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강론자료

마태오복음 2,1-12 동쪽에서 온 현자들 (2017. 1. 8. 주님 공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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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1-06 ㅣ No.2157

예수는 헤롯이 왕이었을 때에 유대아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그 후 곧바로 몇 사람들이 동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와서 물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의 별이 동쪽으로 떠오른 것을 보고 그를 경배하러 왔습니다.” 헤롯왕과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크게 당황하였다. 그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불러모아놓고 물었다.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나겠소?” 그들이 대답하였다. “유대아의 베들레헴입니다. 어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아의 베들레헴

너는 유대아의 주요 고을들 중에서 결코 작지 않다.

너에게서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가 오리라.’

 

그리하여 헤롯은 현자들을 비밀스럽게 만나 그들로부터 별이 나타난 정확한 때를 알아내었다. 그런 후에 그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를 잘 찾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으면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그 아기를 경배하겠소.”

 

그리하여 그들은 길을 떠났는데 가는 도중에 그들이 동쪽에서 보았던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 별은 아기가 있는 곳에 멈추기까지 그들을 인도하였다. 그들은 집으로 들어가 어머니에게 안긴 아기를 보자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다. 그들은 선물로 가져온 금과 유향과 몰약을 꺼내어 아기에게 바쳤다. 그런 다음 그들은 다른 길을 통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느님께서 꿈을 통하여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예수를 방문한 사람들은 별을 관찰하여 미래를 점치는 점성술사(astrologist)라고 보면 무난할 것이다. 예수 시대의 점성술사는 학문과 지혜의 분야에서 최고의 엘리트였다.

 

본문은 창세기 에덴동산 설화와 연결된다.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생명을 주는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에덴의 동쪽에 케룹들과 온 방향으로 돌아가는 불 칼을 두셨다.”(창세기 3:24)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이제 동쪽으로부터 복귀해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평화의 도시라는 뜻으로서 에덴동산을 가리키는 상징어가 된다. 동쪽에서 온 현자들은 예수라는 생명나무를 찾아 에덴동산으로 들어오고 있다. ‘유대인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교하여 말하자면, 한국의 한울님이나 중국의 天帝 등은 막연한 경배와 미신의 대상에 불과하지만 아브라함과 다윗의 하느님은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그들을 이끌어주시는 분이다.

 

각설하고, ‘케룹은 하느님의 천사 또는 성령의 활동을 가리킨다. 케룹은 사람들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도록(=회개) 격려한다. 현자들이 본 예수의 별은 바로 케룹에 상응한다. 현자들은 하늘의 별들을 연구하다가 예수의 별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현자들이 연구하여온 별들은 세상의 스승들이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의 지혜이고, 이것은 또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현자들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편협한 지혜에 만족하지 못하고 생명을 주는 완전한 지혜를 찾아 에덴동산을 향한다. ‘돌아가는 불 칼은 성령을 가리킨다. ‘은 사람의 지혜를 흐트러뜨리는 하느님의 지혜이며, ‘은 사람의 욕망을 가라앉히는 하느님의 생명력이다. 성령의 불 칼은 온 방향으로 돌아가므로생명나무에 이르려는 사람은 마음(이성)과 몸(감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야만 한다.

 

예수는 바로 생명나무이다. 이런 이유로 박사들은 그에게 세 가지의 선물을 바친다. ‘의 불변성과 고귀함은 하느님의 사랑(=애덕)을 상징하며, ‘유향(乳香 frankincense)’은 기도할 때에 태우는 향료로서 성령(=믿음)을 상징하며, ‘몰약(沒藥 myrrh)’은 시체를 처리하는 방부제로서 썩어 없어지는 육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대신에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하느님의 아들(=망덕)을 상징한다. 사람은 애덕, 신덕, 망덕으로 돌아가는 불 칼을 너끈히 통과한다. 케룹들이 늘 함께하며 격려하고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현자들이 무릎을 꿇는 행위는 하느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태도이다. 예수, 마리아, 박사들은 각각 하느님의 아들, 성령의 짝, 왕의 백성으로 대응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 예수를 알아보는 순간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백성임을 자각한다.

 

지금 유대인의 왕은 헤롯이고 다른 왕이 있을 수 없다. 왕은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는 유일한 권력자이다. 권력자의 속성상 헤롯이 자신의 경쟁자가 될 다른 유대인의 왕에게 살의를 품는 것은 당연하다. 수석사제는 제도와 전례를 담당하며 율법학자는 법률과, 지혜를 담당한다. 이들은 성서에 정통하므로 유대인의 왕에 대한 성서구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인용된 성서는 (미가 5:10)이다. 미가는 그 지도자가 다윗과 같이 위대한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그 지도자가 나올 것이라고 한 것이다. 미가서 5장에서 제시하는 지도자의 면모는 얼핏 알쏭달쏭하다. 분명히 그는 정치적인 권력자는 아니다. 베들레헴은 빵을 만드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 지도자는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제공할 것임을 암시한다. 마태오는 베들레헴에서 바로 이 상징을 취하였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성서의 문맥에 따라 베들레헴이라는 장소를 지목한다. 과연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위대하다. 여기에는 두 개의 상반된 관점이 있다. 첫째,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관점; 예언자가 말한 바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고, 아마도 헤롯의 뒤를 이어, 다윗이 이룬 것과 같은 정치적인 성공을 거둘 것이다. 둘째, 동쪽에서 온 현자들의 관점;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작은 인물이지만 사실은 온 인류에게 생명의 음식인 성령을 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룰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하느님과 씨름하는 사람들=하느님의 아들들라는 영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헤롯이라는 권력자를 왕으로 모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참된 왕에 대하여는 무관심하다. 헤롯왕은 자신도 그 왕을 경배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경쟁자인 그를 죽이려고 한다. 거짓 왕은 참된 왕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그가 태어난 를 알고자 한다. 현자들이 예수의 별을 본 사건은 생명과 사랑의 때이지만 그 같은 사건을 헤롯은 죽음과 살인의 때로 받아들인다. 살인자는 사람들을 속이며 그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는다. 헤롯의 태도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헤롯왕은 자신이 아닌 다른 유대인의 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살의를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왕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과연 예수의 별은 어떤 방식으로 박사들을 이끌었을까? 그것은 혜성과 같은 천체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별이 코앞을 떠서 가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정확한 지점을 지시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 역할이라면 반딧불이나 참새 한 마리가 더 적당할 것이다. 복음저자는 독자 개개인이 스스로 회개함으로써 그 별을 보기를(=참된 자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기를) 촉구하고 있다. 박사들이 처음에 찾아간 곳은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이다. 그들은 욕망을 채워서 얻어지는 세상의 평화에도, 위선적 종교지도자들이 주는 거짓 평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평화를 얻고자 한다. 세상이 주는 지혜(별들=거짓 자아)가 극히 불완전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지혜(예수의 별=참된 자아)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헤롯이라는 왕과 그의 조언자인 종교지도자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헤롯은 그들이 찾던 왕이 아니며, 종교지도자들은 성서지식으로 권력자를 보좌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현자들은 참된 왕을 찾으려는 의지를 결코 접지 않는다.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거기에서 자신들이 찾던 왕을 만난다. 그리고 자아 전체를 기울여서 그를 따른다.

 

현자들은 굳이 왕의 옆에 계속 머물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제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왕과 함께 머물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한 삶의 현실이 곧 에덴동산이요 예루살렘이다. 그들은 헤롯왕과 권력에 결탁한 종교지도자들의 거짓을 꿰뚫어보고 다른 길’,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택한다. 그들은 참된 왕을 찾는 과정에서 거짓 왕과 그를 추종하는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를 거쳤지만 참된 왕을 만난 다음에는 더 이상 거짓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성령의 지혜로 생명과 죽음, 참과 거짓을 분명히 식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의 현실(=에덴동산)로 복귀하여 생명나무 열매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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