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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32: 주님께서 마련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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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09 ㅣ No.426

[추기경 정진석] (32) 주님께서 마련하신다


선임 주교 배려, 주교관 옆 함석집에서 교구장 생활 시작

 

 

- 1974년 12월 6일 청주교구청에서 공소 지도자 강습회를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하는 정진석 주교(앞줄 가운데).

 

 

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으며 

 

1970년 10월 3일 청주교구 제2대 교구장 정진석 니콜라오 주교의 서품식과 착좌식은 노기남 대주교와 파디 주교, 한공렬 주교 공동 집전으로 거행됐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한국 교회 모든 주교가 이 미사에 함께하며 새로운 교구장의 탄생을 축하했다. 

 

미사 중 주교 반지와 주교관이 수여됐고, 주교 목장을 받은 정 주교는 교황대사 히톨리토 로톨리 주교와 노기남 대주교의 인도로 청주교구장 주교좌에 착좌했다. 이로써 청주교구는 교구 설정 12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주교를 맞이하게 됐다. 10여 년 동안 메리놀회가 위탁을 받아 사목하던 유년기를 벗어나 자치 교구로서 첫걸음을 뗀 셈이었다.

 

청주교구 신자들은 새로운 교구장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뻐했고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신자들의 기대만큼 새 교구장 정진석 주교의 어깨는 무거웠다. 정진석 주교가 강론을 하기 위해 강론대에 섰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어 주교 서품식을 준비한 이들, 참석하고 함께한 이들에게 인사를 전한 정 주교는 구약의 모세를 들어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모세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하느님은 당신의 도구로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겁이 났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심지어 도망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시는 하느님만을 믿고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한 나 자신인데 두렵고 떨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해주신다는 믿음으로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이 말은 전혀 꾸밈이 없는 말이었다. 정진석 주교는 인생의 우여곡절을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마련하신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성경의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에 나오는 ‘야훼 이레’의 믿음이 깊이 뿌리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다면 모든 것이 하느님 뜻대로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믿음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그러했다. 고난과 역경의 시간도 굳세게 주님만 믿으며 걸어가니 새로운 길을 마련해주셨다. 스스로 그 신비를 체험했기에 자신 있게 주님을 향한 응답을 고백할 수 있었다. 

 

정진석 주교는 미사 내내 이곳으로 자신을 부르신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뜻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일생 그 뜻을 찾고 실천하는 데만 노력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서품식이 끝나고 방문한 귀빈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신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한참 후에 가족들과 함께 계신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별로 말씀이 없고 그저 담담한 얼굴이었다. 정진석 주교는 어머니와 둘이 찍은 사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주교 서품 기념으로 어머니와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둘이 찍은 유일한 사진이었다. 정 주교와 어머니는 사진기 앞에서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는 그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평생을 사셨다. 아들로서 어머니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평생 기도로 함께해주신 어머니는 정진석 주교에게 둘도 없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가난했던 청주교구 

 

당시 청주교구는 메리놀회 사제가 19명, 한국인 사제가 6명이었다. 대다수가 메리놀회 소속 미국 사제들이고 한국 신부들은 수품한 지 아직 3년도 안 된 젊은 사제들이었다. 미국인과 한국인이 함께 있고, 그것도 절대다수가 미국인 사제인 데다가 대부분의 수품 연차가 새 교구장보다 높다 보니 교구장으로 어떻게 사목하느냐 하는 것은 큰 걱정거리였다. 특히 미국인 사제 중에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제가 많지 않아 첫 사제 회의는 영어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또 1970년대는 미국 본토에서도 인종 갈등과 차별이 심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벽들을 잘 넘어 순탄하게 교구를 이끌 수 있도록 정진석 주교는 무엇보다 먼저 기도를 했다. 누가 도와줄 수도 없고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데 하느님께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고집 센 사람들을 세워 보면 신부들은 절대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고집 센 선배들을 지휘하려니 결코 쉽지 않았다. 

 

청주교구는 사제들에게 생활비도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정 주교가 새 교구장으로 부임했지만 전임 파디 주교가 주교관에서 지냈기에 정 주교는 다른 방에 묵어야 했다. 하지만 주교관에도 남는 방이 없었다. 지금 같으면 증축을 했겠지만, 교구가 사정이 어려워서 증축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정진석 주교는 주교관 옆의 함석집에서 지냈다. 작은 기도방이 딸린 집이었다. 사람들은 굉장히 고생한다고 걱정했지만 정작 정 주교는 불편함이 별로 없었다. 전쟁 때부터 단련된 생활로 환경에 빨리 적응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파디 주교는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성심양로원 원장으로 불우한 노인들을 돌보다 1976년 본국으로 귀국했다. 정 주교는 파디 주교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야 주교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첫째 과제는 사제단과 소통 

 

정진석 주교의 첫 과제는 사제단의 일치와 소통이었다. 우선 함께 교구 사목을 할 사제가 필요했다. 눈여겨보았던 제라드 하몬드 신부를 불렀다. 10년 가까이 한국 생활을 한 그는 영어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꿔 ‘함제도’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1960년부터 청주교구에 있었던 함 신부는 초대 교구장 비서 겸 관리국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유능하고 부지런한 사제였다. 함 신부가 교구장실로 들어오자 정진석 주교가 말했다.

 

- 1979년 수동성당에서 복사들과 함께한 정진석 주교(오른쪽). 함제도 신부(왼쪽)는 홍대리와 수동본당 주임을 함께 맡고 있었다.

 

 

“함 신부님, 저를 도와주세요. 총대리를 맡아 교구를 운영하는 데 힘이 되어 주세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함 신부는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주교님, 하늘 같은 선배 신부님들이 많이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정 주교는 물러서지 않았다.

 

“신부님은 청주교구에도 오래 계셨고, 파디 주교님 비서와 교구 관리국장까지 맡으셔서 교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주교의 간절한 부탁에 골몰히 생각하던 함 신부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부족하지만 주교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후 함제도 신부는 교구 총대리로 교구장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교구장이 사목방문을 떠날 땐 운전기사 역할도 도맡았다. 가난한 교구장은 총대리 함 신부가 운전하는 포니 왜건을 나란히 타고 사목방문을 오갔다. 함 신부의 도움에 힘입어 메리놀회 다른 사제들과도 잘 협의해 교구 운영을 지속해나갔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월 8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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