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종교철학ㅣ사상

교회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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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빈 [ssk5762] 쪽지 캡슐

2017-08-13 ㅣ No.336


현대과학이 가톨릭 환경에서 발달한 것은 그냥 우연이었을까? 혹은 가톨릭 자체에 과학의 성공을 낳게 했던 그 무엇이 있었을까? 질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요즘 세간에 떠도는 의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많은 학자들이 점차 그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놀라운 대답을 내놓았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가톨릭교회가 과학에 적대심을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편견은 교회가 과학적 탐구를 방해했다는 널리 만연된 믿음에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John Henry Cardinal Newman 

 

그러나 비록 갈릴레오 사건이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아주 나빴다 하더라도, 19세기 성공회에서 개종했던 유명한 뉴먼 추기경John Henry Cardinal Newman은, 이것이 실제로 생각나는 유일한 예라는 것은 뭔가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Nicolaus Copernicus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태양중심설을 설명하기 위해 그린 동판화.

                             그림 아래 오른쪽에 그가 있고, 왼쪽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있다.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1473-1543)에 대한연구를 중심으로 논란이 있었다. 일부 현대인들은 코페르니쿠스를 성직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1490년대 후반에 플라우엔부르크Frauenburg 대성당의 참사회원이기는 했지만 그가 종교계에서 고위 직위를 맡았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가 성직수임식을 받았을 것이라는 한 가지 암시는 1537년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Sigsmond가 그를 공석인 감독제 자리의 후보자 4명 중 하나로 호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성직지위가 무엇이었든 간에 코페르니쿠스는 종교가족 출생이었다. 가족 모두가 성 도미니쿠스 제 3수도회Third Order of saint Dominic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평신도에게까지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성직자로서의 임무와 전통에 참가할 기회를 넓혔었다.(註 : J. G. Hagen, "Nicolaus Copernicus," Catholic Encyclopedia, 2nd ed., 1913)

 

 

 

교황 클레멘스 7세

 

과학자로서 그는 종교계에서 대단히 알려진 인물로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는 달력개혁 문제와 관련해 그와 상담했다. 1531년 코페르니쿠스는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천문학적 지식에 관한 개요를 준비했다. 그것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교황 클레멘스 7세 요한 알브레히트 비트만슈테터Johann Albrecht Widmannstetter를 불러들여 바티칸에서 그 주제에 관하여 공개강의를 하도록 했다. 교황은 그 공개강의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註 : Jerome J. Langford, O.P., Galileo, Science and the Church<New York: Desclee, 1966>, 35)

 

 

교황 파울루스 3세와 손자들(티티안, 1546년 카포티몬테 박물관, 나폴리)

 

반면에 교회와 학문적 동료들은 모두 코페르니쿠스에게 그의 연구를 일반인들을 위해 발표할 것을 간청했다. 그리하여 몇몇 고위 성직자와 친구들의 부탁으로 코페르니쿠스는 마침내 『천체궤도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발표하여 1543년 교황 파울루스 3세에게 헌정했다. 코페르니쿠스는 기존 천문학의 많은 부분을 고수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누구보다 지구중심우주론(천동설)을 가정한 유명한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은 완전히 둥근 천체모형과 원형궤도, 그리고 행성의 일정한 회전속도 등과 같은 그리스 선구자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소개한 중요한 차이점은 그가 지구가 아닌 태양을 그 시스템의 중심에 놓았다는 것이다. 이 태양중심우주론(지동설) 모델은 움직이는 다른 행성과 마찬가지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가정이었다.

성서Holy Scripture에 대한 이런 반대가설을 프로테스탄트들이 거세게 반발함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은 갈릴레오 사건이 있을 때까지 공식적으로 가톨릭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물리연구 외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시스템의 견해를 반박하는 데 도움이 된 망원경으로 중요한 천체관측을 했다. 그는 달에 있는 산을 관측하고 천체가 완전한 구형이라는 고대의 확신을 반대했다. 그는 목성을 도는 4개의 달을 발견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고대인들이 알지 못했던 천체현상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궤도를 따라 도는 행성을 더 작은 위성이 뒤쳐져 떨어지지 않고 함께 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지동설을 반대하는 의견 중 하나는 지구가 도는 동안 달이 뒤쳐져 떨어져 나가리라는 것이다). 갈릴레오의 금성의 위성발견은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을 찬성하는 또 다른 증거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의 망원경으로 관찰한 달의 표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

 

 

처음에 갈릴레오와 그의 연구는 저명한 교회관계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곧 유명해졌다. 1610년 말,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 신부는 갈릴레오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동료 예수회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을 통해 그 발견이 옳음을 증명했다고 전했다.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 신부

 

pope gregory xiii new calendar

 

이듬해 갈릴레오가 로마에 갔을 때, 종교계와 비종교계 사람들로부터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그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나는 유명한 추기경들, 고위 성직자들 그리고 이 도시의 왕족들로부터 호의를 받았다.” 그는 교황파울루스 5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경청을 즐거워했고, 로마대학의 예수회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활동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갈릴레오는 기뻤다. 추기경, 학자 일반 지도자 앞에서 크리스토퍼 그리엔베르거Christopher Grienberger 신부와 클라비우스 신부의 학생들은 그 위대한 천문학자의 발견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이들은 저명한 학자들이었다. 개인적으로 갈릴레오의 목성의 달 발견을 증명한 그리엔베르거 신부는 지구의 축과 나란한 축을 중심으로 망원경이 돌아가게 하는 적도가대를 발명한 능숙한 천문학자였다. 그는 또한 오늘날 사용하는 반사 망원경의 발전에 기여했다(註 : Joseph MacDonnell, S.J., Jesuit Geometers<St. Louis: Institute of Jesuit Sources, 1989>, 19).

클라비우스 신부는 당시 위대한 수학자 중 하나로, 그레고리력(1582년에 효력이 발생하였다)을 만드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 달력은 옛 율리우스력을 귀찮게 했던 부정확성을 해결했다. 태양년의 길이와 태양년과 일치한 달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날의 수―400년마다 97개의 윤날이 있다고 설명함―에 관한 그의 계산은 너무도 정확하여 오늘날의 학자들도 어떻게 그가 그것을 계산하였을까하고 놀란다(註. : 같은 책)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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