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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시 읽어주는 신부: 글의 제사장으로 산다는 것은? - 생각과 사유의 어둡고 서늘한 정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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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10 ㅣ No.355

[시(詩) 읽어주는 신부] 글의 제사장(祭司長)으로 산다는 것은? - 생각과 사유의 어둡고 서늘한 정조들

 

 

살면서 생각이 많다는 것은, 늘 무언가 사유하며 산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는 몸으로 먼저 느끼며 살고 싶은데, 사유의 논리를 따라가기보다는 마음의 궤적을 쫓아가고 싶은데 정작 생각과 사유의 수레바퀴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씁쓸한 느낌이 듭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미겔 데 우나무노(1864~1936년)의 『생의 비극적 의미』라는 책 제목을 변주해서 “의식의 비극적 속성”이라는 명제를 가끔 사용합니다. 생각한다는 것, 사유한다는 것, 그 자체가 비극적 속성을 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할 때 생각하고 사유합니다. 살면서 어떤 문제가 없고 의미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별로 생각하고 사유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문제의식이 발생하고 어떤 의미를 추구해야 함을 느낄 때, 그때 사람들은 생각하고 사유합니다.

 

생각과 사유는 언제나 이차적입니다. 생각과 사유는 느낌과 감각 다음에 옵니다. 사실 사람들은 기쁘고 행복할 때는 별로 생각하고 사유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행복은 무엇보다 먼저 느끼고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과 고통 역시 느끼고 아파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쁨과 행복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 덕분에 이렇게 기쁘고 행복한지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쁨과 행복의 느낌과 감각이 너무 커서 사유의 기능은 약화됩니다. 슬픔과 고통의 감정 역시 사유의 기능을 놓치게 합니다. 아픔과 절망이라는 감정은 생각할 여유를 갖게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행복과 기쁨의 감정보다는 슬픔과 고통의 감정은, 그 슬픔과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고픈 욕망 때문에 생각과 사유를 요청합니다. 왜 이리 슬픈지, 왜 이리 고통스럽고 힘든지 그 원인에 대한 생각과 그 벗어남의 방법에 대해 사유하게 합니다.

 

생각과 사유는 시간의 여유를 요청합니다. 시간을 갖지 못할 때는 당연히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먹고 사는 일의 건강함, 즉 직업적 충실성으로 살아갈 때 생각과 사유의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육아와 가사라는 육체노동에 성실한 사람들 역시 생각과 사유의 시간을 잘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생각과 사유는 일상과 삶의 건강함과 육체적(구체적) 성실함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과 사유가 시간의 여유를 요청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생각과 사유가 시간을 자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흐름과 소멸을 의미합니다. 흐르는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당연히 비관적이고 염세적 정조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생각과 사유는 문제의식과 의미추구, 슬픔과 고통, 시간 속에 있는 존재의 실존적 정조들과 맞물려 있습니다. 당연히 생각과 사유의 정조는 밝고 환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둡고 칙칙한 회색빛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연 시인의 시집들을 읽는 동안 내내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속으로 망명하고 책에 둘러싸여 유폐의 삶을 살아갔던 사람의 내면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허연 시인의 시들의 작중 화자는(어쩌면 자연인과 생활인으로서의 허연이라기보다는 시를 쓰는 시인 허연은),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의 주인공과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의 주인공처럼 책을 통해 일찍부터 세상의 비의와 생의 이면을 엿보고 눈치채는, 그래서 더 세상과 사람에 대해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태도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사람 같았습니다.

 

허연 시인은 산문과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서늘하고 정직하게 말합니다. “나는 책을 통해 내 자신을 이해했고, 책을 통해 사랑을 했고, 책을 통해 초월을 경험했고, 책을 통해 밥을 먹었다. 책은 내게 계시였으며 친구였고, 또 무기였다… 가끔 내가 몇 명 남지 않은 책의 제사장일지도 모른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한다. ‘책 읽기’라는 거대한 제의를 진행하고, 그 형식을 계승시키고, 사람들에게 짐짓 엄숙한 화두를 던지는 제사장 말이다.”(『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생각정거장, 2018, 5~6쪽) “난 인간의 신념이나 약속을 믿지 않는다. 인간을 믿지 않는다. 인간에겐 입장과 생존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 내세우는 명분은 아무리 고매하거나 근사해 보여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콤플렉스나, 치부를 감추기 위한 가면이나, 이익이나 보상심리가 숨겨져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이다… 나에게 인간이란 늘 측은하기는 하지만 감동적이지 않은 대상이었다. 그렇다 보니 내가 쓴 시들은 결국 내 안에서 자폐적인 병증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읽어줄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은 내 시 창작에 있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 시는 나만의 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몇 명의 독자들이 내 공화국을 찾아주는 건 하나의 정치적 승리다. 결코 문학 정신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시인으로 산다는 것: 우리 시대 시인 20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시』, 문학사상, 2014, 316~319쪽) 시인에게 인간은 비상을 꿈꾸는 존재, 신성을 꿈꾸는 탁월한 존재라기보다는 “낭패를 당하고 진흙탕에 처박혀 허우적거리는 천사”일뿐입니다.(‘내가 원하는 천사’)

 

자신이 “불온한 검의 피”(1995년 세계사에서 나온 첫 시집 제목)를 지녔다고 믿는 시인은 흔들리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정직한 기록인 첫 시집에 “사는 일에 소홀한”(‘저녁, 가슴 한쪽’) 자신을 내려놓고, 매일경제신문의 기자로서 생활인의 삶에 오래 천착했습니다. 시인은 아마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201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네 번째 시집, 『오십 미터』의 시인의 말) 말입니다. 허연 시인 역시 “결국, 범인(凡人)으로 늙어간다. 다행이다.”(2008년 민음사에서 나온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의 自序)라고 고백합니다. 비록 그 생활인의 모습이 누추한 모습이라 할지라도(‘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먹고 사는 일의 숙명을 담담히 짊어지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소설가 김훈이 표현한 “먹고 사는 일의 거룩함”까지는 아니지만 먹고 사는 일에 최소한의 성실성을 갖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생활인의 내면 안에는, 카프카가 그랬던 것처럼 글의 제사장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연의 시 ‘나쁜 소년이 서 있다’의 전문입니다.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문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뽑아달라는 질문에 “나쁜 소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첫 시집에서 두 번째 시집 사이의 거리는 13년입니다. 신문기자라는 생활이 얼핏 시에서 멀어져 있게 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시인은 늘 읽고 쓰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응시하면서 내면을 읽어내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안에 있던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통해 세상을 보는 사람은 안과 밖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자신만의 공화국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생각과 사유의 장에서는 언제나 나는 나입니다. 육체는 세월 속에서 늙어가지만 생각하고 사유하는 나는 세월을 잊고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수 있습니다. 몸은 노년의 모습으로 살아가도 사유는 소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몸은 세월의 선을 넘어갈 수 없지만 사유는 세월의 선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무엇이 되든 근사하지 않은가/ 선을 넘을 수 있다면/… 오늘도 선을 넘지 못했다.”(‘오늘도 선을 넘지 못했다 . 국경 2’) 사유는 불온한 꿈을 꿀 수도 있으며 사유는 “삐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수도 있습니다. 생각과 사유는 모든 한계와 경계의 선을 넘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불온한 생각과 불순한 사유 때문에 놀라기도 합니다. 생각하는 자, 사유하는 자는 불온하고 불순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쁜 소년”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생각과 사유는 서늘한 특성을 갖습니다. 생각과 사유에 머무는 사람은 자주 머뭇거려서(회의적이어서) 열정과 실천으로 잘 나아가질 못합니다. 생각과 사유는 글과 글쓰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 다른 일들로 잘 나아가질 못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생각은 쉽게 끝까지 밀어붙이지만 삶은 끝까지 잘 밀어붙이지 못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허연 시인은, 오랜 가톨릭 신앙의 집안에서 자라서 자연스럽게 신부가 되기로 여겨졌던 자신이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시를 쓰는 “나쁜 소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날 나는 신부(神父)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때 처음 ‘뼈아프다’는 말을 이해했고, 철든 시절까지 난 괴로웠다… 무념무상으로 살지 못했던 날들을 나는 후회한다”(‘무념무상 2’)고 말입니다. 또 시인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고 미안해합니다. “한 친구는 부처를 알고 나니까 시 같은 거 안 써도 되겠다며 시를 떠났다. 또 한 친구는 잠들어 있는 딸아이를 보니까 더 이상 황폐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시를 떠났다… 하지만 난 또 시를 쓴다. 그게 가끔은 진실이다. 난, 언제나 끝까지 가지 못했다.”(‘Cold Case’)

 

거친 견해지만 생각과 사유의 변덕스러움과 현란함을 일찍부터 목격한 사람은, 다시 말해 경계의 선을 쉽게 넘어가며 자주 상식의 틀을 벗어나는 궤적을 그리는 인간 내면의 움직임을 어린 시절부터 관찰해온 사람은 종교적인 것에 잘 귀의하지 못하고 일상생활에도 잘 천착하지 못하는 경향을 지닙니다. 생각과 사유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생의 이면을 바라보는 사람은,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성과 시간(세월) 속의 삶이 갖는 근원적 허무성에 대해 일찍 눈 뜨는 것 같습니다. 시 도처에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인간적인 것은 슬프고 지겨운 것이고 생은 귀찮은 일이라고 말입니다. “슬프게도 지겹게도 인간적이다./… / 생은 잠시 몸을 뒤척인다. 다 귀찮다는 듯이”(‘봄산’). 생각과 사유 안에서 조숙했던 시인은 “낡은 자전거 바퀴 같은 영사기가 힘겹게 세월을 돌리던 곳.// 난 수유리 세일 극장에서 생을 포기했다”(‘세일 극장’)고 말하며, “계시는 언제나/ 천만 년 전으로부터 왔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생은 나를 삼키고 있었다”(‘행성의 노래’)고 한탄합니다. “어차피, 모든 별의 소식은 우리가 사라진 다음 이곳에 도달한다”(‘word 시월’)고, 그래서 “생은 늘/ 허망했음을/ 생은 늘/ 눈이 먼 심해어 같았음을/ 말해준다”(‘미이라 2’)고 합니다. “살아있는 자들은/ 인생을 생각하는 내내 힘이 빠”(‘마지막 무개화차’)지기 때문에 “생에서 포기는 어떤 좌표도 읽지 않겠다는 결의”(‘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다짐합니다. 시인은 “인간은 가끔씩 약간의 불꽃과 함께 ‘빠지직’ 소리를 내는 것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전철은 하수다’)고 자조적으로 말합니다.

 

생각과 사유 안에서도 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에 대해 말하고 생의 의미를 찾아보지만 생은 우리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도 생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상처에 대해서 알 뿐”(‘외전 2’)이라고 시인 역시 고백합니다. 시인은 직설적으로 아니 노골적으로 생에 대해 묻고 생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말합니다. 많은 시인이 그랬듯이, 시인은 강을 보면서 생을 자주 생각합니다. 시인은 “사람의 일에는 눈물이 나지 않는데 강물의 일에는 눈물이 난다”(‘강물의 일’)고, “강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떠나보낼 게 많은 사람”(‘제의祭儀’)이라고, “강물은 많은 것을 섞고, 많은 것을 안고 가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장마의 나날’)으며 그저 빠르게 흘러가버린다고, 그래서 강의 흐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제의”(‘제의祭儀’)이며 하나의 “치료”(‘장마의 나날’)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석양에 영웅은 없”(‘석양에 영웅은 없다’)고, 흐르는 “강물에게 기록 같은 건 없”(‘장마의 나날’)다고 쓸쓸히 말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흐르는 강 같은 생이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일이며(‘Nile 421’), 그저 노래를 부르며 견디는 것(‘別於曲’)이라고 시인은 담담히 서술합니다.

 

시인에게 글을(시를) 읽고 글을(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만의 신전을 세우고 자신의 제의를 드리는 일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어디서든 신전을 짓는다.”(‘신전 3’) 비록 신전 기둥에 남긴 기록과 신전에 새긴 벽화들도 언젠가 세월 속에 흐려질 것이지만(‘신전에 날이 저문다’), 그래도 시인은 끊임없이 사유하고 상상하며 쓰는 일에 매달릴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노래를 해서 수치스러워질 필요가 있을까? 자꾸만 민망하다/ 그런데도 왜 난 스스로 수치스러워지는 걸까. 시를 쓰는 오후다.”(‘Cold Case 2’) 시인에게 글을 쓴다는 것, 적는다는 것은 그리움의 편지를 보내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세속의 도시에서 시인은 죄인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편지를 쓴 죄/ 그리움 같은 것을 적은 죄”(‘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적은 자들은 늘 외롭고/ 벌을 받는다/ 적어놓은 죄. 기록한 죄/ 편지는 오늘도 십자가에 내걸린다”(‘편지’)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시인으로 살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오십 미터’)고 시인은 믿기 때문입니다.

 

허연 시인은 “시는 인간과는 별도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또 “시는 우주 어딘가에 원래 있었던 주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의 시 쓰기는 “몸과 정신을 시가 찾아들기 쉬운 최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시인으로 산다는 것: 우리 시대 시인 20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시』, 327쪽) 허연 시인의 사유에 따르면, 어쩌면 시인은 주술을 받아 제사를 드리는 무당 같은 존재며, 신탁을 받아 제의를 드리는 제사장 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시인이 된다는 것은 주술과 신탁이 잘 흐를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신들을 삶으로 불러내지 않는”(‘Nile 407’) 세상에서, “그들은 호르몬에다/ 한을 새겼지만/ 신은/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툰드라’)는 불신의 노래가 들리는 세상에서, 생각과 사유의 제의를 드리는 제사장의 삶을 노래하는 허연 시인에게서 저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신에 대한 정직한 갈망을 본다고 말하면 모순일까요?

 

시(詩)라는 주술과 신탁을 받기 위해 몸과 정신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글의 제사장의 태도는 한 종교의 제관(제사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에게 서늘함으로 다가옵니다.

 

[월간빛, 2018년 6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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