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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그날, 수원 교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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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08 ㅣ No.1195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그날, 우리 교구는 (상)


해방 후 자리잡아가던 한국교회, 다시 무너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무력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핏빛으로 물들였고 남북의 분단이 고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올해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다. 특별히 매년 6월은 한국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달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6월을 맞으며 당시의 수원교구지역 신앙공동체의 상황을 살펴본다.

 

6·25 전쟁 중 폐허가 된 함경남도 덕원수도원 성당.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대내외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탄생했고, 토지 개혁 사업을 거치면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교회 재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며 점차 교무금이나 봉헌미 등을 내는 등 교회의 정상적인 발전이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6월 25일 벌어진 민족상잔의 비극,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대규모였던 이 전쟁은 남북한에서 3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많은 불구자와 이산가족, 실향민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에도 큰 타격을 안겼다

 

북한에서는 전쟁이 발생하기 전날 북한에 남아있던 13명 한국인 신부를 체포했다. 제국주의자들의 첩자라는 죄목이었다. 남한 교회는 전쟁이 터지자 사제들에게 교회를 지키고 사목 활동을 계속할 책임을 맡겼다. 당시 수원교구지역이 속해있던 서울대목구는 공식 혹은 비공식적으로 사제들이 본당에 남기를 결정함으로써 교회 수호의 의지를 드러냈다.

 

서울대목구는 전쟁 다음 날인 6월 26일 긴급 교구 참사 회의를 열고 ‘본당 신부들은 직장을 사수하고 교우들과 생사를 함께한다’ 등의 방침을 내렸다. 이 내용은 대부분 준수되었고 교회 기능도 상당 기간 지속됐다.

 

교회와 신자들이 입은 인적·물적 손실은 엄청났다. 시설 파괴도 많았는데, 격전지 인근 지대와 함께 공산군 점령 기간이 길고 전투가 치열했던 서울, 경기, 강원도 지역에 물적 피해가 집중됐다. 수원교구지역의 경우 수원본당(현재 북수동본당) 성당 건물 일부가 파괴됐고 이천본당은 성당이 전소됐고 여주본당도 성당이 소실됐다. 성물과 비품, 가재도구 등은 수도 없이 약탈당했다.

 

평택본당은 당시 6대 주임신부인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 페티프런 신부가 수녀들과 피난을 떠나고 북한군이 지역을 점령하는 동안 성당 내부가 파괴되고 성물과 시설물들은 도난당했다. 양평본당은 양평읍에 공산군 침공을 막기 위한 유엔군 공군기 폭격이 극심했던 관계로 성당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1946년 왕림본당에 의해 문을 열었던 광성국민학교는 1950년 6월 2일 초등학교가 아닌 준중학교 3년제 봉담고등공민학교로 개교했으나 북한군이 학교와 성당을 점령하면서 임시 휴교했고, 그해 9월 자진 폐교했다. 광성국민학교는 한국민간구조사령부 원조로 1954년 4월 1일 학교 운영을 재개했다.

 

수많은 교회 시설이 파괴되는 것과 함께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박해시대 이래 가장 많은 희생이었다.

 

남한 일대가 공산군 점령 아래 놓이게 되자 교회는 감시와 탄압 속에 놓였다. 본당 신자들을 지키던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은 체포된 후 살해되거나 행방불명 됐고, UN군 공세로 북한군 전세가 불리했을 때 이러한 상황이 심해졌다.

 

인적 희생은 수사들의 경우 피해자 전원이 외국인이었고 수녀들도 외국인 피해가 컸다. 사제들은 외국인과 한국인이 반반을 차지했다. 서울대목구와 평양대목구에서는 한국인 신부 희생이 두드러졌다.

 

남한 지역에서 체포돼 납북된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서울로 집결했다가 평양으로 압송됐다. 조사 후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하창리 수용소에 갇혔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옥사독 수용소에 수감됐던 덕원과 함흥대목구 성직자 수도자들은 북행하며 다른 수용소를 거쳐 다시 옥사독 수용소로 돌아와 억류된다. 이 두 가지의 고난스러운 이동과정을 ‘죽음의 행진’이라 부른다. 죽음의 행진과 혹독한 수용소 생활 중에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았다. 중강진에서 병으로 선종한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안성본당 초대 주임신부를 맡았었다.

 

수원교구지역 본당 주임신부들은 근처 공소로 피신하거나 피란길에 올라 공산군에게 희생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전에서 희생당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중 폴리신부, 몰리마르 신부, 페랭 신부는 수원교구지역에서 활동했다. 북한 지역에서 행방불명된 김경민 신부와 이순성 신부도 수원교구지역 본당주임을 역임한 바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6월 7일, 이주연 기자]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그날, 우리 교구는 (하)


전후(戰後) 복구과정에서 신심 굳어지고 교세 증가

 

 

- 6·25 전쟁 중 원산이 수복된 후 1950년 11월 2일 원산성당에서 신자들이 미군들과 함께 전쟁 중에 희생된 이들을 위하여 위령미사를 바치고 있다. 전쟁 후, 북한지역 교회시설이 주로 파괴됐으며, 남한의 본당들은 성당 신축과 증축 복구 작업을 본격화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6·25 전쟁은 가톨릭교회에 많은 손실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발전의 계기가 됐다.

 

1950년 10월 이후에는 주로 북한지역 교회시설이 파괴된 것에 비해 남한에서는 복구 활동이 활발했다. 교회시설이 많이 파괴됐지만 전쟁을 계기로 밀려드는 새 신자들로 인해 성당을 신축하거나 증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1952년 3월 12일부터 사흘 동안 대구 남산동 주교관에서는 전쟁 후 처음으로 전국 교구장 회의가 열렸다. 이때 첫 번째 결의사항은 ‘전란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교회 건물과 사업은 재침의 위험이 없는 지방에서는 가급적 수복(修復)할 것’이었다.

 

이 무렵부터 전국에서는 본당의 신축과 증축 복구 작업이 본격화 됐으나, 자체적인 능력이 없던 상황에서 외부 원조, 특히 미국과 미군 원조가 많은 보탬이 됐다. 해방 이후 한국에 진출해 있던 ‘미국가톨릭복지위원회’(NCWC)는 6·25 전쟁 시기나 그 이후에도 활발하게 원조사업을 진행했다.

 

교회는 구호물품을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무상으로 분배하면서 호감을 높였고 이를 계기로 입교자들이 늘어났다. 전쟁 속에서 정신적으로 위로할 곳을 찾던 사람들과 월남한 실향민들은 새로운 전교 대상이 됐다.

 

교세 증가는 1950년대 내내 지속됐다. 휴전이 이뤄진 1953년 16만6471명이었던 신자는 1960년 45만1808명으로 늘었다. 1953년 6·25 전쟁 이후 1959년에 이르는 기간에 신자 증가율은 연평균 16.5%였다. 1962년에는 50만 명을 돌파해 53만217명이 됐다. 본당 수도 늘어서 서울·경기지역은 1952년부터 1961년까지 32개 본당이 신설됐다.

 

화성지역 신앙공동체 중심지 왕림본당의 경우, 해방 이후부터 교세를 확장해 갔다. 당시 매화리 공소 신자는 1949년 당시 15명에 불과했지만 1954년에는 90명으로 늘었고 예비신자도 140명이나 됐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휴전 이후인 1954년 왕림본당에는 신자 3300명의 교세를 보이게 된다.

 

기와성당 당시의 왕림성당. 화성지역 신앙공동체 중심지 왕림본당은 해방 이후 교세를 확장해 1954년에는 신자 3300명의 교세를 보이게 된다.

 

 

폭격으로 성당이 소실됐던 양평본당은 낡은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해 집을 헐고 자재를 가져다가 4개월 만에 임시성당을 건립했다. 이후 곧 281㎡ 규모의 성당 신축공사에 들어갔다. 1200명 신자들이 몇 달 동안 기금을 모으고 노력 봉사한 끝에 1954년 11월 16일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 주례로 낙성식을 거행했다.

 

그때 주임 김정진 신부는 성모회를 조직해 단체 활동을 통해 신심을 굳게 하는 한편 당면 과제인 성당 건축 일을 돕도록 했다. 또 절미운동을 벌여 성당 건축기금을 마련하게 했다.

 

모든 것이 파괴된 극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신자들은 성당 복구와 신축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남한 지역에는 1953년 이전에 전쟁으로 파괴된 성당이 절반 이상 복구됐다. 또 1954년까지는 대부분 완료됐다.

 

연이은 성당 건축 공사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자들 간의 화목을 돈독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비신자들에게는 좋은 표양이 되어 교세 증가로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전쟁에 대한 교회의 대응이라는 면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사안으로 신심운동을 꼽는다. 노길명(요한 세례자) 고려대 명예교수는 “당시 한국교회 신심은 그 시기에 가장 큰 신심이었던 ‘순교신심’과 ‘성모신심’, 특히 성모신심은 공산주의 멸망을 알리는 파티마의 성모님 메시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며 “이러한 신심은 반공주의와 연결되면서 한국전쟁 이후까지도 대중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됐다”고 밝힌다. 노 명예교수는 “이런 교회의 반공주의는 북한교회에서의 본격적인 탄압과 참상을 경험하면서 더욱더 강화됐다”고 덧붙였다.

 

1954년 성모성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합심해서 그해 10월 서울에서 성모성년대회를 거행했다. 1953년 도입된 레지오마리애는 급속한 성장을 이뤄 1950년대 말에는 한국교회 전체에 단원들이 활동할 만큼 성장했다. 수원교구 지역에서도 1958년 8월 21일 양지본당에 ‘매괴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설립된 것을 시초로 1959년 북수동본당과 고등동본당에 쁘레시디움이 설립되고 1960년 1월 17일 북수동본당에 ‘천지의 모후’ 꾸리아가 설립됐다.

 

‘조선천주교순교자현양회’ 활동도 1953년 9월 26일 복자 축일 행사를 계기로 재개됐다. 순교성지 개발과 기념사업도 본격화됐다. 수원교구 지역에서는 순교자 현양운동 전개 일환으로 1953년 복자 축일에 신자들이 김대건 신부 유해를 모시고 기념경당까지 행렬하는 행사가 열렸다.

 

입교가 늘고 신앙공동체 규모도 커지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각지에 본당이 신설돼 지역 신앙공동체의 구심점이 됐다. 1954년 ‘안양본당’(현재 중앙본당) 신설 사례는 새로운 이주민을 기반으로 하는 도심지 본당이 등장하는 시대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후 안양본당은 의왕, 군포, 시흥, 안산 등 인근 지역 신앙공동체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6월 14일, 이주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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