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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병인박해로 싹튼 노기남 대주교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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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14 ㅣ No.780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천주교는 재와 같아서 두드릴수록 멀리 간다” - 병인박해로 싹튼 노기남 대주교 집안

 

 

박해 뒤 교회가 재건되던 동안 신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은 바로 세상이 전혀 모르는 무명의 성인들이었다. 그들이 신앙을 지켰고 또 새싹을 틔웠다. 이름 없이 신앙을 지키고 있었던 그들이 있었기에 교회는 재건될 수 있었다. 그 생생한 실례에 대한 증언이 ‘순교자 성월’을 빛낸다.

 

 

신자를 찾는 선교사, 선교사를 찾는 신자

 

박해 후 입국한 선교사들은 신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성사도 받지 못하는 신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했다. 교회 연락망도 끊긴 상태였다. 신자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선교사를 기다렸고, 그들이 왔다 해도 비밀리에 활동했기 때문에 스스로 찾아나서야 했다. 병인박해 동안 조선선교사들은 만주에 모였다. 박해를 잠시 피해간 선교사 세 명이 있었다. 그리고 1866년 12월에 신품성사를 받은 블랑, 마르티노, 리샤르 신부가 이듬해 조선선교를 지원하여 만주로 갔다. 그들은 일본, 만주 등 여러 곳을 헤맸으나 조선입국로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1869년 리델 신부는 조선교구의 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코스트 신부는 1868년 극동으로 파견되어 홍콩과 상해 등지에서 주로 경리일을 맡았다. 그는 줄곧 조선선교를 청했는데 1875년에야 허락을 얻고 만주로 합류했다. 이듬해에는 드게트 신부가 조선선교를 지원했다. 그는 사제서품을 받고 소속 교구에서 일하다가 1875년에야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그는 1년 수련을 거치고 1876년 평소 소원하던 조선으로 향했다. 두세 신부와 로베르 신부도 1876년 12월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3월 만주에 도착했다. 이들은 아직도 박해 속에 있는 조선에 가고자 했고 그곳에서 부름 받은 이들이었다. 조선선교사들은 입국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다음 입국할 선교사들에게 필요한 조선어사전과 교리책들을 저술하여 간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10년이 흘렀다.

 

1877년 9월 장래 ‘영남의 선교사’로 불릴 로베르 신부는 리델 주교, 두세 신부와 함께 황해도 근처인 대청도에 도착했다. 이미 그 전 해에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가 조선에 입국해서 선교지 조선의 침묵을 깼다. 선교사들은 황해도 연백군 배천지방에 상륙했고, 리델 주교는 강을 따라 서울까지 갔다. 그해 말 리델 주교는 언어를 익히고 있던 로베르 신부에게 강원도 이천군 고메골로 가서 신자들을 돌보고 사제성소를 가진 소년들을 양성하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1878년 1월 리델 주교가 투옥됐다는 소식과 함께 신학생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고 황해도 깊은 산골 곡산으로 피신하라는 연락이 왔다. 로베르 신부는 곡산에 잠시 머물다가 그보다 더 북쪽 후미진 계곡으로 숨어 들었다. 그 사이 리델 주교가 추방되었고 이어 드게트 신부도 체포되어 추방당했다. 이들이 추방된 이후에도 블랑, 두세, 로베르 달랑 세 명의 선교사는 전국에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나섰다. 이때 평안·강원·황해도 접경지역에 로베르 신부의 은신처가 있었다. 그는 이 기간에 노성구 가정, 즉 노기남 주교의 부모에게 혼배의 연을 맺게 했다. 그들은 로베르 신부를 제때 찾아냈다.

 

 

황천일 선비 신자와 노천석 집안의 사돈맺기

 

평양에 황천일이라는 당대 손꼽히는 한학자가 있었다. 그는 초야에 묻혀 서민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한편 청소년교육에 헌신하고자 했다. 그는 향리에서 관의 억울한 탄압을 받거나 권리 침해를 당한 사람을 위해 필봉을 휘둘러 호소문을 지어주곤 했다. 황천일은 베르뇌 주교가 황해·평안도 일대를 순회할 때 주교를 만나기를 원했다. 그는 비밀리에 주교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영세했다. 이어 부인과 외동딸도 신자가 되었다. 이 직후 병인박해가 시작됐다. 급기야 그가 서양인 주교와 연통했다는 소문이 돌고, 천주교인이라고 지목되었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황해도 곡산에 있는 대각산에 입산했다. 그러나 오십 평생을 글만 읽은 선비는 생계가 막막했다. 결국 그는 산촌 농가를 가가호호 방문하여 학생들을 모집해서 집에다 서당을 차렸다. 이 무렵 평안도 평양 인근에 백여 호로 구성된 노씨 집성촌이 있었다. 마을에는 네 파의 후손들이 섞여 살고 있었는데 친족 간 분쟁이 일어났다. 노천석은 이 분쟁을 개탄하여 고향을 떠나 황해도 곡산의 대각산 기슭으로 이사했다. 그들에게는 슬하에 노성구라는 외아들이 있었다. 부부는 화전을 일구며 생활했으나 아들의 교육이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노천석은 평양에서 입산한 선비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로 당시 15세 된 아들은 이 서당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서당훈장과 그 학생의 학부모는 지기가 되었다. 아들 노성구는 이미 고향에서 서당에 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아동들에 비해 앞섰다. 훈장도 그에게 특별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날, 아들은 서당 선반 위 보자기에 쌓여있는 교회서적과 성물을 보았다. 그날 밤 선생은 제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천주교 교리에 매력을 느끼는 제자에게 선생은 신자로서 당할 어려움을 설명했다. 그러나 제자는 죽을 각오로 교리를 배우겠다고 했다. 황천일은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탐문했다. 그는 황해도 수안 산골의 교우촌과 연백 불당골 신자촌에 신부가 방문할 날짜를 알게 되었다. 그는 신부가 곡산 자기 마을에 오도록 애써서 로베르 신부를 모셨다. 온 가족이 성사를 받고 노성구도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했다. 로베르 신부가 리델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듣고 곡산지역에 은신하러 머물던 때였다. 이렇게 해서 숨어 다니는 선교사가 숨어있는 교우에게 믿음의 새싹을 틔우게 했다. 천주교는 재와 같아서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멀리 번져가고 있었다.

 

이때 특별한 일이 행해졌다. 황천일은 나이찬 외동딸이 교회법에 따라 혼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부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평소 마음에 두었던 제자와 딸의 의사를 타진한 뒤 이들의 동의만 받고 혼인을 준비시켰다. 그리하여 노성구 요한과 황 비비안나는 로베르 신부로부터 혼배성사를 받고 교회법에 합당한 부부가 되었다. 혼배성사 후 황천일은 노천석과 양가의 혼사문제를 비로소 의논했다. 말이 나오자 노천석은 대환영이었고 양가의 혼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그들의 세속혼은 완성되었다. 젊은 부부에게 박해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노성구는 종손이었다. 혼인식을 올린 뒤 제삿날이 닥쳤다. 시어머니는 여러 날 전부터 며느리에게 제사준비를 가르쳤다. 그러나 며느리는 두통이 심하다며 자리에 누웠다. 제삿날이 되자 이번에는 종손 아들이 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에 뒹굴었다. 하는 수없이 노부부 둘이서 제사를 지냈다. 첫 번 제삿날은 넘겼다. 그렇지만 이 집안은 종가라 매월 한두 번씩 제삿날이 돌아왔다. 그런데 제사 때마다 아들과 며느리가 자리에 누웠다. 노부부는 점을 치고 굿을 하는 등 백방으로 해법을 찾았다. 마침내 시부모는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내고 아들을 다시 장가들일 생각까지 했다.

 

며느리는 친정아버지에게 호소했다. 황천일은 용단을 내어 그동안의 사연을 사돈에게 설명했다. 사돈은 청천벽력 같은 사실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는 당장 딸을 데려가라고 호통했다. 황천일은 협박조로 맞대응했다. 딸이 소박을 맞으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소문날 테고 아들도 신자로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젊은 부부는 제사에서 빠지게 되었다. 천주교회가 제사를 금지하던 시절에 빚어진 가정박해의 수난 현장이었다. 두 번째 수난은 며느리에게 닥쳤다. 동리 사람들은 이 집안에서 제사·장례에 유교예법이 사라진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 종국에는 이 소문이 곡산읍내 관헌에게 들어가 수색이 시작됐다. 사돈 양가는 수안 배나무골로 피했다. 수안과 곡산은 대각산을 중심으로 연접되어 있으나 2백여 리 되는 거리에 있었다. 곡산 포졸들은 수안 관헌에 연락해서 합동수색을 벌였다. 이들 가족은 교리서와 성물,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정리해서 외딴 곳에 묻었다. 황천일은 몸져누웠고, 남편은 밤이면 다른 집 사랑방에 가서 피신하고 있었다.

 

가을추수가 끝나 곡식을 방아에 찧어 식량으로 만들어야 할 때였다. 비비안나는 조 몇 섬을 동네 물방앗간에서 찧고 있었다. 5~6명의 포졸이 방앗간에 들이닥쳤다. 그 중 촌민 한 사람이 그녀를 지목해 바쳤다. 포졸들은 그녀를 포박하고 앞장세워 집으로 안내하라고 독촉했다. 순간 그녀는 혼자 잡혀가면 아버지와 남편이 무사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집에는 아무도 없으니 자신이나 데려가라고 했다. 세간이라도 압수하겠다는 포졸들에게 그녀는 일전에 땅에 묻은 물건들을 찾도록 해주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혼자 끌려갔다. 이튿날 새벽 수안읍내로 들어가던 포졸들이 주막에 다다랐다. 밤길을 걸어 온 그들은 주막에서 조반을 먹고 몰수한 물품들을 분배했다. 그리고서 포졸들은 밀고자에게 수고의 대가로 비비안나를 주었다. 그녀는 집안 식구 대신 순교할 결심이었는데 엉뚱한 변을 만났다. 천주교 여성신자들이 처하던 또 다른 위험들이었다. 비비안나가 끌려 간 곳은 배나무골에서 십여 리 떨어진 산기슭 마을이었다. 남자는 1년 전에 상처한 가난한 농부였다. 그녀는 함정에서 탈출할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저녁을 짓는다고 부엌으로 나갔다. 밥 짓는 사이 남자가 잠에 빠졌다. 그녀는 산을 향해 뛰었다. 첩첩산중에서 밤은 깊어 길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산을 헤매다가 칡범[大虎]과 마주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배나무골에 닿았을 때 가족은 이미 다른 곳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비비안나는 방물장수 등 갖은 고생을 해가며 가족을 찾아 헤맸다. 이태 만에 가족을 만났다. 그리고 몇 달 후 로베르 신부가 강원도 이천 땅에 왔다. 신부는 그들이 사는 어영골에도 왔다. 신부는 그녀가 보여준 신덕과 슬기를 칭찬했다.

 

그러는 사이 신앙의 자유가 오고 있었다. 그들은 자녀를 두게 되자 좀 더 큰 교우촌을 찾아 어영골에서 40리 되는 이천 염산리 통정골로 이사했다. 통정골 등 너머 염산리에는 후에 성당도 세워졌다. 지금은 휴전선 이북에 있는 침묵의 교회 이천성당이었다. 이곳에는 1892년부터 파리외방전교회의 로(Rault, 盧) 신부가 상주했다. 부부는 2년 터울로 자녀들을 두어 자녀가 6명이 되었다. 그러자 부부는 자녀교육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염산리에 와 있는 본당신부와 의논했다. 그래서 노성구의 고향에서 오 리쯤 되는 논재가 교우촌이라는 것과 평양에도 신부가 파견되어 장대재에 성당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성당은 수안본당 주임이던 르장드르 신부가 평안도 담당신부로 임명되면서 시작한 관후리성당이다. 부부는 함께 살던 교우들의 섭섭해 하는 마음을 뒤로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신앙의 자유가 오면서 교우촌은 이렇게 비어갔다. 남았던 교우들은 화전민으로 생을 마감했다. 또 한편 고향을 떠도는 20년 동안 노천석, 황천일, 그 부인들이 별세했다. 이들은 천주를 따르며 사느라 가족인데도 이곳저곳에 따로 묻혔다. 박해의 합병증은 가족의 삶에까지 이렇게 영향을 미쳤다.

 

부부는 고향에서 신앙생활 하기가 더 어려웠다. 일가친척에게 신앙을 전파하지도 못했다. 자녀들은 촌놈이라고 놀림 받으면서 친척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다. 그래도 10년을 지냈고, 자녀 4명을 더 얻었다. 그런데 자녀들이 차례대로 죽었다. 이사 올 때 두 살이던 딸은 이사 온 지 반년 만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 와서 낳은 자매 둘이 두 살, 세 살 때 부모 곁을 떠났다. 이어 장성한 자녀들도 죽어나갔다. 맏아들은 혼인날을 받아놓고 갑자기 열병으로 죽었다. 둘째도 혼인날을 받아놓고 같은 병세로 죽었다. 이후 넷째 아들, 그리고 몇 달 후 다섯째 아들이 같은 증세로 떠났다. 그러는 사이 맏딸이 출가했다. 집에는 자녀 열한 명 중 아들 둘만 남았다. 셋째가 농사로 가업을 잇고 막내는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 막내가 노기남 주교이다.

 

 

대구교구 제5대 교구장 노기남 주교

 

노기남 주교는 한국인 첫 주교이다. 그는 어려서 조선인은 신부가 될 수 없느냐고 모친께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모친은 김대건 신부를 이야기하며 조선인도 신부가 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조선인으로 신부가 되었고 주교가 되었다. 그는 1942년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서울교구장 및 평양, 춘천교구장 서리로 임명됐다. 1948년에는 대구교구의 제5대 교구장도 겸했다. 이리하여 그는 가장 여러 곳의 교구장을 맡은 주교가 되었다. 그가 교구장이 되었던 지역들은 모두 지난날의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그의 부모는 황해도 곡산 땅에서 혼인했고 강원도 이천에서 살았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를 맺어준 로베르 신부는 대구교구 설정의 기반을 다진 선교사였다.

 

노기남 주교는 일제 말, 해방, 6.25 격변기에 각 해당 교구에서 한국인을 중심으로 교구를 새로 정리하는 획을 그었다. 그는 병인박해의 열매였다. 대구교구 제5대 교구장 노기남 주교를 배출한 그의 부모와 조부모들은 박해시대와 신앙 자유의 시기를 연결지어 준 이름 없는 성인들이었다.(도움 : 노길명 교수)

 

[월간빛, 2016년 9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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