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용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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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21 ㅣ No.898

[밀알 하나] 나는 하느님의 소중한 사람

 

 

‘밀알 하나’를 통해 용서를 주제로 말씀드리기에 앞서 글을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첫 번째 주임신부를 하면서 인근에 있는 수녀님들이 운영하시는 양로원에 미사를 주례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유학을 가야 해서 그곳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나오는데, 수녀님께서 제게 카드를 하나 주셨습니다. 예쁜 손글씨로 쓴 소중한 글이 담겨 있었는데, 저에게처럼 여러분에게도 예쁜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항상 푸른 잎새로 살아가는 사람을 오늘 만나고 싶다. 

언제 보아도 언제나 바람으로 스쳐 만나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 밤하늘의 별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온갖 유혹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언제나 제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의연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언제나 마음을 하느님께 열고 사는 진실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오늘 거친 삶의 벌판에서 언제나 순수한 영혼으로 사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모든 삶의 굴레 속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언제나 사랑과 평화 가득한 얼굴로 살아가는

그런 세상의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마음이 아름다운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서

나도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간직한 채 살고 싶다. 

아침 햇살에 투명한 이슬로 반짝이는 사람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온화한 미소로

마음이 편안한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결코 화려하지도 투박하지도 않으면서

소박한 삶의 모습으로

오늘 제 삶의 갈 길을 묵묵히 가는

그런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 하나 고이 간직하고 싶다.

 

바로…

사랑의 마음을 품을 줄 알고

그런 사랑을 외면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전해줄 수 있는… 마음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 맘으로 뿜어내는 

그런 하느님의 소중한 사람…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그대』

 

우리는 하느님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용서를 하느냐 못하느냐에 앞서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소중한 사람입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6월 12일, 최규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밀알 하나] 용서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일

 

 

예전에 시골에 사시는 노부부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퀴즈와 장기자랑 대결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천생연분’이라는 낱말을 맞추도록 할머니께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그러자 할머니께서 “웬수”라고 대답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몹시 안타까워하시며 “아니, 네 글자로….”하고 힌트를 주자 할머니가 금방 “정답”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대답했지요? “평생 원수!!!” 

 

이 할머니의 대답이 꼭 글자 그대로의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사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우리의 주변에 있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더 힘들게 하지요. 

 

용서라는 문제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힘겹게 다가오지만 사제인 저에게도 버거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한 본당에서 주임 신부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신자분들이 제게 와서 그 문제로 면담을 하시더라고요. 참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정리를 하지 못했는데, 그런 상태에 있는 저에게 제가 가진 비슷한 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하고, 조언을 들으려고도 하고, 기도도 청하셨습니다. 신자분들에게 참 죄송하기도 하고, 또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하느님께서 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신자분들의 어려움을 들으면서 저의 문제를 더 깊이 보게 되었고, 또 신자분들이 위로를 받고 힘을 내는 것을 보면서 저 자신도 힘을 내서 몸을 추스르기도 했습니다.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바라보라고 하느님께서 신자분들을 통해서 저에게 요구하시는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 생활을 하면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뭔가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거지요.

 

제가 어렵게 사제생활을 한 것을 알고 누군가가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저는 지극히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분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이 싫더라고요. 저를 편들어 주면서 이야기 해주더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그분을 용서한 적은 없는데, 어느 순간에 그분이 제 삶에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시간을 기억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그분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상대방의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나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잘 안 된다는 거지요. 왜 그럴까요?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6월 19일, 최규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밀알 하나] 용서할 수 없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가져오는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어쩔 수 없이 용서가 안 되는 건가? 그게 아니라 혹시 용서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가?

 

마태오 복음 18장 끝에 보면 ‘매정한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임금에게 그 빚을 탕감받고 나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그를 감옥에 가두지요. 그리고 이 매정한 종의 처사가 임금의 귀에 들어가고, 화가 난 임금은 다시 그에게 만 탈렌트의 빚을 다 갚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기 이전에 이미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을 기억할 때 아무래도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이 좀 수월해지겠지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해 할 때, 우리가 그것을 살아갈 때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도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우리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 고을에서 소문난 죄인인 여자 하나가 예수님께 다가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리지요. 어느 날 이 부분을 가지고 기도를 하다가 그게 무척 궁금했습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그 여인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을까?’ 뭐라고 쓰여 있지는 않지만 감사의 눈물이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바라보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사랑을 드러내고 나서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도 감사해서 뭐라도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서 사람들의 시선 같은 것은 의식하지 않고 시몬의 집에 들어와서 예수님께 그렇게 해드렸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하느님께서 바리사이인 시몬을 더 사랑하셨을까요? 아니면 고을에서 소문난 죄인인 여자를 더 사랑하셨을까요? 둘 다 똑같이 사랑하셨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죄인인 여자가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시몬이 더 적게 사랑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죄인인 여자가 하느님의 사랑을 잘 받아냈던 반면에 시몬은 하느님의 사랑을 잘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것을 사는 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받았으면 살아라. 사는 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하는 것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6월 26일, 최규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밀알 하나] 용서는 의지의 문제

 

 

용서를 하는 것은 나의 의지의 문제입니다.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감정이 정리가 되고 용서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린다면 우리가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그건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일 것 같습니다. 

 

나를 힘들게 한 그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를 용서합니다’ 하고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감정의 뒤에 숨어서 더이상 용서를 미루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고해성사는 사제들이 힘들어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은총의 시간입니다. 신자분들이 얼마나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고 계신지를 알 수 있지요. 

 

고해를 듣다보면 자신을 몹시 힘들게 하는 이들을 잊고 용서하려고 하는데, 일상생활 안에서 자꾸 떠오르고 미움이 일어서 하느님께 죄스러워서 그걸 고백하시는 분들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용서했을 때 내 감정도 완전히 정리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감정이란 것은 본래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감정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고, 가라앉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 것이지요. 시간이 지날 만큼 지나야 되는 거지요. 

 

용서한다고 한 후에도 미움의 감정이 자꾸 일어날 때 이런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꾸 질책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내 마음이 아파하고 있구나’, ‘시간이 더 필요한 거로구나’, ‘나 자신을 더 사랑해 주어야 하겠다’ 하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남들에게만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우리 자신에게도 너그러움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용서하면 다 잊어버려야 하는 건가요? 사람은 참 묘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이 나질 않아서 애를 먹게 되는데,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일은 정말 기억이 잘 납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 기억이 떠오르고 본래의 기억에 자꾸 무언가가 덧붙여지면서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용서했는데도 자꾸 기억이 나는 것을 좀 편안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본래 그런 것이다’하고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단지 우리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과거의 좋지 않은 일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나의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그냥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기억과 약간 떨어져서 마치 텔레비전을 바라보듯이 떠오르는 기억을 바라보고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억 속에 들어가 버리면 헤어나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7월 3일, 최규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밀알 하나] 용서하기가 어려울수록

 

 

화해를 중재할 때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가 나를 용서하면 나도 그를 용서하겠다.”, “그가 나에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청하면 용서를 해줄 의향은 있다.”

 

감정이 올라와 있을 대로 올라와 있을 때는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입장을 계속 고수하기는 어렵지요.

 

이 입장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의 행복을 다른 이에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왜 나의 행복을 다른 이의 손에 맡겨야 합니까? 상대방을 변화시키겠다는 야심찬 헛된 계획은 일찍 접는 것이 좋습니다. 

 

상대방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도 어려운데 내가 어떻게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나의 일과 상대방의 일을 구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일에만 신경을 써야지요. 내가 용서를 하면 상대방도 용서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용서를 한다고 상대방이 감동을 받고 변화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다음에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젖느라고 애를 쓰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지요. 깜짝 놀란 제자들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며 소리를 질러 댑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들에게 당신이라고 밝히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하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진짜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갑니다.

 

그리곤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져 물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어떻게 하지요? 저는 이 부분이 우리 모두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건져 주시지요.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 베드로가 ‘어- 빠지네, 어 어’하며 물에 빠지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살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의 어려운 날에, 자꾸 헤매게 되는 날에 우리는 고개를 떨구고 자신을 바라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면서 자꾸만 자꾸만 좋지 않은 상황에 휘말려 들게 되지요. 용서하기가 어려울수록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할 첫 번째 일인 것 같습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7월 10일, 최규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밀알 하나] 이번 한 번만은 용서하겠다

 

 

키가 아주 작은 바보 총각이 있었는데, 좁쌀 한 알을 챙겨 과거를 보러 갔습니다.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러 주인에게 좁쌀 한 알을 건네며, “이 좁쌀은 내 생명보다 귀한 것이니 잘 보관해 주시오”하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장을 불러 어제 맡긴 좁쌀을 달라고 했더니, 주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쥐가 먹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 바보총각은 화를 내며, “내가 그 좁쌀은 내 생명보다 귀한 것이라 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소홀히 한 것이오. 그 귀한 좁쌀을 먹은 쥐라도 잡아서 내놓으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겨우 쥐를 잡아서 바보 총각에게 주었고, 그는 쥐를 데리고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또 날이 저물어서 주막에 들러 쥐를 맡기면서, 아주 귀한 것이니 잘 맡아달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주인장을 불러 맡겨놓은 쥐를 달라고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고양이가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고양이라도 달라고 하여 고양이를 데리고 한양 길에 올랐습니다. 

 

길을 가다가 또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러 고양이를 맡기고 잘 좀 돌보아달라고 했지요. 다음날 아침에 보니 고양이가 당나귀한테 밟혀 죽은 거예요. 주인은 어쩔 수 없이 그 당나귀를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나귀를 데리고 한양으로 가던 바보 총각은 또 날이 저물어 주막에 머물렀습니다. 

 

주인에게 당나귀를 맡겼는데, 주인은 당나귀를 외양간에 소와 함께 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당나귀가 함께 있던 소에게 받혀서 죽은 겁니다.

 

바보 총각은 당나귀를 받은 그 소를 데리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또다시 주막에 들러 소를 맡기고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바보 총각이 소를 찾으니 소가 없는 거예요. 주막 주인장의 아들이 그 소가 자기네 소인 줄 알고 팔아먹은 거예요.

 

바보 총각이 하도 뭐라고 해서 돈을 후하게 쳐주겠다고 했지만 바보 총각의 대답은 단 하나였습니다. 자기 소를 자기 앞에 데려다 놓으라는 거였지요. 그래서 아들이 소를 판 정승 집을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하고 소를 돌려달라고 하자, 소는 이미 다 잡아먹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바보 총각은 그 소를 그대로 내놓으라고 했고 이를 본 정승은 그럼 그냥 우리 딸을 아내로 삼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좁쌀 한 알을 가지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난 바보총각은 정승댁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지요.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 번을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일흔일곱 번이나 사백구십 번이나 다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의 한계치를 너무도 벗어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끊임없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생각하지 말고 바보 총각이 했던 것처럼 눈앞에 벌어진 ‘딱 한 번’을 용서하는 것만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7월 17일, 최규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밀알 하나]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옛날에 어떤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시어머니 몰래 용한 무당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무당은 이 며느리의 이야기를 듣고 비방을 내려주었습니다. 앞으로 백일동안 하루도 빼놓지 말고 인절미를 새로 만들어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시어머니께 드리면 백일 후에는 시어머니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을 거라고 무당은 이야기해 줬습니다.

 

며느리는 신이 나서 집에 돌아와 찹쌀을 씻어서 정성껏 인절미를 만들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처음에는 “이년이 죽을 때가 됐나 왜 안하던 짓을 하고 난리야?” 했지만, 며느리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매일 아침 점심 저녁에 인절미를 올렸습니다. 시어머니는 그렇게도 보기 싫던 며느리가 매일 세 번씩이나 인절미를 해다 바치자 며느리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게 됐고 야단도 덜 치게 됐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가자 며느리에게 감동을 받아서 동네 사람들에게 하던 며느리에 대한 욕 대신에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해댔습니다.

 

석 달이 다 되어 가면서 며느리는 이제 자신을 칭찬하고 다니는 시어머니가 죽을까봐 걱정이 돼서 다시 무당을 찾아 갔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으니 시어머니가 죽지 않을 방도를 알려 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무당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미운 시어머니는 벌써 죽었지?”

 

로마 12,21의 말씀을 꼭 기억하고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악에게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같은 본당의 두 신학생이 다퉜습니다. 두 신학생을 불러다가 면담을 했는데 도통 물러날 기색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두 신학생에게 미션을 주었습니다. 얼굴을 볼 때마다 그리고 보지 않아도 미운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라. 

 

‘주님, 그를 축복해 주십시오’, ‘그와 함께 해 주십시오’, ‘주님 그를 용서합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대로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계속 기도를 하고 있고 서로 대화를 할 용의가 있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정말 대화를 하고 관계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양입니다.

 

미움이라는 그 좋지 않은 감정에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을 하는 게 좋습니다. 미운 시어머니에게 인절미를 잘 만들어 드려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의 짧은 기도는 우리가 미움의 감정에 굴복당하지 않고 정말 선으로써 악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좋지 않은 감정에 눌려 지내지 마시고, 짧은 기도를 바치면서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 처음에는 마음이 안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굴복하지 말고 이겨내십시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용서라는 부분에 있어서 많이 놓치면서 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추고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이 부분도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거기서 이끌어내주고 싶어 하십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7월 24일, 최규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밀알 하나] 우리의 어려움도 하느님과 함께

 

 

제가 보좌신부 2년차를 수지본당에서 지냈습니다. 제가 사목할 당시는 성당을 건축하던 중이라, 미사 후에 지하성당에서 여러 쁘레시디움이 레지오마리애 주회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훈화를 할 수도 없었고 그냥 조용히 강복만 드리고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팀에 갔더니 꽃이 참 아름답더라고요. 그래서 강복을 드리고 나서 “꽃이 참 아름답네요”라고 말한 후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미사 후에 신자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어느 신자 분이 저에게 와서 그러시는 거예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저는 영문을 몰라 왜 그러시느냐고 사정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이 사실 미국에 있는 남편과 싸우고, 계속 함께 살아야 될지 말아야 될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제가 주회 때 와서 “꽃이 참 아름답네요” 했던 말에 마음이 풀려 미국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화해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게 감사하다는 거예요.

 

이건 누가 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제가 한 것은 “꽃이 참 아름답네요”라는 말뿐이었지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용서를 결심하기 이전에 우리를 위해서 무언가를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용서를 통해서 당신의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거지요. 혼배미사 강론을 할 때면, 어떤 수녀님께서 제가 사제생활을 막 시작할 때 보내주신 글을 나누기도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라면>

 

갈 길이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습니다.

눈이 오고 바람 불고 날이 어두워도 갈 수 있습니다.

바람 부는 들판도 지날 수 있고

위험한 강도 건널 수 있으며

높은 산도 넘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수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손 내밀어 건져 주고, 몸으로 막아 주고, 마음으로 사랑하면

나의 갈 길 끝까지 잘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야 하며

단 한 사람에게라도 나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동행의 기쁨이 있습니다.

동행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동행에 감사하면서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 누군가와 손잡고 걸어갑시다. 

우리의 위험한 날들도 서로 손잡고 건너갑시다.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이 글을 읽어 주고 신랑 신부에게 묻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누군가가 누구입니까?” 

 

거의 다 신랑은 신부라고 하고, 신부는 신랑이라고 하지요. 저는 여기서 말하는 누군가는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혼생활을 항상 하느님과 함께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어려움도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8월 7일, 최규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밀알 하나] 기도 안에서 주님께 말씀드려야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움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우리의 미움이 깊어지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헛된 말씀이 아니라면,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이나 칼의 시련을 이겨 낼 수 있다면, 미움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우리 안에 있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의 도움으로 이겨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지독한 어려움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마음을 예수님께 솔직히 열어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우리의 기도 안에서 주님께 실제로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상황들 중에서 대표적인 장면을 하나나 둘 정도 고르고,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 보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사랑한다고 하시더니, 왜 저에게 이렇게 힘든 시간을 허락하셨습니까? 언제나 저와 함께 해주신다더니 왜 이 순간에는 저를 혼자 버려두셨습니까? 도대체 저를 사랑하시는 것 맞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서 주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응답하시는지 들어보십시오.

 

이 기도를 할 때 주의할 점은 ‘나에게 이런 응답을 주실 거야’하고 미리 지레짐작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해주시는 말씀을 듣는 것과 내가 추측해낸 답을 얻어가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요. 하느님께서 말씀해주시고 보여 주시는 답을 얻어 가려고 애써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열렬히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는데 하느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지요? 

 

아주 간단합니다. 하느님께서 답을 주실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나의 마음을 다 내려놓을 때쯤 해서, 내가 하느님의 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쯤 해서 하느님께서 답을 주실 것입니다.

 

제가 사제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한 문제가 한 사람의 일생동안을 쫓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할 수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미움이 불쑥불쑥 튀어 올라와서 자신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거지요.

 

여러분이 용서하지 못해 어려워하는 지독한 문제가 있다면 여러분의 기도생활 안으로 가지고 와서 주님께 꼭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응답을 들으십시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8월 14일, 최규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밀알 하나] 용서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주실까요? 예전에 어떤 수녀님께서 저에게 이런 글을 보내주신 적이 있습니다.

 

너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다오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하도록 내버려두렴. 

나는 네 마음을 원한단다. 나는 너를 새롭게 창조해 나갈 생각이란다.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단다. 

그리고 너도 나처럼 했으면 좋겠구나. 

네 비참의 저 깊은 속에서 사랑이 올라오는 것을 정말로 보고 싶구나. 

나는 네 나약함까지도 네 안에서 사랑하고 있다. 

나는 가련한 자들의 사랑을 좋아한단다. 

궁핍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이렇게 부르짖는다면 좋겠구나. 

“주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내게 중요한 것은 네 마음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이다. 

네 학문과 네 재능이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잘난 덕행이 아니란다. 

만약 내가 너에게 이 덕들을 주었더라면, 넌 너무나 약하기에 

금방 이 덕들에 네 자애심을 섞어 놓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이 부족하다고 걱정하지 말거라. 

너에게 위대한 일들을 맡길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아니다. 

넌 쓸모없는 종이 되리라. 

나는 네가 지니고 있는 보잘것없는 것마저도 거두어 가리라. 

왜냐면 넌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것이 잘 되지 않아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학교에 있는 후배 신부님의 방에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저에게 아주 귀한 선물을 주셨는데, 와타나베 가즈코 수녀님이 지은 「당신이 선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라는 책이었습니다. 저자 서문에 있는 글을 나누며 용서에 관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수도자도 남들처럼 화가 나는 날이 있고, 상한 마음이 풀리지 않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을 다독여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오랜 시간과 시행착오를 통해 저는 나름대로 터득했습니다. 서른 중반에 오카야마로 파견되어 대학 학장이 되면서 마음이 어수선하고 심란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때 평소 존경하는 신부님이 짧은 시 한 편을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주님이 심은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 

 

당신이 선 그 자리가 바로 당신의 자리입니다. 그곳이 어디든 지금 당신의 자리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탐스런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겁니다. 하지만 꽃을 피우지 못하는 날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땐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면 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아름답고 탐스런 꽃을 피울 날이 옵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8월 21일, 최규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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