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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시 읽어주는 신부: 자기 생을 어떻게 서술하고 기념(기억)할 것인가 - 자서전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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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21 ㅣ No.354

[시(詩) 읽어주는 신부] 자기 생을 어떻게 서술하고 기념(기억)할 것인가: 자서전적 삶

 

 

사람과 삶과 세상을 알고 싶어 세상의 많은 것들을 읽어왔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학자로 살면서도 여전히 사람과 삶과 세상을 읽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더더욱 사람과 삶과 세상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사람과 삶과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있는 관계의 하느님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으면서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사람과 삶과 세상을 잘 알려주는 글을 좋아했습니다. 사람의 정직한 내면을, 우리 생의 이면을, 세상의 속사정을 드러내는 글을 편애했습니다. 사람과 삶과 세상에 대한 지적 성찰이 담긴 글을 선호했습니다. 감각, 느낌, 감정, 정서 등의 단어보다는 사유, 생각, 상상, 성찰 등의 단어가 더 친숙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그 불균형을 바로잡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삶과 세계에 대한 저의 대응방식은 여전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입니다. 제 몸은 편함과 즐거움의 향유를 추구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저는 분명 삶의 서정성보다 삶의 서사성을 더 사랑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삶과 세계를 응대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강조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삶과 세계를 몸으로 느끼고 감각하는 사람과 삶과 세계를 사유 안에서 생각하고 성찰하는 사람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물론 사람이라는 주체 안에서 몸으로 느끼는 것과 사유를 통해 인식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몸을 통한 느낌과 사유를 통한 인식, 그 두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무게의 중심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뿐입니다. 삶과 세계를 느끼는 방식도 다양하고, 삶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또한 사람마다 몸의 느낌과 사유의 인식 사이의 무게추의 기울기 역시 다변적입니다.

 

장석남(1965~) 시인은 1991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여덟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3권, 창비에서 3권, 문학동네에서 2권을 출간했습니다. 어쩌면 문단과 비평의 중심에서 조명을 받아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실 한국 문단에서는 시적 성향과 시인의 입장에 따라 시집을 내는 출판사가 다른 것 같습니다. 문학의 전문가가 아닌 제가 봐도 문학과지성사 시집들과 창비의 시집들과 문학동네의 시집들은 색깔과 결이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출판사에서 모두 시집을 냈다는 것은 아마도 시인의 시적 성향과 입장이 무난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태준 시인 역시 이 세 출판사에서 모두 시집을 냈습니다. 서사성보다는 서정성이 두드러진 시인이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서사성과 서정성은 명쾌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사적 서정이 있고, 서정적 서사도 있으니 말입니다. 괜한 사설이 길어졌습니다.

 

장석남 시인의 시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한 후 그의 시집들을 찬찬히 다시 읽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시인들의 시에 대해 쓸 때와는 달리 장석남 시인의 시에 대해 쓴다는 것이 저에겐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그의 시들을 읽으면 그저 편하고 마음 따뜻해지고, 애잔하고 쓸쓸하면서도 마음 촉촉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부드럽고 연한 상상”(최하림), “섬세한 감성”(신형철), “간결한 언어와 정밀하게 짜인 이미지가 어우러져 서정시의 진수”(권여선)로 평가되는 시인의 시에 대해 사유의 말을 덧붙이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장석남 시인의 시 안에는 사유를 촉발시키는 자극적 언어도 드물고, 대담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전복적 표현도 없습니다. 강하고 격렬한 표현도 없고, 일상의 잔잔한 느낌과 평범한 사물과의 따뜻한 내면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그의 시는 그저 공감과 느낌만을 요청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때문에 글쓰기가 무척 곤혹스러웠습니다.

 

장석남의 시는 수묵화 풍경처럼 사물을 담담하고 간결하게 묘사하며, 그 사물에 반응하는 시인의 마음 상태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주로 전개됩니다. “저 입술을 깨물며 빛나는 별/ 새벽 거리를 저미는 저 별/ 녹아 마음에 스미다가/ 파르륵 떨리면/ 나는 이미 감옥을 한 채 삼켰구나// 유일한 문밖인 저 별”(‘별의 감옥’ 전문). “우리는 늙으면/ 저녁별을 주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문턱에 앉아서 부는/ 바람도 느껴볼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매일/ 저녁별 보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날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늙음 끝까지 신작로를/ 바라보고 창문 아래에/ 앉아서/ 저녁별을 볼 것이다/ 그리고 먼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水墨 정원 7 . 우리는 늙으면’ 전문). 앞의 시는 그의 첫 시집 첫 번째 시이며, 뒤의 시는 그의 시 가운데 절창의 하나로 여겨지는 ‘수묵 정원’이라는 연작 시편의 하나입니다. 이 두 편만 읽어봐도, 그의 시가 무엇을 노래해왔는지, 그가 젊은 날부터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의 시집의 제목을 일별해 보면, 시인이 무엇에 마음을 두며 살아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1991),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1995), 『젖은 눈』(1998),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2001),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2005), 『뺨에 서쪽을 빛내다』(2010),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2012),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2017). 시집의 제목들은 장석남 시인이 언어의 추상성보다는 삶의 서술성에 기대어 시를 써왔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려줍니다. 시인은 삶의 서술성을 비장함과 결연함으로 외치기보다는 가볍고 담백한 음조로 노래합니다.

 

시인은 그저 담담하게 삶을 서술하고 노래합니다. 시인에게 생의 여행은 끝없는 소멸을 보는 것입니다. “나의 걸음이 다 사그라지기 전에/ 또렷이 보아야만 하는 공부/ 저물녘의 긴 그림자 같은 경전/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끝없는 소멸을/ 보려는 것/ 이번의 간단한/ 나의 여행은,”(‘여행의 메모’). 시인은 “아주 가끔은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살던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도 해보고자 강물 곁에 앉아보기도”(‘서풍부’) 하지만 여전히 “답은 더디고”(‘소풍’), 그래서 그저 “들여다보았다고 기록해두는 수밖에는 없겠”(‘살구를 따고’)다고 체념합니다. 시인은 생의 운명에 대해 한탄합니다. “나는 어찌하여 이, 뵈지도 않는 길을 택하여 가는가?/ … // 누군가 내 속에서 이렇게 답하겠지/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이 길이, 내 발 앞으로, 가슴속으로,/ 눈으로 와 데려가고 있다고”(‘오솔길을 염려함’) 말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슬픈 운명 속에서도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배를 밀며’)라고 사랑을 노래합니다. 사랑 역시 어쩔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배를 매며’)이라고. 그래서 시인은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마당에 배를 매다’)이라고 외칩니다. 시인에게 생은 소멸의 운명을 사랑의 운명으로 견뎌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낯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도 기릴 거야

 

가장 최근의 시집에 실린 ‘불멸’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신형철은 이 시가 장석남 시인의 시풍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라 말합니다. 신형철의 설명을 빌리면, 비문을 새기고 행장을 남기려는, 불멸에 대한 속된 욕망이 꽃으로 낯을 씻는 행위, 미나리를 먹는 행위, 꽃을 문지르는 행위, 웃음을 펼치는 행위를 통해 탈속과 무욕의 세계로 전이되어 흩어져 버리는 느낌입니다. 장석남의 세계는 작고 소박한 행위들을 통해 삶이 정결해지는 세계인 것 같습니다. 간절함이 불순한 욕망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정갈한 예식(행위)을 통해 승화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후일 꽃이 피고 씨를 터뜨릴 때/ 무릎 펴고 일어나며/ 일생을 잘 살았다고 하면 되겠나/ 그중 몇은 물빛 손톱에게도 건너간/ 그러한 작고 간절한 일생이 여기 있었다고/ 있었다고 하면 되겠나/ 이 애기들 앞에서”(‘봉숭아를 심고’).

 

‘불멸’이라는 시에 오래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아마도 소멸과 삶의 예식(전례, 제의)에 대해 제가 자주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의 시간은 소멸의 여정이라는, 그 낡고 진부한 감상에서 제가 여전히 잘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생이 어떻게 나의 행장(行狀)에 기록될 것인지, 내가 쓰는 비문(碑文)에 내 생의 여정이 어떻게 새겨질지(서술될지) 저 역시 궁금합니다. 내 생은 과연 몇 줄의 문장으로 서술될 것인지, 내 생을 서술하고 수식하는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때가 가끔 있습니다. 물론 자기 내면에 비춰진 자신의 생과 타인의 시선에 비춰지는 자신의 생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서술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자신의 시선에 비춰진 것이든 타인의 시선에 비춰진 것이든 자기 자신이 자신의 생을 서술하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자서전적 서술과 전기적 서술은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자기 생을 자서전적 방식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고, 또 서술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생 그 자체가 우리 자신이 쓰는 자서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생에 대한 자서전적 서술을 위해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비춰진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학교의 선생으로 살다보니 가끔은 신학생들이 나를 어떤 모습으로 볼까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의 시선 속에 내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자문할 때도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 속에 비춰질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자신을 경계하며 살기도 합니다. 타인의 시선 속에 비춰진 내 삶 역시 내 생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의 생은 어쩌면 자신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과 하느님의 시선 속에서 구성되고 서술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멸’이라는 시에 오래 시선이 머문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도 시 안에 종교적 제의에 관한 동사들이 다 들어있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문을 쓰고” “행장을 남기는” 행위는 (종교적) 경전의 구성과 형성을 뜻합니다. 그 경전을 “읽고”, “외우고”, “새기고”, “춤추고”, “기리는” 행위는 종교적 제의의 핵심을 의미합니다. ‘불멸’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자기의 생이라는 경전을 읽고 외우며, 자기의 몸에 자기 생의 흔적을 새기며, 자기 생에 감사하며 자기 생을 기리는 춤을 출 줄 아는 제의적 삶을 생각합니다. 우리 저마다의 생은 그 자체로서 거룩한 제의라는 상상을 합니다. 시인이 제시하는 제의의 형식은 참으로 소박하고 정갈합니다. 거룩한 제의는 형식의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제의는 경전의 정신을 자신의 몸에 새겨 춤추게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 실천 속에서 제의는 빛이 납니다. 들녘의 흔한 꽃들과 가난한 이웃들의 웃음으로 봉헌되는 제의가 우리를 변하게 할 것입니다. 전례의 화려함은 자칫 종교적 권력의 강화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전례는 소박함 속에서 거룩함을 드러냅니다. ‘불멸’이라는 시를 읽으며 제의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자기의 생을 어떻게 서술하고 기념할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자기 생에 대한 소박하고 거룩한 예식을 거행해야겠다는 다짐을 장석남의 시를 읽으며 합니다.

 

[월간빛, 2018년 5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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