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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하늘로 떠난 우리들의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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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9 ㅣ No.517

[허영엽 신부의 ‘나눔’] 하늘로 떠난 우리들의 스타

 

 

- 2013년 8월 교구청 마당에서 김지영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님과 함께.

 

 

지난 2월19일 아침 일찍 부음이 날아들었다. “신부님!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님이 선종하셨습니다.” 난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켜고 문자를 찾았다. “♥♥♥늘 감사하고 제가 의지하는 신부님, 아기 예수님의 성탄의 은총이 늘 신부님과 함께 하길 기도할게요.♥♥♥”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님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였다. 혹시 당신의 마지막을 직감하셨던 것은 아닐까. 다른 때와 달리 하트를 6개나 넣은 문자였다.

 

배우 故 김지영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님을 처음 뵌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정진석 추기경님과 함께 영화관에 간 날이었다. 정 추기경님께서는 영화가 끝난 후 자매님의 손을 꼭 잡으시면서 “저는 자매님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오셨는지 잘 압니다. 하느님께서도 자매님의 마음을 다 아시니 용기를 내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자매님의 눈에 이슬이 맺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훗날 자매님은 이 날을 두고 ‘평생 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 모두가 한꺼번에 날아가 버리는 것 같은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홍보국장으로서 가톨릭 문화예술인을 담당하는 일을 맡으면서 자매님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언젠가 자매님을 사석에서 만날 일이 있어 조심스레 부탁을 드렸다. “배우들이 불규칙적인 일정으로 바쁘게 일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신앙생활을 쉬게 되는 것 같아요. 선배로서 후배 배우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다독여주시고 신앙의 끈을 놓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선생님이라면 잘 하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그러자 자매님은 내 눈을 한참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신부님! 제가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기도하면서 할게요!”

 

그리고 몇 달 후, 자매님에게 전화가 왔다. “신부님! 이번 주일 시간이 있으세요?” “네?” “후배 배우가 성당에 다니다 쉬고 있었는데, 성당을 다시 다닌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명동성당에 함께 가기로 했어요. 그날 고해성사 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자 자매님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후배 배우 두 명을 데리고 왔다. 대선배님의 손에 이끌려 성당에 다시 온 이들은 고해성사도 보고, 다음 미사 때는 성체도 영하겠다고 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자매님은 그 후배들과 주일 미사를 함께 보기 위해 뜨거운 여름 날씨를 마다않고 달려왔다. 그 후에도 쉬는 교우였던 여러 연예인을 다시 성당으로 데려왔고, 어떤 이들에게는 영세를 권고하여 자신이 직접 대모가 되기도 했다.

 

 

특별한 신앙체험으로 굳은 신앙심 가져

 

자매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수입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쪼개서 여러 곳에 기부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다. 누구보다 믿음이 굳건하셨기에 어디선가 이단 교리를 전파하는 사람을 만나면, 갑자기 호전적(?)으로 변해서 자신의 신앙을 전달하고자 입씨름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랬던 무용담을 여러 번 전해주기도 했다. 그분이 그렇게 굳은 신앙심을 갖게 된 데는 나름의 특별한 체험이 있었다. 자매님은 교구 주간소식지 ‘서울주보’를 통해 자신의 신앙체험을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 남편의 병세가 심해져서 세상을 떠나는 날에도 저는 촬영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촬영이 한참 진행 중인 정오경, 남편이 죽었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당시 저는 불교 신자였는데, 저도 모르게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입니다. 저는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는 않지만 한 번만 도와주세요. 부디 제가 그토록 미워한 남편을 만나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을 주세요. 서로 욕하고 싸운 일을 화해하고 용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저는 계속해서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숨이 멎어 온몸이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죽은 남편을 붙들고 절규했습니다. ‘하느님, 우리가 화해할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너무하십니다. 너무하십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한 번 더 불러 보아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그때 그 소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제가 다시 부르자 정말 남편이 다시 눈을 떠서 저를 보았습니다. 그 광경에 놀라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하여 병실을 뛰쳐나갔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울면서 당신을 용서하니 당신도 나를 용서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내가 잘 키우겠으니 편안하게 눈을 감으라고 말입니다. 남편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남편의 장례식이 끝나마자 바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저에게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평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제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진정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하느님, 보잘것없는 제게 당신이 계심을 알려주시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리고 늘 행복했습니다.”

 

사실 자매님은 겉으로는 강하게 보였지만 속으로는 깊은 상처가 많았다. 연극무대에서 꿈을 채 펼치기도 전에 아버지의 강권으로 결혼을 했다. 생활력이 없는 남편 때문에 가장 노릇은 물론이며, 남편의 병수발까지 도맡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지만 좋은 역할을 맡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의상을 스스로 준비해야 하던 때에 받은 출연료는 모두 남편의 약값이 되었다. 그래서 겨우 맡은 역할은 식모, 아낙네 1·2·3 등 하찮은 역할이었다. 끼니를 거르는 일은 다반사였고 촬영 중에도 집에 들려 아픈 남편의 식사를 챙겨 주고, 다시 일하러 나가는 일상을 반복했다. 촬영장에 갈 차비가 없어 뛰어다닐 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고생이 심해도 자매님은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느냐’며 하느님께 따지거나 스스로 비관하지 않았다. 하느님이 건강을 주셔서 이렇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그런 긍정적인 마음을 선물해주셨다고 믿었다.

 

자매님은 당신의 투병이 다른 이에게 폐가 될까봐 주변에도 자신의 입원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지난 1월 마지막으로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났을 때도 자매님은 미소를 지으며 반복해서 말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리고 늘 행복했습니다.”

 

진정한 ‘장밋빛 인생’을 살다 간 배우 김지영 마리아 막달레나.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뜨겁게 체험했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아낌없이 나눠주던 분.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님은 영원한 우리들의 스타로 기억될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5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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