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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려면: 법치에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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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17 ㅣ No.1370

[경향 돋보기 -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려면] ‘법치’에서 시작하자

 

 

한국사회를 뒤흔든 국정농단 사건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정상적인 ‘국가’인지를 되물은 사건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 탄생한 이후, 그래도 우리는 조금이라도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국정농단 사건을 통해 이 확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된 것이다.

 

사달이 난 이유는 그동안 쌓여온 적폐의 소산일 수도 있고, 일시적인 후퇴일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암담하지만, 상황이 복잡할수록 ‘기본’에서 출발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테다. 필자가 보기에 그 기본은 ‘법치’다. 문제의 원인과 배경을 법치의 붕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해법 또한 법치의 회복에서 찾아보자는 얘기다.

 

 

법치란 무엇인가

 

법치(法治)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지만, 무엇보다 ‘법이 통치한다.’는 뜻으로 집약된다. 법이 통치한다는 말은 ‘인간이 통치한다.’는 뜻이다. 곧, 법치는 ‘인치’(人治)와 대비되는 말이다. 인간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국가를 바로 ‘법치국가’라고 한다. 여기서 인간이 지배한다는 것은 ‘통치권력’을 가진 자가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권력자들은 권력 남용의 유혹에 빠지게 마련이고, 그 유혹을 법으로 통제하는 것이 바로 법치인 것이다.

 

법치는 ‘법에 따른 지배’(rule by law)와는 다르다. 단순히 법을 이용한 통치는 진정한 의미의 법치가 아니다. 법이 통치자를 구속하는 방향으로 작동될 때, 인간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법의 지배’(rule of law)또는 ‘법치’이다.

 

법치는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국가권력을 법으로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 그에 비례해서 시민의 권리가 보장될 가능성은 커지기 때문이다. 거꾸로 통치권력을 남용한다면 시민의 권리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법치국가는 “국가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이념이다.

 

법치가 최선의 통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최악’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통치자는 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되지만, 선거가 언제나 최선의 통치자를 선출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후보자의 거짓말에 깜빡 속을 수도 있고, 당선되고 난 뒤 통치자가 변심할 수도 있다. 대중영합주의, 곧 포퓰리즘적 분위기에 휩쓸려 국민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민주주의는 늘 일정한 위험을 안고 있다. 이 위험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바로 법치다. 법치는 누가 통치자가 되건 국민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통치권력의 남용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국정농단, 법치가 무너지다

 

지난해 국정농단 사건은 바로 이 법치가 무너진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은 법으로 임명된 공무원이다. 대통령 비서실의 공무원 정원은 443명이고, 이 가운데 5급 이상 공무원만 287명에 달한다. 그런데 이 수많은 공무원을 제쳐놓고, 이른바 ‘비선실세’가 청와대를 드나들면서 국정을 좌지우지했고, 심지어 기업들을 상대로 돈을 받아 재단을 설립했다는 것이 국정농단 사건의 개요다.

 

법률적 근거가 없는 이가 국정에 개입한 것 자체가 불법이고, 정상적인 법치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 대통령이 그렇게 국정을 운영해서도 안 되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가만히 지켜봐도 안 되며, 만일 그러한 행위가 적발되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법치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국정농단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새롭게 알려진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정치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각종 국가 지원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전형적인 ‘권력 남용’이고 우리 법질서의 평등이념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우리 헌법은 평등(제11조)과 예술의 자유(제22조)를 보장하고 있으며, 문화 기본법에는 문화 표현·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4조). 법이 권력을 남용한 차별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는데도, 권력을 가진‘ 인간’들은 이러한 법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법치가 아니라 인치가 작동했다는 얘기다.

 

국정농단이 자행되고 블랙리스트가 유포되는 상황에서 대통령 비서실과 경호실, 그리고 일부 부처 관계자들은 그 사실을 인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설령 그것이 대통령 지시사항이었다고 해도, 위헌적 · 위법적 명령에 복종할 의무는 없다.

 

재단에 출연금을 낸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강요로 돈을 주었든 어떤 이득을 노리고 돈을 주었든 법치에 반하는 건 매한가지다. 법치국가에서는 굳이 뇌물을 주지 않아도 기업활동을 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으며, 통치권력이 부당한 강요를 한다고 해도 코웃음을 치며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건의 주역들은 ‘법’보다는 권력을 가진 ‘인간’이 더 두려웠을 것이다. 이 또한 법치가 아니라 인치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통치권력의 위법에 대처하는 법을

 

청와대 내 감찰기구가 사건을 인지했지만 조기에 중단되었다. 언론이 증거를 찾아내서 쟁점화를 시킨 뒤에야 검찰이 뒤늦게 수사에 나섰지만, 특별검사에게 사건을 넘겨줘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법치를 수호해야 할 ‘상설기구’들은 결국 법치의 붕괴를 저지하는 데 실패했고, 비상사태를 해결하고자 특별기구인 ‘특검’이 해결사로 등장한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국정을 사실상 법치주의가 아니라 최순실 등의 비선조직에 따른 인치주의로 행함으로써 법치국가 원칙을 파괴했다.”고 지적한다. 앞서 얘기한 문제의 본질을 날카롭게 짚어낸 셈이다. 이 탄핵소추안은 결국 국회에서 의결되었고,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간 상황이다.

 

탄핵 결정이 내려진다면 당면한 사건 자체는 일단락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무너져버린 법치를 다시 바로 세워야 하는 과제가 놓여있다. 다행히도, 법치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다. ‘경제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비정규직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과 같은 시대의 난제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이미 분명한 정답이 다 있고, 참고할 만한 해외 사례도 풍부하다. 의지와 실천이 중요할 뿐, 방법이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중요한 것은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입법부와 사법부가 분담하거나 견제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면 헌법 개정이 불가피하겠지만, 현행 헌법 내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감찰 · 수사 기관의 실질적인 독립이다. 통치권력을 직접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감찰과 수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는 독립적인 감찰과 수사를 할 기관이 있다면, 통치권력의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행위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통치권력의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지시나 명령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 헌법상 공무원은 통치권력의 하수인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는 점이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제7조). 공무원법에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정해져 있지만, 이것은 합법적 명령에 복종할 의무를 규정한 것이지, 위법한 명령에 대해서는 복종 의무가 없다는 것이 판례의 확고한 입장이다. 이를 어떻게 ‘관행’으로 확립할 것인지가 남아있는 문제일 뿐이다.

 

아예 불복종을 법으로 확실히 정해두자는 법안도 발의되어 있다. 공무원법상 ‘복종의 의무’에 “다만, 직무상 명령이 위법한 경우 복종을 거부하여야 하며 이로 말미암아 어떠한 인사상 불이익 처분도 받지 아니한다.”는 단서 조항을 넣어 확실히 해두자는 것이다.

 

 

트럼프의 행정명령과 법의 충돌

 

우리와 제도가 달라서 단순 비교하긴 어렵지만, 최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반(反)이민 행정명령을 내린 이후 벌어진 일들을 참고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라크와 시리아, 이란, 수단, 리비아, 소말리아, 예멘 등 7개 이슬람 국가 국민의 입국을 90일간 금지하고 비자 발급을 중단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난민 유입도 120일간 중단했고, 특히 시리아 난민에 대해서는 무기한 미국 입국 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그런데 샐리 예이츠 법무장관 대행은 자신의 양심을 걸고 행정명령을 거부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명령에 불복종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이츠 장관 대행을 해임하고 행정명령을 밀어붙였지만, 이번에는 시애틀 연방법원이 행정명령의 효력을 중단시켰다. 이 행정명령을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조치로 간주하며 그 집행을 저지한 것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지만 헌법적, 법률적 한계를 넘어서서 권한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동이 걸린 것이다. 권력자의 권한보다 ‘법’이 우위에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법치가 작동할 수 있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건 ‘최악’으로 빠지는 것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다.

 

 

법치의 과제, 좋은 국가의 조건

 

국정농단 사태 이후, ‘나라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실망과 분노를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 이것이 ‘무기력함’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무수한 과제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중심축은 ‘법치’의 회복에 두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법치는 한 국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며, 이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통치자를 ‘잘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주적 선출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오류를 통제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법치에 관하여 이렇게 찬사를 보냈다. “법이 정부의 주인이고 정부가 법의 노예라면 전망이 아주 밝은 상황이며, 사람들은 신이 국가에 선사하는 축복을 만끽할 것이다.” 법치가 제공하는 이러한 축복을 즐길 수 있도록 법과 정치의 제도와 관행을 정돈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법치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금물이다. 법치는 좋은 통치, 좋은 국가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일 뿐이다. 법치가 권력의 자의적인 남용을 막을 수 있고, 최소한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보장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법치는 ‘여건’을 조성할 뿐이며, 그 내용을 채워가는 것은 여전히 ‘정치’일 수밖에 없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는 법치 회복이라는 과제를 던져주었다. 하지만 지금보다 나은 국가를 위해서는 더 좋은 정치, 곧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고 공고화하는 것이 법치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

 

* 홍성수 토마스 아퀴나스 -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위원, 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3월호, 홍성수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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