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성경자료

[성경] 히브리어 산책: 게르,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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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06 ㅣ No.3516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게르, 이방인


이집트 종살이하며 ‘게르의 삶’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 게르. 게르는 낯선 땅에서 살아야 하는 힘든 처지의 사람을 지칭했다.

 

 

게르는 이방인이란 뜻이다. 낯선 마을에 살던 가련한 이들이다.

 

 

이방인

 

‘이방인’이란 단어는 사뭇 문학적이다. 까뮈의 유명한 소설을 떠올리거나, 히말라야 산길이나 산티아고를 묵묵히 걸으며 명상하는 순례자를 연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게르는 훨씬 절실하고 궁핍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 전쟁이나 기근 때문에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몸붙여 살아야 하는 가련한 사람들이 게르다. 그들은 낯선 곳에서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는 사람들로서,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힘든 처지였다. 구약성경에는 가엾은 게르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게르이자 과부, 나오미와 룻

 

룻기는 시작부터 게르가 나온다.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룻기 1,1). 그래서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은 식솔을 거느리고 모압땅에서 게르(나그네살이)가 되었다. 그런데 가장이 죽고 말았다(1,3). 그 당시 시대상을 짐작하면 과부 나오미의 처지를 짐작할 수 없다. 그녀는 게르이자 과부로서 이중으로 궁핍한 처지로 떨어졌다. 게다가 아들 둘을 키워야 했으니 고단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들이 모두 결혼을 하고 나서는 그나마 형편이 폈을 것 같다(1,4).

 

- 룻. 룻기의 주인공의 이름이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게르이자 과부’로서 이중으로 가난한 처지에서 구원자를 간절히 염원한 여인이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아들 둘도 죽었다. 이제 집안에 과부 셋만 남았다. 나오미는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향이 넉넉해졌다는 소문을 듣자(1,6) 돌아가기로 한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너희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너무나 쓰라리단다”(1,13)고 말하며, “새 남편 집”(1,9)을 찾아가도록 허락하는 장면에서 여성 사이의 진한 동정심과 연대감를 느낄 수 있다. 한 며느리는 나오미를 떠났지만 룻은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다(1,16-19). 나오미는 자신을 알아보는 고향사람들에게 그동안의 쓰라린 삶을 들려주었다(1,20-21).

 

고향에 돌아왔지만 게르와 다름없는 처지의 나오미이다. 게다가 “모압 출신 며느리 룻”(1,22)은 이제 유다 땅의 게르다. 게르이자 과부, 곧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처지의 여성 두 사람만 남은 가련한 가정이다. 유일한 친족 보아즈는 그들에게 생명줄과 같았을 것이다(2,1). 그는 결국 구원자가 된다.

 

 

이집트의 게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이집트로 들어가 외국인 노동자로 살았다. “이집트 종살이”(탈출 6,6)는 게르의 삶이었다(탈출 22,21). 이집트 탈출의 영웅인 모세는 미디안으로 달아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였다(탈출 2,22). 게르솜은 ‘게르의 아들’, ‘게르의 이름’, ‘게르의 자리’ 등으로 새길 수 있는 말이다. 이 이름을 통해서, 동족의 처지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했던 그의 내면을 짐작할 수 있다.

 

- 게르솜. 모세의 아들의 이름이다. 히브리어로는 ‘게르숌’에 가깝게 발음된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게르와 관련된 이름임은 확실해 보인다. 윗첨자로 붉게 쓴 글씨 e는 발음되지 않지만 초보자를 위해서 표기한 것이다(무성셰와).

 

 

가엾은 외국인에게 잘해 주어라

 

구약성경은 이처럼 이방인의 고단한 삶을 알고 있다. 하느님은 너희도 한때 게르였으니, 게르의 마음을 헤아리라고 권유하신다(탈출 23,9). 하느님은 “게르를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신명 10,18)이시며, 하느님 백성은 고아와 과부와 게르를 차별하면 안 된다(신명 16,11.14). 게르(길손)가 묵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는 것은 미덕이었다(욥기 31,32).

 

산업화 시대에 한국인들은 중동과 독일과 북미 등에서 외국인노동자로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도 외국인노동자들이 게르로서 꽤 많이 존재한다. 우리 신앙인은 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베풀고 있을까? 마침 오늘 복음을 보자. 나자렛 출신 예수님이 낯선 고을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루카 19,1). 자캐오의 순종과 선행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1,5) 예수님 일행을 친절히 집에 모신 것에서 시작되었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30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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