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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 교회사 여행: 로마제국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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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여행] 로마제국 시대 (1)
2세기, 소아시아 지역인 사르데스의 멜리톤 주교가 그리스도교 박해의 부당성을 알리는 편지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써 보냈다. 이 편지에서 멜리톤은 박해를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의 교의는 삶의 방식, 즉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멜리톤은 로마제국의 출현과 그리스도교의 출현 사이에는 하느님의 섭리의 일관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통치 시대에 태어났고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 시대에 가르쳤기에, 그리스도교와 로마제국은 함께 꽃피운 것이고,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유대감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정당성을 주장함과 동시에 로마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는데 지리적·정치적으로 복음전파에 용의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시작도 끝도 없는 교의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성경의 바탕이 된 셈족 세계에서 발달해서 로마제국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 사람이 도와달라는 호소 뒤에 가장 중요한 지역을 복음화했고 복음은 이내 페르시아와 어쩌면 인도에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형성된 정치적·군사적 장벽 때문에 이들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서방 지역에서는 로마제국이 지중해 연안을 통일했기에 별다른 장애 없이 사람과 문물과 사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로마제국에 형성된 지리적 · 물질적 이점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시대에까지 그리스도교라고 특정 지어지는 사고방식과 표현방식들도 이용했다. 또한, 잘 정비된 로마의 교통망은 사람과 물건의 이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프랑스 리옹에서 발견된 시리아 상인의 비문은, 시리아 상인들이 상인이면서 동시에 복음 선포자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바오로도 해로와 육로를 따라 전도 여행을 했다. 사도행전 27장과 28장에는 고대 세계의 항해 역사상 가장 찬란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전도 여행지의 여건에 따라, 바오로는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수월하게도 여행했다. 또한, 로마제국은 다양한 나라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집단이었다. 각 나라는 자신들의 고유한 관습과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었지만 여러 지역에서 구어로 사용되던 그리스어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동방지역의 공용어가 되었고 이후 문화와 철학의 언어였을 뿐만 아니라 상인들이 사용하는 국제어이기도 했다. 로마의 가장 익숙한 언어인 그리스어는 그리스도교에서도 중요한 언어이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유다인의 성경 셉뚜아진따-칠십인역을 사용했고 그리스도교 문헌과 전례서들이 그리스어로 쓰였다. 로마에서는 3세기까지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 로마의 언어이자 서방의 언어였던 라틴어는 널리 사용되지 않았고 단지 법과 질서의 언어였다가 3세기 이후 서방 그리스도교 전역에 사용되었다. 이렇듯 지리와 언어, 문화적 단일성도 거부감 없이 복음이 쉽게 전파되는 바탕이 될 수 있었다. [2017년 2월 5일 연중 제5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로마제국 시대 (2)
로마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 메시지는 다양한 종교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들 종교는 복음 메시지에 상반되었지만, 그리스도교의 계시로 향하는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다. 이는 종교적인 불안감 때문에 수용이 더 용이해졌다는 반사효과라고 볼 수 있다. 로마제국에도 고대로부터 이어오는 전통 종교들이 있었는데 이는 도시 종교와 마을 종교로 구분되었다. 주로 초자연적인 힘을 숭배하는 자연 종교였던 마을 종교는 자연, 땅 그리고 짐승들의 풍요를 보장받기 위해 필요한 종교로 추수를 관장하는 신, 양 떼를 돌보는 신, 물을 공급하는 신이 있었다. 그러나 5세기에 접어들어 마을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자, 이들 종교는 그리스도교에 흡수되거나 당시 성행하던 민간전승 종교에 흡수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스 지역의 도시든 라틴 지역의 도시든 모든 도시는 그 도시의 고유한 전통 종교의 신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이 정복당하면서, 각 도시의 고유한 신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로 점차 바뀌어 갔다. 그래서 제우스(그리스) - 주피터(로마), 헤르메스(그리스) - 머큐리(로마), 포세이돈(그리스) - 넵톤(로마) 등과 같은 비교가 가능해졌다. 도시들이 점령당하고 독립성을 잃게 되자 그 도시들의 종교마저도 생명력을 잃었다. 그 결과 도시들의 종교들은 ‘내가 네게 주었으니 너도 나한테 주어야 한다.’와 같은 의례적인 형식이 되어, 더는 사람들의 정신을 계몽하지 못하고, 참 종교에 대한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종교들은 더 이상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종교들에 충실한 편이었다. 왜냐하면 종교는 대대로 물려받은 하나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로마에는 황제 숭배 사상이 있었다. 이는 동방에서 시작되었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은 황제 숭배 사상을 강조했고 이 사상이 서방에 들어오자 로마제국의 황제들도 이 사상을 강조했다. 황제 숭배는 일종의 정치적인 종교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황제를 숭배하는 것은 일종의 충성 행위였다. 3세기까지는 통치자와 군인들만이 황제 숭배에 참여했으나 이후 그리스도인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하자, 황제를 주님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하느님과 그리스도만을 주님이라 고백하며 결사반대했다.
마지막으로 동방의 신비 종교가 있었는데 이는 인구 밀집지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끌었다.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노예, 군인, 관리들이 소아시아나 이집트의 종교를 로마와 서유럽에 전파했다. 비탄에 빠진 불행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론적 고통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이런 종교들을 선택했다. 이 종교들은 선별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자신들의 신비를 가르쳤다. 이 같은 신비 전수를 통해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신을 만났다. 이들은 구원받은 특권층 즉 신앙에 충실한 자만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 새 삶을 산다고 가르쳤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종교들이 하나의 거대한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서로 일치 융합하여 하나의 보편 종교로 발전해 갔다고 지적했다. 바로 이런 시기에 그리스도교가 출현했다. 그리스도교는 도덕 증진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종교였다. 복음은 양보와 타협의 대상도 아니었고 타종교와의 혼합도 없었기에 초세기 그리스도교는 분명 다른 종교와 달리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7년 2월 12일 연중 제6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로마제국 시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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