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강론자료

요한복음 4,5-42 우물가의 여인 (2017. 3. 19. 사순 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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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3-18 ㅣ No.2167

그때에 예수는 사마리아의 시카르라는 마을에 당도하였는데 그곳은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주었던 밭에서 멀지 않았다. 거기에 마침 야곱의 우물이 있어서 여행에 지친 예수는 우물가에 앉았다. 때는 정오쯤이었다.

 

시카르는 세겜 부근에 있는데, 세겜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원주민에게서 빼앗은 도시이다.(창세기 34장 참조) 유목민에게 우물은 생명줄과도 같다. 그리하여 야곱의 우물은 하느님을 상징한다.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야곱의 우물을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 빗대어,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온 세상에 미치고 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암시한다. 세상의 모든 민족은 각자의 하느님을 형식적으로 경배하되 실제로 하느님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하느님은 생명이 없는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야곱의 우물을 지렛대로 삼아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알리고자 한다.

 

정오는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을 상징한다. 세상 사람들은 더운 날에 마른 목을 축일 생각을 하면서도 인생길에서 큰 난관에 부닥쳤을 때 진리를 목말라할 줄 모른다. 예수는 지금 목이 마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불쌍한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더 목이 마르다. 예수는 육신의 목마름을 통하여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풀어헤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고자 한다. 성서저자는 묻는다. 당신은 무엇에 목이 마른가?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온 것을 보고 예수가 말을 걸었다. “물 한 모금만 주십시오.” (그의 제자들은 음식을 사러 마을에 가 있었다.) 여인이 대답하였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인인데 어떻게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쓰던 잔과 그릇은 결코 쓰지 않았다.) 예수가 대답하였다. “당신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과 당신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당신은 그에게 청했을 것이고 그는 당신에게 생명의 물을 주었을 것입니다.” 여인이 말하였다. “선생님, 당신은 두레박도 없고 우물은 깊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생명의 물을 얻겠단 말입니까? 이 우물을 준 사람은 우리 조상 야곱입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짐승들이 여기에서 물을 마셨지요. 설마 당신이 야곱보다 위대하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예수가 대답하였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결코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고 그를 생명의 물로 적셔서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입니다.” 여인이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이제 목도 마르지 않고 여기로 물을 길러 올 필요도 없겠군요.”

 

사람들은 큰 사고, 질병, 가까운 사람의 죽음 등의 엄청난 시련을 맞닥뜨리면 그냥 망연자실 그 순간이 잊히기를 기다린다. 인생을 사는 동안 이런 일들을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때야말로 인생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이다. 절망은 하느님을 갈망하는 강력한 목마름이다.

 

예수와 여인의 사이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자와 여자, 제자들을 거느린 스승과 평범한 주민 등등의 장벽이 있지만 그들이 공유하는 목마름으로부터 대화의 물꼬가 트인다.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 목이 마르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여인은 남들의 눈을 피하여 한적한 시간에 우물을 찾고 있다. 여느 사람들은 더운 한낮을 대비하여 미리 물을 준비해 두었을 터이다. 그녀는 무언가의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끼이지 못하는 외톨이다. 그녀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목이 마르다. 이때 예수가 먼저 말을 건넨다. 이는 그녀가 영적인 목마름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 그녀가 목마름을 느끼는 바로 그때 예수는 이미 그녀에게 와 있다.

 

여인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짐승들이 이 우물에서 물을 마셨듯이 자유로이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물을 마시기만 해도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물로 갈증을 해결한다. 그런데 예수는 여인에게 물을 청함으로써 그녀가 짐승과는 달리 남을 도울 수 있는 위대한 존재임을 자각하도록 격려한다. 여인은 예수와 자신 사이에 있는 장벽들을 들어 예수의 청이 부당함을 주장하지만 예수는 바로 그 장벽들이 여인의 위대함을 가리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녀 자신 안에 우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규정하는 모든 것들이 우물을 짓누르는 무거운 덮개로 작용하고 있다.

 

예수하느님께서 구원하시다라는 뜻이다. 예수와 일치하는 것은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고, 이것은 곧 성령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이는 또한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머무는 일이다. 우물물은 일시적으로 목을 축일 뿐이지만 성령은 자아 안에서 끊임없이 샘솟으면서 생명을 준다. 이것은 사람을 살리는 참된 생명이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참된 자유로움이며, 온 세상을 살리는 참된 지혜이다.

 

여인은 예수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직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디에선가 야곱의 우물보다 더 좋은 우물을 발견했다는 말인가? 그런 우물이 있다면 남들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이 아무 때나 그곳에 가서 마음껏 물을 마실 터인데!

 

 

예수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가서 당신의 남편을 불러 데리고 오시오.” 여인이 대답하였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가 응대하였다. “당신에게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은 옳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다섯 남자들과 결혼하였으니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사실은 남편이 아닙니다. 당신은 나에게 진실을 말하였습니다.” 여인이 말하였다. “당신은 예언자시군요, 선생님. 우리 사마리아인의 조상들은 하느님을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네 유대인은 예루살렘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장소라고 말합니다.” 예수가 그녀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사마리아인은 당신들이 예배하는 분을 도무지 모르지만 우리 유대인은 우리가 예배하는 분을 압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과 진리 안에서 계신 그대로의 아버지를 예배하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를 올릴 때가 오고 있으며 여기에 이미 와 있습니다.” 여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압니다. 그가 오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겠지요.” 예수가 대답하였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내가 그 사람입니다.”

 

다섯은 육정(肉情)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육정의 즐거움은 결코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즐거움은 싫증나기 마련이고 그 어떤 새로운 즐거움도 영원히 계속 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인은 현재의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없다고 말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똑바로 인식하고 있다. 예수는 여인의 진실한 태도를 칭찬하면서 그녀를 새로운 영적 여정으로 부추긴다. 그녀에게는 참된 남편이신 하느님이 필요하다.

 

여인은 예수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맞힌 것을 보고 용한 점쟁이쯤으로 생각한다. 예수에 대하여 종교적인호기심이 일어난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예언자는 점쟁이를 뜻한다. 점쟁이는 땅 위의 일을 말하되 예언자는 하늘의 일을 말한다. 여인은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참된 예언자라는 것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다.

 

여호수아는 세겜 부근에 있는 에발산에 제단을 쌓고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을 갱신한 바 있다.(여호수아기 8:30-35) 사마리아인은 이곳을 성소로 삼아 야훼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유대인은 예수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성소라고 주장하며 사마리아인의 혼합주의적 종교 생활을 경멸하였다. 여인은 사마리아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유대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 사마리아인당신네 유대인의 대립각이 세워지고 있다.

 

예수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하여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온다고 쐐기를 박는다. 유대인은 야훼 하느님만을 경배할 뿐 다른 잡신들을 드러내놓고 경배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들이 있다. 예수가 전하는 하느님은 틀림없이 유대인의 하느님이다. 다만 유대인의 예배는 형식과 율법에 얽매어 있어서 일상적인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문제이다.

 

성령은 예배의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는 힘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성령으로 집약된다. 성령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구별, 나아가 모든 민족의 구별을 철폐시킨다. 성령은 개개인의 영적 자아를 낳으면서 사람을 규정하는 모든 외적인 조건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성령을 통하여 있는 그대로의 사람계신 그대로의 하느님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진다. 이 친교는 곧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참된 예배이다. 이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감동적이건만 그의 외모는 너무나 허름하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가 메시아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메시아라면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위대한 인물일 것이라는 편견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녀는 홀로서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을 재배하고 이끌어줄 남편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녀는 스스로 성령을 거절하고 있다. 모든 미신은 하느님과 자신을 믿지 않고 다른 위대한 인물을 믿으려는 의타심에서 오는 것이다. 그 위대한 인물 또한 하느님과 자신을 믿지 않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믿는다. 올바른 스승은 백성 개개인이 스스로 하느님과 친교를 맺도록 권하되 결코 추종자들을 거느리지는 않는다.

 

그녀가 성령을 받아들이는 순간 스스로 메시아로 변화한다. '메시아'는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메시아는 또 다른 메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하여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당신의 신부를 자유로이 독립시키는 남편이시다.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선언하면서 여인을 메시아의 지위로 초대하고 있다. 이 허름한 사람이 메시아라면 평범한 보통 사람도 누구나 메시아가 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예수는 올바른 지도자의 모범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모든 것을 말해주는 분은 예수를 통하여 내려오는 성령이다. ‘모든 것은 성령을 가리킨다.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것에 통달하는 완전한 지혜를 성취한다. (이 세상의 지혜를 모두 배우더라도 결코 모든 것에 통달할 수는 없다.)

 

 

그때 예수의 제자들이 돌아와서 그가 여인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에게 무얼 원하십니까?” 하고 묻지도 않고 예수에게 이 여인과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하고 묻지도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물 항아리를 놔두고 마을로 돌아가 그곳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을 알아맞힌 사람을 보세요. 그는 메시아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은 마을에서 나와 예수에게 갔다.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에게 간청하고 있었다. “선생님, 무엇을 좀 드시지요!” 그러나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이 모르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물었다. “누군가 저분에게 음식을 갖다드렸나?” 예수가 말하였다.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이 나에게 맡기신 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이 있지요. ‘넉 달이 지나면 추수 때라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밭을 바라보시오. 지금 곡식이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추수하는 사람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이 될 곡식을 거둡니다. 그리하여 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함께 기뻐합니다. 그래서 이런 속담은 참됩니다.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네.’ 나는 여러분이 일하지 않은 밭에서 추수하라고 여러분을 보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서 일했는데 여러분은 그들이 한 일에서 이익을 얻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잊었다. 그 두 사람은 도무지 격이 맞지 않는 대화 상대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과도 다른 제 3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대화하신다. 예수는 바로 이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늘나라의 스승(예수의 제자)은 하느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되 둘 사이에 끼어들어 간섭하지는 않는다.

 

한편 여인은 자신이 왜 우물에 왔는지조차 잊고 우물에서 만난 예수에 대한 소식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녀의 육적인 목마름은 영적인 목마름으로 변화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가 메시아인지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한다. 이는 그녀가 아직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제자들은 스승을 걱정하는 마음에 음식을 좀 먹으라고 청한다. 이에 예수는 엉뚱한 종류의 음식을 소개한다. 여인에게 소개한 생명의 물은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이며, 제자들에게는 소개하는 음식은 그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다. 물과 음식은 각각 생명과 지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상징한다. 제자들이 육적 음식을 구해오는 동안에 예수는 여인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영적 음식을 먹고 있다. 예수는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가르친다.

 

넉 달은 1년의 1/3에 해당하는 기간으로서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진 시간의 세 토막 가운데 미래를 상징한다. ‘넉 달이 지나면 추수 때라네.’ 라는 속담은 하늘나라가 하느님의 판결에 의하여 결정되는 미래의 사건이라는 착각을 풍자한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선업(善業)을 많이 쌓으면 사후(死後)에 하느님께서 보상을 해주신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 선업이란 스승이 가르치는 예배 또는 기도의 형식과 윤리도덕 등을 실천하는 일이다. 모든 미신은 바로 이런 잘못된 생각에 기초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녀들과 친교를 맺기를 원하신다. 지금 하느님을 모른다면 사후에도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는 항상 추수해야만 한다.

 

추수하는 사람이 받을 삯은 더 크고 풍성해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더 큰 사랑의 권능이다. 이웃을 사랑할수록 하느님께서는 더 큰 지혜와 권능을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생명의 음식을 많이 먹을수록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생명의 물을 더 많이 내려주신다. ‘심는 사람은 회개하여 생명의 물을 받아들이는 세상 사람들이요, ‘거두는 사람은 생명의 음식을 먹는 예수의 제자들이다. 물과 빵이 합하여 몸에 생기를 북돋는 것처럼, 회개와 은총이 결합하여 참된 생명을 열매 맺는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두지만 둘이 함께 기뻐한다. (이 속담의 본뜻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세태를 풍자하는 것이다. 약자는 심고 강자는 거두며, 심은 사람은 자신의 몫을 빼앗기며 슬퍼하고 거두는 사람은 남의 몫을 빼앗으며 기뻐한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일한 다른 사람들은 바리사이파, 율법학자와 같은 거짓 스승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바로 지금 하느님과 친교를 맺을 줄은 모르고 사후에 닥칠 그분의 심판을 가르친다. 그래야만 지금그들 자신이 백성의 행실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면서 백성의 스승을 자처할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도 거짓 스승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환상 속의 메시아를 기대하여 왔다. 참된 스승은 스스로 참된 믿음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는다. 세상의 거짓 스승들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니 그들도 나름대로 하늘나라의 건설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제자들은 거짓 스승들이 일한 밭에서 추수하고, 거짓 스승들이 한 일에서 이익을 거둔다. (두 번째 속담은 지식인의 약삭빠름을 풍자한다.)

 

 

그 여인이 그는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을 알아 맞혔어요.” 하고 말했기 때문에 그 마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었다. 그리하여 그 사마리아인들이 그에게 왔을 때 그들은 그에게 함께 머물 것을 간청하였고 예수는 그곳에서 이틀을 묵었다. 그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소식을 듣고 믿었는데 그들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지금 믿는 것은 당신이 말한 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의 말을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여인의 말을 전해 듣고 예수를 만나러 우물가로 나온다. 예수가 과거를 잘 알아맞힌 예언자라면 앞날도 역시 잘 알아맞히지 않겠는가? 세상에 흔한 점쟁이들은 바로 이런 이치를 이용하여 손님들을 끈다. 거짓 스승들도 같은 원리를 따른다. , 그들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미래를 예측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은 막연한 언사로 얼버무린다.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은 학문의 영역이며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은 종교(미신)의 영역이다. 학문과 미신은 같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에게 함께 머물 것을 간청한다. 그들은 여인의 과거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앞날이 궁금하다. 남에 대한 관심을 떠나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에 올바른 믿음이 싹튼다. 하느님께서는 자아의 내면(內面)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틀을 묵은 것은 도착한 날, 머문 날, 떠나는 날을 합하여 사흘에 해당한다. 3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사건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예수가 전하는 소식은 하늘나라에 관한 것이다. 우물가로 나온 사람들과 그밖에 다른 마을 사람들도 그 소식을 듣고 예수를 믿었다. 처음에는 여인의 말을 듣고 그녀와 같은 미신의 차원에서 예수를 믿었는데 이제는 예수의 소식을 직접 듣고예수가 참으로세상의 구원자임을 믿었다. 여기에서 직접은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은 사람과 하느님을 직접 결합하는 힘이다. 여인은 마을 사람들 중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만났지만 예수의 소식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여인도 예수의 소식을 직접 들어야만 예수가 참으로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먼저 예수를 만난 여인보다 나중에 예수를 만난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먼저 아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그 뿐이 아니다.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오지만 정작 구원을 먼저 받아들이고 있는 쪽은 사마리아인이다.

 

그러면 예수가 전하는 하늘나라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현대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직접예수의 소식을 들을 것인가? 그 유일한 해답은 회개이다. 회개는 타인에게 의존하기를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결단의 행위이다. 자아의 내면은 죽음의 공포를 자아내는 거친 광야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하느님과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작은 골방이 있고 생명의 물이 샘솟는 우물이 있다. 예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일하는 주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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