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성경자료

[성경] 히브리어 산책: 미셔파트, 야톰, 알마나(다스림, 고아, 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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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31 ㅣ No.3872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미셔파트, 야톰, 알마나


가난한 이 도와주는 그리스도인 돼야

 

 

오늘 제1독서는 과부와 고아 등 가난한 사람에게 공정을 펴라는 말씀이다. 이와 관련된 히브리어 단어를 알아보자.

 

미셔파트. 이 말의 의미를 깊게 이해하면, 율법과 하느님 나라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페(점선 원) 안의 점은 일부 자음(bgdkpt)으로 음절이 시작할 때 사용하는 기호다(약한 다게쉬).

 

 

미셔파트의 다양한 의미

 

히브리어 미셔파트는 다양한 뜻을 지녔다. 미셔파트의 본래 뜻은 ‘(지배자의) 의지가 실현되는 것’, 곧 ‘다스림’이란 뜻이다. 그런데 고대근동에서 다스림이란 신법(神法)을 선포하고 집행하는 일이었다. 함무라비 법전을 펴낸 바빌론이나 하느님의 율법을 선포한 이스라엘이나 이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물론 그 선포한 법의 내용이나 형식이 퍽 차이 난다) 그래서 미셔파트는 질서, 법규, 재판, 공정 등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주님의 법규

 

이스라엘에서 미셔파트는 주님이 다스리시는 도구, 곧 율법의 일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우리말로는 대개 ‘법규’라고 옮긴다. 이집트 탈출 직후에 모세가 마라에서 쓴 물을 단 물로 바꿀 때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해 미셔파트(법규)를 세우셨다.(탈출 15,25) 모세는 하느님 백성이 위대한 이유는 주님의 올바른 미셔파트(법규)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신명 4,8)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의 미셔파트(법규)를 실천해야 그분의 진노와 심판을 면할 것이라 말했다.(스바 2,3)

 

 

재판과 공정

 

이스라엘의 재판은 주님의 미셔파트(다스림)와 일치해야 한다. 그런 재판은 정의의 미셔파트요 사랑의 미셔파트가 될 것이다. 일찍이 모세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모든 성에 판관들과 관리들을 세워, 그들이 백성에게 올바른 미셔파트를(재판을) 하게 해야 한다”(신명 16,18)고 말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진실한 미셔파트(판결)”를, 예레미야 예언자는 “공정한 미셔파트(판결)”를 외쳤다.(에제 18,8; 예레 21,12) 주님의 판결은 심판이기도 하다. 먼 미래에 모든 민족은 주님의 미셔파트(심판)를 보게 될 것이다.(에제 39,21) 주님의 미셔파트(심판)는 그분께 충실한 이들에게는 영광이다.(시편 149,9)

 

- 야톰. 고아를 뜻한다. 과부와 함께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주님의 질서는 공정하므로 그분의 다스림과 심판도 공정하다. 그래서 주님은 “미셔파트(공정)의 하느님”(말라 2,17)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당연히 정의와 공정을 실천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어 주신 장면을 보자. 그때부터 주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미셔파트(공정)를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창세 18,19) 그렇게 하여 주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임을 의도하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미셔파트를 묻다

 

구약성경에는 점을 치는 장면이 여럿 나오는데, 이것도 미셔파트와 관련이 있다. 현대인들은 점을 미신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수천 년 전 고대인들에게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뜻을 알아보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곧 점이란 주님께서 어떤 미셔파트(결정)를 내리실지 물어보는 도구였다.(민수 27,21)

 

알마나. 과부를 뜻한다. 윗첨자 e는 거의 발음되지 않는다.

 

 

이웃 사랑의 하느님 나라

 

구약의 ‘주님의 미셔파트’는 신약의 ‘하느님 나라’와 무척 가까운 개념이다. 주님의 미셔파트가 실천되는 곳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미셔파트를 실천하는 삶을 알려준다. “미셔파트를(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7) 야톰(고아)과 알마나(과부)는 전통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대표하는 말이었다. 가부장제가 당연시되던 고대 사회에서 아버지와 남편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기초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그런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나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측은한 마음을 지니고 공정을 펴는 것이 주님의 미셔파트를 실천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미셔파트를 저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0월 29일, 주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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