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강론자료

루카복음 23,35-43 십자가 위의 예수 (2016. 11. 20. 그리스도 왕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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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6-11-18 ㅣ No.2150

지도자들은 이런 말로 예수를 모욕하였다. “이 자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였다면서! 그가 정말로 하느님께서 뽑으신 메시아라면 이제 자신을 구원해야겠지.” 병사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에게 포도주를 가져다가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들의 왕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 자는 유대인들의 왕이다.’라고 쓴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예수는 이미 영적 생명으로 영원히 살아있으므로 육신의 죽음이 그를 해치지 못한다. 예수는 세상 사람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육신을 희생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참된 지도자이다.

 

그에 비해 거짓 지도자는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므로 세상의 헛된 즐거움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 지도자는 백성의 봉사와 희생을 밑거름 삼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책략을 발휘한다.

 

지도자들은 거짓 지도자이기 때문에 참된 지도자인 예수를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를 적으로 간주하고 공공연하게 그를 모욕한다. 만일 예수가 참된 지도자라면 그들 자신이 거짓 지도자임이 저절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유대인의 왕을 조롱함으로써 유대에 대한 로마의 우위를 과시한다. 병사들은 오직 세상의 권력자에게 복종할 뿐 예수의 진면목을 결코 알아보지 못한다. ‘포도주는 생명을 상징하면서 육정(육신의 생명)과 성령(영적 생명)을 동시에 암시한다. ‘이 자는 유대인의 왕이다.’라는 표지판은 물론 예수와 유대인을 조롱하기 위한 소품이다. 이때 유대인은 혈통, 정치, 문화 등을 공유하는 집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표지판은 역설적이게도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예수는 참으로 유대인의 왕이다. 여기에서 유대인은 영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의 백성이다. 예수는 영적 생명을 누리고 있으므로 육신의 생사에는 초연하다. 예수는 하느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생명을 누리면서 그 생명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고 있다.

 

성서저자는 구원을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지도자들과 병사들의 구원은 육신의 생명을 보전하는 일이다. 이것은 사실상 구원이 아닌 멸망이다. 육신의 생명은 조만간 허무하게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와 성서저자의 구원은 육적 생명을 초월하여 영적 생명을 얻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구원이다. 같은 구원이란 단어로 전혀 다른 방향의 길을 가리키고 있다.

 

 

거기에 매달린 죄수 하나도 이렇게 말하며 예수를 모욕하였다. “너는 메시아가 아니냐? 그렇다면 너 자신과 우리를 구해 보아라.” 그러나 다른 죄수는 그를 꾸짖었다. “당신은 하느님이 두렵지 않은가? 당신도 이 분과 같은 벌을 받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에 합당한 응보를 받지만, 이 분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예수에게 말하였다. “당신에 왕이 되셨을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가 대답하였다. “내가 약속하거니와,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죄인이며 죽음을 앞둔 죄수이다. 말하자면, 죄인은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처해진 죄수이다. 두 죄수는 세상 사람들을 상징한다. 예수와 죄수들은 함께 십자가형을 받고 있지만 그 형벌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죄수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값을 치루고 있으되, 예수는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죄수들과 같은 처지에 동참하고 있다.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시다.’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 곧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사람은 죄인이거나 의인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죄인은 의인을 알아보지 못하되, 의인은 의인을 알아본다. 누구든지 회개한 사람은 의인이다.

 

회개한 죄수는 구원을 사후에 일어날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그가 바로 지금 낙원에 있음을 알리면서 그를 위로한다. ‘오늘은 바로 지금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예수와 함께 있다면 그가 있는 곳이 바로 낙원이다. 십자가 위에 있는 두 죄수 중에서 한 사람은 이 세상에 그대로 있으되 다른 한 사람은 하늘나라로 들어가 있다. “두 사람이 함께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불려 올라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마태오복음 24:40)

 

십자가 위는 회개한 죄수에게는 낙원이되 회개하지 않은 죄수에게는 지옥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생명을 주는 나무이다. “정원 한가운데에 생명을 주는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창세기 2:9) ‘정원은 자아 또는 의식의 내면을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지도자들, 병사들, 죄수들의 이야기는 각각 사랑/권력, 지혜/어리석음, 의인(회개)/죄인의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사람은 누구나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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