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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25: 그리스도교 문화 정착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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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2 ㅣ No.1606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25) 그리스도교 문화 정착의 선구자

 

복음적 삶 사는 교우 모습에 감복해 입교하는 이 늘어나

 

 

복음의 토착화를 위해서는 문화의 복음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전통을 지녔거나 깊이 세속화된 나라에선 그리스도교의 참된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대중적 표징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이 대중적 표징 가운데 복음과 일치된 신앙인의 삶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최양업 신부는 일종의 사목 보고서인 스승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앙과 삶이 일치된 신자들의 모습에 감화된 많은 이들이 입교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복음과 일치된 신앙인 모습 전해준 최양업 신부의 편지

 

비신자에게 직접 교리를 설교함으로써 전교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사제들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신자들은 천주교의 진리에 관해 떠도는 소문을 듣거나 신자가 당한 어떤 환난 등의 사건을 통해 마음속으로 감동하고, 이것이 계기가 돼 스스로 신자들을 찾아가서 교리를 가르쳐 주고 신자들 사회에 받아들여 달라고 청하는 것이 보통입니다.“(1851년 10월 15일 잘로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서 보듯 신자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해마다 입교자들이 늘었다. 최 신부의 사목 관할 지역에는 해마다 7-8개의 교우촌이 생겨나 새 공소를 짓고 100여 명의 예비신자들이 몰려들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기도문과 교리 문답을 익히는 데 경쟁할 정도였다. 이에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후 “(최양업) 토마스 신부 같은 사람 열 명만 더 있었으면 오죽 좋겠습니까”라고 안타까워했다.

 

“올 1년 동안에 저는 2867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했고, 어른 171명에게 세례성사를 주었으며, 대세 받은 어른 17명에게 세례성사의 보례를 했고, 181명의 신자를 전교회(傳敎會)에 가입시켰다. 내 관할 구역의 신자는 모두 합해서 4075명이고 예비신자는 108명이다. … 어떤 마을에서는 우리 원수들이 불러일으킨 소요가 있었던 후 오히려 그 덕택으로 한 마을 전체가 개종해서 천주교에 입교했다.”(1857년 9월 14일 불무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다른 종교의 전통 사회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가톨릭교회에 입교한다는 것은 교세 확장이라는 단순한 수치 이상의 종교 문화적 자산을 지닌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머무르시면서 선과 진리, 정의를 향한 열망을 북돋워주시고 연대와 형제애를 증진하게 해주신 결과다.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전통 사회에 새로운 생활 방식을 제시했다. 유교 전통과 전혀 다른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를 태동시켜 자라게 했다.

 

이를 ‘복음화’라고 한다. 복음화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이다.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굶어 죽어 나가는 이 한 명 없고 늘 기도 속에서 기쁘게 생활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준 최양업 신부와 교우촌 신자들은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 문화를 정착시킨 선구자들이다.

 

보례 = 정식 세례성사를 받지 않고 대세(代洗)를 받은 사람이 추후에 교리 교육과 세례성사의 다른 부분을 보충하여 받는 예식. 다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세례의 효력이 믿음을 완성시키도록 하는 예식이다.

 

 

사례1. 스스로 교리 받아들인 조 바오로

 

충청도 보은 땅에 조씨라는 지체 높은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가 사는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산골에 ‘멍에목’ 교우촌이 있었다. 어느 날 이 교우촌에 불이 나 잿더미가 됐다. 조씨는 졸지에 재산을 몽땅 잃은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멍에목을 찾아왔다. 그런데 신자들은 조금도 근심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씨가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꼬치꼬치 캐묻자 그제야 신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천주교를 믿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 항상 의탁하며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안배를 칭송할 뿐입니다.”

 

조씨는 이 말을 듣고 천주교를 믿기로 하고 기도문과 교리 문답을 배워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는 외교인들이 보기에 우연히 불이 난 것으로 믿게끔 꾸며 집과 위패들을 불 지르고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친척과 친구들과의 교제를 모두 끊어버린 후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바오로’로 새 삶을 살게 됐다.

 

 

사례2. 교우들의 인내와 친절, 겸손으로 마을 전체가 회개해 교우촌이 된 일

 

“어느 마을에 12가구가 살고 있는데 2년 전부터 세 가족만 빼놓고는 모두가 천주교에 입교했다. 세 가족은 신자들과 원수가 돼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새 신자들은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인내와 친절, 겸손으로 저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정다운 권고까지 해줬으므로 저들도 감동돼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렇게 그들도 그리스도 우리 안의 양들이 되어 모두 힘을 합해 새 공소를 건축했다. 제가 처음으로 그 공소에 갔을 때에 그들은 거의 모두가 기도문과 교리 문답을 잘 배우고 세례받을 준비를 훌륭히 했다. 그래서 지금 이 공소에만도 어른 세례자가 32명, 어린이 세례자가 10명, 예비신자가 17명이나 된다.”(1859년 10월 11일 안곡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사례 3. 어린아이의 확고한 신앙심이 우유부단한 가족을 회개시킨 일

 

“식구가 꽤 많은 집안이 하나 있었다. 그 집 식구들이 천주교 교리를 들었으나 외인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신자가 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이 집의 13세 된 아이가 자기 부모와 형들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화가 치밀어 미신 단지와 미신을 섬길 때 쓰는 기구 등을 내동댕이치고 깨뜨리면서 ‘왜 이따위 물건들 때문에 주님이신 하느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우리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단 말입니까?’라고 말했다. 꼬마가 한바탕 소란을 피운 다음 온 집안이 천주교를 믿기로 했다.”(1858년 10월 3일 오두재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2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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