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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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먼저 사랑하고, 먼저 화해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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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09 ㅣ No.508

[허영엽 신부의 ‘나눔’] 먼저 사랑하고, 먼저 화해하는 삶

 

 

얼마 전 어느 교구에서 있었던 일이다. 거리를 전전하며 노숙하던 개가 그 곳 교구청 안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 그리고는 슬며시 눌러 앉았다. 교구청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라 시끄럽게 짖거나 사람들을 물거나 하면 즉시 퇴출(!)된다. 그런데 이 개는 누구에게나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곤 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곳의 관계자들은 자유롭게 교구청을 다닌다는 의미로 그 개에게 ‘프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몇 달 후 개 한 마리가 또 들어와 프리와 가정을 이루었다. 나중에 들어온 개는 대림절에 들어왔다고 ‘대림’이라 불렀다. 대림이는 성탄절을 준비하며 만들어 놓은 구유에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태어난 새끼들에게는 ‘성탄’이와 ‘탄일’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 가족은 주교님 이하 모든 교구청 식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이들로 인해 교구청 분위기도 한결 밝아졌다고 하니 생명이란 참 신비롭다.

 

성경에서 개는 사실 부정적인 상징이다. 즉 개는 불결이나 멸시, 위선, 이방인, 거짓 교사, 구원받지 못한 이를 비유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어리석은 행위를 거듭하는 자를 개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한 유다인들은 불경한 동물로 생각한 돼지를 개와 같은 동급으로 취급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서양에서 개는 종교적 차원에서 이 세상과 저 세상 중간에 존재하는 동물로 생각

 

유다인 사회에서 사람을 개와 돼지에 비유하면 이는 엄청난 모욕이 되었다. 특히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비하해서 자주 ‘개’에 비유하여 천박하게 불렀다. 여기서 ‘개’는 집에서 기르는 개가 아니라 거리를 떠도는 사나운 개를 의미한다. 선민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하느님이 버리신 백성으로 생각했고, 그들을 개에 비유하며 배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오면 사도 바오로는 오히려 유다인들을 ‘개’로 지칭했다. 여기서 개는 형식적인 할례를 주장하는 유다인을 말하며, 악과 저속함과 더러움을 신랄하게 표현한 단어로 쓰였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에서는 가난한 라자로의 종기를 핥는 개를 죽음의 예고자, 하늘나라로의 여행길을 안내하는 선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서양에서 개는 윤리적 면에 있어서는 선과 악, 종교적 차원에서는 이 세상과 저 세상 중간에 존재하는 동물로 생각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에서도 개는 삶과 죽음에 관계하고 있는 동물로 여겼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상처를 핥는 개는 죄인의 영혼을 말씀으로 치유하는 설교자를 상징한다는 해석까지 했다. 성화에서 횐 개는 깊은 신앙심을 뜻하기도 한다.

 

예전에 본당 사목을 할 때, 개 두 마리를 길렀던 적이 있다. 개들의 이름은 ‘형순’이와 ‘삼돌이’였다. 형순이는 뼈대 있는 집안의 진돗개였고, 삼돌이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황구였다. 형순이는 여자, 삼돌이는 남자였다. 한동안 두 놈 모두 별 탈 없이 성당 생활에 잘 적응하여 지냈다. 그런데 형순이가 한쪽 눈을 다쳐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결국 시력을 잃었고, 삼돌이는 신나게 돌아다니다가 그만 다리 하나를 다쳐 세 다리로 뛰어 다녔다.

 

둘 다 졸지에 장애견이 되어 버렸다. 과년한 나이가 된 형순이는 세 번이나 시집을 갔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형순이는 한 동안 시름시름 앓더니 성격도 조금 이상해지고, 모습도 처량해졌다. 반면에 삼돌이는 성격이 활발하여 활동적이고 교제 범위가 넓었다. 잡다한 성당 구석구석의 일까지도 안 끼는 데가 없었고, 불편한 다리를 잊은 듯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돌아다녔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신나게 뛰어 노는 토요일 오후 시간, 성당 마당은 삼돌이의 무대가 되었다. 삼돌이는 먹을 것을 주면서 같이 놀아주는 아이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불구의 다리로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꼬리를 흔드는 삼돌이를 ‘평화의 사도’라고 극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번은 주교님께서 사목방문을 오신 적이 있었다. 주교님은 도착하자마자 즉시 성당에 올라가셔서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하셨다. 그런데 마침 삼돌이가 제대 옆에 있었다. 다행히 주교님이 눈을 감고 계셔서 못 보셨기에 망정이지, 주교님은 삼돌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 셈이었다. 다행히 삼돌이 녀석이 눈치는 빨라서 휑하니 옆문으로 도망쳤고, 주교님은 편안한 표정으로 기도를 마치셨다.

 

 

사랑받는 것은 자기 할 탓, 사랑 받기 전에 먼저 사랑을 주는 자세

 

형순이와 삼돌이는 그 곳 사람들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이 사랑받는 것은 먼저 사랑받도록 스스로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마주치면 반가워하고, 발소리를 들으면 꼬리를 흔들며 인사를 했다. 온 몸으로 반가움과 애정을 표현했다. 가끔은 잘못을 저지르고 예절(?)을 지키지 않아 혼을 내고 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금방 잊어버리고는 꼬리를 치고 두 발을 치켜들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금세 화해하자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받는 것은 자기 할 탓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사랑을 받기 전에 먼저 사랑을 주는 자세를 그 두 마리의 개에게서 배웠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쉽게 버리기도, 쉽게 화해하기도 어려워한다. ‘꼬리를 친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이지만, 글자 그대로 보면 반가움과 애정을 한껏 표시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우리도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만나는 이들에게 꼬리를 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 삶은 더 싱싱하고 활기찬 나날이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웃을 먼저 사랑하고 먼저 화해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눈이 불편한 형순이가, 다리가 아픈 삼돌이가 우리에게 그러했듯이.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3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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