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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주님의 기도와 교부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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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23 ㅣ No.1149

[주님의 기도와 교부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우리의 기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신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가 누구에게로 향해야 할지를 가장 짧은 말로 알려 주시는 깨우침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를 드려야 함을 가르치신다.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한 번도 누구에게 계시된 적이 없던 말이다. 모세가 하느님께 이름을 여쭈었을 때 그는 다른 이름(야훼)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아드님을 통해 이 이름이 계시되었다. 아들이라는 이름 안에는 이미 새로운 이름 ‘아버지’가 들어 있다”(테르툴리아누스, 「기도론」, 3).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무도 자기 스스로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다만 아드님과 또한 그 아드님이 계시하는 사람만이 아버지를 알 수 있다. 세례성사로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바오로 사도는 이 사실을 은혜로운 표현으로 말씀하신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4-7).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은총으로 말미암은 자녀성을 소유하게 되어 하느님의 아들이신 성자와 함께 상속을 누리는 ‘자녀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아빠, 아버지!’는 예수님에게서 우러나온 가장 순수한 믿음과 위탁의 부르짖음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강조하곤 하였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기도론」, 2,3).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하느님께 큰 기쁨을 안겨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을 부를 때마다 마치 그분이 번번이 다시 아버지가 되시는 기쁜 일과 같다. 왜냐하면, 번번이 그 외침이 그분이 아버지시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으며, 우리에게도 그같이 하라고 가르치셨다.

 

아버지와 친밀하게 대화하시는 예수님의 기도가 어떠했는지를 들어 보자.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7).

 

또 예수님께서 애절하게 당신의 속마음을 아버지께 드러내는 말씀도 들어 볼 수 있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느님께 드리는 기쁨은 단순하고 특이하다. 그것은 부성(父性)의 기쁨이다. 그분이 이말을 들으셨을 때 그분의 마음은 그분 속에서 ‘압도되셨고’ 그분의 ‘간장이 녹아 긍휼이 불붙듯’ 하셨다(호세 11,8 참조).

 

 

하느님의 자녀가 갖게 되는 두 가지 과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은 두 가지 결론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첫째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친밀함’과 ‘신뢰감’이 생기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거듭 강조하셨다. 우리는 두려워하며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잘 아시기 때문이다. 지상의 아버지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겠는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7-11)

 

둘째, 결론은 우리가 하느님의 참된 자녀처럼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여러분이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마음을 그대로 가진다면, 여러분의 아버지를 모든 선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 여러분은 더 이상 천상 아버지의 선하심의 특징을 여러분 안에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 강론」, 7,14,3).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모두 완전해지기를 힘써 노력하고, 하느님 아버지를 항상 마음 안에 모시며 살기를 결심해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 교부는 말했다.

 

“진실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을 ‘의인들이 드리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 하느님께서 마치 당신의 성전처럼 거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그렇게 부르며 기도하는 사람은 그가 부르는 하느님이 참으로 그 안에 거처하시기를 원하게 됩니다”( 「산상 설교」, 2,5,17).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신 하느님의 이름 ‘아버지’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을 갖지 못했다. 그저 “조상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비로소 모세에게 하느님의 이름이, 곧 ‘야훼’란 이름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이름을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였고 후대에 와서는 야훼란 이름을 부르는 것을 삼갔다. 둘째 계명은 이 존엄한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금하였다(탈출 20,7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제 새롭게 하느님의 이름을 계시하신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요한 17,1.6). ‘하느님의 이름’, ‘아버지’를 참으로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의 크신 선물이다!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나타난다. 곧 예수님의 이름의 뜻,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이름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가능성을 마련한다.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앞에서 증언하였다.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0.12).

 

요한 묵시록에도 예수님의 이름(어린양)과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이마에 적혀 있는 사람들이 세상 종말의 환난에서 구원된다고 기록되어 있다(14,1 참조).

 

* 장인산 베르나르도 - 청주교구 신부. 2016년에 은퇴한 원로 사목자로 현재 강화꽃동네 성녀 헬레나 성당에서 통일을 기원하며 지낸다. 독일 본대학교에서 교부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구가톨릭대학교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8년 4월호, 장인산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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