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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청탁금지법(김영란법):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 태울 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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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18 ㅣ No.1363

[경향 돋보기 - 청탁금지법(김영란법)을 돌아본다]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 태울 수야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이 2016년 9월 28일 자로 시행되었다. 해방 뒤 이렇게 광범하게 규율하는 법은 처음인 것 같고, 그 규율 범위가 너무 넓다보니 적용대상이 애매모호한 점도 많은 것 같다.

 

필자가 모든 분야에서 이 법이 실제 몇 퍼센트나 적용되고 있는지는 아직까지 그 긍정적 기능과 역기능에 관한 통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 어떤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 법의 시행은 순기능을 갖는 면도 있으나 상당한 역기능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부정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부정과 부조리를 척결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추상적이긴 하나, 필자도 이 법의 시행으로 모든 음성적 부정이나 비리를 없앨 수만 있다면 대찬성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한편, 종래의 관행을 ‘부정’이라는 이름 아래 획일적으로 금지시키는 것이 서민들에게 불편을 주는 면은 없는지 생각하게 된다. 관행적으로 인정되어 온 ‘선물 문화’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부정적 시각으로만 바라다보면 ‘부정의 전초기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행정기관과 공기업 기타 납품 업체의 본사와의 거래관계 등에서 ‘선물’은 대부분 ‘뇌물’ 또는 ‘보험금’의 구실을 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그마한 거래관계로 운영하는 기업체나 상점들의 ‘선물’은 거래의 상재(商才)이고, 그동안 거래해 준 감사의 정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이를 행하는 것을 광범하게 획일적으로 금지시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정(情)의 교환을 단절시키고, 거래의 수단까지 단절시키는 것이라고 하면 논리의 비약일까?

 

공무원과 공기업과 하도급 업체의 선물을 부정(不正)시하여 금지하면, 어떤 물품의 수수가 아니라 ‘현금수수’로 변형될 가능성이 많기에 이것이 음성적으로 행하여질 때 막을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추석 때 십만 원짜리 물품을 선물 또는 상품권을 주는 것은 금지되고, 현금으로 십만 원을 음성적으로 건네는 것은 상품 판매자를 어렵게 만들 뿐이지 부정 또는 부조리 방지에는 효과가 없는 행위가 아닐까? 추석 등 명절의 경우 선물 대신 관계자를 만나서 현금을 주는 빈도수에 관하여 통계도 갖지 않은 자가 함부로 말한다고 비판하면 달게 받겠다.

 

이 법이 시행되던 날, 대학에서 강의가 끝나자 교수에게 캔 커피 하나를 건네는 것조차 이에 해당될 수 있다는 보도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필자의 경우, 쉬는 시간이 지나고 강의를 속행하려 교실에 들어 가보면 거의 탁자 위에 캔 커피나 다른 음료수가 놓여있다. 나는 학생들의 뜻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남은 시간 더 열심히 강의한다. 그런데 이런 것까지 ‘김영란법’에 해당될 수 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학생을 기억해 두었다가 시험 채점이나 출석관계를 고려한다는 생각에서 그럴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이런 조그마한 감사까지 금지시키는 것은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더 큰 부정과 비리는 기술적 단속이 어려워 방치하면서 아름다운 예의에 가까운 행위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금지하는 것이 과연 비례원칙에 맞는 일인지 되새겨보아야 한다.

 

사소한 행동이 비리와 연관 가능성이 있다면 금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소도둑은 그 적발이 기술적으로 어렵다고, 눈에 보이는 바늘 도둑이나 잡는 형상은 반정의적이다.

 

 

자그마한 미풍(美風)마저도

 

김영란법이 시행된 후 운전을 못하는 어느 교수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그 교수는 강의를 끝내고 귀가하려면 교문 앞까지 약 1km를 걸어 내려가 버스를 타는데 차를 몰고 다니는 학생이 이런 사정을 알고 교문 앞까지 태워다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종전에는 그 학생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성명을 물어보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이 법이 시행된 뒤는 아예 학생 차를 타지도 않고, 어쩌다 승차하게 되더라도 이름을 물어보지 않는다고 한다. 이 법은 자그마한 미풍마저도 가져가버린 것이다.

 

그 밖에도 김영란법 시행 뒤 필자 주변에서 발생하는 미풍양속의 역행적 행위는 많다. 예컨대, 어느 출판사의 사장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동안 저자들에게 음력설에 감사의 표시로 조그마한 물품을 보내왔으나, 이번 설에는 김영란법에 걸리는 것이 두려워 그만두기로 했다고 한다.

 

국내의 상당히 많은 출판사에서는 일 년에 한두 번씩 저자들에게 간단한 선물을 보내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것은 출판사들의 일종의 상재(商材)이기도 하고, 인정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행위가 저자와 출판사 간에 어떤 부정의 전초가 되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이는 정다운 인간관계를 메마르게 변화시키는 것으로 ‘반법적 행위를 금지시키려는 목적’으로 ‘반도덕적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하면 이것도 논리의 비약일까?

 

지난날에는 과외를 금지시키려고, 과외가 적발되면 그 부모까지 세무조사를 한 일이 있다. 이를 일컬어 ‘견강부회’라고 한다. 김영란법에도 이런 측면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좀 상식에 벗어난 이야기인 것 같으나, 경제에서 연방효과(聯方效果)라는 말이 있다. 이는 상품의 활발한 거래는 그 상품의 생산이 증가하고, 생산의 증가는 확대생산으로 고용증대의 효과가 있다. 동시에 그 상품의 원료를 생산하는 기업에도 꽤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김영란법의 시행은 이런 ‘연방효과’(전방 연관효과, 후방 연관)를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면 법의 취지를 몰각하는 편견일까? 어떻게 보면 좀 침소봉대하는 주장 같으나, 대형 판매점이나 재래시장 할 것 없이 이번 설에 각종 상품의 판매량을 줄여서 계획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라고 본다.

 

김영란법의 시행으로 그동안의 ‘인정적 선물’을 부정과 비리의 출발로 보아 작은 것에서부터 그것을 척결하겠다는 의지와 정책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현금 뇌물로 옮겨가는 것을 실효적으로 금지하지 않으면, 정책은 겉돌게 된다. 지난날 각종 선거에서 고무신이나 설탕을 돌리고 조직원을 동원하여 음식을 대접하던 선거 문화는 자취를 감추었다. 길거리에서 교통경찰이 드러내놓고 돈 받던 부정도 사라진지 오래다.

 

따라서 김영란법 시행도 처음에는 여러 역기능을 일으키더라도 ‘뇌물성 선물 문화’가 사라지는 기대를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적 인정을 앗아가거나, 거래상황에 가져오는 부정적 효과는 최소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법 집행의 주무부처는 집행과 관련하여 더욱 상세한 지침을 마련하여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규제와 조정을

 

단속기관에 부탁하고 싶은 것은 사적 거래에서의 행위는 직접적인 부정 연관성이 인정되는 경우 외에 너무 지나치게 규제 일변도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부정과 비리는 척결하고 방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일이다. 특히 단속과 규제 때 거래의 계속성, 밀착관계, 주관적 동기를 잘 파악하여 행하고, 학교나 사적 단체의 내부행위에 간여하는 것은 최소한으로 축소하여야 할 것이다.

 

단속과 규제를 하는 기관이 실적 위주로 행동해서는 절대 안 된다. 또한 예측만으로 무조건 사전에 금지할 일은 아니다. 만일 화재 발생을 염려하여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아예 불의 사용을 금지한다거나, 본드를 환각제로 흡입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 본드의 생산 자체를 금지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듯 이것도 마찬가지다. 범죄나 부정 뒤 조사해야지, 어떤 행위의 추상적 관련성만으로 사전에 금지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반법치주의를 초래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은 합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법 자체에 대한 판결이고, 지나치게 엄격히 획일적으로 적용하면 ‘과잉 입법’ 또는 ‘언론기관을 길들이기 위한 입법’ 또는 ‘국민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심지어 처벌받지 않으려면 하나의 행동을 할 때마다 사전에 국가에 물어봐야 한다는 ‘난센스’ 법이 될 것이다.

 

또 이 법의 위반을 적발하는 ‘란파라치’(김영란 법과 파파라치의 합성어)의 발호를 조장하는 법이 되면, 우리나라는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부정하는 국가가 될 수도 있다. 법 철학자 켈서스(Celsus)는 법이란 정의(개인적 정의 · 배분적 정의)와 형평(衡平)을 실현하는 원리라고 하면서, 개인적 정의를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과 창의를 존중하고, 배분적 정의는 국가가 나서서 인간의 보편적 비례원칙이 실현되도록 하는 ‘규제와 조정’이라고 했다.

 

이 법이 이런 정의와 형평을 외면하면서 정치인과 상부 관료들의 비리에는 관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경직하게 만드는 악법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 송희성 아우구스티노 - 평론가, 수필가. 수원대학교 법과대학장과 행정대학원장, 법무법인 법률고문, 한국공법학회 부회장, 사법시험 위원, 행정고시 위원 등을 지냈다. 「민법총정리」 등 전공 서적 18권을 비롯하여 「택시기사의 애환」 등의 수필집을 펴냈다.

 

[경향잡지, 2017년 2월호, 송희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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