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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심리로 풀어 보는 세상사: 악마를 만든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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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28 ㅣ No.791

[심리로 풀어 보는 세상사] 악마를 만든 공부

 

 

신념이 만든 악마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은 이익만 좇는 10만 명의 힘에 맞먹는다.”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요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이다. 세속적이고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자신의 신념이나 지조쯤은 쉽게 포기해 버리는 사람을 현실 감각이 뛰어나다고 칭찬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신념을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경외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결국 세상은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움직이고, 사람들은 이들의 신념에 자신의 마음을 준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실현시키고자 앞으로 돌진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늘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사람들 중에는 주위에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에서 연쇄 테러 용의자로 검거된 안드레스 베링 브레이빅은 범행을 저지르기 5일 전인 17일에 트위터(댓글나눔터)를 개설했다. 그가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말이 바로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은 이익만 좇는 10만 명의 힘에 맞먹는다.”였다. 브레이빅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문구를 트위터에 남기고,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로 향했다.

 

그는 정부 종합 청사 앞에서 폭약을 가득 실은 화물차를 세워 놓고, 원격 조정 장치를 이용해 폭파시켰다. 오슬로 시내의 건물들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폭발은 강했고, 정부 종합 청사와 주변 건물의 유리창이 박살 났다. 8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청사를 폭파한 뒤 브레이빅은 준비해 둔 차량을 이용해 오슬로 북서쪽으로 38km 정도 떨어져 있는 우토야섬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그가 혐오하는 다문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노동당 주관의 청소년 캠프가 열리고 있었다.

 

보트를 이용해 섬으로 들어간 브레이빅은 경찰복을 입고, 정부 종합 청사의 테러 소식을 듣고 불안해하던 청소년들에게 다가갔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모여라.”는 그의 지시에 따라 청소년들이 모여들자, 브레이빅은 바로 소총을 꺼내 난사하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청소년들을 조준해 사살했고, 죽은 척 쓰러져 있던 사람들에게 다가가 총구를 머리에 대고 확인 사살을 했다. 우토야섬에서만 68명이 죽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겪는 불안을 가장 쉽게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범죄자를 악마로 규정하는 것이다. 악마로 태어난 자만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악마는 잡혔으니,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곧 안전을 되찾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브레이빅 주변 사람들의 증언은 브레이빅이 타고난 악마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브레이빅의 이웃은 그를 내성적이고 보수적인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실제로 교통 법규를 위반한 것을 빼고는 특별히 사회적 규범을 어기거나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사람이 한순간에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악마를 만든 공부

 

주변 사람들에게 브레이빅이 내성적으로 보였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혼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브레이빅은 대학에 진학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경영학과 역사학을 1만 4천 5백 시간, 그리고 종교학과 재무학을 3천 시간 독학했고, 이는 경영학 학사와 역사학 석사 학위를 받을 정도의 수준이라고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주장했다.

 

다른 동물과 비교했을 때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생각할 능력이 있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파괴적일 수 있는 이유 또한 생각할 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고, 그래서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며, 더 나아가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그 결과, 자신의 왜곡된 신념을 실현하려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은 잔혹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브레이빅이 체포된 뒤 했다는 말이다. 살인자와 학살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인류 또는 역사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동시에 피해자들은 죽어 마땅한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설득하고 나면, 이들에게는 하지 못할 짓이 없어지게 된다.

 

더구나 집단이나 사회적 차원에서 정당화가 이루어진다면,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나치가 6년간 600만 명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집단 수준에서 정당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당화 능력을 키워 주는 것이 바로 공부다.

 

 

공부에 대한 고정 관념

 

공부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 가운데 하나는 공부를 많이 하면 더 인격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공부가 인간으로서 자신을 수련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던 시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날의 공부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와 행동거지에 대한 소양을 갖춘 사람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현명하고 인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는 지난날의 그것과는 다르다. 현재의 공부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을 배양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의 현재의 의미는 그 분야의 전문지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했다는 것이지, 자기 수양에 시간을 많이 투여했다는 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거나 정교하게 하는 기술만을 열심히 습득했을 때 발생할 수 있다. 자기 생각만 주장하는 것을 의사소통이라고 착각하며, 자신이 공들여 정교화한 주장에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심지어 적의를 품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약자를 배려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타인의 삶도 나의 삶만큼 소중하다는 생각을 키우는 데 필요한 공부는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인간을 만드는 공부가 배제된 상태에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거나 정교하게 하는 능력만 키워 주는 공부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을 만들 수도 있다.

 


우리의 공부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말할 필요가 없다. 덕분에 대학 진학률도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한다. 지난 세대와 비교해 보면,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학교에서 머무는 시간은 훨씬 길어졌다. 전 국민이 평균적으로 공부하는 시간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공부 시간만 증가한 게 아니라, 지난날에 비해 우리 사회에 엽기적이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빈도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공부에 쏟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왜 이런 종류의 사건이 우리 사회에 발생하는 빈도도 동시에 증가하고 있는 것일까?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공부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은 인간을 파괴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게도 한다. 따라서 우리의 공부가 사회를 더 평화스럽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려면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 더 나아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어렸을 때부터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논리만을 강화하거나 정교하게 하는 능력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는 교육은 위대한 철학자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브레이빅처럼 약 1천5백 쪽에 달하는 ‘2083: 유럽 독립 선언’이라는 선언문을 작성하고 자신의 행위를 ‘사회 혁명을 위한 거사’라고 믿는 악마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 전우영 -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무료 온라인 공개강좌 서비스인 케이무크(K-MOOC)에서 일반인들을 위해 쉽게 디자인한 ‘심리학 START’를 강의하고 있다. 「나를 움직이는 무의식 프라이밍」, 「내 마음도 몰라주는 당신, 이유는 내 행동에 있다」 등을 펴냈다.

 

[경향잡지, 2017년 12월호, 전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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