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사료와 문학으로 구현된 유배자 유섬이(柳暹伊, 1793-1863)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15 ㅣ No.921

사료와 문학으로 구현된 유배자 유섬이(柳暹伊, 1793~1863)*

 

 

국문 초록

 

본고는 신유박해의 유배자였던 유섬이(柳暹伊)에 대한 연구이다. 유섬이는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1756~1801)의 딸로 9세의 나이에 거제도로 유배를 간 인물이다. 본고에서는 <이순이 루갈다 서간>,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한국천주교회사》, 《사학징의》, 《승정원일기》, 《동국교우상교황서》와 《사헌유집》, <유처자묘>, <처녀의 향수>, 마지막으로 《순교자의 딸 유섬이》 등 유섬이 관련 사료와 작품을 연구 대상으로 하였다. 유섬이 관련 문헌 자료는 교회 문헌과 그 외의 한국사 문헌, 사료와 문학 작품이 함께 존재한다. 때문에 유섬이 관련 연구는 이들 자료들에 대한 통합적 연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유섬이는 실존 인물이기도 하지만, 문학적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 천주교회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교회 밖 인물로도 살아야 했다. 신유박해의 희생자였으나, 교회 역사에서 이름까지도 사라졌던 유섬이의 삶을 추적함으로써 본고는 순교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에 답했던 유섬이라는 인물에게 주목하였다. 또한 역사적 인물 유섬이와 문학적 인물 유섬이를 구분하여, 유섬이라는 인물이 문학을 통해 어떻게 형상화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계승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논하였다. 천주교 신앙 때문에 부모는 순교하고 자신은 유배자가 되어 관비로 살아야 했던 유섬이. 그녀는 정결함으로 노비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킬 수 있었고, 이웃 사랑으로 지역 공동체와 함께할 수 있었다.

 

박해는 신앙의 순교자들을 낳았지만, 그 순교자들과 함께 순교할 수 없었던 유가족들 그리고 박해 앞에서 신앙을 굽혀야 했던 배교자 역시 낳았다. 한국 천주교회사는 그들의 역사와 함께 기록되어야 한다. 유섬이 역시 그중 하나이다. 유섬이 관련 사료와 문학작품을 고찰함으로써 천주교 유배문학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본고의 의의 중 하나다. 유섬이는 교회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며, 조선 천주교가 낳은 새로운 인간형의 하나였다. 동정을 지킴으로써 신앙을 이어가고, 이웃 사랑으로 이를 완성하여 200여 년의 시간을 거쳐 다시 교회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인물, 그녀가 유섬이이다.

 

 

1. 머리말

 

본고는 유섬이(柳暹伊) 관련 사료와 문학 작품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유섬이는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1756~1801)와 부인 신희에게서 태어난 딸이다. 유항검은 초기 한국 천주교인의 지도자로 평신도 성무대행 즉 가성직제도에서 신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의 집안은 대표적인 한국의 초기 천주교 가족의 하나다.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는 동정부부로 살다 순교한 인물이기도 하다. 유항검은 초남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호남의 사도로 불리며,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다. 유항검의 가족도 이 박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중에는 순교한 가족들도 있었지만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섬이(柳暹伊)이다.

 

신유박해 당시 교회 기록에서 유섬이에 대한 언급은 매우 단편적이며, 그나마 기록에서 거의 사라진다. 박해는 신앙의 순교자들도 낳았지만, 순교할 수 없었던 유가족들 그리고 박해 앞에서 신앙을 굽혀야 했던 배교자 역시 낳았다. 기존의 한국 천주교회사는 순교자를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그 과정에서 누락되었던 존재들이 유배자들과 배교자들이다. 유섬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고에서는 유섬이의 삶을 추적할 것이다. 순교자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 심지어 배교자들까지도 우리의 교회사는 함께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본고가 유섬이라는 인물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유섬이와 관련된 문헌의 발견은 잊힌 존재 유섬이의 삶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성래의 《사헌유집》(思軒遺集)의 발견이 그것이다.

 

본고에서는 《사헌유집》에 실린 유섬이 관련 작품을 비롯하여 유섬이 관련 텍스트를 중심으로 유섬이의 삶과 그 의미를 추적하고자 한다. 유섬이 관련 자료는 교회 문헌과 그 외의 한국사 문헌, 사료와 문학 작품이 함께 존재한다. 때문에 유섬이의 삶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이들 자료들에 대한 통합적 연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도 유섬이 관련 각 자료의 특징과 내용, 전개 양상 및 차이점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본고는 《사헌유집》뿐 아니라 <이순이 루갈다 서간>, 《승정원일기》,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한국천주교회사》, 《사학징의》, 《동국교우상교황서》, <유처자묘>, <처녀의 향수> 그리고 《순교자의 딸 유섬이》에 이르기까지 유섬이 관련 사료와 문학 작품을 연구대상으로 유섬이의 삶과 그 삶이 주는 특징 및 교회사적 의미를 고찰할 것이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신유박해를 전후한 시기에 기술된 19세기 교회 문헌 속 유섬이의 가족과 천주교 신앙에 대해, 3장에서는 신유박해 이후 유배자가 된 유섬이의 삶을 《사헌유집》에 실린 두 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분석할 것이다. 4장에서는 구비문학으로 전승과정을 거쳐 기록된 40여 세 이후 유섬이의 삶을 보여주는 설화와 가요, 마지막으로 2016년에 창작된 시극 《순교자의 딸 유섬이》를 중심으로 분석할 것이다. 유섬이 관련 자료에 대한 소개와 성격에 대해서는 각각 해당 장에서 상술하겠다. 본고에서는 현재까지 유섬이 관련 사료와 작품을 총괄하여 그 공통점뿐 아니라 각 자료의 특징과 차이를 토대로 유섬이의 삶을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유배자 유섬이의 삶의 의미와 특징을 분석할 것이다.

 

유섬이는 실존 인물이기도 하지만, 문학적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 천주교회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교회 밖 인물로도 살아야 했다. 이 문제적 인물 유섬이를 통해 한국 천주교에서 유배자에 대한 학적 관심을 유도하고, 이에 기반을 두어 유섬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유도하는 것 역시 이 글의 목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본고는 잃어버린 유섬이의 삶을 복원함으로써 순교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에 답했던 유섬이라는 인물에게 주목할 것이다. 또한 역사적 인물 유섬이와 문학적 인물 유섬이를 구분하여, 유섬이라는 인물이 문학을 통해 어떻게 형상화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계승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 역시 본 연구의 주요과제이다.

 

 

2. 천주교의 영향과 가족 관계

 

유섬이의 생몰연대는 신유박해인 1801년 당시 9세라는 기록과 이후 《사헌유집》에서 71세로 사망한 연도의 기록에 근거한다면 1793년에서 1863년으로 볼 수 있다. 《사헌유집》에서의 기록은 1863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데,1) 유 처녀의 나이를 71세라고 했다. 1863년 71세의 사망이라면 생년은 1793년이 되고, 9살이 되는 해는 신유박해인 1801년과 일치한다. 즉 유항검의 딸 유섬이와 《사헌유집》의 유 처녀는 동일인이다. 다만 《사헌유집》에서는 계해년 71살 사망으로 적으면서도 나이 7세에 유 처녀가 유배를 온 것으로 되어 있다.2) 이는 하겸락의 오판이나 오기로 판단된다.3)

 

유섬이의 아버지 유항검(1756~1801)은 부인 신희와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유항검의 어머니 권 씨 부인은 권철신 암브로시오(1736~1801)의 일가이다. 유항검은 그가 소유한 토지와 부를 바탕으로 초남이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 호남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4) 그의 입교는 1784년 만 28세의 나이에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의 대부는 권철신이었다. 유항검은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되었고, 평신도 성무대행에5) 의해 1786년 이승훈으로부터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된다. 1789년 유항검은 평신도 성무대행과 관련해서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고, 평신도 성무대행이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교회의 입장을 확인받는다. 1790년에 중국에 있던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에 관한 서간을 전하고, 1791년에는 진산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1793년에 유섬이가 유항검 나이 36세를 전후한 시기에 탄생한다. 즉 유섬이는 태어날 때부터 천주교를 믿을 뿐 아니라 조선 천주교를 이끌었던 지도자였던 아버지 유항검의 딸로 태어난다. 그녀가 태어난 다음 해인 1794년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였으며, 유항검은 동생 유관검을 통해 주문모 신부의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며, 이에 주문모 신부는 유항검 일가를 방문하였고,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의 동정 결혼 등이 이어진다.

 

이상과 같이 유섬이는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한 부모를 비롯하여 천주교 신앙 가족 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인물이다. 그녀의 세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현재 찾을 수 없지만 그녀 역시 세례를 받았을 확률이 높다. 더구나 그녀가 태어난 이듬해에 주문모 신부의 방문까지 있었다. 설사 유섬이가 세례를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유섬이에게 천주교의 영향은 지대했다. 천주교를 믿었던 가족이었기에 모든 일상이 천주교 신앙 안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섬이가 유항검과 신희의 딸이며, 유중철의 동생이요 이순이의 시누이였다는 것은 그녀 역시 철저한 신앙 안에서 유년기를 보냈음을 반증한다. 또한 유섬이가 유배를 떠난 나이는 9세다. 9세라면 유년의 경험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이이다. 비록 가족과 헤어지고 신앙 공동체에서 벗어났지만 9년 동안 이어졌을 신앙생활을 기억하는 것이 가능하다. 9세의 나이라면 그 이후의 삶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과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6)

 

그러나 천주교회 자료에서 ‘유섬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유섬이라는 인물에 대해 기술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이 루갈다의 서간과 <동국교우상교황서>에서이다. 이순이 루갈다의 서간은 한국 천주교회에 전해지는 대표적인 서간 중 하나로 한국 천주교 문학작품이다.7) 이순이 루갈다는 순교 직전 옥중에서 두 통의 서간을 남기는데, 그중 하나가 <언니들에게 보낸 서간>이다. 여기에서 루갈다는 어린 시누이 유섬이의 존재를 언급한다.8) 다음은 이 부분에 해당하는 서간의 내용을 필사본과 현대어 번역본을 비교하여 제시한 것이다.

 

 

 

a' 세 시동생 9세, 6세, 3세인 어린아이를 흑산도, 신지도, 거제도로 각각 멀리 귀양보냈으니, 이런 안타깝고 애절한 처지를 차마 어찌 볼 수 있겠어요.10)

 

a'' 세 명의 시동생은 구 세, 육 세, 삼 세 아이로 거제도, 흑산도, 신지도로 각각 귀양을 보냈으니, 그 경상을 차마 어찌 볼 수 있겠어요.11)

 

‘섬이’라는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12) 이순이가 언급한 세 시동생 중 9세의 동생이 유섬이이다. 유항검과 신희 부인 사이 자녀는 유중철, 유문석, 큰딸,13) 유섬이, 유일석, 유일문이다. 이 중 유중철, 유문석은 모두 처형당하고, 시집을 갔던 큰 딸은 처형에서 제외되었으며, 16세가 되지 않았던 세 명의 어린 자녀가 관노비가 되어 유배를 가야 했다. 인용문은 어린 자녀를 걱정하는 어머니 신희의 고뇌와 이를 위로하던 옥중에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필사본인 a와 이를 그대로 현대역한 a'에 따르면 어순에 의해 9세였던 아이는 흑산도로 간 것으로 보이나, a''는 ‘흑산도, 신지도, 거제도’의 순서를 ‘거제도, 흑산도, 신지도’로 바꾸었다. 이는 《사학징의》에 나오는 다음 기록(b)을 고려해 정병설이 순서를 바꿔 현대역한 것이다.14)

 

b. 1801년 10월 6일 : 의정부가 보고하기를,

“전주 판관 정지용의 보고서와 관계 자료를 받으니, 대역부도죄인 유항검과 모역동참죄인 유관검 등의 연좌죄인을 조사하여 잡아냈다고 합니다.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柳重喆, 23세)과 유문석(柳文碩, 18세)이 지금 전주부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곧 의금부 도사를 보내서 지방관과 함께 형률에 따라서 연좌시켜 교수형에 처하고, 처 신희는 함경도 경원부의 관비로 삼으십시오. 아들 유일석(柳日碩)은 여섯 살이고, 유일문(柳日文)은 세 살로서 모두 사형에 처할 나이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형률에 따라 교수형을 면제하여 유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에, 유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에 보내 관노로 삼으십시오. 딸 유섬이(柳暹伊, 9세)는 경상도 거제부로 보내 관비로 삼고, 자부 이순이(李順伊)는 평안도 벽동군에 보내 관비로 삼으십시오. 조카 유중성(柳重誠)은 함경도 회령으로 3천리 유형에 처하고, 유관섬의 처 이육희(李六喜)는 평안도 위원군의 관비로 삼으십시오. 이 죄인들은 전주부의 감옥에 지금 수감되어 있으니, 형조에게 명령하여 각기 유배지로 압송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지시하기를, “허가한다”라고 했다.15) (강조 밑줄, 인용자)

 

b의 인용은 《사학징의》에서 찾은 유항검 관련 내용이다. 천주교회 자료가 아닌 신유박해의 처형 기록인 《사학징의》는 이순이 루갈다의 서간에서 언급된 유배 간 아이들의 이름과 나이, 유배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이다. 이에 따르면, a에서 이순이가 언급한 어린 시동생은 유섬이, 유일석, 유일문이며, 각각 거제도, 흑산도, 신지도로 유배를 갔다. 이를 a에서 이순이가 ‘흑산도, 신지도, 거제도’의 어순으로 기록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사학징의》 내용에 따르면 유섬이가 거제도로 유배 간 것은 확실하다. 이를 고려하여 정병설은 a''에서와 같이 아예 어순을 바꿔 필사본 서간을 현대역하여 옮겼던 것이다. 《사학징의》 외에도 《승정원일기》 순조 1년 10월 6일 기사에서 유섬이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일석은 전라도 흑산도, 일문은 강진 신지도의 노예로 삼고, 9세 여아인 유섬이는 경상도 거제부의 비로 삼는다는 기록이 그것이다.16) 이들 사료는 1801년 당시 유섬이는 9세였으며 거제도의 관비로 유배 가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이다.17)

 

루갈다의 서간에서 필자인 이순이는 옥중의 상황을 기술한다. 가족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함께 순교를 결심하며, 그때를 기다린다. 그런데 어린 시동생들은 순교할 수 없었기에 각각 유배를 가야 하는 상황을 a와 같이 고백한다. 당시의 옥중 상황은 보인대학본 《동국교우상교황서》(東國敎友上敎皇書)에 더욱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동국교우상교황서》는 1811년 조선 신자들의 북경의 주교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를 포함한 글이다.18) 《동국교우상교황서》에 실린 편지 <동국교우상교황서>는 조선의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1801년 신유박해에 관해서 보고한 1811년의 편지 및 당시 순교자의 전기와 명단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19) 《동국교우상교황서》에 실려 있는 <동국교우상교황서> 즉 조선인 신자들이 교황 비오 7세에게 보낸 편지는 독립된 자료로 취급되어 <1811년 교황 성하에게 올린 조선 신자들의 편지>로 부르고 있다.20) 《동국교우상교황서》 <동국교우상교황서> ‘이순이’ 조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진다.

 

c. (…) 처형일에 형이 집행되기 전에 먼저 정강이를 맞는 벌을 받았는데, 하나같이 통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네 사람이 함께 형장으로 갈 때, 한마음으로 기뻐했고, 완석은 큰 소리로 천주교를 전했습니다. 루갈다는 시어머니 동서 형제의 마음이 약해질까 하여, 시아주버니 완석에게 큰 소리로 ‘우리를 일깨워 주세요.’ 외쳤습니다. 그러고는 네 사람은 편안한 마음으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귀양 간 세 아이를 잊지 못해 연연해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소리로 위로했습니다.21) 오늘은 육친의 정을 끊고 오로지 주님을 향해야 할 날입니다. 어찌 사소한 사사로운 정에 매일 수 있겠어요. - 《동국교우상교황서》 수록 이순이 조항22) (강조 밑줄, 인용자)

 

세 아이를 귀양 보내고 아이들의 어머니 신희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이 글은 서간보다 더 직접적으로 기술한다. 이 글에서는 시어머니 신희의 고통이 부각되었다. 신희는 자식을 잊지 못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다른 가족들의 위로와 격려로 순교를 받아들인다. 이처럼 이 글에서 유섬이를 포함한 어린 자식들의 존재는 순교자의 입장에서 기술된다. 서술자는 순교자들이 남겨질 어린 자식의 유배라는 고통에 굴하지 않고 순교를 감내했음을 전한다. 유배자의 목소리, 유배자가 된 아이들의 입장은 확인할 수 없으며, 유배 이후의 삶도 알 수 없다.

 

서간 외에 이후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유섬이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자료는 한국 천주교회사 기술의 저본이 된 책이기도 하다.

 

d. (…) 우리는 그들의 전기와 각자의 결말에 대해 웬만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므로 그 이름들을 넣을 수가 없다. 혹자들은 이 집안에서 13명의 순교자를 꼽고 있다. 나이가 어린 세 자녀는 섬으로 유배되었다.23) (강조 밑줄, 인용자)

 

e.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1872) : 제3권 제3장 이 누갈다의 순교

누갈다는 누갈다 대로 두 여자 동반자, 특히 세 어린 자식이 귀양 간 생각을 하고 불안과 슬픔에 잠겨 있는 시어머니를 격려하고 권고하였다. 우리의 영웅적인 동정녀는 시어머니에게 천주께 대한 신뢰를 다시 가지게 하고, 그의 용기를 되살려주며, 그 마음을 이 세상의 인정에서 떼어내어, 이제 문이 열리려고 하는 천국으로 그의 생각을 돌리게 할 줄을 알았다. (중략) 멀리 떨어진 섬으로 따로 귀양 간 세 어린 자식들은 거기서 딸 하나밖에는 아무 후손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딸은 몇 해 전까지 아직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집안은 완전히 멸망하였고, 그 집안에 교우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24) (강조 밑줄, 인용자)

 

d는 다블뤼 주교가 쓴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유섬이가 언급된 부분이다. 다블뤼는 유항검, 유중철, 이 루갈다를 소개한 후 이 집안의 순교자들을 요약 서술하면서 마지막에 어린 세 자녀가 유배되었음을 짧게 언급한다. e는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루갈다의 순교를 다룬 내용이다. 여기서는 루갈다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그녀는 자식 걱정으로 고통과 슬픔에 잠긴 시어머니를 위로하고 권고하여 시어머니가 순교를 받아들이게 한다. 유배되는 아이들보다는 이순이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e는 d보다 자세하고, 앞서 인용한 c의 내용과 유사하다. 그러나 사를르 달레 역시 살아남아 유배지에서 관노비로 살아야 할 아이들에 대한 처지보다는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가 보여준 신앙의 용감함을 강조한다. 즉 달레는 루갈다에게 초점을 맞춘다.25) 그런데 아이들에 대한 소식을 덧붙이면서 “아직 살아 있었다”는 “딸”이 등장한다. 이 딸은 문맥상 유섬이보다는 아우 유일석이나 유일문의 여식으로 읽힌다. 하지만 이 책이 1874년에 발간되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1863년에 죽은 유섬이 일수도 있다.26) 이러한 기록은 유섬이든 혹은 두 아우 중 한 명의 여식이든, 유섬이가 죽은 후 근 10년까지 당시의 교우들이 유배를 간 아이들 소식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현전하는 교회 사료에서 이들에 대한 그 이상의 정보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생존자에 대한 무관심 때문인가? 아니면 박해 시기 천주교 유배자로 살아야 했던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인가? 가족이 순교한 후 남은 어린 자식들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했을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기록은 교회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27) 유섬이는 천주교 신앙 때문에 가족의 죽음과 이별, 관비로 유배당하는 비극적 인물이다. 그 비극은 다만 그녀의 생애가 주는 전기적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교회 문헌에서 순교자들이 처했던 고통의 한 예시이자 순교자들의 강한 순교 의지를 보여주는 근거 제시처럼 활용되었다. 유섬이는 서술의 주체,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자의와 무관하게 천주교 신앙 때문에 유배를 가야 했던 희생자였지만, 그 희생에 대한 가치는 교회도 기억해 주지 않았다. 교회에서조차 유섬이는 9살 때 유배와 함께 무명(無名)의 존재, 역사에서 사라진 존재가 되었다.

 

 

3. 《사헌유집》을 통한 전승 : <부거제>, <제거제유처자문>

 

부모가 순교한 후 거제도로 유배를 간 유섬이의 삶이 의외의 기록을 통해 발견되었다. 하성래가 발견한 《사헌유집》(思軒遺集)에 실린 <부거제>와 <제거제유처자문>이다. 하성래는 이 두 편의 글에 등장하는 ‘유처녀’가 ‘유섬이’(柳暹伊)임을 밝히고, 두 편의 글 원문과 번역문을 소개하였다.28) 사학 때문에 거제도로 유배를 간 인물, 게다가 생몰연대를 추적할 때, 이 두 글의 주인공인 ‘유 처녀’는 유섬이이다.29) 본고 역시 이 견해를 전제한다. 물론 하겸락이 《사헌유집》에 기록한 유 처녀와 유섬이가 동일인인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다음 인용은 유 처녀를 소개하는 도입 부분이다.

 

거제부에서는 71세 된 유 처녀가 있었다. 정조는 사학을 엄금하고 범법자는 반드시 중벌에 처하고, 그 자녀는 관비로 보냈다. 조정의 유명한 벼슬아치 중에도 역시 죄를 범하여 불행을 당하는 자가 많았다. 유는 어느 집안인지는 모르나 역시 명족이라 들었다. 아버지가 사학을 범하여 딸이 관비에 속하게 된 것이다. 나이 7세였다.

 

(원문 : 正廟祖嚴禁邪學 犯者必置重 其子女屬之奴婢 朝中名官亦多犯遭 柳未知

誰家 聞亦名族 父犯邪學女屬官婢 年七歲) 《사헌유집》(思軒遺集) <부거제> 30)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첫째 유 처녀가 유배 온 나이 7세다. 이는 유섬이가 9세에 유배를 갔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하겸락의 오판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고 2장에서 밝혔기에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한다. 두 번째는 ‘정조 때’에 대한 언급이다. 이에 대해서 하성래는 유항검이 순교한 것은 순조 때이나, 윤지충이 순교한 진산박해, 주문모 신부 입국이 발각돼 일어난 을묘박해 등은 정조 때임을 언급하여 정조에 대한 기록의 배경을 설명하였다.31) 위의 인용문을 정조 때 유섬이가 유배를 간 것으로 읽는다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성래 역시 이 글에서의 ‘정조’를 유섬이가 유배를 간 시기로 보기보다는 천주교 박해의 정황과 연결해서 설명하였다. 순조가 즉위한 것이 1800년이었고 신유박해인 1801년은 순조 때이나 그 이전 정조 때 있었던 사학에 대한 배경으로 제시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정조’에 대한 언급에 큰 무리가 없다. 근본적으로 《사헌유집》이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 역사서가 아니라, 문집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문집을 남긴 하겸락은 역사가로서 역사 서술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 문집에 글을 남긴 것이다. 때문에 《사헌유집》 속 두 편의 유 처녀 관련 글은 사료이기 전에 문학 작품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하겸락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유 처녀의 죽음과 관련된 연대는 정확히 기술할 수 있었지만, 들었던 이야기에 기반을 둔 과거 사실 즉 사학과 관련한 내용이나 유 처녀의 유배 당시의 나이는 착오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이 글 속에 유 처녀가 유섬이를 모델로 했다는 점이다.

 

하성래에 따르면, 하겸락은 무신이었으나 학문에 조예가 깊었는데 자신의 문집 《사헌유집》(思軒遺集)을 네 권 남겼다. 그는 1853년(철종 4년) 무과에 을과로 급제했고, 1862년 거제도호부사로 파견되며 이때 알게 된 ‘유 처녀’에 대한 두 편의 글을 지어 《사헌유집》에 실었다. 이 글들은 《사헌유집》(思軒遺集) 권 3 잡저(雜著) 서유록(西遊錄)의 부록에 실렸다. <부거제>는 하겸락이 거제도 부사 때의 견문을 곁들여 쓴 글로, 목민관으로서 하겸락이 직접 느끼고 겪은 일이기 때문에 현실감이 있고 당시의 시대상 혹은 국가가 처한 위급한 사실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32) 유 처녀가 등장하는 글 역시 자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직접 느끼고 겪은 일들을 생생하게 기술하였다. <부거제>가 유 처녀라는 인물의 전(傳)이라면 다른 하나인 <제거제유처자문>은 제문(祭文)이다. 둘 다 사실(史實)로서보다는 실제 사건을 이용한 문학적 글쓰기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두 편의 글을 통해 유섬이가 거제에 유배 가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장르적 성격을 이해하고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의 불일치 때문에 이 자료의 가치를 폄하하기보다는 이 인물을 어떻게 형상화하였는가를 이해하는 것, 문학적 방법론의 이해가 더 중요하다. 하성래가 이 두 글을 발견함으로써 무명의 존재로 역사에서 잊힌 유섬이가 문학적 글쓰기를 통해 역사적 인물로도 다시 호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부거제>와33) <제거제유처자문>에서 유 처녀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교회 문헌 속 유섬이와 설정부터가 다르다. 유항검과 신희의 딸, 이 루갈다의 시누이로서가 아니라, 유 처녀를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그녀의 가족에 대해서는 이름난 가문이었지만 ‘아버지가 사학을 범하여 딸이 관비에 속하게 된 것이다’[父犯邪學女屬官婢]로 관비가 된 연원을 밝힌 정도다. 또한 두 편의 글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유섬이의 생애는 4기로 나뉜다. 1기는 1~9세까지의 거제도로 유배를 오기 전의 생애다. <부거제>에서는 이 시기의 유 처녀를 ‘이름난 가문의 딸’, ‘아버지가 사학을 범하여 관비’가 되었다고 간략하게 전한다.

 

2기는 9세부터 15세 내지는 16세까지의 생애다. 유 처녀는 거제도로 유배를 와서 그 마을의 양모에게 맡겨진다. 유 처녀는 수양모의 뜻을 받들었고, 수양모 역시 그녀를 아끼고 사랑한다. 유 처녀는 수양모에게 바느질을 배우며 수양모 곁에서 살아간다. 이때 유 처녀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하거나 웃지 않고 발길이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柳平生不與人言笑 足跡未嘗出戶外 日惟以針線爲事 官奴輩不敢待以官婢] 이 시기 유 처녀에게 두 번의 위기가 닥치는데 한 번은 혼인의 위기이고, 다른 한 번은 뭇 남성들로부터의 위기다. 13, 14세가 되어 시집보내고자 하는 중매쟁이가 있었으나, 유 처녀는 “나는 선비의 혈육으로 참혹하고 독한 화를 만나 지금 거제 관비가 되었다. 남편을 얻게 되면 반드시 관노(官奴)로서 아들을 낳으면 종이 될 것이요, 딸을 낳으면 계집종이 될 것이니, 이 괴로움을 어찌 당하리오? 다시 시집가라고 내 귀를 더럽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갚으리라”고34) 말하며 결혼을 거부한다.

 

16, 17세 때 유 처녀는 “제 나이 점점 자라 강폭한 남자의 손이 제 몸에 한 번 가해질까 두렵습니다. 몸을 더럽히면 그 욕됨이 크옵니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흙과 돌로 한 집을 굳게 지어 음식을 넣어 줄 수 있는 구멍과 대소변을 집 안으로 처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작은 창을 남향으로 내서 바느질하기에 편하게 하여 주소서”하며 어머니를 설득하여 이를 해결한다. 이는 자신의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유 처녀는 혼인의 제안도 거절할뿐더러 양모를 설득하여 아예 흙돌집으로 들어가 살았던 것이다. 2기는 유 처녀가 여성으로서 성숙해지는 시기이다. 유 처녀는 정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결혼을 거부하고, 이어서 흙돌집이라는 유폐된 공간으로 자신을 가둔다. 이를 통해 본 이 시기 유 처녀의 삶은 나약한 여인의 삶이 아니다. 관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다시 시집가라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갚으리라”, “몸을 더럽히면 그 욕됨이 크옵니다.”라는35) 것이 흙돌집을 짓고 홀로 살게 된 연유이다.

 

3기는 15, 16세부터 40여 세까지의 시기로 이 시기 유 처녀는 흙돌집에서 홀로 지낸다. 이 시기에 유 처녀의 삶은 우선 그녀가 지어달라고 했던 흙돌집의 형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흙돌집은 흙과 돌로 만든 집으로 작은 구멍이 있고, 대소변을 안에서 해결할 수 있게 하며,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은 창이 있을 뿐이고, 다른 모든 것은 외부와 차단된 공간이다. 그녀는 이 공간에서 구멍을 이용해 바느질감과 음식을 교환하면서 산다. 이 시기 유 처녀의 삶을 제문인 <제거제유처자문>에서는36) 수사적 표현을 동원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어둑어둑한 작은 집에 / 벌어진 틈새 하나로 / 햇빛이 뚫고 들어와 / 내 마음 비추면 / 바늘 잡고 밝음 향해 / 밤낮 쉬지 않더니 / 귀밑머리 반백이 되어서야 / 비로소 사람들과 어울렸네”37) 이 삶의 모습이 천주교 신앙을 토대로 한 믿음 생활의 면모였을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성장했던 유섬이의 유년기에 근거한다면, 비록 신앙을 앞세우지는 못하였지만 신앙인으로서의 일상으로 보인다. 햇빛에 의지하여 마음을 비추고, 밝음을 향해 부지런히 바느질하는 유 처녀의 모습에 대한 묘사에서 빛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노동하는 수도자와 같은 삶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4기는 40여세 이후부터 71세까지다. 이 시기 유 처녀의 삶을 하겸락은 ‘예사 사람’(平人)이라는 표현을 통해 서술한다. “유는 이처럼 자신을 보호하며 나이 40여 세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와 예사 사람처럼 살았다. 그러나 몸을 보호하기 위해 한 자 길이의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고을 안 사람들이 모두 그 정절을 알고 감히 더럽힐 마음을 갖지 못하고, 유 처녀라고 불렀다.”38)에서처럼 유 처녀는 40여세에 흙돌집에서 나와 예사 사람처럼 산다. 이후에도 칼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자신의 정절을 지키고자 했고, 마음 사람들로부터 유 처녀라고 불리며 인정을 받는다. 흙돌집에서의 삶이 약 25여 년 전후라면, 예사 사람으로 산 것은 약 30여 년 전후의 기간이다. 제문에서는 “귀밑머리 반백이 되어서야 / 비로소 사람들과 어울렸네 / 두 눈썹에 쓸쓸함 맺히고 / 백발이 온통 머리를 뒤덮더니 / 옥녀의 이가 흔들리고 / 사선의 몸이 말라 / 고희의 나이에 / 초연히 세상을 떠났어라”로39) 표현하고 있다. 앞의 글이 “예사 사람”처럼 산 것을 부각시켰다면, 제문에서는 사람들과 어울렸다는 것과 함께 ‘옥녀’(玉女)나 ‘사선’(謝仙)이라는 표현을 통해 유 처녀를 선녀와 신적 존재로 비유한다. 사선(謝仙)은 천둥을 맡고 있는 뇌신(雷神)이다. 이 시기 유 처녀의 삶을 요약한다면 예사 사람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되 정절을 지키며, 선녀나 신처럼 지내다 71세에 초연히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유 처녀가 죽었다는 보고를 들은 후 하겸락은 유 처녀가 “외로운 여인으로 짝을 만나지 못하고 그 몸을 정결히 하며” 살았다는 점, “여자의 몸으로 참화를 입은 집안에서 태어난 점”을 애석해하고, “그 정과 절개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 장사를 치르고 묘표를 세운다. 또 얼마의 시간이40) 지난 후에 제문을 직접 써서 유 처녀의 삶을 찬양한다. “결혼할 나이에도 행동을 단속하여 깊이 고행했네”,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 선조에게 의로운 뜻을 바치는 게 낫지 않으랴”, “뛰어나고 특별한 정절 / 청사에 보기 드물기에”, “곧은 혼령 어둡지 않으리니 부디 위에서 굽어보소서”라는 것이 그 예다. 특히 하겸락이 유 처녀의 생애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녀의 ‘정결’ 혹은 ‘정절’이다.

 

조선시대 여자의 정절은 유가 질서 속에서 혼인 관계를 중심으로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었다. 결혼하지 못한 노처녀의 정절이나 정결은 칭송의 대상이 아니었다. 결혼했을 경우 남편 외의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 않는, 심지어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수절하는 정절이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유 처녀는 당시 여성들에게 요구한 관습을 거부하고, 혼자 살겠다고 선언하고 이를 실천한다. 여성이 결혼도 하지 않고 동정을 지킨다는 것은 당대로서는 모험과 같은 행위였다. 그런데 유 처녀가 이렇게 한다. 임금이 정해준 것이 유배지에서 관비로 사는 삶이었다면, 유 처녀는 이를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않은 인물이다.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를 이 글에서는 “나는 선비의 혈육으로 참혹하고 독한 화를 만나 지금 거제부 관비가 되었다. 남편을 얻게 되면 관노로서 아들을 낳으면 종이 될 것이요, 딸을 낳으면 계집종이 될 것이니 이 괴로움을 내 어찌 당하리오”41)로 근거를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유섬이는 관비로 유배를 와서도 ‘선비의 혈육’으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고수한 것이고, 결혼 후 자신의 자녀들이 종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결혼하지 않은 것이다. 즉 그녀가 정결을 지키고 혼인도 하지 않은 것은 하겸락의 글에 의하면 과거 양반가의 사람이었다는 자신의 정체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섬이는 신분질서를 고수한 전근대적인 인물인가? 그녀는 유가질서를 지키기 위해 정결을 고수한 인물인가?

 

그렇지 않다. 서학을 모르는 하겸락의 시선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 있지만, 2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유 처녀 즉 유섬이는 누구보다도 천주교 신앙이 견실했던 집안의 일원이었다. 때문에 신분질서나 당대의 관습으로의 정절만으로는 유섬이의 정결함을 파악할 수 없다. 관비였지만 조정의 하명과 당대 사회의 보편 질서를 거부하고 무리의 한 개체로 존재하기보다는 철저하게 단독자로 선 인물이 유 처녀이다. 그녀가 혼인을 거부하고 이를 위해 유배지에서 자신을 더욱 가두어 고립된 삶을 사는 것은 관비였던 유 처녀의 신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행위였다. 유 처녀가 지키고자 했던 정결함은 당대의 지배자인 거제부사 하겸락에게는 신분제를 인정하고 자신의 과거 신분의 정체성을 잊지 않은 채 남성의 윤리관습에 헌신하는 여성의 순결함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하겸락에게 유 처녀의 정결함은 더욱 칭송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고수하고자 했던 정결함의 이유는 관비라는 노예의 삶을 거부하고자 한 수단이었다. 또한 천주교와 관련된 본고 2장의 내용을 고려한다면,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정결은 유가질서에서의 정결보다는 당시 천주교인이 추구한 ‘동정’(童貞)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글뿐 아니라 구전 노래와 설화에서도 유섬이는 ‘유 처녀’ 혹은 ‘유 처자’로 불린다.42) 그만큼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처녀였다는 것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야 하는 당대 사회에서, 노비였지만 노비로서의 삶을 거부하고자 정결을 선택하고 자신을 오히려 철저히 당대 사회에서 격리해 인간 주체로 살고자 했던 존재! 바로 그 존재가 유섬이다.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어릴 때부터 키운 신앙이었다면 신앙이야말로 그녀를 노비가 아닌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본고 2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유섬이는 9세에 유배를 온다. 9세라는 나이는 유년의 경험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이이다. 천주교 신앙에 철저했던 유항검으로 미루어보면 그의 딸 유섬이도 천주 신앙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며, 부모님과 형제들, 특히 자신의 큰 오라비였던 유중철 요한과 새언니 이순이 루갈다에 대해서도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유섬이가 정결, 혹은 동정을 지킨 것은 관비나 혹은 양반사회의 신분질서나 당대 조선의 남성지배질서가 칭송한 여성의 순결함이나 정조 때문이기보다는43) 천주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에 대한 또 하나의 근거는 왜 유섬이가 40여 세에 흙돌집에서 나왔는가에서 찾을 수 있다. 하겸락의 글에서부터 현재 유섬이 관련 다른 글에서 모두 유섬이가 정결을 지키기 위해 흙돌집을 짓고 살았으며, 늘 칼을 몸에 지녔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그런데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유 처녀의 ‘깨끗한 정결’을 강조하는 것은 조선시대 지배자들의 관념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는 것이다.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 흙돌집을 지어 그곳에서 고독한 삶을 살았다면 굳이 40세에 나올 이유가 없다. 40세 이후에도 당시 여성이 홀로 살면서 정절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44) 2016년에 발표된 강희근의 《순교자의 딸 유섬이》에서는 유섬이가 흙돌집에서 나오는 연유를 늙은 양어머니를 돌보기 위해서, 즉 효(孝) 때문으로 설정한다.45) 양모께 효도하기 위해서였다면 처음부터 흙돌집에 들어가지 않고 양모와 살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왜 40세인가? 당시 관비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여자 나이 40세는 관비에서 벗어나는 나이이다.46) 즉 유섬이는 더 이상 관비로, 노비로 살지 않고 ‘예사 사람’(平人)처럼 살 수 있었기에 흙돌집을 부수고 세상으로 나왔던 것이다. 노예로 사느니 더 철저하게 자신을 유폐시켜 사회적 죽음을 선택한 것이 유섬이가 흙돌집에서 고독하게 산 약 25년간의 삶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 후기 사회 이후 점점 붕괴하던 신분질서 속에서 관비들이 관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시기였다는 점, 노비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녀가 선택한 정결 역시 양반들의 지배이념을 수용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천주 신앙으로서의 동정을 지킬 수 있는 안전한 방어막으로 작용했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정결, 혹은 정조는 당대 천주교 여성 신자들의 동정과 외형적으로는 유사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당시 지배자였던 하겸락의 해석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유 처녀의 동정의 근원 즉 천주 신앙으로서의 동정을 간파할 수 없다.

 

 

4. 구비문학과 시극으로의 계승 : <유처자묘>, <처녀의 향수>와 《순교자의 딸 유섬이》

 

하겸락의 문집 외에도 거제도 지역에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유 처녀와 관련된 설화와 노래가 있다. 하겸락의 《사헌유집》의 발견으로 유 처녀가 유섬이임이 밝혀졌고, 거제지역 구비문학으로 전해진 이 두 작품의 주인공 유 처녀 역시 유섬이임을 알게 되었다. 구비전승되었기 때문에 《사헌유집》의 내용과 차이가 있으나 이 작품들에서도 유 처녀는 홀로 결혼하지 않고 정절을 지키며 산 유배자였다는 점이 동일하다. 거제면 설화 <유처자묘>나 구전가요 <처녀의 향수>에서는 ‘높은 신분의 딸’이었다는 것만 언급할 뿐 천주교에 대한 내용은 없다. 특히 설화에서는 유 처녀가 홀로 연좌유배를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귀양을 왔다가 아버지는 귀양이 풀려 올라가고 유 처녀만 남아 거제에서 살다가 죽은 것으로 소개된다.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둘 때 이런 경우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이야기가 전승되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또 ‘회양적’이라는 산적을 소개해 준 사람이 유 처녀였음이 부각된다.

 

설화 <유처자묘>는 그 지역에 있는 유 처자 묘의 기원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하성래가 《사헌유집》을 소개한 후, 이 이야기의 제목이기도 한 유 처녀의 실제 묘를 거제 지역민과 천주교회 연구자들의 협력으로 찾을 수 있었다.47) 다음은 <유처자묘> 전문인데 1979년에 채록한 것이다.

 

안골로 가몬 말이요. 저 안골이라 쿠는데 거(거기) 가몬 유 처자(柳處子)라 쿠는 묘가 하나 있소. [조사자 유 처자?] 유 처자. 그 비석만 쓸쓸하게 서 가 있거만. [청중비석이 아니고] 비석이 돌로 가이고 그 유 처자라 쿠고 백히(박혀) 가아(가지고) 있소. [조사자 유자는 무슨 유자?] 버들 유(柳)자요. 그 다음에 처자, 처자라 쿠는 곧처(處)자지. [조사자 곧 처자하고 자 자는 아들 자지요?]

 

게 유 처자라 쿠는 묘가 지금 쓸쓸하게 지금 우리가 끼고 있는데, 거기 집의 증조부 때 돼서 내려오는 말인데, 증조부가 그때 뭘 한 게 아니라 그 당시 말이지 고을 좌수를 했어요. 좌수를 했는데, 그런께 유 처자가 인자 유 처자가 있은 기가 그때 어떤 고을 관장이, [앞말을 취소하며] 아, 저, 정부에서 그때 인자 이 합방 안 돼서 합방 안 돼서 정승께나 지냈어. 유씨가. 이름은 모리지요. 정승을 지냈던가 뭐 하든가 해서, 못 해서요, 귀양을 왔던 모양이라요. 거제로 귀양을 왔는데, 귀양살이 풀리 가지고 올라가는 판이라. 올라가는 판인데 이 저거 딸을 덷고(데리고) 내려왔는데 딸로 못 덷고 올라갔어. 딸로 못 덷고 올라 가 가이고 그런께 요따가 밀아(미루어) 뿌렸어요. 당신 좀 처리해 돌라고, 길러 돌라고. [조사자 이 집안에?] 우리 집안에 길러 돌라고 밀아 뿌렸어요.

 

그 다음에 죽었다 말이요. 죽은께, 그 전부다 우리가 세밀하게 알아 봤으몬 할 긴데, 이 누 집 자손이라 쿠는 거로 알아 놨으몬 할 긴데 그걸 모리고 그만 그 뿐이라 말이지요.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이 죽어 가지고 묻었다 말이지요. 처이로 죽어가 묻었는데 그래 가 묘만 지금 쓸쓸하게 서가 안 있소? 비석하고.

 

[조사자 다른 이야기는?] 그런 거는 없고요. 그리해서 내가 그런 것은 모리고요. 거기가 뭣이 거제 와서 뭐로 했노 하몬, 거제에 와서 유 처자가 들어서 우리가 지금 회양적(산적)이라고 끼고 적을 붙이가 묵거든. 회양적이라고, 이, 파 끼고 뭐 끼고 해가이고 딱 구워 먹는 거 그걸 처음 거제 와서 그 집에서 그 여자가 맨들었다 쿠거든요. 맨들어서 일반 우리가 요새도 해 먹거든요. 제사 지낼 때 그래서 오늘날까지 본을 떠서 제사 지낼 때 끼가 적을 부치가 묵거든요.48) (강조는 인용자)

 

이 설화 외에도 송곡 마을에 구전되어 전해지던 노래인 <처녀의 향수>는 서울에서 귀양 온 유 처녀가 거제 음지에 귀양 와서 귀양이 언제 풀릴지를 생각하며, 구름같이 돌아갈 날을 그리는 마음을 노래한다.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이라 유처녀가 거제 음재(음지에) 귀양 와서

대구야 청청 일년이야 봉에 구름아 둥실 높이 떴네

나도 언제 평화로저서 구름같이 떠나갈까49)

 

<유처자묘>나 <처녀의 향수>처럼 거제도에는 유 처녀와 관련된 설화와 노래가 동시에 전승되었다. <유처자묘>는 ‘내간리 안골’에 있다는 유 처자 묘가 생긴 유래를 소개한 이야기이고, <처녀의 향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유 처녀의 애달픈 마음을 표현한 노래다.50) 이 노래에서는 유 처녀의 고향이 ‘서울’로 제시되어 있어 유 처녀의 전기적 사실과 차이가 있다. 구전된 문학이기 때문에 가능한 차이다. 단편적인 내용의 설화와 노래이지만, 고향을 그리워한 유 처녀의 심정을 노래로 불렀다는 것, 그녀가 알려 준 음식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하겸락의 글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유섬이의 일면을 보여준다. 또한 이 설화와 노래는 40여 세 이후 유섬이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다. 유섬이는 집안이 몰락하지 않았다면, 글을 배웠을 만한 집안의 딸이었다. 이 루갈다가 순교 직전까지 서간을 남겼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유섬이 역시 어릴 때부터 글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관비가 된 처지에 그녀가 유배지에서 글을 읽고 쓰기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유섬이의 삶이 글로 남을 수 없었다. 유섬이는 바느질을 하고 음식을 만들며 살아야 했다. 때로는 떠나온 고향과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삶이 이야기와 노래로 거제의 삶에 뿌리를 내렸다. 유 처녀 관련 설화, 가요, 음식, 묘가 모두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지역 공동체에서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음을 알려준다.

 

유섬이의 흙돌집에서 지낸 삶이 기도와 묵상의 삶에 비유된다면, 40여 세 이후의 삶은 자신의 지향을 생활 현장에서 실천하며 산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모습을 유섬이 관련 작품들을 통해 알 수 있다. 40세가 넘어 동네 나이 먹은 처자로 그 동네의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부인네들과 음식과 바느질로 소통하며 지냈을 모습, 그 모습에 거제부사도 동네 백성들도 감화되었던 삶, 그 삶을 유 처녀 관련 구비 문학 작품은 형상화한다. 물론 이 작품을 통해 그녀가 신앙생활을 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고독과 노동과 이웃 사랑을 통해 일상 안에 뿌리내린 신앙인의 삶을 보여준다.

 

죽는 것이 신앙 때문이었다면, 사는 것도 신앙 때문이었다. 죽든 살든 어떻게 자신의 생애로 완성하느냐가 중요하다. 양반의 딸이 아닌 노비의 삶에서조차 한 인간의 존귀함을 드러낼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가족들로부터 받은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유섬이의 삶은 순교자로서 죽은 것 못지않게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삶이었다. 특히 지역의 문학 작품 속에 남아 있는 유 처녀라는 인물은 지역 공동체와 함께하며 형제애를 실천하는 가운데, 지역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인간다운 인간의 길이 참신앙의 길이라면, 그 길을 먼저 간 신앙 선조, 그가 바로 사료와 문학 작품을 통해 다시 만나는 인간 유섬이이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할 수 없었던 어린 유배자 유섬이, 전례에 참례하려 해도 할 수 없었던 그녀를 교회는 어떻게 교회의 일원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떠한 문헌에서도 유배 이후 유섬이의 모습에서 교회 공동체와 함께한 자취는 찾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유섬이는 순교자라고 심지어 신앙인이라 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 오직 삶과 죽음으로만 남은 유섬이. 때문에 유섬이를 기억하는 것은 순교자 혹은 백색의 순교자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담론화하거나 성지화하는 것 보다는, 인간 유섬이로 기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인간 유섬이를 어떻게 온전히 교회의 일원으로 수용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옛 문헌을 통해 또 구전을 통해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된 유섬이의 모습은 보통사람들과 함께 하는 유섬이, 그들 안에서 인간애를 나누며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타인으로부터의 존경을 받는 모습으로서의 유섬이(柳暹伊)이다. 양반도 아니지만 노비도 아닌 예사 사람(平人) 유섬이이다. 특히 이웃 사랑으로서의 인간애, 즉 형제애의 강조는 《순교자의 딸 유섬이》에서 더 적극적으로 형상화된다.

 

《순교자의 딸 유섬이》는51) 현대적 감성으로 옛 문헌을 이용하여 강희근이 창작한 시극이다. 유섬이의 삶을 현재의 시점에서 문학의 형식을 통해 다시 쓴 예다. 특히 이전 문학 작품들에서 유섬이가 천주교 신앙과는 무관하게 전개되었다면 이 작품에서 작가는 기존 문헌이나 작품에 전해지는 유섬이 관련 내용을 적극적으로 천주 신앙과 연관 지어 다시 썼다. 때문에 이 작품은 종교 시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전 4막으로 주인공의 생애를 극화하였는데, 첫째 마당은 피어린 초남이 마을, 둘째 마당은 안골의 달, 셋째 마당은 매화나무에 매화, 넷째 마당은 유처녀의 성(城)이며 여기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더했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적인 것과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창작자의 허구가 더해져서 새로운 창작물로 완성되었다. 특히 허구 부분에서는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강조하려는 유섬이의 삶과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작품 속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작품은 시극이므로 공연을 전제로 한 작품이다. 때문에 이 작품은 공연 감상을 통해 천주교 신자들에게 대중화되는 것을 전제한 작품이다. 그 과정에서 허구가 사실처럼 인식된다면 작가의 창작 의도마저도 왜곡될 것이다.52) 문학은 문학으로 감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학을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특히 종교문학의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때문에 유섬이 관련 모든 문헌과 자료에 대한 통합적 접근이 더욱 필요하다.

 

극은 유항검이 순교한 후 살아남은 가족들이 초남이 변두리에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피신해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유항검과 그의 동생 유관검, 그리고 아들 유중철, 유문석이 순교한 다음 날 아침. 그의 아내 신희, 제수 이육희, 며느리 이순이가 순교하러 가기 직전 서로 대화가 오간다. 이후 유섬이는 거제도에 유배되어 양모와 함께 살게 되는데, 윤도령 강도령의 호감과 사랑을 받는다. 이 부분에서 역사적 사료에는 없었던 남성들로부터의 유혹 내용이 창작되었다. 이때 유섬이의 마음을 다잡아 주는 것은 이순이 루갈다의 편지이다. 유섬이는 올케언니가 순교하기 전에 자신에게 15세 이후 봉투를 뜯어보라고 전해 준 편지를 읽는다. 이 편지 설정도 작가의 창작이다. 이는 작가가 유섬이와 루갈다의 연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창작한 것이다. 편지 내용은 “온갖 어려움이 올지라도 정덕을 지키며 살아 달라는”53) 당부의 말이 핵심이다. 이 역시 루갈다 혹은 천주교와의 연계성을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설정이다.

 

4막은 유섬이의 16세부터 41세까지 흙돌집살이 25년을 약술한다. 유섬이는 정결을 지키기 위해 양어머니에게 “제가 자신이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은 가족들을 위해, 가족들이 옳다고 하신 일을 지켜 내는 일”이라며,54) “저는 쓰러지지 않으면서 쓰러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라고55) 고백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흙돌집을 지어달라고 청한다. 이후 흙돌집 생활이 이어진다. 흙돌집을 부수려는 어장주 변학술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지만, 다른 남성인 이난돌과 이웃의 도움으로 위험을 모면한다. 유섬이는 바느질을 하면서 지내고, 마을 사람들이 그녀와 그녀의 흙돌집을 보호해준다. 관청에서 형리들이 나와 유섬이의 돌집을 깨려고 했을 때도 “유섬이는 이 동네의 살아있는 법, 이 동네의 자존심”이라고 하면서 유섬이가 혼자 거하는 흙돌집을 함께 지켜낸다.56) 이 역시 창작으로 역사적 공백을 메운 예이다.

 

《사헌유집》에서는 유섬이가 왜 흙돌집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동기가 확실하지도 않고, 구체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순교자의 딸 유섬이》에서는 기존 문헌자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천주교 신앙을 통해 구현한다. 유섬이는 기도 안에서 병환이 든 양어머니를 위해 그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정한다. 기도하는 모습, 예수님을 향하는 유섬이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유섬이는 병환이 든 양어머니인 ‘초시댁’을 돌보기 위해 흙돌집을 허물게 하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동네 사람들의 환영 속에서 흙돌집에서의 25년 동안의 독거 생활을 끝낸 유섬이는 “저는 이 집에 들어가 살면서 여러 가지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흙돌집 밖에 여러분과 이웃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 곁으로 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흙돌집이 되겠습니다. 살아있는 흙돌집이 되겠습니다.”라고57) 고백한다. 이에 동네 사람들의 감탄과 환대로 이 작품은 끝난다.58)

 

이 시극은 사료에서 주요한 몇 가지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가 유섬이의 삶을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해 창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유섬이의 정결을 강조하며, 이를 지키기 위해 흙돌집을 지어 그곳에서 고독한 삶을 사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기존의 유섬이 관련 사료나 작품과는 무관하게 유섬이가 흙돌집 안에서 기도 생활을 했다는 것, 이순이 루갈다가 그녀에게 편지를 남겼다는 것, 흙돌집에서 나오게 되는 이유가 양모의 병환 때문이었으며, 흙돌집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것을 이웃 사랑으로의 확대로 설정한다. 이 작품의 작가 강희근은 이 작품을 통해 한국 천주교에서 잊힌 유섬이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특히 유섬이의 정결과 신앙심, 또 이순이 루갈다와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1막의 시작 장면과 루갈다의 편지 장면을 창작한다. 또한 에필로그를 통해 유섬이가 ‘순교자의 딸답게 매운 피바람 속에서도 매화로 피었다가 그 향기로 주님의 집에 닿았다’고59) 덧붙인다. 유섬이가 흙돌집에서 나와 마을에서 어떻게 30여 년을 살았는지에 대한 내용은 이 작품에서 다루지 않는다.

 

또한 이 작품은 <유처자묘>나 <처녀의 향수>와 같이 유섬이의 이웃 사랑, 형제애를 강조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유섬이가 흙돌집에서 나오는 것을 이웃 사랑과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웃 사랑을 유섬이가 흙돌집 생활을 마치는 근거로 설정하였다. 유섬이는 “이웃”의 존재와 “이웃 사랑”을 깨닫고 흙돌집을 나온다. 이 부분에서는 관비와 관노들이 40세 이후 50세를 전후하여 노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노비는 그들 소유주에 따라 국가기관이나 개인에게 예속되어 노동력을 강제 정발 당하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점차 노동력 제공의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공사노비 모두 외거(外居) 하면서 신공(身貢)만을 납부하고 있는 경향이 증가하였다.60) 솔거노비(率居奴婢)의 경우에도 1672년에서 1825년 사이 연령별 구성을 보면, 솔거노비 연인원 541명 중 15세 이하 32명, 16~40세 408명. 41~50세 42명, 51세 이상 10명, 연령 미상 49명이다. 연령이 기재된 노비 492명의 83%에 해당하는 408명이 16~40세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41세 이상의 노비들도 대부분 남성인 노(奴)였다.61) 즉 이러한 조선 사회의 역사적 배경이 이 작품에는 전혀 고려되지는 않았다.

 

이 작품에서 유섬이는 이웃들과 격리되어 홀로 25년을 살았지만, 그 기간은 유섬이에게 이웃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정결함을 지키며 동정녀로 하느님께 향했던 삶에서 유섬이는 이웃 사랑 즉 이웃 한가운데로 파견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생략되었다. 이는 <유처자묘>나 <처녀의 향수>보다 아쉬운 점이다. 유섬이가 흙돌집에서 나와 이웃과 더불어 살았던 30년여의 삶이야말로 사료가 빈약하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적극 활용될 수 있다. 또한 현재의 관점에서 유섬이의 존재를 어떻게 의미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주제를 더 구체화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보통 사람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유섬이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선언으로 끝난다. 이는 시극이라는 장르가 갖는 한계이기도 하다. 시극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시공간에서의 공연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작가는 흙돌집에서 나온 유섬이의 삶보다는 흙돌집에서의 삶에 비중을 두면서 유섬이가 주님의 사랑을 통한 이웃 사랑을 깨닫는 절정의 순간을 극의 결말로 삼은 것이다.

 

 

5. 맺음말

 

- 사진 1. 2014년 촬영한 묘와 묘비석.

 

이상 본고에서는 사료와 문학 작품을 통해 기록되고 형상화된 유섬이라는 인물의 특징과 그 전승 과정을 분석하였다. 또한 유섬이를 역사적 인물로만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형상화된 문학적 인물로 보고 그 특징을 분석하였다. 본고는 1차 사료를 통해 기록된 유섬이와 문학적 표현을 통해 형상화된 유섬이라는 인물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데서 시작하였다. 유섬이의 삶과 유섬이를 통해 각 시대의 문학이 어떻게 그녀의 삶을 형상화하고자 했는가에 대한 구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역사적 존재로서의 유섬이는 사라지거나 더 왜곡될 것이다. 그렇다고 사료만이 유섬이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문학 작품도 유섬이의 삶과 그 삶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표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섬이의 존재를 다시 역사로 소환시킨 것은 문학적 글쓰기와 구비문학이었다.

 

2014년 《사헌유집》에서 유섬이와 관련된 글이 발견된 이후 역사 속에서 누락되었던 유섬이의 삶이 조명받기 시작하였다. 하성래는 《사헌유집》의 유섬이 관련 내용을 소개하면서, 유 처녀의 묘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62) 이후 2014년 5월에 거제도에서 유 처녀의 묘가 발견된다. [사진]은 묘가 발견된 해의 묘와 묘비석을 찍은 사진이다.63) 묘비석에는 ‘유처자지묘’(柳處子之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묘가 발견되면서 현재까지 거제도 지역 사회는 지역 문화를 살리고 지역 경제를 살리는 일환으로, 천주교회는 이 역사적 인물을 교회사로 수렴시키고자 하는 과정으로 유섬이 기념사업이 진행되는 중이다. 그러나 학술활동에서는 별다른 관심이나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유섬이 묘는 관비의 묘라는 특징까지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묘 주변 성역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섬이에 관한 역사 왜곡이나 몰이해가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본고는 유섬이 관련 사료와 문학 작품을 통해 유섬이의 삶에 주목하였다. 유섬이는 신유박해로 부모를 잃고 유배자가 되어 관비로 살아야 했지만 동정을 추구하며 노비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킬 수 있었고, 이웃 사랑으로 세상에서 산 인물이다. 그런데 유섬이는 순교자는커녕 신앙인이었다는 확증도 없다. 부모의 신앙 때문에 유배를 당한 인물일 뿐이며,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운명처럼 다가온 박해의 희생자로 관비가 되어야 한 비운의 인물이었으나, 스스로 노예가 아닌 인간의 길을 감으로써 지역 공동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된 인물이다. 때문에 유섬이를 기억하는 것은 인간 유섬이로 기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인간 유섬이를 어떻게 온전히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계승할 것인가가 앞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유섬이와 같이 유배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 천주교회사를 보완해야 하는 것뿐 아니라 유섬이의 신학적 가치를 공론화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순교자 혹은 성인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었던 유섬이라는 존재는 평신도 영성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복음화와 연관될 수도 있다.

 

본고는 유섬이를 통해 유섬이라는 한 인물이 어떻게 기록과 작품을 통해 전승되었는가를 추적하고, 이 과정에서 유섬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특징과 의미를 밝혔다. 유섬이를 통해 한국 천주교 박해시대 유배자들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유배문학의 가능성도 가늠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남은 과제로 이어갈 것이다. 특히 유섬이 관련 사료에 대한 철저한 고증 연구는 교회사 연구로, 또 묘와 관련된 연구 역시 고증을 통한 관련 학계의 후속 연구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문학 텍스트로서 《사헌유집》에 남은 유섬이 관련 두 작품의 연구와 《순교자의 딸 유섬이》 역시 본격적인 작품론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본고는 이를 위한 시론이었다. 특히 《사헌유집》 속 <부거제>와 <제거제유처자문>은 하겸락에 대한 작가론과 한문학 연구를 통해 더 심층적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연구과제로 남긴다. 유섬이는 교회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며, 조선 천주교가 낳은 새로운 인간형의 하나였다. 역사와 문학을 통해 전승된 유섬이라는 인물은 동정을 지킴으로써 신앙을 이어가고, 이웃 사랑으로 이를 완성하여, 200여 년의 시간을 거쳐 다시 천주교회 공동체로 돌아오게 된 인물이다.

 

* 본고는 2017년 4월 23일 교회사 아카데미 ‘학술답사’에서의 발표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토론에서 고견을 주시고 지도해주신 조광 교수님, 논문 투고 후 심사를 맡아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드린다.

 

 

참고문헌

 

강희근, 《순교자의 딸 유섬이》, 가톨릭출판사, 2016.

고영화, 《거제도 유배고전문학 총서》, 거제시청, 2014. 2.

구경혜, <1801年 公奴婢 革罷에 關한 小考>, 梨花女子大學校 大學院 석사, 1978.

김건태, <19세기 공노비 후손들의 삶 - 제주도 대정현 사례 ->, 《民族文化硏究》 69, 민족문화연구원, 2015.

김상환, <조선후기 공노비(公奴婢)의 신분변동 - 17, 8세기 단성현(丹城縣) 호적대장을 중심으로 ->, 《복현사림》 12권, 경북사학회, 1989.

김영익, <유관검의 천주교 신앙과 그 특성>, 《한국교회사아카데미 논총 1》, 한국교회사아카데미, 2016.

김윤선, <한국 천주교에 나타난 서간의 전통 : 이순이 루갈다 가족의 서간을 중심으로>, 《문학과 종교》 22-1, 한국문학과 종교학회, 2017. 3.

- - -,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편,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서간 재고>, 《상생과 희망의 영성》,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6.

김진소 편, 양희찬 · 변주승 옮김, 《이순이 루갈다 옥중편지》, 흐름, 2010.

- - -, 《천주교 전주교구사》, 천주교 전주교구, 1998.

박영민, <19세기 지방관아의 교방정책과 관기의 경제현실 - 강계부(江界府)의 <교방절목(敎坊節目)>을 중심으로 ->, 《민족문화연구》 50,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9.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上 · 中,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 1980.

앙투안 다블뤼, 유소연 역, <초남이의 유씨 집안사람들>,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윤민구 옮김,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임영정, <조선초기의 관노비(官奴婢)>, 《동국사학》 19,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1986.

전형택, 《조선후기노비신분연구》, 일조각, 1989.

정병설, 《죽음을 넘어서》, 민음사, 2014.

조 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 - -,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기초》, 경인문화사, 2010.

- - - 역주, 《역주 사학징의》 I,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

하성래, <거제로 유배된 유항검의 딸 섬이의 삶>, 《교회와 역사》 46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4.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문생활사연구소 편, 《한국구비문학대계》 8-2, 역락, 2014.

 

-----------------------------------------------------

1) 《사헌유집》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癸亥七月余遞任將歸 刑吏告柳處女身死 年爲七十一歲(國法犯逆奴婢身死則以檢驗 狀報于巡營 故來告)” 계해 7월은 철종 14년, 서력으로 1863년이다.

 

2) 해당 원문은 ‘父犯邪學女屬官婢 年七歲’이다.

3) 이에 대해서는 본고의 다음 장인 3장에서 상술하겠다.

 

4)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천주교 전주교구, 1998, 92~95쪽 참고. 김영익, <유관검의 천주교 신앙과 그 특성>, 《한국교회사아카데미 논총 1》, 한국교회사아카데미, 2016, 12쪽~14쪽 참조.

 

5) ‘평신도 성무대행’은 ‘가성직제도’라는 용어와 같은 의미의 용어이다. 조광은 ‘가성직제도’의 용어가 갖는 의미의 혼동을 염두에 두고 이를 ‘평신도 성무대행’으로 부를 것을 제기한다.

 

6) 본고의 4장에서 다루게 될 설화 <유처자묘>에 따르면 유 처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음식을 기억하여 이를 그 동네 주민에게 전파한다. 어린 시절의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준 것은 유섬이가 9세 이전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이는 조광 교수의 의견이기도 하다.

 

7) 김윤선, <한국 천주교에 나타난 서간의 전통 : 이순이 루갈다 가족의 서간을 중심으로>, 《문학과 종교》 22-1, 한국문학과 종교학회, 2017. 3, 42쪽.

 

8) 이순이 서간에 대한 연구는 김윤선의 위의 논문과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편,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서간 재고>, 《상생과 희망의 영성》,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6, 245~274쪽을 참고할 것.

 

9) 이순이, 김진소 편, <이순이 루갈다가 두 언니에게 보낸 편지>(김종륜 필사본), 《이순이 루갈다 옥중편지》, 흐름, 2010, 61~62쪽(영인본).

 

10) 김진소 편, 위의 책, 49쪽.

11) 정병설, 《죽음을 넘어서》, 민음사, 2010, 127쪽.

 

12) 왜 이순이는 ‘섬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어볼 만하다. 우선 그 이유는 조선사회의 풍속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에서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여성은 결혼 후 주로 택호로 불렸으며, 가족 내에서는 이름보다는 관계를 표현하는 호칭으로 불렸다. 때문에 이순이 역시 서간에서 굳이 섬이를 밝힐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13) 여기서 ‘큰딸’이 유중철과 유문석 사이에 있는지, 아니면 유문석과 유섬이 사이에 있는지 역시 확실하지 않다. 큰딸의 나이에 대한 실증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원문의 어순과 다르게 현대역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재고해야 한다. 주석을 이용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교회의 현대역 원칙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본고에서는 현대역한 예문을 함께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15)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 I,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 65~66쪽.

 

16) 이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日碩, 全羅道羅州牧黑山島, 日文, 康津縣薪智島, 竝爲奴, 女暹伊年九, 慶尙道巨濟府爲婢” 승정원일기 1842책 (탈초본 97책) 순조 1년(1801년) 10월 6일 기유 32~37 기사.

 

17) 그렇다면 이순이 서간과 이들 사료의 차이 즉 유섬이 유배지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사료의 사실성을 우선시한다면 이는 이순이나 이순이 서간 필사자의 실수나 착오로 보인다. 또는 형 선고 이후 집행 과정에서 변동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더 이상 확인할 수 없다. 이순이의 경우는 평안도 관비로 판결 받았으나 이후 가는 도중 취소되어 전주 감옥으로 다시 돌아와 순교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순이가 언니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 정황을 남긴 바 있다.

 

18) 《동국교우상교황서》에 대한 사료적 연구는 조광의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기초》(경인문화사, 2010)를 참조할 것.

 

19) 이 자료집에는 이 편지 외에도,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동국교우상북경주교서>와 <동국교우상북경주교재서>, <북경주교답조선교우서> 등 모두 네 종류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조광, 위의 책, 211~212쪽 참조.

 

20) 조광, 위의 책, 212쪽. ; 달레, 최석우 · 안응렬 역, 《한국천주교회사》 中, 한국교회사연구소, 30쪽.

21) 이 부분의 한문원문은 ‘其姑猶有眷戀, 三兒之意, 兩人同同勸慰曰’이다.

 

22) 이 글의 한글역은 정병설의 역을 인용하였다. 정병설, 《죽음을 넘어서》, 민음사, 2014, 216쪽. 원문은 《東國敎友上敎皇書》(한문본, 대만 보민대학 소장) <이순이> 조항이다. 이 자료는 윤민구 옮김,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에 번역문이 실려 있다.

 

23) 앙투안 다블뤼, 유소연 역, <초남이의 유씨 집안사람들>,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230쪽.

24)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上, 한국교회사연구소, 554~555쪽.

 

25) 이는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참고한 저본이 다블뤼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유사점이기도 하다.

 

26) 이에 대해서는 더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이에 대해서는 문제만 제기하고 추후 다른 자료들이 발견된다면 이를 보완할 것이다.

 

27) 여기서 드는 또 하나의 질문은 당시 우리나라 법 시행의 기준이었던 《대명률》에서 모반대역죄인의 가족은 연좌제로 처해져서, 16세 이하의 자녀와 처첩은 모두 관비로 보내지는데 그 기준의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죄인 당사자의 육체적 죽음뿐 아니라 그의 어린 자식의 사회적 죽음을 통해 죄인에게 중벌을 배가시킨 잔인한 처벌의 방식인 건지 16세 이하 아이들의 생명권을 보호해주기 위한 법적 배려였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28) 하성래, <거제로 유배된 유항검의 딸 섬이의 삶>, 《교회와 역사》 46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4.

29) 하성래, 같은 글, 29쪽.

30) 하성래, 위의 글, 28~29쪽에서 재인용.

31) 하성래, 위의 글, 28쪽 각주 6)의 내용.

32) 하성래, 같은 글, 32쪽.

 

33) <부거제> 원문은 다음과 같다.

<附巨濟> 哲宗 壬戌二月 外除爲巨濟府使 巨濟卽南邊一島邑也 見乃梁渡頭有撫吏樓 昔我從先祖文孝公敬齋先生 登臨題詠而年久無蹟 乃刊板以懸之 府有七一歲柳處女 正廟祖嚴禁邪學犯者必置重 其子女屬之奴婢 朝中名官亦多犯遭 柳未知誰家 聞亦名族 父犯邪學女屬官婢 年七歲 邑婆收養爲女 敎以針線 柳平生不與人言笑 足跡未嘗出戶外 日惟以針線爲事 官奴輩不敢待以官婢 年十三四 有欲嫁之者 柳曰吾以士夫之血肉遭禍慘毒 今爲巨濟官婢矣 作夫則必官奴 而生子爲奴 生女爲婢 吾豈忍爲哉 更有以嫁人汚我耳者 必以死爲報 事義母順志 母亦愛護如己出 柳年至十六七謂母曰吾年漸長强暴可畏男子之手 一加吾身則汚吾辱大矣 願以土石堅策一屋 置飮食出入之竇 置大小便處于屋中 又向陽出一小窓以便針刺 母如其言 柳以此自保 至年四十餘然後 始如平人處 猶以尺劒常隨之 府人皆知其貞 無敢生汚之心 稱以柳處女 癸亥七月余遞任將歸 刑吏告柳處女身死 年爲七十一歲(國法犯逆奴婢身死則以檢驗 狀報于巡營故來告) 噫噫 天地萬物莫不有陰陽 寃哉柳女孤陰不藕 潔其身 寄斯世七十有一年 其貞白之節寃恨之氣 徹于九天 若使處女爲男子 身出而事君 忠可貫日月 誠可透金石 惜乎爲女子 身生於慘禍之家也 其情其節 寧忍泯沒卽遺由吏問其送終之具何者 未備曰唯棺木斂布未具 余乃辦給更使由吏護喪治葬 又使兵校往占地 必取無水氣 無崩?處 有巖石可以鐫刻處埋之 特鐫七十一歲柳處女之墓 九字於墓 九字於墓側巖面以表. 하성래, 위의 글, 28~29쪽에서 재인용. 번역문은 하성래의 글을 참조할 것. 본고에서 인용한 한글 번역문도 모두 하성래의 번역문을 기준으로 인용했다.

 

34) 하성래, 같은 글, 28~29쪽.

35) 현대역 번역문은 하성래, 같은 글, 29쪽.

 

36) 원문과 한글역을 본고에서 인용할 때는 서종태의 한글 역 <거제 유처자를 제사지낸 글>에서 했으며, 이 역시 하성래의 글에서 재인용하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하성래, 30~31쪽 참조.

惟靈 貞玉之姿 寸鐵之腸 夙遭鞫? 隷于玆邦 書名鹵簿 白粲爲伍 年及縱? ?操?苦 相彼春林 時物烟縕 角角鷄鳴 俟俟鹿奔 各爲匹? ?育?生 我有形氣 稟于陰陽 手攀園花 非不永傷 鳥鼠同穴 爲物之疹 鳳與?群 亦?其倫 無寧自潔 獻于先人 視我霜刃 礪疇敢? ??狂荒 吐舌?氣 闇闇圭竇 ?然一隙 天日透光 照我心曲 持針嚮明 晝夜不息 ?髮半華 始與人齒 雙眉蕭颯 素?盈咫 玉女齒搖 謝仙形槁 及稀之年 ?然觀化 孤貞特節 靑史罕? 昔我?府 略加褒愍 ??敦? 磨崖表鐫 侈觀一方 昭示無窮 弟今繼踵 玆曠想 具送?? ?文以慰 貞魂不昧 尙冀鑑右

 

37) 하성래, 같은 글, 30쪽. 

38) 하성래, 같은 글, 29쪽.

39) 서종태, <거제 유 처자를 제사지낸 글> ; 하성래, 같은 글, 31쪽에서 재인용.

40) 이 시기는 삼우제 설과 사망 후 1년 정도 후의 설이 제기되었다.

41) 하성래, 같은 글, 28~29쪽.

42) 이들 작품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논한다. 하겸락이 남긴 제문에서도 ‘유 처자’로 불렸다.

43) 적어도 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녀의 천주신앙에 대한 동기부여 역시 배제할 수 없다.

 

44) 이에 대해서는 본고의 심사자는 40여 세 여인은 반백인 노인과 같았으므로 정절을 지키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러한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정절을 지키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면 굳이 흙돌집에서 나온 후에도 유 처녀가 ‘한 자 길이의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 내용을 납득할 수 없다. 정절을 지키는 것이 젊었을 때보다는 쉬웠을지 몰라도 40세 이후 여인도 정절을 위협하는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적어도 이 작품 속 유 처녀의 경우는 그렇다.

 

45) 강희근, 《순교자의 딸 유섬이》, 가톨릭출판사, 2016, 106쪽.

 

46) 40세 관비 해제는 조광 교수님의 가르침에 도움을 얻었음을 밝힌다. 또한 조선 후기 사회에서 관비에 대해서는 전형택의 《조선후기노비신분연구》를 참고할 것. 이 책에 따르면 50세 이후에 관비들은 노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조선 후기 사회로 갈수록 신분질서가 붕괴하면서 노비가 양인이 되는 경우 역시 점점 증가하였고, 41세 이상의 노비들은 대부분 남성인 노(奴)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의 4장 각주 60)과 61)에 해당하는 본문 내용에서 상술하였다.

 

47) 《평화신문》 2014. 5. 25과 《가톨릭신문》 2014. 5. 25. 3면 기사 참조. 그런데 교회 신문에서는 이 사실을 교회 인사의 발견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거제도 향토신문이라 할 수 있는 《거제시민뉴스》(2014. 7. 11)에서는 마을 이장 윤성부 씨가 최초의 발견자라고 기술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윤성부 이장은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당해 연도 4월 말에 무덤과 묘비석을 확인했다고 증언한다. 이 신문은 하성래 박사와 서종태 교수가 유섬이의 묘를 확인하기 위해 거제를 방문했지만 실패하고, 이후 윤성부 이장이 발견하면서 천주교 등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전한다.

 

48) 거제면 설화 <유처자묘>, 《한국구비문학대계》 8-2, 364~364쪽. 채록지 :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면 내간리, 구연자 : 김형택, 채록자 : 정상박, 최미호 조사. 채록일 : 1979. 8. 9.

 

49) 고영화, 《거제도 유배고전문학 총서》, 거제시청, 2014. 2. 51쪽. 이 책에서는 ‘류 처녀’로 표기되어 있으나, 본고에서는 유섬이의 성씨가 柳 씨이나 문화 柳 씨가 아니기 때문에 한글로 표기할 때는 ‘류’가 아니라 ‘유’로 표기해야 함을 고려하여 모두 ‘유섬이’의 성씨와 같이 ‘유 처자’, ‘유 처녀’로 통일하였다. ‘류 처녀’나 ‘류 처자’로 표기된 것은 유(柳) 씨 성의 본을 혼동하여 한글 표기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오류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 심사자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50) 소개한 고영화는 이를 시조라고 했지만 본고에서는 구전가요 혹은 노래로 칭하였다.

51) 강희근, 《순교자의 딸 유섬이》, 가톨릭출판사, 2016.

 

52) 2017년 5월 10일 강희근의 《순교자의 딸 유섬이》가 제 20회 한국가톨릭문학상 특별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마산교구의 기획에 의해 간행되었으며, ‘신앙이 신앙으로서도 역사가 되는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고 저자 소감을 밝혔다. 2017년 10월 이후 수상작은 시극으로 공연될 예정이다.

 

53) 강희근, 같은 책, 73쪽.

54) 강희근, 같은 책, 86쪽.

55) 강희근, 같은 책, 같은 곳.

56) 강희근, 같은 책, 104쪽.

57) 강희근, 같은 책, 108쪽.

58) 강희근, 같은 책, 같은 곳.

59) 강희근, 같은 책, 110쪽.

60) 전형택, 《조선후기노비신분연구》, 일조각, 1989, 6쪽.

61) 전형택, 위의 책, 57쪽.

 

62) 하성래가 《사헌유집》을 소개할 당시 유 처자의 묘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맺음말에서 ‘71세유처자지묘’가 적혀있는 유 처녀의 묘비와 묘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하성래, 같은 글, 33쪽. 그런데 발견된 묘의 묘비는 ‘71세’가 빠진 ‘유처자지묘’이다. 이런 차이의 연원에 대해서 밝혀야 할 것이나, 본고에서는 이보다는 텍스트에 기반을 둔 문학 작품 연구로 한정하였음을 밝힌다.

 

63) 사진은 조광 교수님께서 촬영하신 사진이다. 현재는 이런 모습이 아니라 묘지가 재정비되고 있다.

 

[교회사 연구 제50집, 2017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윤선(고려대 문화창의학부)]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물음표가 있을 곳 외에는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파일첨부

2,34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