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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2) 사랑의 학교에서 하느님의 완벽한 친구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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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15 ㅣ No.1059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2)


‘사랑의 학교’에서 하느님의 ‘완벽한 친구’로 성장

 

 

콜롱비에르 신부.

 

 

예수회 입회

 

1658년 가을, 그가 17세 되던 때 멀리서 아이들의 우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빵을 달라는 것이었지만 사실 아무도 빵을 떼어 줄 사람이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수확할 것은 많으나 일꾼은 적다”고 하신 예수님의 호소와 연결될 수도 있다. 결국 그해 10월 25일 성인은 아비뇽의 예수회 수련원에 입회했다.

 

조용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였지만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받고 특히 예수회 입회 이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년간 수련기를 마치고, 3대 서원을 발한 후 아비뇽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철학 시험을 통과한 후에는 학교로 파견돼 5년간 문법을 가르쳤다. 예수회 총장 파올로 올리바(Paolo Oliva) 신부는 그의 가능성을 보고 신학 공부를 위해 그를 프랑스 파리로 파견하기로 했다. 이때 유명한 태양 왕 루이 14세의 재무대신이었던 콜베르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책임지는 임무까지 맡게 됐다. 사제 수품 전인 젊은 신학생에게 주어진 큰 임무와 파리의 화려함은 자칫 교만의 씨앗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교양과 인품으로 칭송받았음에도 그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채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 1669년 4월 6일 그는 사제품을 받고 리옹의 모교로 돌아가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제3수련

 

그후 1674년에서 1675년까지는 성인의 영적 여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다. 바로 이때 ‘제3수련’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제3수련이란 예수회 창설자 이냐시오 성인이 「회헌」에 명시한 것으로,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친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영적 심화 교육’이다. 단순히 지식을 공부하거나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유롭게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태도 또는 정서를 함양하는 교육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를 ‘사랑의 학교’(schola affectus)라고 불렀다. 

 

당시 콜롱비에르 신부가 남긴 영적 일기 가운데 예수님과 성모님께 드린 담화 속에는 이 시기에 충만했던 하느님의 은총과 그에 대한 성인의 감격이 잘 나타나 있다. “오 (두 분의) 성심이여,…당신께서는 저의 법이 되시고, (당신과) 비슷한 모든 상황에서 저는 당신의 느낌들을 느끼도록 힘쓰겠나이다. 이제부터 저의 심장이 오직 예수님과 성모님의 심장 안에 머물 수 있기를, 그리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심장이 저의 심장 안에 머무시어 제 심장이 두 분 성심의 느낌들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당시 그리스도교 수덕-신비주의 전통 안에서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이 일반화돼 있었다. 하지만 예수 성심이 가장 뚜렷한 방식으로 계시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를 알게 되기 전에 이미 성인에게 이러한 신심이 표출될 수 있었던 것을 단지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수덕생활이란 ‘하기 싫은데’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안 해도 되지만’ 하고 싶은 어떤 것이 아닐까 한다. 제3수련 기간에 성인은 지도 신부의 승인하에 아주 특별한 서원 즉 하느님께 대한 약속을 한다. 「회헌」의 모든 규칙과 다른 일반 규범 및 사제들을 위한 규범들을 엄수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단순한 수도 단체 내의 행동 규범만이 아니라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 등 완덕에 필요한 모든 권고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 어떤 엄격해 보이는 약속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요즘의 관점에서는 생소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의 이러한 결심이 완고한 도덕주의, 엄격주의 또는 규칙에 대한 강박의 소산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 점은 실제로 그가 한 서원의 내용을 보면 확실해진다. “이냐시오 성인에게 영감을 주시어 규칙들을 제정하게 하신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이 지켜지기를 원하셨다. … 이제 이 서원은 그 준수를 어렵게가 아니라 오히려 쉽게 만들어 준다. 중죄를 범하는 공포로 인한 유혹을 없애 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하느님이 필요한 때에 더욱 강력한 도움을 주시도록 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어려운 법규를 더 많이 준수할수록 하느님을 잘 따른다는 말이 아니다. 자세히 읽어 보면 이 서원은 이토록 어려운 무엇무엇을 잘 해내겠다는 다짐이 아니다. 행동 또는 그것을 통해 마음까지 완벽히 통제해 내겠다는 것도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감사와 확신의 표현이다. 하느님이 ‘이미’ 나를 사랑하시고, 이미 당신의 법을 따를 힘과 용기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서원이 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갈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서원의 의무에 대해 생각하면 공포보다는 기쁨을 줍니다.” “나는 내 (진정한) 행복과 조우했다고,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찾고 싶은 보물을 마침내 찾았다고 느낍니다.” 그는 이렇게 사랑의 학교에서 주님의 충직한 종이자 완벽한 친구로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특별한 은총이 충만했던 성인의 제3수련은 다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나게 된다. 파올로 올리바 총장 신부가 리옹 관구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가 곧바로 최종 서원을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때는 1675년 2월 2일 그가 34번째 생일을 맞던 날이었다. 곧이어 그는 파레르모니알의 한 예수회 공동체 원장직으로 파견됐다. 그의 명성과 역량에 비해 ‘한직’으로 임명된 것이라 많은 사람이 의아해 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다. 그곳에는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던 한 영혼,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가 있었다.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는 나중에 콜롱비에르 성인보다 먼저 시성되지만, 처음에 알라코크 수녀는 덕행으로 인한 명성 대신 ‘오명’으로 사람들 사이에 알려졌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12일, 김민철 신부(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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