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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 폴리 신부와 북수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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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15 ㅣ No.1927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 (3) 폴리 신부와 북수동 성당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한국 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시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신앙의 증거자”인 이분들 가운데에는 어쩌면 살아생전에 직접 뵌 독자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위원장 유흥식(라자로) 주교님의 바람대로 “특별히 이분들이 하늘에서 우리 교회와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빌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왕림 본당 관할 수원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다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수원가톨릭대학교 초입에 오래된 성당 하나가 있습니다. 한강 이남에서 처음으로 설립되었다는 왕림(旺林) 성당입니다. ‘갓등이 성당’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갓등이란 갓을 쓴 등불이라는 뜻으로 신부를 지칭하는 은어였다고 합니다.

 

이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76년경으로 여겨집니다. 천주교 4대 박해 중 전국적으로 가장 오래 지속되어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병인박해(1866~1873년)로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이 이곳에 다시 모여 공소를 설립하였고,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 1888년 7월에 이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로써 왕림 본당은 1882년 종현(현 명동) 본당, 1883년 제물포(현 인천 답동) 본당, 1887년 원산 본당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설립된 본당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수원교구 뿌리가 된 것이지요.

 

천주교가 활기를 띠면서 신자수가 점차 늘어나자 왕림 본당에서는 여러 곳에 공소를 설립하였습니다. 수원 읍내에도 신자가 많아져 이곳 유지 신자들은 1891년에 남수리(南水里) 황학정 인근의 밭 800평과 25칸짜리 한옥을 매입하였고, 화양학교(華陽學校)를 개설하는 한편 ‘천주당’이라는 간판을 달고 일부를 공소 강당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이 갓등이 본당 관할의 수원 공소입니다. 공소 신자들은 1897년 3월 북수리(北水里)의 ‘팔 부잣집’ 300여평 매입하여 강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하였습니다.

 

왕림 본당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주임신부는 31개에 달하는 관할 공소를 혼자 사목하기 힘들어지자 뮈텔 주교에게 수원에 사제를 파견해 줄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습니다. 수원 신자들의 끈질긴 호소와 김원영 신부의 강력한 진언으로 1923년 11월 초 르 메르(L. Le Merre, 李類斯)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수원 공소는 드디어 수원 본당으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 수원 본당은 1959년 11월 고등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이름이 북수동(北水洞)으로 바뀝니다.

 

본당으로 승격된 지 얼마 안 된 1925년 5월, 한국을 두 번째로 방문한 베네딕토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노르베르트 베버(N. Weber) 총아빠스가 수원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1927년에 펴낸 그의 여행기 『금강산』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제관이라지만 주위의 낮은 한옥과 다를 바 없고, 성당은 그 속에 있어 눈에 띄지 않았다. 알고보니 ㄱ자 모양으로 붙어 있는 두 개의 낮은 한옥이 성당이라고 한다. 오른쪽 모퉁이에 제대가 있고, 한 채는 남자용, 다른 한 채는 여자용이어서 한국 관습이 요구하는 남녀의 구분이 저절로 되어 있었다.”

 

 

폴리 신부가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다

 

폴리(D. Polly, 데시데라토, 沈應榮)는 1884년 10월 27일 프랑스 비비에(Viviers) 교구의 베르노스크(Vernosc)에서 아버지 조제프 펠릭스 폴리(J.F. Polly)와 어머니 마리 빅토린 포제(M.V. Fauget)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901년 9월 11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선교사를 꿈꾸던 그는 1906년 12월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가 신학 공부를 마치고 이듬해 5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은 뒤 8월 8일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였습니다. 곧바로 제물포(현 답동) 본당 임시주임으로 잠시 있다가 1908년에 충청도 홍성의 수곡(須谷) 본당 초대주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본국으로 돌아가 그 해 8월 육군 보병 장교로 참전하였고, 종전이 되자 1919년 9월 23일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서산 동문동(東門洞) 본당 제2대 주임을 거쳐 1921년 7월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발령받아 교수로 재직하였고, 1923년 6월 원주 원동(園洞) 본당 제8대 주임, 1928년 5월부터는 대전(大田, 현 목동) 본당 제3대 주임을 맡아 사목하였습니다.

 

 

폴리 신부가 수원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다

 

크렘프(H. Krempff, 헨리코, 慶元善) 신부와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 신부를 거쳐 1931년 5월 수원 본당 제4대 주임으로 폴리 신부가 부임하였습니다. 1948년 8월까지 17년 동안 재임하면서 폴리 신부는 수원 본당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지요. 부임하자마자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고 전교에 힘썼는데, 전교가 잘되지 않기로 소문난 수원에서 재임 동안 신자수가 2천 명으로 증가한 것은 오로지 폴리 신부의 독려와 회원들의 열성 때문이었습니다. 능력이 있음에도 외교인을 한 번도 성당에 데려오지 않고 미사 참례하러 온 신자에게는 불호령을 내리기도 했답니다.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할 수 있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시는 것을 옆에서 구경이나 하면서 물 한 그릇 떠다 드릴 생각이 없다면 이것이 어찌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이겠소.”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제2의 고향이요 성소의 꿈을 키운 수원 본당과 인연이 있는 제2대 수원교구장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주교의 일화에서 폴리 신부 성품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34년에 새로 간행된 『천주교 요리 문답』 세 편을 모두 공부한 뒤 찰고를 받아야 했는데, 1편만 공부하고 폴리 신부에게 찰고를 받으러 갔다가 “6학년 학생이 1편밖에 외우지 못했는가? 여기서 당장 나가!”라고 호통 치는 바람에 아주 혼쭐이 났다고 합니다. 6학년 졸업 무렵 신학교에 간다고 했더니 문답 찰고에도 불합격한 학생이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네가 신학교엘 가? 덕원신학교는 몰라도 용산신학교엔 못 가.”라고 할 정도로, ‘심 딱딱이 신부’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엄하고 무서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협심 강하고 일제 통치에 저항하는 반골 기질도 있고, 식민지 백성이 된 한국 민족을 연민의 정으로 사랑한 속깊은 분으로 많은 신자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폴리 신부가 부임 이듬해부터 착수한 일은 성당 건축이었습니다. 가난한 신자에게서 건축 기금을 모으기가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폴리 신부는 그동안 근검절약하며 모은 돈과 신자들이 낸 교무금,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마련해 준 기금으로 공사를 시작했지요. 건축비가 부족하여 고향의 홀어머니가 삯바느질로 모은 돈까지 보탠 끝에 공사를 차질 없이 마칠 수 있었고, 마침내 수원 지역 최초의 벽돌조 고딕 양식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1932년 11월 13일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보좌 주교 주례로 10명의 신부들이 공동 집전한 성당 봉헌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이듬해 4월 23일에는 종 축복식도 거행하였는데, 폴리 신부의 고향에 사는 가난한 신기료장수가 구입해서 보내준 소중한 종이었습니다. 1934년 11월 『경향잡지』 제794호에서 성광과 성체등을 봉헌한 두 여성을 소개하면서 “그 높은 종각에서는 아직까지 잠자고 있는 시민들의 귀를 조석으로 흔들어 주어 어서 종교의 품 안으로 들어오기를 재촉한다.”고 묘사되었던 이 종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강제 징발당할 뻔했지만 폴리 신부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구장의 협조 지시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조치이긴 했지만, 일제의 전시 동원령으로 성당과 부속 건물이 징발되는 수모를 겪기도 한 폴리 신부는, 일제의 패망으로 맞이한 해방의 기쁨을 신자들과 함께 나누며 감격해 마지않았습니다. 폴리 신부의 감회어린 강론에 눈물을 흘린 신자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또 대중 집회에서의 연설로 본의 아니게 정치에도 밝은 인사로 유명해져서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수원 유지들과 정치에 뜻을 둔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자문을 구할 정도였지요.

 

 

천안 본당 재임 중 북한군에 피랍되어 순교하다

 

1948년 5월 8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된 신설 교구가 대전에 설립되어 충청남도 전역을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서울과 대구 대목구에 소속되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신설 교구로 통합되면서 1948년 8월 8일 폴리 신부도 수원을 떠나 남쪽으로 50km가량 떨어진 천안(현 천안 오룡동) 본당 제6대 주임으로 전임되었습니다.

 

신설 교구의 제반 행정이 채 자리도 잡기 전인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포격에 성당이 심하게 파손되었고 피란을 떠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본당 신자들의 권유에도 폴리 신부는 “신자가 천안에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떠날 수 없어. 신부가 신자를 놔두고 도망가? 그건 신부도 아니야.”라고 뿌리치며 성당을 지키다가 8월 23일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공산군에게까지 천주교를 믿으라고 했던 폴리 신부는 당시 공산군이 몰수하여 정치보위부로 사용하던 대전 목동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프랑스인 동료 신부들과 함께 수감되었습니다. 수도원 인근에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대전 형무소가 있었는데, 수용자들로 가득 차자 공산군은 이곳 수도원과 성당에도 감금하였던 것입니다. 북으로 후퇴하기 직전인 9월 24~26일 공산군은 대전 형무소와 수도원에 가두었던 많은 사람들과 42명의 미군 포로를 살육하고 사체를 한 구덩이에 파묻고 우물에도 던져 넣었습니다. 폴리 신부 또한 이때 피살된 것으로 보입니다.

 

폴리 신부가 세운 고딕식 성당은 건축된 지 46년만인 1978년에 철거되고, 지금은 외부 전면 구도가 주교관(主敎冠) 모양이고 주보성인 미카엘 대천사상이 눈길을 끄는 북수동 성당이 우리를 반겨줍니다. 본당에서는 1979년 4월 5일 이 새 성당 봉헌식 날 폴리 신부를 잊지 못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거행하였으며, 2007년 11월 21일에는 소화초등학교 건물을 ‘뽈리 화랑(Polly Gallery)’으로 개조하여 폴리 신부와 관련된 유품(성합, 성광, 십자가, 성작 등)과 사진을 상설 전시하며 그분을 기리고 있습니다.

 

 

참고 도서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자료집 제2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18.

「수원의 호랑이 서양 신부」, 『경향잡지』 제1240호(1971. 7), pp. 36~42.

『북수동 성당 7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북수동 성당, 1994.

 

[평신도, 2020년 가을(계간 69호), 글 · 정리 김주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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