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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미리내 성지의 교회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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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5 ㅣ No.1111

미리내 성지의 교회사적 의의

 

 

‘미리내’는 은하수를 뜻하는 순우리말로 1840년대 경기도 양성현(陽城縣) 읍지(邑誌)에서 금곡면(金谷面)에 속한 ‘미이천리(彌迤川里)’라는 동네 이름으로 그 명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곳은 1846년 병오박해 직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방인성직자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이 묻혔던 곳일 뿐만 아니라, 병오박해 직전인 1846년 1~4월 약 4개월간 김 신부님이 용인 은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할 당시에 이곳 미리내의 최 회장 댁에 설정되었던 미리내 공소에도 사목순방을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김대건 신부님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유서깊은 성지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장상으로서 신학생 김대건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차례로 손수 부여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고(高) 주교의 무덤과 김 신부의 어머니 고 울술라의 무덤도 함께 묻혀 있는데, 페레올 고 주교는 김대건 신부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아버지 신부님과 같은 분이시며, 김 신부가 철저하게 순명하고 정성을 다해 보필한 분이셨기에, 교회 장상에 대한 김 신부의 순명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 울술라는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입국 이후 약 4개월간의 짧은 기간이나마 함께 모시고서 그동안 자식으로서 못다한 효성을 바치고자 했던 친어머니이므로 김대건 신부의 효심과 성직자를 아들로 둔 어머니의 자애심을 동시에 드러내주는 분이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분들의 무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김대건 신부 현양의 의미를 더욱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리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리내는 또한 병인박해 직전인 1860년대 초부터 내한 프랑스 선교사 칼레 신부의 1862년 10월부터 1863년 10월까지 사목활동의 거점이었다. 또 뒤이어 내한한 오메트르 신부의 1864년 10~11월부터 1865년 11월까지 여름철 은거지 겸 사목활동 보고서와 서한을 작성한 곳으로서, 오메트르 신부님의 사목활동 거점이기도 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박해시기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신심 깊은 교우들의 보호를 받으며, 공소순방 후의 피로를 풀고, 정기적인 기도생활과 묵상, 저술, 서한 작성 등의 여가활동을 통하여 다음 공소순방에 필요한 체력을 보강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미리내는 박해시기 선교사의 안전한 은신처이자, 공소순방에 필요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쉼터와 같은 곳이었다.

 

미리내 성지에는 병인박해기로 추정되는 시기에 인근의 수원 및 광주 유수부 관아에서 순교하여 미리내 인근의 응다라니, 수지, 한덕골 등지에 그 시신이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된 순교자 17위의 무덤이 위치해 있던 곳으로서, 이윤일 성인으로 밝혀진 한덕골에서 이장된 묘를 제외하고 16기가 지금까지도 무명 순교자 묘역에 모셔져 있다. 그러므로 미리내 성지에는 세속적인 부귀영화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하느님께 당신들의 모든 것을 온전히 봉헌하신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겸손과 봉헌의 정신이 묻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은 이들 무명순교자들로부터 진실한 신앙생활을 귀감을 발견하고 본받을 수 있게 된다.

 

미리내는 김대건 신부님의 안장으로 인해 한국 순교자 현양의 근원지중 하나가 되었고, 뒤를 이어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82위의 가경자 선언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신 페레올 주교님의 안장, 1896년부터 1929년까지 33년간 미리내 본당에서 사목하면서 미리내를 성지로 가꾸고 김대건 신부 경당 등을 건립한 강도영 마르코 신부의 무덤으로 순교자 현양의 의미가 더욱 확대되고 굳어졌다. 여기에 무명순교자들의 묘소까지 이장됨으로써 박해시기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역사와 순교자 현양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게 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성지, 순교자 현양의 대표적 근원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Ⅰ. 머리말 - 미리내 성지 역사 개관 -

 

미리내는 현재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 소재하고 있는데, 순우리말로 ‘은하수’라는 뜻이다. 이는 냇가를 중심으로 점점이 흩어져 살던 교우들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함께 어우러져 은하수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1) 미리내가 소재한 미산리는 조선시대 양성현 금곡면 미이천리(陽城縣 金谷面 彌迤川里)였다가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安城郡 陽城面 美山里)로 개편되었고 오늘날 안성군은 안성시가 되었다.

 

미리내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미리내가 속한 경기 남부의 다른 교우촌의 사정과 유사하리라 보인다.2) 경기 지역에서 처음으로 천주교가 전파된 곳은 동부에 위치한 양근 지역인데, 이곳은 신유박해로 인해 그 신앙공동체가 약화되게 된다. 이와 함께 서울의 남쪽 수리산과 같은 서울 근교나 용인 지역이 새로운 신앙 중심지로 부상되었다. 한편 경기 남부의 교우촌들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수원, 양성, 이천 등지에 거주해온 토박이 신자들의 영향력이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와 함께 1820년대 이후 충청도 신자들의 이주에 영향 받은 바도 적지 않다고 지적된다.3) 충청도 신자들의 이주는 신유박해 시기까지 거슬러 볼 수 있을 것이며, 이렇게 하여 미리내가 포함된 경기 남부 교우촌은 1820~30년대에는 형성되어 있었으리라 추정되고 있다.4) 미리내의 경우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리라 보인다. 특히 1846년 병오박해 시기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옮겨와 안치한 것으로 보아, 당시 신심 깊은 교우들의 신앙공동체가 이미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수원 출신 임 루치아의 1884년 증언(당시 56세)에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모셔 와서 당시 미리내 최 회장의 공소에 관을 안치해 두었다가 후에 그 근처에 장사지냈다”고 하므로, 1846년 이전 미리내에는 최 회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소가 설정된 것을 확인할 수 있음에서도 증명된다.5)

 

미리내가 현재와 같은 성지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위에 언급한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이곳에 조성함으로써 마련되었다.6) 이후 상술하겠지만 김대건 신부에 대한 사적 공경도 이루어져 많은 이들이 미리내를 찾은 듯하며 성지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853년 2월 3일 선종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Ferreol, Jean-Joseph-Jean-Baptiste, 高, 1808~1853) 주교도 김대건 신부의 곁에 묻히기를 희망하므로 그 유지에 따라 미리내에 안치되었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의 사제서품식을 집전하였고, 김대건 신부의 짧지만 굵직했던 사목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인연이 있었다. 이후 김대건 신부의 모친인 고 울술라도 이곳에 안장되었다. 김대건 신부와 밀접한 인연을 가진 페레올 주교와 고 울술라 등이 이곳에 묻힘으로써 성지로서의 미리내의 기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처럼 신심 두터운 신앙공동체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 미리내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 직전 선교사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칼레(Calais, Adolphe-Nicolas, 姜, 1833~1884) 신부, 오메트르(Aumaitre, Pierre, 吳, 1837~1866)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Michel Alexandre, 朴德老, 1828~1866) 신부 등이 미리내를 찾아 머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병인년 박해령이 내려지면서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신앙공동체는 일시 와해되었다. 이후 흩어진 신자들이 다시 모여 공소의 형태를 재차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83년 이전으로 추정된다.7)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이 자유로와진 때로부터 2년 후 1888년 6월 수원유수부 봉담면의 갓등이 공소가 개항이후 당시로서는 경기도 최초의 왕림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미리내 공소는 이 본당에 속하게 되었고, 이후 미리내는 냉담자들이 차츰 회두하면서 더욱 신심이 두터운 모범적인 신앙공동체로 발전해간 것으로 보인다.8) 1893년 3월, 후일 장호원 본당 주임으로 선종한 부이용(Bouillon, Camill, 任加彌, 1869~1947) 신부가 입국하였는데, 미리내에 머물며 우리말을 배웠다. 부이용 신부는 미리내에 머물던 1893년 9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신심 깊은 미리내 교우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고, 미리내를 떠나 부엉골에 부임하고도 미리내 교우들에 대한 그리움을 감추지 않았다.9)

 

미리내가 본당으로서 역사가 시작된 것은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1863~1929) 신부가 부임하면서 부터이다.10) 강도영 신부는 1896년 4월 26일 사제 서품과 동시에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929년 3월 12일 선종시까지 약 33년 동안 미리내 본당에 재임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강도영 신부 재임기간 동안 교세가 확장되어 두 차례의 분당이 있었고, 1925년에는 성체회가 설립되었다. 1907년 8월에는 현재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을 축성하였고, 1909년 3월에는 종을 마련하였다. 1907년 해성학원(海星學院)이 설립되어 교리교육과 초등교육이 실시되었다.

 

한편 강도영 신부는 부임 후, 순교자 김대건 신부 현양에 관심을 기울여 김대건 신부 기념관을 미리내에 건립할 수 있도록 백방의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1927년 드브레(Devred, Emile Alexandre Joseph, 兪世竣, 1877~1926) 부주교로부터 허락을 받아 구체적 건축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미리내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은 1928년 완공되었고, 9월 18일 라리보(Larribeau, Adrien Joseph, 元亨根, 1883~1974) 부주교의 집전 아래 강복식을 가졌다. 그러나 1936년 해성학원은 제국주의 일본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폐교되었고, 미리내 본당은 양지 본당의 공소 및 안성 본당의 공소로 전락하는 등 쇠락을 거듭하였다. 그러던 중 1965년 김대건 신부의 경당 옆에 있던 공동묘지 자리에 광장이 조성되었으며, 윤형중 신부의 재임(1959~1960) 이후 순교자 현양 대회가 복자성월에 개최되기 시작하여11) 현재까지 매년 계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1970년대 들어서 미리내는 순례사적지로 가꾸어지기 시작했다.

 

미리내 성지의 보다 구체적인 역사상은 본서에 게재된 여러 논문들을 통해 다양하게 드러날 것이므로, 본고에서는 미리내가 성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사제들의 숨터로서의 역사적 면모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무명순교자 묘가 미리내에 이장되어 온 과정에 대해서도 현재까지의 방문조사를 종합하여 그 내용을 정리해두고자 한다.

 

 

Ⅱ. 선교사들의 사목 거점지 미리내


1. 김대건 신부 · 페레올 주교와 미리내

 

김대건 신부의 시신 수습과 장례, 이장 등에 대한 기록은 1880년대 시복재판 과정에서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때 순교한 82위 순교자에 대한 증인심문 기록을 담은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에서 다수 확인할 수 있다. 그 과정에 대하여 당시 유 바르바라, 임 루치아, 오 바실리오, 김 요아킴, 김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최 베드로, 이 마리아 등의 증언이 있었는데, 대개 교우들 사이에서 전달된 소문이나 지인들을 통해 들었던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시신 수습과 장례 및 이장 절차에 대한 증언이 일치되지 않는다. 또한 이와 관련된 장소 및 인물에 대해서도 증언 간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金大建) 안드레아 탁덕(鐸德: 신부)을 무쇠막 심(沈) 주부(主簿) 집에서 뵈옵고 성사를 받았으나 어떻게 잡히신 줄 모르고 병오년에 새남터에서 참수 치명하신 사정을 그때 교우에게 들었삽고, 치명하신 후에 죄인 장부 이(李) 요한과 다른 교우들이 신체를 찾아 미리내 동네에 장사 지낸 말을 장부에게 친히 들었습니다. (유 바르바라)12)

 

옥에 계실 때 모든 교우에게 편지 한 장을 써 보내셨더니 죄인도 보았삽고 그해 가을 8월 초승 즈음에 하루는 비가 붓듯이 오며 뇌성(雷聲: 천둥소리)이 요란하매 죄인 동네 교우들이 이상히 보고 김(金大建) 신부 치명하시는가 짐작하였더니 8월 초10일 김령장[김량장(金良場)13)]에서 교우 전언으로 김(金大建) 신부(가) 뇌성하던 날 참수 치명하셨단 소문이 퍼졌습니다.(임 루치아)14)

 

김(金大建) 신부 치명하신 후에 그해 가을에 교우들이 신체를 찾아 겹관(-棺)하여 염(殮)하고 양성(陽城) 미리내[美山里]15) 최(崔) 회장 공소에 관을 모셨다가 그 근처에 장사 지낸 말을 들었으나 다른 사정 모르옵니다. (임 루치아)16)

 

병오년 춘(春)에 성교 일로 황해도로 배 타고 갈 새[때] 잡히시어 서울로 올라와 문목과 형벌 받은 사정(은) 모르되, 그해 8월에 하루는 비가 쏟아지며 뇌성(雷聲: 천둥소리)이 요란하더니 며칠 후 교우 말 들은즉 “김(金大建) 신부가 서울 새남터에서 그날 참수 치명하셨다”하더라. 치명하신 후 신치관(申致觀)이와 여러 교우가 시체를 찾아 양성(陽城) 미리내에 장사 지낸 말을 (신)치관이에게 듣삽고 추후로 죄인도 미리내 가서 김(金大建) 신부 산소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오 바실리오)17)

 

치명하신 후에 서울 교우들이 신체(身體: 시체)를 찾아 양성(陽城) 미리내에 장사지내었삽고 김(金大建) 신부 잡히신 것은 친히 본 것이로되 후 사정은 교우 전언(傳言: 전해들은 말)으로 들었습니다. (김 요아킴)18)

 

치명한 후에 (林致百) 요셉의 아들과 박(朴) 바오로19)가 신체를 찾아 둔지미20)에 장사지내었더니 추후에 죄인도 산소에 가 보았으나 지금 분묘 자리를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김 요아킴)21)

 

김(金大建) 신부 치명하신 후에 교우들이 그 시체를 찾아 행상(行喪: 상여 나감)하여 양성 미리내[美山里]로 가서 산소를 본즉[만들었는데] 고(高, Ferreol) 주교와 분묘 곁이 되옵니다. (김 프란치스코)22)

 

시체 찾기에는 죄인이 간섭(干涉: 관여)함이 없었으나 교우들이 찾아다가 먼저 문배부리23)에 (무덤을) 건조(建造)하였다가 군난이 그친 후에 양성(陽城) 미리내로 발인(發靷)하여 장사지내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박 베드로)24)

 

죽은 후 수삼일 만에 여러 교우들이 밤에 가만히 김(金大建) 신부와 (玄錫文) 가롤로의 시체를 찾아 아직 토감(土坎: 임시 가매장)하고 자기네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죄인 집에 와서 자고 갈 새[때] 알았삽고, 그후 장사는 언제 하였는지 잊었으나 김(金大建) 신부 시체는 양성(陽城) 미리내[美山里]에 지금까지 계시외다. (최 베드로)25)

 

8월 초승에 군문효수(軍門梟首)하여 참수 치명하신 말을 친히 보고 온 김(金大建) 신부 5촌 (金公淑) (사도) 요한26)에게 들었삽고 죽은 후 신체(身體: 시체)를 찾아 교우들이 양성 미리내에 장사하여 모셨습니다. (이 마리아)27)

 

이와 같이 그 내용이 일치하지는 않으나 이들 증언을 종합 정리하면, 새남터에서 치명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일부 교우들이 치명장소에서 멀지 않은 용산 일대에 일단 안치하였고, 그 후 박해가 수그러지는 시기를 기다려 미리내로 옮긴 듯하다. 그런데 페레올 주교의 1846년 11월 3일자 서한에 기반하고 있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국법에 의하면 죄인들의 시체는 3일 동안 형장에 남아있어야 한다. 이 기한이 지나면 친지들이 마음대로 시체를 묻을 수 있다. 그러나 김대건 안드레아의 시체는 의금부(義禁府)의 명령으로 그가 사형을 당한 바로 그곳에 묻히었다. 그의 옷을 그대로 입혀두고 머리를 다시 목에 가져다 붙이고 시체는 깨끗한 거적으로 쌌다. 관장은 무덤 둘레에 군인들을 보초로 세워 신자들이 시체를 훔쳐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40일이 지난 뒤에야 신자들이 이 귀중한 유해를 거두어 미리내 산에 좀 더 예의를 갖춘 장례를 지낼 수 있었다.28)

 

위 기록이 사실에 가까운 것인지 확신하기 곤란하나, 이 기록을 취할 경우 일단 형장에서 시신이 수습된 후 그곳에 그대로 매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형장에 시신으로 방치된 것이 아닌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급히 파묘하여 다시 멀지 않은 곳에 (가)매장한 것이 된다. 그러나 증언록에서는 이미 관(官)에서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했던 흔적이 찾아지지 않는다. 향후 이러한 기록 간 절차상의 혼란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다양하게 추적해볼 필요가 있겠다.

 

한편 절차 과정뿐 아니라 유해를 수습, 이장한 관련 인물에 대한 증언도 차이를 보인다. 사실 관련 인물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더욱 각각이라 그 구체적인 실상이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미리내로 이장한 이에 대해 유 바르바라는 ‘남편 이(李) 요한과 다른 교우들’이라 하였고, 오 바실리오는 ‘신치관(申致觀)과 교우들’이라 하였다. 또한 김 요아킴은‘(林致百) 요셉의 아들과 박(朴) 바오로’가 지금의 용산일대 둔지미에 시신을 옮겨와 매장했다고 증언하였다.

 

그밖에 1921년 《경향잡지》에서는 이민식 빈첸시오가 김대건 신부의 시체를 자기 선산(先山)에 모셨다는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29) 특히 여기에는 이민식이 17세의 나이에 홀로 군졸들의 감시를 피해 시신을 옮겨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밤을 이용해 3일간 200리 산길을 달려 10월 30일 미리내에 도착하여 선산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그 후 전라도 지방으로 잠시 피신했다가 다시 돌아와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보살폈고, 사제가 되기 위해 40이 넘은 나이에 중국으로 가지만 포기하고 돌아와 서울 약현 성당 초대 주임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다. 미리내를 성지로 개발할 수 있도록 선산 일부를 교회에 기증했으며, 집을 공소로 내놓기도 하였다 한다.

 

이민식에 대한 이 기록은 ‘개인의 행적’을 강조하는 시각은 일단 접어두고, 절차만으로 보았을 때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내용과 대개 맞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기해병오박해증언록》의 증언들과는 김대건 신부의 이장에 참여한 인물의 측면에서 상당한 정도로 배치된다. 각 기록 자료들의 역사적 성격을 다시 엄밀하게 검정하여 진상에 다가가야 할 것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묘가 안치된 산의 소유권을 시기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면 도움 되는 부분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민식이 시신을 이장했다는 시기의 나이는 17세이므로 선산의 소유주는 본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큰데, 소유권자가 가족인 경우 교우였는지 여부 등을 파악할 수 있어야 부풀린 ‘개인의 무용담’이 아닌 역사적 진실로서 그 사실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신심 깊은 이후 행적이 과거에 투영되었을 가능성도 고려되므로, 거품이 있다면 걷어내고 전체상을 그려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컨대 임 루치아는 “양성(陽城) 미리내[美山里] 최(崔) 회장 공소에 관을 모셨다가 그 근처에 장사하였다.”는 증언을 한 바 있는데,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셔온 미리내 교우들의 각각의 역할과 그 전체상을 조망할 수 있는 시도들이 차후 요구된다.

 

덧붙여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로 옮겨오게 된 원인을 다양한 부분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리내 교인들의 영성뿐 아니라 미리내의 지정학적 위치 등이 영향을 미친 바는 없는지 고려해봄은 어떨까 한다.

 

한편 순교 직후부터 김대건 신부에 대한 공경이 이루어졌다고 보이는데, 다음의 증언 내용을 통해 그러한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다.

 

김(金星禹) 안당 시체를 장사 지낼 때 세속 장사법대로 하옵고 별로 공경하는 거동이 없었으며 다른 치명자의 무덤은 모르오나 김(金大建) 안드레아 탁덕의 무덤은 용인(龍仁) 미리내니 죄인도 그 분묘(墳墓)에 가 보았습니다.30)

 

위 김 막달레나의 증언을 통해 많은 치명자들 가운데에서도 김대건 신부에 대한 교우들의 공경이 뚜렷하여, 타 지역 교우들도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찾아 미리내를 왕래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 파악된다. 이와 같이 김대건 신부에 대한 공경에서 묘소를 찾는 교우들의 발길이 이어졌음은 앞서 살펴 본 《기해병오박해증언록》오 바실리오의 “산소를 여러 번 보았다.”는 언급을 통해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다음은 《병인치명사적》에 수록되어 있는 기적 일화에 대한 증언 자료이다. 김대건 신부를 주보로 하여 9일 기도 후 병이 완치되었다는 내용으로 이 역시 김대건 신부에 대한 사적공경의 사례로 주목된다.

 

죄인의 장부 장(張) 치릴로는 연세 57이온데 금년 9월분에 우연 득병(得病)하여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하와 호천망극지중(呼天罔極之中)에 애인지심(愛人之心)이 가득한 두 분 수녀(修女)께서 병자를 가긍(可矜)히 여겨 9일 기도를 시작하여 8일째 되던 저녁에 와서 이르는 말이 “우리 수녀가 병자를 위하여 조선 치명 탁덕(朝鮮致命鐸德) 김(金大建) 안드레아를 주보(主保)로 정하고 기구(祈求) 마치는 날이 마지막 내일이자, (마침) 안드레아 종도 첨례(宗徒瞻禮)가 되니 병자를 위하여 생미사 한 대 봉헌(奉獻)하자” 하기로 마음이 감동되어 가솔(家率)이 9일 기구를 시작한 후 여덟 살 먹은 여식아(女息兒)가 영성체(領聖體)를 매일 제 부친 위하여 영(領)하는데 시작한 날부터 병세(가) 감(減)하여 기구(祈求) 마치기 전에 완인(完人)이 되었으니 영적(靈蹟)이 아니고야 어찌 이 같사오리까? 지금 죄인의 장부가 제 방에 탁덕(鐸德) (김대건) 안드레아 상본(像本)을 모시고 공경하며 은혜(에) 감사(함을) 마지 아니 하나이다.31)

 

한편 비가 쏟아지며 뇌성(雷聲)이 요란하였던 8월 어느 날 김대건 신부가 치명하였다는 소문 및 전언이 앞서 살펴본 임 루치아와 오 바실리오 등의 증언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 보인다.32) 그런데 페레올 주교의 서한을 토대로 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김대건 신부가 치명한 날의 날씨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처형일도 양력 9월 16일33)로 기록되어 있어 증언자들의 기억과 꼭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임 루치아 등이 전한 이 증언의 외적 현상이 사실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체포된 후 8월의 어느 날 쏟아졌다던 폭우와 천둥은 김대건 신부에 대한 교우들의 공경과 신심에 흐르는 눈물의 외현(外現)은 아니었는가 라고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육신이 미리내에 안치된 데 이어 1853년 2월 3일 선종한 페레올 주교도 미리내에 안식했다. 1843년 2월 15일 이전에 페레올 주교는, 그가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뒤를 이어 제3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34) 그리하여 1843년 12월 31일 개주(蓋州)의 양관(陽關) 성당에서 베롤 주교로부터 주교 축성식을 받았고, 이후 조선입국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개시하였다. 성성식에 참석한 당시 신학생이었던 김대건 신부와의 인연이 이때 시작되었는데, 두 사람은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는 데 의기투합하여 노력을 경주하였다. 1845년 8월 17일 페레올 주교는 상해에서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 서품식을 집전하였다. 그리고 8월 말 황해 바다를 횡단하기 시작하여 10월 12일 강경 부근 황산포에 도달하여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1846년 5월부터 비롯된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 등을 잃었다. 1846년 11월 2일에는 수리치골에서 성모성심회를 설립하고, 교우촌 방문과 선교사 영입 등 활발한 전교활동을 전개해 나가다가, 1853년 선종하였다.35)

 

페레올 주교는 매스트르 신부의 1853년 10월 20일자(양) 서한에 따르면 그의 선임자인 앵베르 주교 곁이나 본방인(本邦人) 신부(神父) 김대건 곁에 묻히기를 희망하는 뜻을 밝혔다 한다.36) 그런데 어떤 외교인들의 반대로 앵베르 주교 곁은 접근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미리내의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안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페레올 주교가 선종한 때는 눈과 얼음 때문에 즉시 매장을 할 수가 없어 신자가 관을 2개월간 맡아두고 있었다 하며, 양력 4월 11일에 이르러서야 안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37) 페레올 주교의 유해를 운반하는 과정은 별다른 장애가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기록상으로도 뚜렷한 점을 발견할 수 없으며, 페레올 주교의 경우 선종한 것으로서 박해가 진행되는 시기 순교자들의 시신 수습 및 운반 과정과는 사뭇 달랐으리라 짐작된다. 특히 이 시기는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기까지 비교적 평온함이 유지되었고, 머지않아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리라는 희망도 조심스럽지만 충만했던 때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페레올 주교가 선종한 즈음 작성된 바랑(Jean Barran, 1798~1855) 신부의 1853년 9월 6일자 서한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38) 따라서 페레올 주교의 시신 운구는 조금만 조심한다면 조선의 다른 외교인의 운구와 같은 방식으로 눈에 띄지 않게 진행해 나갈 수 있었으리라 보인다.

 

 

2. 박해시대 선교사들의 사목 활동과 미리내

 

박해시대 조선의 선교사들은 과중한 업무로 연속되는 일과와 열악한 환경, 언제 닥칠지 모를 박해의 칼날에 대항하며 힘든 사목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따라서 건강상의 문제에 직면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페레올 주교는 1852년 9월 19일자(양) 서한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당시 다블뤼(Daveluy, Marie Nicolas Antoine, 安敦伊, 1818~1856) 신부도 여러 해 전부터 건강이 좋지 못함을 전하였다.39) 결국 페레올 주교는 건강이 쇠약해져 45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배론 신학교장 푸르티에(Pourthie, Jean Antoine Charles, 申妖案, 1830~1866) 신부는 병인박해 때에, 오래전부터 폐병이 들어 각혈을 하기에 도피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40) 박해시기 이처럼 고단한 선교사들의 위안처로서 매년 여름철 1~2개월간 은신하여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 중에 하나는 미리내 교우촌이었다. 이곳 미리내는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낯선 조선 땅에서 교우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여름철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공소순방 때 할 수 없었던 기도생활을 규칙적으로 실시하면서 심신의 활기를 불어넣고, 친지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교사목에 필요한 저술활동 등을 할 수 있었던 특별한 장소였다. 기록상 박해기에 적어도 1년 이상 이곳에 사목활동의 근거지를 두고 머무른 것으로 드러난 프랑스 선교사로는 칼레(Calais, Adolphe-Nicolas, 姜, 1833~1884) 신부와 오메트르(Aumaitre, Pierre, 吳, 1837~1866) 신부 등을 들 수 있다.

 

칼레 신부는 1861년 4월 7일 조선에 도착하였고, 이때부터 병인박해 발생으로 중국에 피신하는 1866년에 이르기까지 경상도의 서부지역에서 전교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41) 그러나 그의 서한들을 통해 볼 때, 경상도 서북부 지방으로 가기 전에, 1862년 10월 무렵부터 1863년 10월까지 대략 1년간 미리내에 그 사목활동의 근거지를 둔 것으로 확인된다. 그것은 다음의 표1을 통해 입증된다.

 

 

 

위 표를 통해서 보면 칼레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병인박해로 다시 출국하기 전까지 사목활동을 하면서 쓴 여러 통의 편지들 가운데 현재 남아서 학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두 5통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1862년 10월부터 1863년 10월까지 미리내에서 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칼레 신부는 1861년 3월, 중국 산동반도의 체푸(芝罘, 현재의 煙台)에서 조안노(Joanno, Pierre Marie, 吳, 1832 ~1863), 랑드르(Landre, Jean Marie Pierre Eliacin, 洪, 1828~1863), 리델(Ridel, Felix Clair, 李福明, 1830~1884) 등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서해를 항해하기 시작하여, 동년 4월 7일 조선에 입국하였고, 입국 직후 서울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를 만나 보름 가량 머물다가 곧바로 조선말과 풍습을 익히려 조안노 신부와 함께 경기도의 손골 교우촌으로 파견되었다.42) 위〈표1〉에 보이는 첫 번째 서한은 손골로 파견되어 조선말 공부를 하고 있던 1861년 10월에 쓴 것으로 약 1년 후인 1862년에는 미리내 교우촌으로 파견되어 정식으로 사목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매우 존경하고 친애하는 교장 선생님, 가엾은 신부는 첫 번째 출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떤 공적에 의해 빛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매우 존경하고 사랑하는 갑사의 주교님은 그분께서 담당하셨던 구역을 제게 맡기셨습니다. ; 그 구역은 42개의 작은 교우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난 박해 때에 가장 (심한) 고통을 받았던 곳이고, 올해에도 크게 고통을 당한 곳입니다. … 저의 관할 구역에서 일어난 소요로 저는 대략 3~4개월을 갑사의 주교님(=베르뇌 주교)과 함께 지냈습니다.43)

 

위 인용문에서 말하는 베르뇌(Berneux, Simeon Francois, 張敬一, 1814~1866) 주교가 물려준 사목순방 구역은 곧 서울 외곽 한강 이남의 경기도 지역으로 현재의 수원교구에 해당되는 곳으로 추정된다.44) 칼레 신부가 미리내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수원교구 지역의 전교를 담당하고 있었을 당시, 그는 1860년을 전후하여 서울에서 비롯된 이른바 경신박해(庚申迫害)의 여파로, 그의 구역에서 4곳 또는 6곳의 교우촌이 포졸들에게 유린당하여 완전히 파괴되었고 여러 교우들이 포박을 당한 채 감옥으로 끌려가서 고생을 했기에, 칼레 신부는 매년 겨울마다 비슷한 약탈을 겪게 될까봐 걱정을 할 정도였다.45) 그리하여 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박해의 혼란 속에서 가까운 수도 서울의 베르뇌 주교의 거처로 약 3~4개월간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칼레 신부가 미리내를 거점으로 경기도 남부지역 일대를 사목하던 시절, 그는 박해 속에서도 굳세게 열심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교우들의 모습을 전하면서, 특히 교우들이 만날 때마다 “찬미예수” - “아멘”을 첫마디 인사말로 건네는 것을 깊은 감명으로 기록하였다.46) 당시 미리내를 비롯한 그가 사목순방을 나선 구역의 신자들은 12세부터 65세 또는 70세까지 천주교의 교리를 암기하여 잘 알고 있었으나, 대개의 교우 가족이 부모와 자식을 막론하고 전 가족이 단칸방에서 함께 이불 한 채만을 같이 덮고, 때로는 군불도 때지 못한 채 냉방에서 겨울을 날 정도로 매우 가난하게 생활했다고 기술하였다.47) 칼레 신부는 이런 신자들을 대상으로 부지런히 공소 순방에 나선 결과 겹친 과로에다 전염병까지 걸려서 고생하기도 했으나,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서 140리나 떨어져 있는 자신의 거처(미리내)까지 유능한 의사를 보내준 덕분에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48) 이와 같은 어려운 생활 가운데에서도 칼레 신부는 조선이 무척 마음에 들고 자신의 신자들을 무척 열렬하게 사랑하였기에, 이 세상의 가장 호화로운 궁전에서 누리는 독재자 왕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행복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고백하였는데, 여기에 그의 전교 열정과 신심이 잘 드러나고 있다.49)

 

칼레 신부는 1863년 4월 13일 당시 충청도 공주 인근에서 전교하던 조안노 신부50)가 병으로 선종하자, 그를 대신하여 동년 10월말 이후 미리내를 떠나 공주로 그 임지를 옮겼다.51)

 

오매트르 신부는 1863년 6월 말 조선에 입국한 이후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기 위해 1년 정도 머물고 있던 손골을 1864년 11월 무렵에 떠나, 칼레 신부의 사목지에 부임하여 사목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칼레 신부가 미리내를 떠난 지 대략 1년 후 쯤이 된다. 오메트르 신부는 응다라니(현재의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대대리)52)를 순방하였다가, 다시 손골에도 들렀고, 응다라니와 인접한 지역에 있던 무량골, 사기점 및 소래실(현재의 광주시 포곡면 금어리) 등지에도 들러 성사를 집행하다가 1865년 10월 경에는 미리내로 귀환하였음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그의 사목활동 구역을 가름해 볼 수 있는 서한들 중에서 조선입국 이후부터 1866년 3월 병인박해로 순교하기 직전까지의 것들만 나열해 본다면 다음〈표2〉와 같다.

 

 

 

 

위 〈표2〉에서는 오메트르 신부가 중국의 치푸를 출발한 후 서해를 항해하여 1863년 6월 19일 조선 황해도의 메린도(melinto)에 기착하여 그곳에서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리브와 신부에게 쓴 서한도 있으나53), 이는 몇 줄 안되는 아주 짤막한 글로서 조선에서의 본격적인 사목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 제외하고, 위 표를 통해서 살펴보면, 오메트르 신부의 조선입국 이후 서한은 손골에서 조선말 공부를 하던 1863년 10월부터 1864년 9~10월까지의 기간 중에 가장 많은 서한을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동 기간 중에 그에게 부여된 전담사목 구역이 정해지지 않는 상태에서, 조선사회에 적응하면서 다른 선교사에 비해 자유로운 기도생활과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쨌든 오메트르 신부의 경우에도 대략 1년간의 어학공부가 끝난 시점인 1864년 11월부터는 이전에 칼레 신부가 담당하던 한강 이남의 경기 남부지역의 교우촌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고, 그중에는 미리내 교우촌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리내에 그 사목활동의 거점을 두었던 오메트르 신부도 힘겨운 사목 순방 활동의 피로와 고뇌를 미리내 교우촌에서 쉬면서 털어내고 이곳에서 영적인 휴식을 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메트르 신부의 1865년 10월(*또는 11월?) 서한54)에서는 당시 선교사들의 고단한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주교님은 제게 적어도 7시간 잠을 자라고 명령하셨지만, 그건 항상 어려운 일이며 가끔 불가능 하기도합니다. 저에게는 4시간 밖에 못자는 일이 가끔 생깁니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자는 일이 종종 생깁니다. 특히 길거나 이해하기 힘든 고해를 들어야 할 때 그렇습니다. 아침이면 미사를 하루가 시작하기 전 또는 적어도(어쨌건) 해뜨기 전에 미사를 마쳐야 합니다. 만약 마을의 비신자들이 오더라도 모임에 대해 물어볼 이유가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에게 박해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매우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는 해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비밀리에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도에서 교우촌 순회를 하시는 주교님은 우리보다 더욱더 경계를 하는데, 날이 새기 전에 모든 것을 마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 그 분이 한 공소에서 다른 공소로 이동할 때도 더 시간이 걸립니다. ; 방문하고자 하는 공소에 날이 새기 전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선교사들에게 7시간의 수면을 명하신 주교님도 보통은 기껏해야 4시간에서 5시간 밖에 주무시지 못합니다.

 

오메트르 신부의 동일 서한을 보면 조선 선교사의 한 해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교우촌 순회방문을 위해 몇 달 동안 집밖에서 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몇 달 동안 집에서 공부나 기도로 자신을 좀더 특별히 돌보는 것이라고 한다. 오메트르 신부는 이 가운데 후자의 경우 자신의 의무(숙제)를 적절히 다 하고자 한다면 매우 바쁜데도, 휴식의 시간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55) 미리내는 이러한 ‘휴식의 시간’을 선교사들에게 제공한 장소 가운데 하나였음을 확인된다. 오메트르 신부도 병인박해 직전 미리내에서 비교적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병(病)이 저로 하여금 20일 정도 일찍 끝마치게 하여 저는 새로운 은신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 저는 더 이상 손골에 살지 않습니다. 이곳(미리내)은 제가 언어(조선말)를 배울 때 당신들께 편지를 썼던 곳으로 수도에서 150리 정도 떨어져 있고 제가 이번 여름을 보낸 마을입니다. ; 이곳은 또한 저의 동료 칼레 신부님이 이 관할지역의 교우촌 순회방문 때 여름을 보낸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 위험하지 않았지만 꽤 길게 갔던 저의 병이 낫고 나서 저는 언어와 신학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 불과 2-3일 전에 저는 제가 방금 당신들께 말씀드린 신부님과 피정을 가졌는데 그분은 이곳에서 90리 떨어진 곳에 살고 계시고 다음에도 또 여기를 다녀가실 것입니다. 모든 성인의 날 다음 날 저는 올해의 교우촌 순회방문을 시작할 것입니다.56)

 

오메트르 신부의 ‘새로운 은신처’이며, ‘수도에서 150리 정도 떨어져있고 이번 여름을 보낸 마을’이란 미리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리내는 “수도에서 140리 또는 150리 정도 떨어져있다”고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매스트르 신부의 1853년 10월 20일자(양) 서한에서도 페레올 주교가 안치된 미리내를 같은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오메트르 신부는 그의 선임자 칼레 신부가 미리내에서 남긴 업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면서 자신은 선임자가 남겨준 좋은 전통, 즉 미리내 주민들의 영성생활을 더욱 심화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음을 말하였다.

 

저의 동료가 살던 다른 마을에서와 같이 미리내에서도 똑같이 몇몇의 작은 기적이 잘 일어난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그 기적은 경이롭고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그런 기적이 아니라, 은총의 기적입니다. 네, 매우 존경하올 원장 수녀님과 친애하는 수녀님들, 우리는 기적을 모든 외국인들에게 엄격히 입국(방문)이 금지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보잘것없는 산에서, 그리스도교 세계(chretiente)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이 나라에서 주님은 지극히 사랑받으시고, 성스러운 이름은 지극히 찬미받으시는 것을 기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제가 이곳 미리내 마을에서 살 때, 사람들이 일주일마다 그리고 몇몇 축일에 영성체를 합니다. 그렇게 열심하지는 않지만 상당수의 다른(새로운) 사람들이 아침마다 묵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선임자인 칼레 신부님이 성스러운 행위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저는 그분의 작품을 발전시키도록 하는 일을 시작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57)

 

한편 오메트르 신부는 1862년 6월 14일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863년 6월 말 조선에 입국하였다. 오메트르 신부의 병인 치명 직전 복사로 일했던 이 빈첸시오의 증언에 따르면, 오메트르 신부는 입국 후 용인 손골에서 1년 가량을 보내고 경기 지역에서 남은 시간을 사목활동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오메트르 신부 서한을 통해 볼 때, 이 기간 동안 미리내는 휴식과 은신의 장소로 사목활동의 거점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오(吳, Aumaitre) 신부는 본래 서양 신부로 언제 오신지 모르나 처음 오신 후에 용인(龍仁) 손골서 한 1년 계시다가, 죄인 동네에 오셔서 죄인이 모시고 다닐 새[때] 경기(京畿) 땅에서 1~2년 성사(聖事) 주시더니, 성품이 양선(良善)하시고 교우들을 힘써 가르치시며, 교우들 말이 참 좋으신 신부 만났다고 다들 (말)하였습니다. 죄인이 오(吳) 신부 복사(服事)로 한 1년 동안 오(吳) 신부 잡혀 죽으실 때까지 있은 고로 이 위의 사건을 다 명백히 아옵니다.58)

 

한편 오메트르 신부가 미리내에 여름 동안 머무르며 보낸 일과는 다음과 같다.59)

 

(상략) 대략 저의 여름동안의 규칙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묵상, 미사, 아침식사, 성무일도, 묵주기도, 저의 시종과의 조선어 공부, 그리고 나서는 대략 낮 12시까지는 혼자 지내기, 점심식사 전후하여 영적 독서, 성서(읽기), 저녁기도, 끝기도, 교리공부, 새벽기도, 아침기도, 저녁식사, 신자들과의 잡담(한담)이나 어떤 종류든 기분전환을 위한 오락, 기도, 양심 성찰 등등입니다.60) 이 규칙은 장애물이 없으면 잘 지켜지지만, 장애물은 자주 나타납니다. ; 때로는 사람들이 30리, 40리 또는 50리 거리에 종부 성사를 주러 와달라고, 또한 주일이나 축일에 미사를 드리거나, 고해를 들어주기를 청하러 옵니다. ; 또한 때론 동료가 저를 보러 오기도 하고 제가 동료를 만나러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문은 꽤 드문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곳에는 철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모든 여행을 걸어서 하는데 가끔 너무 힘든 경우는 두 사람이 메고 가는 들것을 이용할 때도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에서는 [의자 형태의] 가마(chaise porteurs) 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 큰 길이 없으므로 자동차를 가질 수도 없고, 말을 타고 가려면 말을 가져야 하고 조선식으로 말을 타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 간단히 말해, 우리는 그래도 서로를 방문하는데 방문이 드물고 어려운 만큼 더욱 기쁩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혼과 정신과 몸의 상태를 회복하도록 노력합니다. ; 감정도 다시 새로워지는데 우리는 매우 새롭고 기민하고 생기 있어져, 10년은 젊어집니다.

 

여름 동안에도 교우촌 순회방문 시기와 유사하게 일정은 바쁘게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바쁘고 고된 일상 속에서도 조선의 선교사들은 순회사목 활동기 사이의 휴식기를 통해 동료 선교사들과의 만남에서 활력을 찾기도 하고, 영성 생활에 보다 힘쓰기도 하며 조선의 교우들과 함께 영적인 교제를 해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리내는 그 속에서 작은 안식의 공간이 되는 한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박해시대를 지나 미리내는 매우 신심 깊은 교우들의 공동체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이후 선교사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병인박해가 끝나고 약 10여년의 공백 기간 후인 개항 직후 다시 서해항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 중에는 박해이전 유명한 교우촌이었던 미리내를 방문하기도 했다. 1880년대 초부터 경기도 일대의 교우촌들을 사목 순방했던 뮈텔(Mutel, Gustave-Charles-Marie, 閔德孝, 1854~1933) 신부는 당시 부교구장 블랑(Blanc, Gustav-Marie-Jean, 白圭三, 1844~1890) 주교에게 보낸 1884년 2월 28일자 서한에서 자신이 김대건 순교자와 페레올 주교의 묘소가 있는 미리내 교우촌을 방문하였음을 밝히고 있다.61) 한편 1893년 9월 조선에 입국하여 며칠 후 곧바로 미리내로 파견된 부이용(Bouillon, Camill, 任加彌, 1869~1947) 신부는 1894년 당시 미리내 교우촌에 대한 그의 애정을 드러내면서 그 이유까지 함께 언급하였다.

 

이곳에서 저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들입니다. 2명의 여자를 제외하고는 이곳 마을 사람들 모두 교우들입니다. 이 2명의 여자도 사실은 교우 집안 출신입니다. 아직 한 젊은이가 외인이지만 교리문답을 다 외우고 있으며 아마도 알릭스62) 신부께서 성사를 집행할 때 영세를 받을 것입니다.63)

 

신심 깊은 미리내 교우들에 대한 부이용 신부의 감동과 그리움은 그가 미리내로부터 120리나 떨어진 부엉골로 1894년 봄에 그 임지를 이전한 후에도 계속되었고64), 당시 미리내를 사목하던 빌렘(Wilhelm, Nicolas Joseph Marie, 洪錫九, 1860~1938) 신부의 초청으로 부이용 신부는 오매불망 그리던 미리내 교우들을 다시 만나게 된 기쁨을 감추지 않았고, 미리내를 떠나 부엉골로 갔던 자신의 처사를 후회하면서, 한편으로는 곧 황해도로 떠날 예정이었던 빌렘 신부를 대신하여 미리내의 사목을 전담할 선교사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미리내 전담 사제의 파견을 간절히 요청하기도 했다.65)

 

 

Ⅲ. 무명순교자 16위와 미리내


1. 미리내 무명순교자 묘

 

1986년 12월 20일 오후 3시 경에 미리내 무명순교자 묘지에서는 이윤일 성인의 유해 발굴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자리잡고 있던 무명순교자들의 관 상태도 확인되었다. 1987년 1월 18일 《가톨릭신문》 7면에는 이때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발굴 당시 미리내에서 모시고 있던 무명순교자의 수는 모두 17기로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하나는 이윤일 성인의 유해로 밝혀졌기에, 성인의 관은 묘 밖으로 옮겨진 다음날 미리내를 출발하여 대구에 모셔졌다.66) 이로써 미리내에서는 지금까지 16분의 무명순교자를 모시고 있는 셈이다.

 

미리내에서 모시고 있는 무명순교자의 이름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미리내에 무명순교자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6년 4월 22일과 23일에 걸쳐 용인 대대리 음다라니(응다라니, 응달아니) 산기슭에서 12기67), 1976년 12월 17일 용인 수지 성북리 시봉마을에서 4기를 미리내로 이장해 온 것이다. 1976년 6월 24일 용인 이동 묵리 한덕골에서 온 1기의 무명순교자는 훗날 이윤일 성인으로 이름이 드러난 것과는 달리, 음다라니 12기와 시봉마을 4기는 여전히 무명순교자로 모셔져 있다. 미리내 성직자 묘소로 옮겨진 무명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의 이름과 삶을 되찾아주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이에 1976년 이장 과정에 참여했던 이들을 찾아 증언을 채록하여 분석하고, 사료를 통해서 희미하게나마 무명순교자의 이름을 찾아보고자 한다.68)

 

 

2. 무명순교자 묘 미리내 이장 증언자

 

1976년에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무명순교자 이장 관련 기록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현재로써 당시의 이장 관련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은 이영기 보나 자매의 증언과 사진자료 및 메모들을 통해서이다. 더불어 당시 이장 현장에 함께 있었던 이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69)

 

음다라니 무명 순교자의 묘가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우르술라회 이 보나 자매의 공이 크다. 증언을 통해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4년 10월 27일에 정원진 신부70)는, 보나 자매에게 가래실 음다라니에 100년 넘은 치명자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또한 교회사에 관심이 많았던 오기선 신부 역시 보나 자매에게 음다라니를 살펴볼 것을 당부하였다. 당시 음다라니의 치명자 묘는 가래실 공소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보나 자매는 가래실 공소 최광현 요한 회장71) 댁을 오가며 현장을 여러 번 답사하였다고 한다. 음다라니의 백년도 더 된 임자없는 무덤이자 ‘목없는 줄무덤’으로 알려진72) 무명순교자 무덤들을 확인한 후, 보나 자매는 당시 수원교구 교구장이던 김남수 주교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본격적인 이장 작업을 준비하게 된다.

 

76년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묘지 이장은 김남수 주교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수원교구 내에 구전으로 전해오던 순교자들의 무덤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고 미리내로 모셔와 공경하기 위한 판단이었다. 여러 증언자들의 증언 가운데 대표자 격이던 이 보나의 증언을 토대로, 첫 번째 이장 작업지였던 1976년 4월에 있었던 음다라니에서의 이장 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증언자들 외에도 이장 작업에 참여하였던 이들의 증언들을 들어볼 수 있었다. 30여년이 지난 일이라 그들의 기억이 분명하지 않아 그 차이가 있지만,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박창운 라우렌시오(1944년 생)의 증언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증언자는 당시 용인본당 청년회장(이장 당시 33세)이었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음다라니에서는 이틀에 걸쳐 9기 이상의 유해를 이장하였다고 하였는데, 1기를 제외하고는 유해가 남아 있었고 머리가 온전히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첫날 파묘하고 관에 모시지 않은 상태에서 밤에 비가 많이 내려 비닐을 구해 덮어두었고, 다음날 유해를 관에 수습하여 미리내로 옮겨 왔다고 한다.

 

 

3. 음다라니에 묻혀있던 12기의 무명순교자

 

1976년 4월 22일부터 24일까지 3일에 걸쳐 음다라니에서 미리내로 이장된 무명순교자들은 병인박해시 순교한 이들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병인박해 당시 수원성에서 순교한 이들 가운데 12명의 음다라니 출신 순교자들이 그들일 가능성이 있다. 수원성에서 순교한 시신을 가족이나 동료들이 수습하여 출신지인 음다라니로 가져와 매장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순교자의 숫자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기에 그 가능성은 조금 더 높아진다고 하겠다. ‘목없는 줄무덤’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지만 이장 과정에서 드러난 유해의 상태는 머리가 온전히 자리하고 있었다고 하므로, 이는 참수형 보다는 교수형을 통한 순교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조심스럽게 음다라니 12명의 무명순교자들이 병인박해 당시 수원성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다음의 순교자들은 아니었을지 추측해 본다.

 

 

 

아울러 이장 과정을 살펴보면서 접하게 된 음다라니 순교자에 대한 구전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구체적이고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담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 인 검증작업은 차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둔다.75)

 

1976년 6월 24일 용인 이동 묵리 한덕골에서 1기를 이장하였는데, 이때 음다라니에서 누락된 1기의 묘도 함께 이장하게 된다.76)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자세한 기록이나 증언은 없지만, 남아있는 사진을 통해 한덕골에서의 모습을 살펴보면 당시 약 30~40여명의 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가 이장 작업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덕골의 순교자 묘는 훗날 이윤일 성인의 묘로 밝혀져 1986년 대구대교구에서 옮겨 간다.77)

 

 

4. 시봉마을에 묻혀있던 4기의 무명순교자

 

1976년 4월 22일~24일에 걸쳐 음다라니의 무명순교자들이 미리내로 옮겨지고 난 후, 유봉구 신부78)가 또 다른 치명자 무덤이 있다는 땅79)을 구입하여 보나 자매에게 이장 작업을 요청하게 된다. 순교자가 묻혀있다는 ‘치명자의 돌무덤’은 손골성지(경기도 용인시 수지군 동천동)로 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었고, 발굴 이전부터 이종철 신부를 비롯한 여러 신자들의 참배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동년 12월 17일에 시봉마을의 무명 순교자들도 미리내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된다. 아쉽게도 이때의 기록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눈이 내려 땅이 얼어서 이장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만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추후에 자세한 사정을 조사하고자 한다.

 

 

Ⅳ. 맺음말 - 영성의 샘, 미리내 -

 

미리내 성지는 병오박해 직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방인성직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묻혔던 곳일 뿐만 아니라, 1846년 1~4월 약 4개월간 김 신부가 용인 은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할 당시에 이곳 미리내의 최 회장 댁에 설정되었던 미리내 공소에도 사목순방을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김대건 신부님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유서깊은 성지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장상으로서 신학생 김대건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차례로 손수 부여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고(高) 주교의 무덤과 김 신부의 모친 고 울술라의 무덤이 김대건 신부 옆에 묻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미리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리내는 또한 병인박해 직전인 1860년대 초부터 내한 프랑스 선교사 칼레 신부의 1862년 10월부터 1863년 10월까지 사목활동의 거점이었다. 또 뒤이어 내한한 오메트르 신부의 1864년 10~11월부터 1865년 11월까지 여름철 은거지 겸 사목활동 보고서와 서한을 작성한 곳으로서, 오메트르 신부님의 사목활동 거점이기도 했던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 병인박해기로 추정되는 시기에 미리내 인근 응다라니, 수지, 한덕골 등지에서 이장된 순교자 17분의 무덤이 위치해 있던 곳으로서, 이윤일 성인으로 밝혀진 한덕골에서 이장된 묘를 제외하고 16기가 지금까지도 무명순교자 묘역에 모셔져 있다.

 

이처럼 미리내는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그리고 병인박해기 직전에 이곳에서 사목하신 칼레, 오메트르 신부, 그리고 수많은 무명순교자들의 활동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미리내는 김대건 신부의 안장으로 인해 한국 순교자 현양의 근원지중 하나가 되었고, 뒤를 이어 기해병오 순교자 82위의 가경자 선언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신 페레올 주교의 안장, 1896년부터 1929년까지 33년간 미리내 본당에서 사목하면서 미리내를 성지로 가꾸고 김대건 신부 경당 등을 건립한 강도영 마르코 신부의 무덤으로 순교자 현양의 의미가 더욱 확대되고 굳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무명순교자들의 묘소까지 이장됨으로써 박해시기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순교역사와 순교자 현양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성지, 순교자 현양의 대표적 근원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사료

 

〈모방 신부 서한집〉 《Monsieur Maubant Lettres de 1832 1839》(디디에 신부 편)

〈뮈텔 신부 서한〉(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 A-MEP v.580)

〈오메트르 신부 서한집〉 《Lettres de trois saints martyrs de H. Dorie L. Beaulieu》(호남교회사연구소 편)

〈칼레 신부 서한〉(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 A-MEP v.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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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영인본(2004년).

《병인순교자시복재판기록》

《병인치명사적》

《본당별교세통계표(서울 · 경기지역)》 1882~1911, 1912~1924, 1930~1937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대전교구사 자료집 제1집, 천주교 대전교구 홍보국 ·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보경문화사 영인본(1985년).

 

연구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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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경희대 박사학위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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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살몽 저, 정현명 옮김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6.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오기선,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성황석두루가서원,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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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연, 〈페레올 주교의 조선입국 후 사목활동〉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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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서울교구연보》 1, 명동천주교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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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원교구30년사》 〈천주교 미리내 성당〉(1993, 천주교 수원교구) pp.429-442

 

2) 경기지역의 천주교도들의 존재양태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와 논문이 참고 된다. 디디에 신부 편, 〈모방 신부의 1836년 4월 4일자 서한〉 《Monsieur Maubant Lettres de 1832 1839》 pp.53-65 ;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경희대 박사학위논문(2004) 및 이를 보완한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pp.67-73 ; 정종득, 〈수원교구 순교 신앙의 역사적 맥락과 남한산성 순교성지〉 《교회사학》 창간호(2004.12) pp.78-129

 

3)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고려대출판부, 1988) pp.46-47 ; 방상근 앞의 책(pp.70-71) 및 정종득 앞의 글(pp.82-83) ; 방상근 연구원은 조광 교수의 위 논문을 인용하면서, “1801년 이전에도 수원과 양성에 거주한 신자가 있었다거나, 19세기 중반 경기 남부의 신자 중 83.72%가 토착민(이주민은 약 16.28%)으로 추정되는 것은 비록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토착민들에 의해서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고 서술하였다.

 

4) 방상근 앞의 글 같은 곳.

 

5) 《기해병오박해 시복재판 증언록》(*이하에서 《기해증언록》으로 약칭) [3권 086-하] 회차 68 : 임 루치아 증언(1884. 4. 21)

 

6)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1886년에 시복 판사인 푸아넬 신부가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으며, 1901년 5월 21일에는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교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본래 무덤이 위치하여 그 진토가 남아있는 자리에는 1928년에 김대건 신부의 경당이 건립되었다.

 

7) 〈1883~1884년 뮈텔 신부가 경기도 일대를 순방한 후 보고한 교세통계표〉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본당별 교세통계표 Ⅰ(서울 · 경기지역 1882~1911)》 p.6 ; 이에 의하면 미리내는 당시 양성 지방의 유일한 공소로서 82명의 남녀교우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8) 〈1886년도 보고서〉 《서울 敎區年報(Ⅰ)》(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p.47 ; 이에 의하면, “양성에는 당시 아직 냉담자들이 많았으나, 용인과 함께 양성 지방에는 개종의 움직임이 현저하였으므로, 아직 입교하지 않은 인근의 외교인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임종 대세를 주도록 부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9) 본고 Ⅱ장 2절 참조.

10) 강도영 신부 부임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본서에 게재된 차기진, 〈강도영 신부와 김대건 신부 현양〉 참고.

 

11) 미리내 출신으로 미리내 사제관에서 윤형중 신부의 복사를 하였다는 이덕우 마르코(1940.3.11생, 화성시 병점1동 345-63번지) 씨의 증언에 의하면, 윤 신부 당시 현양대회는 9월의 마지막 주일에 있었다고 한다. 이날 서울 쪽에서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서 미리내에는 온통 뽀얀 차먼지가 날렸다고 한다. 본 연구소가 이덕우 씨를 2008년 10월 31일 화성시 병점 거주지로 방문하여 인터뷰한 녹취록 참고.

 

12 《기해증언록》[3권 017-상] 회차 54 ; 유 바르바라 증언② (1883.10. 1)

13) 김량장 : 현재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14) 위 《기해증언록》[3권 084-하] 회차 68 : 임 루치아 증언 (1884. 4.21)

 

15) 미리내 :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조선후기(18~19세기)에는 양성현(陽城縣) 금곡면(金谷面)에 속했는데, 1896년 양성현이 양성군(陽城郡)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안성군(安城郡)에 편입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자료편〈신앙자유이전, ‘미리내 공소(본당)’ 신자들의 인문지리와 관련된 읍지의 주요내용〉 참고.

 

16) 위 《기해증언록》[3권 086-하] 회차 68 : 임 루치아 증언 (1884. 4.21)

17) 위 《기해증언록》[3권 093-상,하] 회차 70 : 오 바실리오 증언② (1884. 4.24)

18) 위 《기해증언록》[4권 007-상] 회차 72 : 김 요아킴 증언② (1884. 4.29)

 

19) 박 바오로 :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아버지. 훈련도감 포수로 다니다가 1868년에 체포되어 형 바오로와 조카 내외와 함께 3월 23일에 치명하였다. 《치명일기》 18번 ; 《박순집증언록》(一).

 

20) 둔지미 : 현재의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용산동 일대에 있었던 마을. 현재 용산시민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21) 위 《기해증언록》[4권 008-상] 회차 72 : 김 요아킴 증언② (1884. 4.29)

 

22) 위 《기해증언록》[4권 051-하] 회차 81 : 김 프란치스코 증언⑨ (1884. 5.24) ; 고 주교와 분묘 곁이 되옵니다 : 본문 내용을 보면, 마치 고(高, 페레올) 주교 무덤 옆에 김대건 신부 무덤 자리를 쓴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는데, 1846년 김대건 신부 묘를 먼저 쓰고 나중에 고 주교[1853년 선종]의 유언에 따라 그 옆자리에 주교 무덤을 만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의 원재연, 〈페레올 주교의 조선입국 후 사목활동〉 참고.

 

23) 문배부리 : 서울 용산구 문계동 문배산 밑에 있는 마을. 문배산은 옛날 공동묘지였다.

24) 위 《기해증언록》[4권 073-상] 회차 86 : 박 베드로 증언② (1885. 1.27)

25) 위 《기해증언록》[5권 071-상] 회차 100 : 최 베드로 증언② (1886.11. 3)

26) 5촌 요한 : 김대건 신부의 5촌으로는 김공숙(金公淑) 요한으로 추정된다.

27) 위 《기해증언록》[5권 084-상] 회차 102 : 이 마리아 증언 (1887. 4. 2)

28)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下(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p.120

 

29) 이민식 빈첸시오의 업적에 대해서는 《경향잡지》 1921년 p.563~564,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오기선 신부 자서전, 1985, 성황석두루가서원) pp.286-295 참조.

 

30) 위 《기해증언록》[2권 008-상] 회차 28 : 김 막달레나 증언② (1883. 6.12)

31) 《병인치명사적》[16권-032~033] 〈은혜 감사장〉

 

32) 위 《기해증언록》[제3권 084-하] 회차 68 : 임 루치아 증언(1884. 4.21) 및 같은 책 [3권 093-상] 회차 70 : 오 바실리오 증언② (1884. 4.24)

 

33) 샤를르 달레, 위의 책, 119쪽, 같은 책 주78)에는 《右捕盜廳謄錄》 병오 7월25일자의 기록, 즉 “이날 김대건 신부를 포도청에서 어영청 장교에게 출부(出付: 내어줌)하되, 포도청의 두목군관이 노량진 백사장에서 어영청 장교와 함께 대기하라”는 기사를 토대로 김 신부의 처형일을 음력 7월 25일 즉 양력 9월 15일에 해당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날 처형이 되지 않은 것 같다. 《승정원일기》 동일자 기록에 보면, 영의정 권돈인의 건의에 의해, 죄인 김대건의 사형을 집행하도록 그를 어영청에 인계하는 작업을 기피한 좌 · 우포도대장을 모두 파면하는 조처가 내려지고 있으며, 같은 책의 다음날(7월 26일) 기록에 보면 비로소 어영청에서 김대건을 효수경중(梟首警衆)했다고 보고한 기록이 나와 있다. 그러므로 김대건 신부의 순교일은 음력 7월 25일에서 하루가 늦추어진 음력 7월 26일로 양력 9월 16일이 되며, 이는 교회측의 기록과 일치한다.

 

34) 본서 조현범, 〈중국 체류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 참고.

35) 자세한 내용은 본서에 게재된 원재연 〈페레올 주교의 조선입국 후 사목활동〉을 참고.

36) 위 《한국천주교회사》하, 198쪽

37) 같은 책, 198쪽

38) 같은 책, 202-203쪽

39) 같은 책, 196쪽

40) 같은 책, 413쪽

41) 《가톨릭대사전》 권11, pp.8430-8431

42) 위 《한국천주교회사》 하, 324쪽

 

43) 위 표1의 두 번 째 서한, 〈칼레 신부가 미리내에서 파리 신학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2년 10월 1일자 서한〉 A-MEP v.579 ff.623-626

 

44) 1837년 연말에 입국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 이후, 역대 교구장들은 서울에 그 거점을 두고 서울과 경기 지역의 공소순방을 전담하여 왔다. 이는 페레올, 베르뇌 주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칼레 신부가 1862년 10월 베르뇌 주교로부터 그의 사목활동 구역으로 물려받은 지역은, 베르뇌 주교가 직접 담당한 수도 서울과 한강 이북의 경기도 지역을 제외한 한강 이남의 경기도 지역으로 현재의 수원교구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베르뇌 주교는 서울과 한강 이북의 경기 지역으로 제한되었던 그 자신의 사목순방 범위를 넓혀 병인박해 이전에 이미 황해도와 평안도까지 그의 전교 구역을 확대하게 된다. 위 《한국천주교회사》 하, 324-325, 369, 380쪽 ; 샤를 살몽 저, 정현명 옮김,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pp.323-324, 363(대전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6.4). 그런데 칼레 신부는 1863년 4월 13일에 선종한 조안노 신부를 대신하여, 그해 10월 말 이후 공주 인근으로 그 사목활동의 거점을 옮겼다고 하므로, 그가 경상도 서북부 지방으로 거점을 옮긴 것은 1864~1865년의 일로 추정된다. 위 표1, 네 번째 서한 〈칼레 신부가 미리내에서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3년 10월 25일자 서한〉 참고.

 

45) 칼레 신부의 1862년 10월 1일자 위 서한(*이 서한에는 4곳의 교우촌이 완전히 약탈당했다고 기록했다.) ; 한편 위 표1의 세 번째 서한인 〈칼레 신부가 미리내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62년 10월 31일자 서한〉(A-MEP v.579 ff.647-650)에 의하면 6곳의 교우촌이 완전히 관가의 포졸들과 한 패가 된 도둑들에게 약탈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의 차이는 칼레 신부에게 전달된 정보의 시점이 약 한 달 정도의 차이가 있는 데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즉 한 달 동안에 추가로 2곳의 교우촌이 약탈을 당할 정도로 당시 그의 관할 구역 내에서 관가의 포졸 및 이들과 한패가 된 도둑들의 교우촌 기습약탈 사건이 그만큼 빈번하였음을 말해준다.

 

46) 위 칼레 신부의 1862년 10월 1일자 서한.

47) 같은 서한.

48) 〈칼레 신부가 미리내에서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3년 10월 25일자 서한〉

49) 위 칼레 신부의 1862년 10월 31일자 서한 및 1863년 10월 25일자 서한.

 

50) 조안노 신부의 사목활동지에 대해서는 위 달레(원저) 《한국천주교회사》 하권 pp.324-325 및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대전교구사 자료집 제1집, 천주교 대전교구 홍보국 ·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p.97 참고.

 

51) 위 칼레 신부의 1863년 10월 25일자 서한 ; 칼레 신부는 병인박해 때 요동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조선으로 입국할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1869년 상해를 거쳐 프랑스로 영구 귀국하여 파리외방전교회를 탈퇴하고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였으며, 1884년 2월 모베크의 수도원에서 선종하기까지 늘 조선 교회와 조선의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였다고 한다. 《교회와 역사》 제119호(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5. 25) pp.2~3 〈조선 포교지에서 트라피스트 수도원까지 마리 칼레 신부(1833~1884)〉 한국교회사연구입문 No.98 참고.

 

52) 이곳을 비롯하여 이하에서 비정한 교우촌의 현재 위치는 본서, 이석원〈미리내 본당의 변모와 역사적 의의〉를 참고.

53) 〈오메트르 신부가 메린도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63년 6월 19일자 서한〉 A-MEP 시복문서 16-上 f.37

 

54) 이 서한의 발신일은 명확하지 않다. 서한의 출전은〈오메트르 신부의 1865년 서한 No.48〉《Lettres de trois saints martyrs de Coree P. Aumaitre H. Dorie L. Beaulieu》(호남교회사연구소 편) pp.126-132

 

55) 오메트르 신부의 위 서한(1865년) No.48

56) 위 오메트르 신부의 1865년 10월 또는 11월(?)자 서한

57) 같은 서한

58) 《병인순교자시복재판기록 1차》 〈이 빈첸시오 증언〉, 1900, ‘오매트르 신부에 대한 문목’ 중 제11조목에 대한 답변.

59) 위의 〈오메트르 신부 서한(1865년) No.48〉

 

60) 파리외방전교회 최세구 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점심식사 후 저녁기도를 하고, 저녁에 미리 당겨 그 다음 날 아침기도를 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61) 〈뮈텔 신부가 블랑 주교에게 보낸 1884년 2월 28일자 서한〉 A-MEP v.580 ff.1194-1195

 

62) 알릭스(Alix, Joseph Jean Baptiste, 韓若瑟, 1861~1948) 신부는 1885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후 사제서품을 받고 1889년 12월 초 조선에 입국하여 1911년 프랑스로 귀국하기까지 갓등이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벌였다.

 

63) 〈부이용 신부가 미리내에서 뮈텔 주교에게 보낸 1894년 1월 18일자 서한〉 《감곡본당90년사》(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p.182

 

64) 〈부이용 신부가 부엉골에서 뮈텔 주교에게 보낸 1895년 10월 10일자 서한〉 위의 책 p.223

65) 〈부이용 신부가 미리내에서 뮈텔 주교에게 보낸 1895년 12월 26일자 서한〉 같은 책 pp.224-225

 

66) 대구대교구에서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를 이장해 간 사실과 관련해서는 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대건출판사, 1989) pp.523-595에 그 배경이 되는 이원순 교수의 연구 내용을 비롯하여, 유해 이장의 과정과 의의 및 유해의 안치 상황 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자초지종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먹방이 무명순교자 무덤의 주인공이 이윤일 요한 성인이었음을 밝혀낸 이원순 교수의 글이 게재된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속)》(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pp.337-346도 참조된다.

 

67) 음다라니에서의 이장 기수는 증언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다. 22일과 23일 이틀에 걸쳐 발굴하여 미리내로 옮겨온 순교자들과, 당시 누락되어 훗날 이장되어온 순교자들이 있는데 이 차이에 대해서는 증언과 남아있는 자료들을 통해 살펴보고 후에 정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68) 미리내 무명순교자 묘역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묘역에는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이름조차 숨긴 채 순교하신 16위의 무명 순교자들이 모셔졌다. 1976년 수원교구의 순교자 현양사업으로, 좌로 12기는 4월 23일 용인군 내사면 대대4리 음다라니 산기슭, 소위 목없는 줄무덤으로 전해오는 곳에서, 중앙의 1기는 6월 24일 용인군 이동면 묵리 한덕골 산상에서, 우로 4기는 12월 17일 용인군 수지면 신봉2리 시봉부락 밭기슭 돌무덤으로 전해오는 곳에서 옮겨 모셨다. 중앙의 1기 묘는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12월 21일 순교 장소인 대구 관덕정으로 모셨다.”

 

69) 이영기 보나(1928년 3월 15일 생, 이천 거주), 이재학 (1927년 5월 30일 생, 용인 거주), 최영화 마태오(1933년 생, 도척 거주), 박창운 라우렌시오(1944년생) 등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70) 정원진 루카(1900~1976) 신부는 1959년 5월부터 양지성당 주임으로, 1963년 1월부터는 안양본당(현 중앙성당) 주임으로 있었다.

 

71) 미리내 천주성삼수도회 성직수도회 총장 이풍우 신부의 외조부. 당시 가래실 공소 회장.

 

72) 이른바 ‘목 없는 줄무덤’이란, 한 줄로 늘어선 여러 무덤의 주인공들이 참수형(斬首刑 ; 칼로 목을 내리쳐서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켜 죽이는 형벌)을 당하여 순교했다는 말인데, 실재 무덤을 이장할 때 참여한 이들의 다수가 몇몇 무덤에서 머리뼈가 몸통과 함께 확인되었다고 증언하므로, 아마도 본문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또 《병인치명사적》등에서 확인되듯이 교회 기록상 교수형으로 순교한 사실이 민간에 잘못 와전(訛傳)된 것으로 이해된다.

 

73) 1987년 1월 18일 《가톨릭신문》 기사에 의하면, “이 여사의 기록과 증언에 의하면 음다라니 목없는 줄무덤에서의 1차 이장 때 11기를 이장한 후 1기가 남은 것이 뒤늦게 밝혀져 김남수 주교에게 이를 보고, 6월 24일 묵리에서 이윤일 성인유해를 이장할 때 함께 2기를 이장하게 됐으며”라고 밝히고 있다. 이 보나 자매의 당시 기록은 확인해 보지 못하였으나, 오래전 일이어서 기억이 분명치 않아 기수가 혼동이 있는 듯하다.

 

74) 원재연, 〈수원유수부내 천주교 박해의 전개과정〉 《교회사학》 제2호(수원교회사연구소, 2005). p74 참조

 

75) 최능희 안나(1938년 생, 인천거주)가 시아버지 황재옥 요왕에게서 구전으로 들은 내용이다. 구전에 따르면 황재옥의 증조부 황하윤과 조부 황진동이 음다라니 출신이고 순교자라는 것이다. 음다라니 산기슭에 참수되어 버려져 있던 10여구의 시신들 가운데 그들이 있었고, 심한 부패로 수습이 불가하여 그 자리에 모두 매장되었다고 한다. 궁에서 바느질 일을 하다가 세례를 받은 황하윤의 부인이 지니고 있던 묵주가 발각되어 체포되어 가던 중 이를 저지하던 황하윤이 포졸을 죽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옥에서 하느님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황하윤의 아들 황진동이 아버지가 믿는 하느님의 존재를 알기 위해 함께 옥에 갇혔고, 황하윤과 함께 순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황재옥이 할머니(황하윤의 부인)를 통해 전해 들었고, 최능희 안나를 비롯한 상주 황씨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비교적 최근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상주 황씨의 족보를 통해 살펴보면 황하윤과 황진동이 천주교 박해로 인해 순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황진동의 아들 황희봉이 1886년 생으로 병인박해 시기와는 차이가 있어 황진동을 순교자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묘사된 상황이 구전되어 내려오고, 후대에 작성된 족보가 잘못 기록되었을 수도 있기에 족보 이외의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온다면 무명 순교자 가운데 2명의 이름이 밝혀질 수도 있겠다.

 

76) 앞의 신문 기사에서는 보나 자매의 기록으로 확인하였다고 하나, 보나 자매는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77) 한덕골 무명순교자 묘가 이윤일 성인의 묘로 밝혀지고 대구로 옮겨간 과정은 앞서 언급한 마백락의 책과 이원순 교수의 책이 참고된다.

 

78) 유봉구 아우구스티노 (1915-1987), 1970년 7월부터 1980년 4월까지 10년간 양지본당 주임으로 있었다.

 

79) 서봉마을 내에 위치(현재 용인시 수지군 신봉동 639번지 922평방미터의 땅이라고 하는데 추후 확인이 필요함). 미리내 무명순교자 묘 비석에는 ‘시봉부락’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의 옛 지명은 ‘시봉굴’이었는데, 이는 서봉골(서봉산에 있는 골짜기)의 사투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지명고증이 필요하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5, 2008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정종득(천주교 수원교구 수원교회사연구소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99919&Page=20&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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