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조선 화교의 성당건축 시공 활동(1880년대∼1930년대) - 서울과 대구를 중심으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08 ㅣ No.951

조선 화교의 성당건축 시공 활동(1880년대∼1930년대)

- 서울과 대구를 중심으로 -*

 

 

국문 초록

 

본고는 조선 화교가 성당건축 시공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지 화교 건축청부업자와 직공을 중심으로 검토한 것이다. 이 검토를 통해 화교 건축청부회사 및 직공이 성당을 비롯한 가톨릭 건축 시공에 상당히 많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가톨릭 신자인 王 베드로와 陳 베드로가 초기 서울의 가톨릭 건축의 시공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으며, 특히 陳 베드로는 명동 성당뿐 아니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그리고 대구의 계산 성당 건축시공에 중요한 감독으로 참가했다. 화교 벽돌조적공은 벽돌 굽기와 조적 기술을 보유하여 시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대구 대목구의 각종 가톨릭 건축물을 시공한 것은 대구지역의 건축청부회사인 쌍흥호로 청부업주인 강의관과 감독 모문금이 1910년대부터 대구의 주요한 종교건축을 거의 시공했다. 강의관은 프란치스코가 세례명인 가톨릭 신자로 산동성 황현 출신이었다. 그와 같은 동향 출신인 모문금은 경성의 쌍흥호 건축청부회사에서 설계사로 활동한 경력도 있어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지역 대부분의 벽돌조적의 종교건축 시공을 담당했다. 화교 건축청부회사가 종교건축을 비롯한 공사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한 데는 다음과 같은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화교 청부업주와 직공 간은 주종의 관계로 가족적인 경영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 둘째, 화교 청부업자와 직공의 작업 태도가 매우 성실하고 충실하다는 점. 셋째, 직공은 공사 감독자의 지시에 순종하고 공기를 빨리 마무리한다는 점. 넷째, 화교 직공의 임금이 조선인과 일본인에 비해 저렴하여 공사 수주 가격이 싸다는 점.

 

 

1. 서론

 

근대 시기 가톨릭 성당건축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가 적지 않다. 이들 연구 성과를 크게 2가지로 분류한다면 건축학적인 시각에서 접근한 연구와 역사학적인 시각에서 접근한 연구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성당건축의 건축학적인 접근은 해당 건축이 어떤 건축적 양식과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건축적 공간구조 변천을 했는지를 중심으로 검토가 이뤄졌다. 이에 대한 연구 성과는 상당히 풍부한 편이며 성당건축물에 대한 각종 조사보고서도 많이 발행되어 있다.

 

그러나 성당건축을 역사학적으로 접근한 연구 성과는 상대적으로 매우 빈약한 편이다. 조선 가톨릭의 역사에 대한 연구 성과는 많지만 성당건축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김정신의 이 분야 연구 성과는 상당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며 이 분야 연구의 개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국 가톨릭 성당건축의 역사를 5기로 구분하여 분석했다. 제1기는 조선에 가톨릭 복음이 전파된 후 조불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되는 1785년부터 1886년까지의 시기이다. 제2기는 개화기의 성당건축(1886~1910년), 제3기는 일제 강점기의 성당건축(1910~1945년), 제4기는 해방과 격동기의 성당건축(1945~1962년), 제5기는 현대의 성당건축(1962~1992년)이다.1)

 

그는 각 시기별로 대표적인 성당건축과 참가한 설계자를 소개하며 성당이 건축되는 과정을 검토했다. 성당건축의 설계자는 대부분 조선(한국)에 파견된 외국인 신부이며, 제2기와 제3기의 대표적인 설계자는 코스트, 프와넬, 시잘레, 베르모렐, 로베르 신부이며 제4기와 제5기는 알빈 신부라고 분석했다.2)

 

그런데 하나의 성당건축이 완성되려면 훌륭한 설계도면만 있어서는 안 되고 설계도면에 근거하여 건축 재료를 활용해 공사할 수 있는 건축청부회사와 직공이 필요하다. 성당건축의 설계자인 신부에 대한 연구는 있지만 건축청부업자와 직공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근대 시기 건축된 각 성당의 기념지와 각종 문헌에 중국인 벽돌조적공과 건축청부업자에 의해 시공되었다는 언급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당건축의 시공에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구체적으로 연구된 것은 없다.

 

화교청부업자 및 직공에 관한 연구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정창원은 개신교 관련 건축물 및 교회의 화교청부업자로 慕文序, Harry Chang, 王公溫의 3명을 소개했다.3) 모문서는 서울 승동교회(1913), 평양 숭실전문학교(1928), Harry Chang은 서울 YMCA회관(1908), 서울 새문안교회(1910), 그리고 왕공온은 대한기독교서회(大韓基督敎書會), 이화여대 본관 및 각종 건축물(1933~1936)을 각각 시공했다. 이들 화교 건축청부업자는 주로 개신교 관련 교회 및 학교 건축을 주로 담당한 반면, 성당 및 가톨릭 건축의 시공에는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Harry Chang과 왕공온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한편, 조선 화교사 분야에서 화교 노동자에 관한 연구는 주로 비숙련 노동자, 이른바 쿨리[苦力]에 집중되었다.4) 이들 쿨리는 철도, 도로, 광산, 수리공사, 염전공사 등 각종 공사현장에 싼 임금으로 동원되어 장시간 노동을 했다. 쿨리는 상대적으로 싼 임금과 높은 노동효율로 조선인 노동자가 점차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잃으면서 1920년대와 1930년대 쿨리와 조선인 노동자 간에 각종 마찰과 충돌이 발생했다. 그러나 화교노동자 가운데에는 숙련노동자도 적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거의 없었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하에서 1880년대부터 1930년대에 조선에 건축된 성당 및 가톨릭 관련 건축물의 시공에 참가한 화교 건축청부업자 및 숙련 직공을 중심으로 검토하여 그들이 이들 건축시공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화교 건축청부업자 및 직공의 성당건축 참가


1) 화교 건축청부업자 및 직공 시공의 성당건축 목록

 

화교 건축청부업자와 직공이 시공에 참가하여 건축된 가톨릭 관련 건축물을 정리한 것이 〈표 1〉이다. 이 표의 작성은 기존의 연구 성과뿐 아니라 1차 자료라 할 수 있는 《뮈텔 주교 일기 1~8》5), 《드망즈 주교 일기 1911~1937》6), 《안세화 주교 공문집 : 대구대교구 초대교구장(1911~1938)》7), 《대구의 사도 : 김보록(로베르) 신부 서한집 1~2》8)를 근거로 작성했다. 그러나 이 표는 화교 건축청부업자와 직공의 참여가 확인된 것만 넣었기 때문에 실제 참가 건축물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에 가톨릭 관련 건축물이 자유롭게 건축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후반부터이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인에 의한 토지 구입 및 교회 건축이 인가된 것이 큰 계기였다. 당시 성당건축은 한옥식의 성당과 서양의 벽돌조적의 성당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19세기 말은 한옥식 성당이 많이 건축되다가 20세기 들어서는 벽돌조적의 성당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벽돌조적의 가톨릭 관련 건축물은 1888년~1889년에 건축된 명동 수녀원과 성영회(고아원) 건물이 처음이며, 그다음은 1889년~1890년의 명동 주교관 건물이다. 두 건축물은 모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코스트(Eugène-Jean Georges. Coste, 高宜善, 1842~1896년) 신부에 의해 설계되었다. 그는 조선 최초의 서양식 성당인 서울의 약현 성당과 명동 성당의 설계를 담당했다. 그가 1896년 장티푸스로 선종하면서 같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와넬(Poisnel) 신부와 시잘레(Chizallet) 신부가 벽돌조적의 성당건축을 설계했다. 같은 벽돌조적의 용산신학교와 용산신학교 성당은 1891~1892년과 1899~1902년에 각각 건축되었다.9)

 

서울 이외의 지역에선 인천 답동 성당이 1897년 건축된 것을 시작으로 대구의 계산 성당이 1903년, 횡성 풍수원 성당이 1910년, 원주 원동 성당이 1913년, 전주 전동 성당이 1914년, 원주 용소막 성당이 1915년, 익산 나바위(華山) 성당이 1916년에 각각 건축되었다.

 

특히, 1911년 4월 조선 대목구 관할하에 있던 경상도와 전라도가 조선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대구 대목구로 신설되면서 대목구에 걸맞은 성당, 수녀원, 신학교, 주교관 등의 건축물이 잇따라 신축되었다. 〈표 1〉을 보면 1910년대 계산 성당 증축공사를 비롯하여 각종 건축물이 잇따라 건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들어 농촌지역이면서 교통이 발달한 곳에 벽돌조적의 성당이 건축되었다. 1922년 아산 공세리 성당10), 1924년 칠곡 가실 성당11), 1928년 왜관 성당, 1929년 당진 합덕 성당, 1931년 경산 하양 성당, 1934년 김천 황금 성당이 각각 건축되었다. 인천 답동 성당은 1937년 기존의 준고딕양식에서 현재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증 · 개축되었다.

 

조선의 가톨릭 선교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1831년 처음으로 시작한 이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12) 그러나 독일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회가 1909년 서울 백동(혜화동)에 수도원을 세우고, 1920년 함경도와 중국 동북의 간도지역의 원산 대목구를 관할하게 되자, 원산지역에 1930년까지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 병원 등을 건축했다.13) 미국에 본부를 둔 메리놀 외방선교회(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는 1922년 평안남도와 평안북도 지역을 담당하여 1923년부터 선교활동을 시작했다.14) 1916년 아일랜드에서 창설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Missionary Society of St. Columban)는 1933년 맥폴린 신부가 목포에 본부를 두고 전라도와 제주도 서쪽의 선교를 담당하기 시작했고 1938년부터 강원도의 전교를 담당했다.15) 따라서 성 베네딕도회는 함경도, 메리놀 외방선교회는 평안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전라도와 강원도 일부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이들 지역의 가톨릭 건축은 그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성 베네딕도회와 메리놀 외방선교회가 담당한 대목구는 북한지역이기 때문에 성당 등의 건축물 현존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

 

 

 

2) 화교 건축청부업자 및 직공의 경쟁력

 

이처럼 화교 청부업자와 기술자가 종교건축의 시공 분야에서 큰 활약을 한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첫 번째 원인은 당시 조선의 건축물 가운데 벽돌건축물은 거의 전무한 상태로 벽돌의 제조와 벽돌조적의 기술을 보유한 직공이 거의 없었다. 이것이 내적인 원인이다. 둘째는 벽돌 제조와 조적의 기술을 가진 일본인 청부업자와 직공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화교 청부업자와 기술자가 그들보다 더 많이 채용 및 동원된 데는 그들만의 상대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교 청부업자 Harry Chang이 1907~1908년 시공에 참가한 경성 YMCA 건물 공사의 주임감독인 가네코 세타로[金子政太郞]는 그 원인에 대해 당시 경성에서 발행되던 건축전문잡지인 《建築世界》에 2차례에 걸쳐 기고했다.16) 그의 분석을 중심으로 화교 청부업자 및 직공의 우위성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1908년 1월 경성에 도착한 후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화교 건축청부업자 및 직공의 작업을 유심히 관찰하고 특히 일본인 건축청부업자 및 직공과 비교했다. 경성 YMCA는 당시 조선 기독교의 본부와 같은 상징성을 가진 단체로 이 단체의 건축 상량식에는 고종이 직접 참가하여 하사금을 낼 정도로 세인의 주목을 받는 공사였다. 건축의 규모는 약 220평, 구조는 3층 벽돌조적 건축물로 공사비는 약 2만 원으로 당시 조선 최대의 대공사였다.17)

 

그는 글의 서두에서 “공사에서 일하는 모든 淸人 직공의 작업 태도가 우리 청부자의 행위와 모든 면에서 전연 다르며 피차의 사업을 대조하면 매우 흥미로울 뿐 아니라 우리 업자가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제언했다.18) 그는 화교 건축청부업자와 기술자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첫째, 화교 건축청부업주와 직공 간의 관계이다. 그는 일본인 청부업자와 직공 사이는 “늘 공사상의 싸움보다는 오히려 음식, 금전, 혹은 도박(일부분을 가리킴) 등의 지저분하고 더러운 싸움이 벌어진다. 또한 청부업주는 이름뿐으로 속되게 말해 돈만 밝히는 악당이며 하나의 공사를 할 때마다 어떤 간교한 술책을 꾸며내 교섭타협을 유일한 직업으로 談合金을 억지로 짓궂게 청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또한 ‘돈이 있으면 親分子分’이라고 하는 더러운 의미를 자기 마음대로 하는 兇漢이라고 해야 할 악당의 발호가 있다. 끊임없이 사업의 진척을 방해하고 있으며 최근 그들에게 준엄한 단속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교묘하게 감춰 이러한 간교한 만행을 계속하고 있다”라고 혹평했다. 이에 비해 화교 청부업주는 “이 사업의 진척을 방해하여 공사계의 발달을 저해하는 추잡한 작폐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고 청부업주와 그 부하인 직공은 마치 주종의 관계로 공사는 가족적으로 경영되어 매우 평화로우며 충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실로 일대 美點이다”라고 감탄했다.19)

 

그는 이러한 장점이 발휘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모든 것이 조직적이며 우리 직인 간의 악폐인 속된 말로 노가다[土方]의 ‘이주’라는 것을 원래부터 꿈꾼 적도 없고 어떤 직공을 만나더라도 금전 이해에 구애받지 않고 공사를 준공할 때까지 열심히 일한다. 즉, 청부업주는 직공과 평화로운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원래 淸人 청부업자와 직공 간의 관계는 청부업주가 사용하는 목수, 석공, 벽돌공 등의 모든 직공은 청부업주와 평소 1~2년 일정의 기간을 정하여 고용계약을 맺은 후 공사를 개시한다. 그래서 공사 감독자가 청부업주에 대해 지시를 내리면 곧바로 청부업주는 직공의 십장에게 공사의 방법을 전달하고, 십장은 곧바로 직공 등에게 작업을 지시한다. 이와 같은 순서로 열심히 헌신적으로 작업한다. 이 조직은 어디까지나 專制的이며 이른바 淸國式이라 평해야 한다”라고 했다.20) 즉, 화교 청부업주와 직공 간의 일사불란한 주종관계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둘째, 화교 청부업주와 직공의 작업 태도가 매우 성실하고 충실하다는 점이다. 가네코 감독은 “그들 청부업자는 상부(공사감독)에 잘 복종하고 하부(직공)를 사랑하여 화목하며 단란하게 지내며 하나의 작업을 하는데도 서로 돕고 자신의 업무를 끝냈다고 해서 동료를 되돌아보지 않는 것은 없다. 일단 공사에 착수하기만 하면 완전히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모든 힘을 쏟아 힘써 일한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충실함은 “우리 청부업자에 고용된 직인에게 볼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21)

 

셋째, 공사 감독자의 지시와 뜻에 따라 작업한다는 점이다. 그는 “감독자의 눈을 피해 공사상 기만하는 일은 추호도 없다. 또한 어떤 작업에 구애받지 않고 일단 약속한 것은 구두 지시라 하더라도 결코 위약하는 것은 없고 만사에 주도면밀하다. 따라서 외국인이 맡긴 공사는 대개 그들의 손에 의해 이뤄지고 우리 동업자가 청부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외국인의 뜻에 따라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평가했다.22)

 

넷째, 화교 직공과 일본인 직공의 작업 태도의 차이점이다. 그는 “그들은 사업상 온순한 직공인데 비해 우리나라의 직공은 거칠고 잡스러우며 活潑한 직공이라고 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의 직인의 작업 태도가 생동감은 있지만 늘 살벌한 야만적인 풍습을 띠는 반면, 온순하고 평화로운 청국 직공은 사업에 충실하면서 만사가 느리고 둔하다. 그들의 마무리 작업을 보면 우리나라 직공의 뛰어난 솜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이런) 오점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몇 번이나 작업의 순서를 설명하여 그들에게 어떤 일을 시켰는데 성질의 측면에서도 부족한 점이 있다. 또한 도구와 작업상 개량 개선해야 할 충분한 여지가 있는 것을 알았다”고 지적하고, “일솜씨는 우리 직인에 비해 ‘둔하다’”라고 평가했다.23)

 

다섯째, 화교 직공의 임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그는 “경성 일본인의 임금은 목수 1.50원 내외, 석공 1.80원으로 결코 적지 않은 수준이다. 청국 직공의 임금은 어떠한가 하면 그들은 연간 고용이기 때문에 임금지불은 추석과 설로 나눠 2차례 지급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이를 일당으로 환산하면 겨우 50전 내외이다. 이와 같이 피차의 임금은 큰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해야 할 저축을 유감없이 한다”고 지적했다.24)

 

여섯째, 화교 청부업자와 직공은 매우 경제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화교 직공의 임금이 일본인 직공의 3분의 1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일본인 청부업자에게 1만 원의 공사가 화교 청부업자에게 7천~8천 원밖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공사 완료의 준공은 기일보다 빨리 공사를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는 이러한 것을 들어 그들을 “공사계의 경제적 직인으로 칭찬할 가치가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25)

 

그는 상기와 같이 일본인 직공에 비해 솜씨는 떨어져도 임금의 저렴함, 성질의 온순함, 지시한 작업 명령의 복종, 약속의 이행 등에서 훨씬 일본인 직공을 압도하기 때문에 서양인에게 두터운 신용을 얻어 그들의 공사의 대부분은 그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들은 우리 일본인 직공이 가장 경계해야 할 강적이다”고 결론지었다.26)

 

그리고 가네코 세타로는 자신이 관찰한 화교 직공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① 화교 직공의 세심한 기술 부분은 아직 불충분하지만 개선 발전의 전망은 밝다. ②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화교 직공을 경시하지만 특정 기술은 일본인 직공을 앞선다. ③ 화교 벽돌 직공의 뛰어난 조적 기술은 칭찬할 가치가 있다. ④ 화교 석공은 화강석에 어떠한 조각도 잘 해낸다. ⑤ 화교 목공은 일본인 목공에 비해 훨씬 못하지만 개량 발전의 전망은 충분하다. ⑥ 화교 직공을 엄중히 감독하여 잘 지도한다면 보다 작업을 충실히 하고 경제적으로도 얻을 것이 많다. ⑦ 일본 직공은 공사상 속이는 것이 많다. 특히 배합물의 배합 시 한시라도 감독을 느슨하게 할 수 없는 데 반해 화교 직공은 처음에 배합 및 방법을 설명하면 콘크리트, 모르타르 등의 주요 재료를 속이지 않고 성실히 실시한다.27)

 

상기와 같은 평가를 한 것은 일본인 건축기술자만은 아니었다. 미국 남장로회의 스와인하트(Swinehart) 선교사는 광주와 순천지역의 개신교 관련 건축물을 거의 모두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는 15년간 화교 건축청부업자와 같이 공사를 한 경험을 토대로 그들의 장점을 세 가지 들었다. 첫째는 직공의 선택과 재료의 사용에서부터 완성까지 전반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있고 실행력이 있다는 점. 둘째, 건축 자재를 스스로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도난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 셋째, 미국의 일반적인 착실한 건축청부업자의 활동과 비교적 유사하다는 점.28)

 

이처럼 일본인과 서양인 건축전문가는 화교 건축청부업자 및 직공의 기술과 작업태도에 대해 상당한 신뢰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 가톨릭 건축뿐 아니라 개신교 건축물에 화교 청부업자 및 직공이 참가한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네코 세타로와 스와인하트가 칭찬을 아끼지 않은 화교 건축청부업자 및 직공은 어느 정도 있었을까. 1930년 10월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國勢調査에 의하면, 화교 ‘토목건축업주, 청부업주’는 46명이었다. ‘토목건축기술자, 직원, 감독’도 같은 46명이었다. 그리고 일반 직공인 목수는 2,791명, 미장이는 366명, 벽돌조적직공은 119명, 석공은 1,279명, 토공 6,480명, 기타 158명이었다. 화교 토목건축 종사자는 총 1만 1,285명에 달했다. 조선 전체의 토목건축 종사자의 13.2%를 차지했다. 조선인은 전체의 69.1%, 일본인은 17.6%였다. 당시 화교 인구는 9만 1,783명으로 조선 전체 인구의 0.4%에 불과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노동시장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화교 토목건축 노동자 가운데 숙련 기술자라 할 수 있는 목수, 미장이, 벽돌조적직공은 화교 토목건축 노동자의 약 3할을 차지했다. 하나 흥미로운 점은 벽돌조적공은 화교 119명, 조선인 114명, 일본인 86명으로 화교가 가장 많았다는 점이다.29) 화교 벽돌조적공은 성당과 같은 종교건축 시공에서 주로 활동했다.

 

 

 

이러한 화교 건축청부업주 및 직공의 각 도별 분포를 나타낸 것이 〈표 2〉이다. 경기도에 전체의 4할에 해당하는 19개소로 가장 많았고, 이 가운데서 경성에 13개소, 인천에 5개소로 두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벽돌조적공은 경기도에 전체의 35%인 42명이 있었으며 이 가운데 경성 27명, 인천 9명이었다. 목수는 전체의 31%, 석공은 전체의 40%가 경기도에 각각 분포되어 있었다. 이처럼 경기도에 속하는 경성과 인천에 화교 건축청부업주 및 직공이 전체의 약 4할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식민 도시의 수도이기 때문에 종교건축뿐 아니라 학교, 병원 등의 건축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경기도에 이어 화교 건축청부업자가 많은 지역은 함경남도 7개소, 평안북도 4개소, 평안남도 및 함경북도 각 3개소로 많았다. 함경남도는 원산부, 평안남도는 평양부가 위치한 곳으로 이 지역은 성 베네딕도회와 메리놀회의 대목구가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종교 건축의 수요가 많았던 곳과 일치한다.

 

주요한 화교 건축청부회사는 경성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東成號, 雙興號, 長發隆, 廣昇號 등 4개 회사가 종교건축, 학교, 병원 등의 건축을 거의 독점했다.30) 일본의 신용평가기관인 商業興信所가 1915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長發隆(경영주 劉銀生), 榮興號(경영주 司徒紹), 廣昇號(경영주 林喜亭)의 연간 매상액은 1만~2만 원, 雙興號(경영주 慕文序)는 3천~5천 원, 徐坤生은 1천 원 미만이었다.31) 東盛號는 1917년 조사에서 경영주는 張時英으로 연간 매상액은 10만∼15만 원으로 최고의 규모를 자랑했다.32)

 

제1차 세계대전 후 불경기로 청부회사가 문을 닫는 곳이 많았다. 1923년 현재 경성의 주요한 화교 건축청부회사는 福音建築廠(王公溫, 연간 매상액 10만 원), 雙興號(3만원), 司徒紹(1만 원), 江兆仁(8천 원)이었다.33) 진남포부에는 德春盛이 조선인 주택 건축을 주로 청부 시공하고 있었으며 연간 매상액은 9,150원이었다.34) 대구에는 姜義寬 경영의 건축청부회사로 연간매상액은 7천 원이었다.35) 商業興信所의 《商工資産信用錄》에 의하면,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의 주요한 화교건축청부회사는 복음건축창, 雙興和記(경영주 慕文翰), 영흥호(司徒紹)의 3개로 압축되었으며 이전보다 청부 금액도 많지 않았다.

 

 

3. 화교 건축청부업자의 시공 활동


1) 王 베드로와 陳 베드로

 

뮈텔 주교의 1891년 6월 16일 자 일기에 “우리가 용산의 (신학교) 건축을 위해 고용했던 중국인 신자 왕 베드로가 사망하다”라고 적혀있다.36) 용산신학교는 1891년 5월 정초식을 갖고 1892년 6월에 완공된 건축물이다. 王 베드로는 이 신학교 건축 시공으로 고용된 직공으로 정초식을 가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건축물은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것이기 때문에 1888년부터 1889년 사이에 건축된 명동 수녀원 및 고아원의 시공도 王 베드로가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종교건축의 금자탑은 명동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성당의 공사는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정초식이 거행되는 1892년 5월 8일부터 축성식이 거행되는 1898년 5월 29일까지 약 6년에 걸친 대공사였다. 서울의 약현 성당의 공사가 1891년 10월 21일부터 1892년 11월 6일까지 약 1년에 그친 것과 비교된다. 그 후 약현 성당은 소형 성당건축, 명동 성당은 대형 성당건축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규모 면에서 명동 성당은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이 명동 성당의 건축에 관해서는 뮈텔 주교의 일기에 등장하는 공사 관련 내용을 정리한 연구가 있지만, 화교를 중심으로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37) 따라서 화교 직공이 명동 성당건축에 어떻게 참가하고 있었는지 이 일기를 토대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명동 성당의 건축 공사에 화교 직공이 동원되었으며 이들의 감독자로 陳 베드로가 고용되었다. 陳 베드로에 대한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며, 《뮈텔 주교 일기》에 약간 등장할 뿐이다. 陳 베드로의 이름이 《뮈텔 주교 일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894년 8월 6일 자 일기이다. 그는 청일전쟁 발발 직후 벽돌조적공 감독으로 심한 고열을 앓아 전쟁으로 인해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연기시켜달라는 요청을 뮈텔 주교에게 하는데, 뮈텔 주교는 그의 요청을 수용했다.38)

 

1896년 10월 6일 자 일기에 陳 베드로는 벽돌직공 감독으로서 인천 답동 성당의 공사에 명동 성당 벽돌직공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대해, 조선인 감독이 모든 업무와 화교 직공의 임금 지불을 조종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39) 그리고 1900년 7월 14일 자 일기에 의화단의 난 때 芝罘(현재의 煙台)에서 난을 피해 서울로 피신 온 陳 베드로 자신의 가족의 임시 거처를 명동 성당의 정원 뒤쪽 건물로 해달라고 뮈텔 주교에게 요청하고 주교는 이를 수용했다.40) 이러한 일기의 내용으로 볼 때 陳 베드로와 그의 가족은 모두 가톨릭 신자이며 산동성 연태 출신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뮈텔 주교가 그의 요청을 두 번이나 수용한 것을 보면 그가 陳 베드로를 매우 신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陳 베드로와 화교 벽돌직공이 명동 성당의 공사에 어떤 형태로 참가하고 있었는지 뮈텔 주교의 일기를 근거로 살펴보자. 명동 성당의 공사가 시작되기 전 먼저 부지의 측량이 1892년 3월 31일에 실시되고41), 5월 8일 정초식이 거행되어 공사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42) 이때부터 화교 벽돌조적공이 동원되었다. 5월 24일 명동 성당 지하부에 다듬어진 돌을 놓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조선인 석공도 참가했는데 그들은 화교 벽돌조적공이 돌을 놓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뮈텔 주교는 그들이 일을 아주 잘 한다고 칭찬했다.43) 화교 벽돌조적공은 성영회(고아원) 건물에 머무르며 작업을 했다. 6월까지는 성당의 지하 및 지반 기초공사가 끝났다.

 

1892년 7월 27일부터 벽돌쌓기가 시작되었으며 화교 벽돌조적공이 담당했다.44) 성당의 벽은 붉은 벽돌을 쌓고 그 사이사이 버팀벽을 회색 벽돌로 쌓아 좋은 효과를 내려 했다.45) 화교 벽돌조적공이 사용하는 벽돌은 성당 근처 벽돌공장에서 직접 구워낸 것으로 이 벽돌 제조도 화교 벽돌제조공이 담당했다. 당시 성당 시공에 참가한 화교 직공은 벽돌제조직공 4명, 벽돌조적공 22명, 총26명이었다.46)

 

그러나 이들 벽돌 직공은 조선에 정주하지 않는 계절노동자였다. 그들은 대체로 11월 말 경 짐을 싸서 중국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듬해 4월경 봄이 되면 다시 돌아와서 작업했다. 즉, 4월~11월의 약 8개월간 공사를 하고 번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5개월을 고향에서 생활하고 다시 돌아오는 형태였다. 따라서 명동 성당의 공사는 이 5개월의 기간에는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뮈텔 주교의 일기에 명동 성당의 공사가 재개되었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대부분 4월의 일기에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47)

 

명동 성당 근처에 위치한 청국의 한성상무공서(漢城商務公署, 현재의 중국대사관 자리)도 이 공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92년 8월 31일 공서 및 용산상무공서(龍山商務公署)의 직원인 唐紹儀, 周, 梁 등이 명동 성당 공사를 둘러보았으며,48) 1898년 5월 29일 성당 축성식에는 청국의 총영사로 파견된 당소의도 참관했다.49) 뮈텔 주교는 한성상무공서와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892년 7월 21일 청국의 국경일 때 한성상무공서를 방문하고 원세개와 당소의의 환대를 받았다.50) 뮈텔 주교는 음력 설 때는 꼭 한성상무공서를 방문하거나 방문하지 않을 때는 카드를 보냈다.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로 뮈텔 주교가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1892년 12월 9일 조선 정부 서리독판 李容稙이 명동 성당의 공사를 방해하려는 음모를 간파한 원세개가 이를 뮈텔 주교에게 미리 알려준 일이 있었다.51) 당소의는 공사장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물 펌프를 제공해주었다. 뮈텔 주교는 특히 당소의와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뮈텔 주교는 그에 대해 조선을 잘 알고 조선말을 매우 잘하며, 조선 정부 인사와 잘 지내고 영어를 매우 잘하지만, 사물을 이해하는 태도나 방식이 여전히 매우 중국적이라고 지적했다.52)

 

한편, 陳 베드로는 명동 성당 완공 후 서울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의 건축을 담당했다. 1897년 8월에 시작된 이 공사는 1900년 9월 8일 완공되었는데 자재나 직공은 명동 성당건축에 참가자가 그대로 맡았다. 한국 수도회의 85주년지에 “이 집을 지을 때 명동 대성당을 짓던 청국 사람인 베드로라는 열심한 교우에게 맡겼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이 수녀원의 핵심적인 시공업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53)

 

陳 베드로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 완공된 후, 1901년~1903년에 건축된 대구 계산 성당의 시공에 참가했다.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1902년 5월 8일 서신에, “Poisnel 신부님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분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54) 이 편지로 볼 때, 시공상의 문제로 ‘베드로’라는 인물이 계산 성당의 설계자인 프와넬 신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시공책임자의 자리에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말이다. 명동 성당의 공사가 끝난 이후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陳 베드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계산 성당은 1899년 원래 한옥형 성당으로 건축되었지만 지진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로베르 신부는 소실된 성당을 명동 성당과 같은 벽돌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프와넬 신부에게 설계를 부탁하고, 정식으로 공사를 착수한 것은 1901년 3월 16일이었다.55) 5일도 채 지나지 않아 성당의 정지 작업을 끝내고 벽돌 제조소 건설, 물을 끓이기 위한 나무 베기 작업, 석재를 나르는 작업을 했다. 그러나 벽돌 제조공이 없었기 때문에 로베르 신부는 5월 13일 프와넬 신부에게 연락하여 화교 기술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56) 곧 벽돌제조공이 도착하여 작업을 개시했다. 그러나 처음에 흙이 너무 질어 벽돌을 구워내는 데 실패하고 목재가 부족하여 나뭇가지를 사용해야 했다.57) 곧 벽돌조적공이 도착하여 성당건축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동원된 화교 직공은 28명이었다.58) 5월 말에 석공 14명과 목수 3명, 요리사 2명 등 19명이 도착하고 6월에는 벽돌제조업자 9명이 도착했다. 7월 20일부터 9월 15일까지 구운 벽돌은 17만 장에 달했다.59) 9월 초 석재공사가 마무리되어 9월 18일부터 벽돌조적 공사가 시작했다.

 

그 후 공사는 프와넬 신부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진척되어 6월까지 성당의 골조를 세우기 시작하고 종탑과 성가대석도 반가량 세웠다.60) 벽돌쌓기는 9월 20일부터 11월 말까지 창문의 절반 높이까지 벽돌을 쌓았으며 10월 13일까지는 성당 천정에 벽토를 바르는 공사를 마쳤다. 명동 성당의 공사 때와 같이 화교 직공은 11월 25일 성당 공사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61)

 

계산 성당의 시공감독으로 참가한 陳 베드로는 1909년~1910년에 건축된 횡성의 풍수원 성당에 참가한 것이 확인된다.62) 비슷한 시기 강원도의 원주 원동 성당(1913)과 용소막 성당(1915)도 그의 시공에 의한 건축일 것으로 추정된다.

 

2) 강의관과 모문금의 대구대목구 성당건축 시공

 

(1) 강의관과 모문금의 이력

 

화교 건축청부업자 강의관과 모문금이 대구대목구의 각종 가톨릭 건축에 참가한 것은 몇몇 연구에 의해 언급되었다.63) 그러나 강의관과 모문금이 어떤 인물이며 그들이 건축청부업자로 건축 시공에 참가한 사실이 자료에 의해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먼저 강의관과 모문금이 어떤 인물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강의관이 조선총독부의 공식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昭和三年 各國領事館往復》이란 문서에 ‘在留民國人姜銀貴大邱中學校入學願ニ關スル件’이다.64) 이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화민국 주경성총영사 王修善은 1927년 2월 22일 자로 조선총독부 外事課長 앞으로 강의관의 자제로 대구보통학교를 졸업한 姜銀貴를 대구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京城中華總商會가 주경성총영사관으로 강은귀가 입학할 수 있도록 부탁했기 때문에 강의관이 경성중화총상회에 직접 연락한 것으로 보인다.

 

경성총영사관은 강은귀의 이력을 첨부했다. 강은귀의 나이는 15세이며, 원적은 ‘中華民國山東省黃縣城東毆頭于家村’으로 적혀 있어 그의 부친 강의관의 중국 거주 주소일 것이다. 산동성 황현은 발해만에 면한 지역으로 중국 동북지역에 이민을 많이 송출하는 지역의 하나로 이 지역 출신 화상이 동북지역에서 큰 상업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강의관은 대구부 南山町 190번지에 위치한 토목청부회사 雙興號의 총책임자였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이 회사의 연간과세표준액(연간수입액)은 7천 원에 달했다. 당시 조선 화교의 건축청부회사 가운데서는 5번째의 규모를 자랑했다.65)

 

강의관은 大邱華商公會 설립에 적극 참가했다. 1921년 大邱華商同鄕會가 설립된 후 화교의 인구 증가와 상업의 번창으로 1927년 대구화상공회를 설립하는데 강의관은 孔漸鴻, 張蓮舫, 楊心齋와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대구화상공회의 공소 건축도 적극 나섰으며 쌍흥호는 250원의 기부금으로 최고의 기부자였고, 강의관은 개인적으로 100원의 기부를 했다. 그는 대구화상공회의 초대 의원으로 피선되어 대구화교사회 발전에 기여했다.66)

 

다음은 慕文錦에 대해 살펴보자. 1941년 대구화교소학의 설립 때 중화민국 부산영사관으로 그가 보낸 자신의 이력은 이러하다. 모문금은 1895년 10월 28일 산동성 황현 東麻院 慕家村에서 태어났다. 강의관과 같은 산동성 황현 출신인 것이다. 1904년 모가촌의 私塾에 입학하고 1912년 12월 12일 사숙을 휴학한다. 1913년 3월 15일 서울로 이주하여 정동에 있던 쌍흥호 건축청부회사의 서기로 취직한다. 이 쌍흥호가 강의관이 대구서 개업한 雙興號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쌍흥호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1915년 4월 1일부터 설계사로 승진한다. 약 2년 설계사로 일한 후 1917년 3월 31일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쌍흥호를 떠난다.

 

그는 대구시 남산정 190번지에 소재한 쌍흥호의 책임 경리로 1920년 4월 1일 취직하며, 강의관은 총책임 경리였다.67) 강의관이 동향의 후배이자 경성의 쌍흥호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모문금을 데려온 곳으로 보인다. 따라서 1920년 4월 1일 이후 강의관과 모문금은 함께 건축 시공을 담당하게 된다.

 

강의관은 1931년 화교 배척사건 때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이후 쌍흥호는 모문금이 총책임경리가 되어 경영을 책임졌다. 모문금은 강의관 귀국 이후 대구화교사회의 중추적인 인물이 된다. 1933년 12월 14일 대구 화상공회에서 바뀐 대구 중화상회의 부주석에 피선되고, 1936년 7월 17일에는 주석에 피선되어 대구 화교사회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된다. 1937년 6월 21일에는 지역 최대의 중화요리점인 群芳閣의 경영자로서 대구 중화요리음식점조합장에 피선된다. 중일전쟁 이후 그는 대구 중화상회의 주석으로서 지역 화교의 염원인 화교소학의 설립에 발 벗고 나서 1941년 8월 21일 경상북도지사로부터 인가를 받아냈다.68)

 

화교소학교는 1943년 2월 중화상회의 한 방을 빌려 개교했는데 모문금은 발기인 위원장으로서 200원을 기부했을 뿐 아니라 그가 경영하는 군방각과 쌍흥호의 이름으로 각각 200원, 100원을 기부하여 전체 모금총액 6,350원의 약 8%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냈다.69) 그는 지역뿐 아니라 조선 화교사회의 지도자의 한 명이었다. 1939년 3월 3일 전국의 중화상회의 연합체인 旅鮮中華商會聯合會의 간사로 피선되었으며, 1942년 3월 20일 旅鮮華僑代表大會에 초빙되어 경성의 화교중학교 준비위원으로 피선되었다.70)

 

그는 해방 직후에도 대구 중화상회의 회장을 맡아 구 화상공회 건물에서 자신이 시공한 徐炳國 주택으로 1949년 이전을 주도했다. 또한 화교 학생 수의 증가로 기존의 교사로 수용이 불가능하자 새로운 교사를 건축하였으며 그때 그는 쌍흥호 이름으로 52만 원, 군방각 이름으로 39만원으로 총 91만 원을 기부했다. 당시 그는 대구화교소학의 교장이었다.71) 그는 쌍흥호와 군방각의 총경리로 일했으며, 1967년 현재의 대구중화기독교회 건축시공을 마지막으로 1968년경 대만으로 이주했다.

 

(2) 쌍흥호 시공의 가톨릭 건축

 

이러한 이력의 강의관과 모문금이 소속한 쌍흥호 건축청부회사는 대구지역의 어떠한 가톨릭 건축물을 시공했는지 검토해보자.

 

드망즈 신부가 1911년 6월 대구 대목구의 대목구장으로 부임한 후 대목구에 어울리게 각종 가톨릭 관련 건축을 시공했다. 대목구에 필요한 시설은 주교좌 본당, 주교관, 신학교, 수녀원 등이었다. 드망즈 주교는 1910년대와 1920년대 이들 건축의 공사를 대대적으로 실시, 이른바 대구 대목구의 ‘건축의 시기’라 할 정도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건축의 설계는 신부가 담당했지만 시공은 주로 쌍흥호가 담당했다.

 

모문금의 대구 이주는 1920년으로 정확히 밝혀졌지만 강의관은 경우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드망즈 주교의 1914년 12월 18일 자 일기에 “그저께 신학교 성당의 제대와 제기단(祭器壇)이 설치되었다. 비용은 전부 합쳐서 200원이 못 들었고, 돌은 중국인 시공자인 강 방지거가 기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2) ‘강 방지거’[姜方濟角]는 강 프란치스코의 한자 세례명이며, 프란치스코는 강의관의 세례명이다. 이로 볼 때 강의관은 1914년 12월 성유스티노신학교 성당의 시공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1914년 12월 이전에 이미 대구에 이주한 것을 말해준다. 계산 성당(1901~1903년)의 시공을 陳 베드로가 담당한 것으로 볼 때 그는 1904년~1914년 사이에 대구에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특히 대구 대목구가 개설되어 건축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드망즈 대목구장이 취임하는 1911년경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그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드망즈 주교의 신망이 두터웠다고 할 수 있다.

 

드망즈 주교가 가장 먼저 건축에 착수한 것은 그가 거주할 주교관이었다. 1912년 9월 18일 주교관 부지에 벽돌직공 8명이 자리를 잡았다. 그 근처에 벽돌제조에 쓸 흙이 있어 주교관과 신학교 부지 사이에 벽돌공장을 세웠다. 명동 성당과 같이 현지에서 벽돌을 구워 건축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73) 그해 10월 30일 벽돌 한 가마 분인 1,400개의 벽돌이 잘 구워졌다.74)

 

1913년 2월 24일 화교 직공 제1진이 도착하여 곧바로 건축 시공에 필요한 우물을 파는 일부터 시작했다.75) 6월 10일경 주교관 건물은 화교 벽돌조적공에 의해 지하실 창문 높이까지 올라갔다.76) 8월 19일 벽돌 공사는 뼈대 골조가 완성되어 널빤지로 덮고 2~3일 후 미장일을 시작했다.77) 10월 5일 주교관의 공사의 외부 공사가 끝나고 내부공사가 진행되었다. 화교 벽돌제조공은 올해 65만 개의 벽돌을 제조하고 11월 30일 대구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78) 12월 22일 드망즈 주교는 완공된 2층 벽돌조의 주교관으로 이사를 했다.79)

 

다음은 성유스티노신학교의 시공이다. 이 시공은 주교관 공사와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1913년 10월 5일 신학교의 기초가 완성되어 1층의 창문 위까지 세워졌다.80) 1914년 3월 16일 신학교 건물의 측면 미장이 진행되었으며, 그해 10월 1일 신학교 건물이 준공되었다.81) 그해 12월 18일 신학교 성당의 제대와 제기단이 설치되었는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시공자인 강의관이 석재를 기증했다.82) 신학교 성당의 축성 의식은 1915년 5월 9일 개최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신부를 보좌하면서 고아와 노인을 돌보고 의료사업을 담당할 수 있는 수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1914년 6월 17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공식 요청했다.83) 7월 29일 수녀회에서 수련소 이외에 대해 긍정적인 회답을 받고 곧바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강의관이 시공을 맡았다.84) 1915년 성바오로 수녀회의 코미넷관이 완성되어 10월 12일 뱅상 수녀, 루이스 수녀 그리고 한국인 수녀 3명이 수녀원에 도착했다.85) 코미넷관의 1층은 예배실과 유아원, 2층은 침실, 지하는 식당 및 창고였다.

 

드망즈 주교는 성모당 공사를 계산 성당 증축 공사와 동시에 진행했다. 계산 성당 증축 공사에 앞선 1917년 7월 31일 성모당의 토목공사를 시작했다.86) 강의관은 이 성모당 공사의 시공자로 참가했다. 드망즈 주교의 1917년 10월 17일 일기에 “우리의 청부업자 중국인 강 방지거가 오늘 아침에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렀다. 나는 그에게 건축 자재 준비를 목적으로 동굴 건축 계획을 대략 설명했다. 그는 안동(安東)현의 목재를 주문하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87) 이 일기로 강의관이 성모당의 청부업자로 참가하고 있었으며 성모당의 목재는 중국 동북의 안동(현재의 丹東)에 주문하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1918년 1월 27일 1년 걸려 성모당의 설계도 3장이 완성되어 공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88) 5월 27일 동굴의 아치 꼭대기에 돌이 올려졌다. 특별열차로 운송되어 온 이 돌은 1천kg이나 나가 화교 직공과 조선인 직공이 도르래로 7m 높이까지 올리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드망즈 주교는 매우 기뻐하여 직공들에게 약주 값으로 3원을 주었다.89) 드망즈 주교는 5월 30일 직접 성모당의 정면 위에 ‘1911 EX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1911년 무염시태의 성모에게 한 서약에 의해 1918)이란 글자를 직접 새겨 넣었다.90)

 

1917년 7월 31일 동굴 정지작업으로 시작된 성모당 공사는 꼭 1년 되는 때에 끝났다.91) 10월 1일 일본 고베에서 성모당에 설치할 성모상이 도착했지만, 양식을 무시한 포장으로 80여 개의 조각이 났다. 다행히 얼굴과 손은 손상을 입지 않은 상태였는데 화교 직공이 다음날 조각들을 다시 붙이고 성모상을 시멘트로 수선했다. 그들은 칠 작업을 잘 해 어떤 틈 자국도 남지 않았다.92) 10월 13일 성모당의 낙성식이 개최되었다.93)

 

드망즈 주교는 신자 수의 증가로 1903년 건축한 계산 성당으로 수용이 어려워지자 증축을 계획했다. 1918년 1월 23일 경상북도지사에게 증축 공사를 위한 신청서를 보내 조선총독부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으로부터 허가가 난 것은 1918년 3월 22일이었다.94) 공사가 시작되어 5월 20일 제대석을 허물고 바닥과 지붕도 헐었다. 이 성당 증축 공사에 화교 직공이 동원되었으며 시공자로 강의관이 참가했다. 9월 2일 대성당의 제대 설계도가 완성되었으며95), 10월 8일 제대용 석재가 상해에서 도착했다.96) 10월 24일 공사를 하고 있던 화교 직공 가운데 여러 명이 전국을 강타한 전염성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눕는 일도 있었지만97), 10월 25일 대성당의 제대 설치가 무사히 끝났다.98) 대성당은 12월 25일 견진성사와 성체강복을 행하고 증축 공사는 완전히 끝났다. 이때 증축 공사한 성당이 현재의 계산 성당이다.

 

강의관과 모문금은 칠곡군 가실 성당의 시공에도 참가했다. 1920년 6월 14일 자 경성의 뮈텔 주교에 보낸 가실 성당 신축 공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중국 일꾼들을 오게 하였습니다. 기술자 10명과 보조자 4~5명을 불렀습니다. 중국인 일꾼들은 양심적이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건축업자 강 프란치스코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싸게 짓게 되었습니다. 중국인 일꾼들은 하루에 2,750(냥)을 줍니다. 벽돌 품질이 제일 좋은 것은 아니지만 공사일을 잘 하기 때문에 건축은 튼튼할 것입니다. 강 프란치스코는 너무 높은 가격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전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자금이 부족하여 공사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99)

 

1912년 5월 29일 가실 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투르뇌(여동선) 신부는 기존의 한옥 4채로 이뤄진 본당을 벽돌조적의 성당으로 바꾸려는 계획을 세우고 설계를 프와넬 신부에게 맡겼다. 1919년 1월 4~10만 장의 벽돌을 계약하고 1920년 초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상기의 보고서에 언급된 ‘건축업자 강 프란치스코’는 물론 강의관이다. 그런데 이 성당건축에 강의관은 높은 가격을 제시하여 그에게 시공이 맡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된 후, 투르뇌 신부가 1921년 모친의 병문안차 프랑스로 귀국, 공사 자금을 모금하여 1922년 9월 16일 가실 성당으로 돌아온 후 공사는 재개되었다. 가실 성당의 신도인 강 라파엘은 이때의 성당 공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여동선 신부는 먼저 벽돌을 구울 중국인 기술자 7~8명을 초청하고 가실 현지에서 중국인 모 씨를 감독으로 하여 성당건축에 사용할 벽돌을 구웠으며 다른 중국인 강 씨가 총감독이 되어 공사가 재개되었다. 이렇게 성전에 사용될 벽돌은 현지에서 구워 만들고 목재와 시멘트는 부산에서 배를 이용하여 낙산 선착장으로 운반하였다. 이리하여 구운 벽돌이 다 준비되자, 중국인 건축기술자들이 벽돌을 쌓아올려 성전과 사택 건물을 지었다. 성당의 건축 목재는 바다와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운반된 일본산 홍송을 사용하였다. 1923년 12월경 성당건축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었는데 건축에 소요된 자금은 그 당시 금액으로 약 17,000원이 들었다.”100)

 

여기서 ‘중국인 강 씨’는 바로 강의관이며, ‘중국인 모 씨’는 모문금이다. 강의관이 1922년 9월부터 재개된 공사에 총감독, 모문금이 감독으로 현지 공사를 지휘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쌍흥호 건축청부회사와 계약하여 추진했을 것이다.

 

강의관과 모문금이 주도하는 쌍흥호는 상기의 건축물 이외에 대구 지역의 다른 가톨릭 건축물 시공을 담당했다. 1937년 모문금과 직접 계약한 것이 확인되는 성바오로 수녀원의 수련소 건축은 2만 919.64원에 시공 계약되었다.101) 1930~1931년에 건축된 경산 하양 성당, 1934년 건축된 김천 황금 성당도 건축 양식과 사용된 벽돌이 낙산 성당과 매우 유사하여 쌍흥호에 의해 시공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해방 후인 1948년경 조선은행 조사부가 쌍흥호에 대해 조사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지의 쌍흥호는 화교 모문금씨가 경영하는 건축업 기업체로서 20여 년 전부터 건축청부업으로 당지 토목계에 일대 세력을 뻗치고 있다. 그가 설계한 공사 건축물은 상당한 수에 달하는데 종전에는 일인 청부업자와 비견하고 있었다.”102)

 

즉, 쌍흥호가 시공한 건축물은 ‘상당한 수’에 달한다고 했는데, 가톨릭 관련 건축물뿐 아니라 서병국 주택(1929년), 계성학교의 Henderson관(1931)도 그의 작품이다.

 

쌍흥호는 해방 직후에도 “미군의 위탁청부(하부)와 그 밖의 건축 사업으로 여전한 성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여 여전히 활발한 건축청부업을 하고 있었다.

 

 

4. 결론

 

우리는 위에서 화교 건축청부회사 및 직공의 종교건축 시공, 특히 가톨릭 건축 시공을 중심으로 검토했다. 상기의 검토를 통해 화교 건축청부회사 및 직공이 성당을 비롯한 가톨릭 건축 시공에 상당히 많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큰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가톨릭 신자인 王 베드로와 陳 베드로가 초기 서울의 가톨릭 건축의 시공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으며, 특히 陳 베드로는 명동 성당뿐 아니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그리고 대구의 계산 성당건축시공에 감독으로 참가했다. 화교 벽돌조적공은 벽돌 굽기와 조적 기술을 보유하여 시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조선인 벽돌조적공이 가톨릭 관련 건축물 시공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화교와 같이 공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구대목구의 각종 가톨릭 건축물을 시공한 것은 대구지역의 건축청부회사인 쌍흥호로 청부업주인 강의관과 감독 모문금이 1910년대부터 대구의 주요한 종교건축을 거의 시공했다. 강의관은 프란치스코가 세례명인 가톨릭 신자로 산동성 황현 출신이었다. 그와 같은 동향 출신인 모문금은 경성의 쌍흥호 건축청부회사에서 설계사로 활동한 경력도 있어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지역의 대부분의 벽돌조적의 종교건축 시공을 담당했다.

 

이와 같은 화교 건축청부회사는 1930년 10월 현재 46개소였으며, 이 가운데 경성에 13개소, 인천에 5개소가 있어 가장 많았다. 벽돌조적공은 119명으로 조선인, 일본인보다 더 많았다. 화교 건축청부회사가 종교건축을 비롯한 공사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한 데는 다음과 같은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화교 청부업주와 직공 간은 주종의 관계로 가족적인 경영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 둘째, 화교 청부업자와 직공의 작업 태도가 매우 성실하고 충실하다는 점. 셋째, 직공은 공사 감독자의 지시에 순종하고 공기를 빨리 마무리한다는 점. 넷째, 화교 직공의 임금이 조선인과 일본인에 비해 저렴하여 공사 수주 가격이 싸다는 점.

 

마지막으로, 이번 연구에 의해 화교 벽돌조적직공과 같은 화교 숙련 기술자가 종교건축물의 시공에 참가하여 크게 활동한 것을 밝혀냈는데, 이는 쿨리와 같은 단순 육체노동자 중심의 기존의 화교 노동자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 이 논문은 2009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09-362-A00002).

 

 

참고문헌


1. 신부 일기 및 서한 자료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1911~1937》, 1987.

영남교회사연구소 편역, 《대구의 사도 김보록(로베르) 신부 서한집 1 · 2》, 영남교회사연구소, 1995.

이종흥 역, 《안세화 주교 공문집 : 대구대교구 초대교구장(1911~1938)》, 영남교회사연구소, 2003.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1~8》, 1986~2008.

 

2. 1차 사료

 

대구중화기독교회 楊春祥 장로 소장 영수증

大邱華僑學校發起人,《大邱華僑學校發起及成立》(대구화교협회소장), 1943. 2. 21.

大邱華商公會, 《本會成立及關聯一覽表》(대구화교협회소장), 1930.

中華民國駐京城總領事王修善이 朝鮮總督府外事課長에 보낸 공문, 〈在留民國人姜銀貴大邱中學校入學願ニ關スル件〉, 《昭和三年 各國領事館往復》(한국국가기록원 소장), 1927. 2. 22.

中華民國駐釜山領事館이 中華民國南京國民政府外交部에 보낸 공문, 〈大邱中華商會轉慕文錦創設僑校請求補助〉, 《汪僞僑務委員會檔案》(南京第二歷史檔案館所藏, 2088-569), 1943. 2.

 

3. 2차 문헌

 

가실 성당 100년사편찬위원회 편, 《가실(낙산) 성당 100년사(1895~1995)》, 분도출판사, 2011.

강길선 · 임영배, 〈한국 성당 건축의 공간 변천에 관한 연구 - 광주대교구를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학술발표논문집》 8-2, 1988.

공세리 본당 100년사편찬위원회 편, 《공세리 본당 100년사》, 천주교대전교구공세리교회, 1998.

堀內稔, 〈赴戰江水電工事と中國人勞動者〉, 《むくげ通信》 183, むくげの會, 2000.

- - -, 〈植民地下朝鮮における中國人勞動者(その2) : 新聞社說に見る中國人勞動者問題〉, 《むくげ通信》 192, むくげの會, 2002.

- - -, 〈植民地朝鮮における中國人勞動者(その3) : 中國人勞動者と勞動爭議〉, 《むくげ通信》 199, むくげの會, 2003.

- - -, 〈植民地朝鮮における中國人勞動者(その4) : 1934年における中國人勞動者の入國制限問題〉, 《むくげ通信》 209, むくげの會, 2005.

- - -, 〈植民地朝鮮における中國人勞動者(その5) : 鑛山と中國人勞動者〉, 《むくげ通信》 217, むくげの會, 2006.

- - -, 〈植民地朝鮮における中國人勞動者(その6) : 石工などの技術系勞動と中國人〉, 《むくげ通信》 225, むくげの會, 2007.

- - -, 〈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中國人勞動者(その7) : 新聞記事にみる萬寶山事件の影響〉, 《むくげ通信》 231, むくげの會, 2008.

- - -, 〈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中國人勞動者(その9) : 北朝鮮開拓と中國人勞動者〉, 《むくげ通信》 247, むくげの會, 2011.

金子政太郞, 〈韓國に於ける工事上の淸人(上) · (下)〉, 《建築世界》 제2권 제9호 · 제10호, 1908. 9 · 10.

김정신,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 - -, 《건축가 알빈 신부》, 분도출판사, 2007.

노르베르트 베버 지음, 박일영 · 장정란 역, 《고요한 아침의 나라》, 분도출판사, 2012.

대구대교구사편찬위원회 편, 《大邱本堂百年史 1886-1986》, 계산본당창립 100주년기념행사위원회, 1986.

대구직할시 · 영남대학교문화연구소, 《대구지역 건축물 조사 보고서》, 1999.

山口正之, 《朝鮮キリスト敎の文化史的硏究 : 朝鮮西敎史》, 御茶の水書房, 1985.

商業興信所, 《第十六回 商工資産信用錄》 (복각판, 《明治大正期商工資産信用錄》 第8卷 大正四年(下)》, クロスカルチャー出版, 2009)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눈먼 이들에게 빛을 Lumen Caecis :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한국진출 100주년 기념 화보집 1909~2009》, 분도출판사, 2009.

이원희, 〈원주 · 횡성지역의 천주교 전래와 정착연구〉, 《강원문화사연구》 6, 2001.

이은자, 〈淸末 駐韓 商務署 組織과 그 位相〉, 《명청사연구》 제30집, 명청사학회, 2008.

이정희, 〈20세기 전반기 대구지역 화교의 경제적 활동 (1905~1955년)〉, 《대구사학》 제80집, 2005.

李正熙, 〈朝鮮開港期における中國人勞動者問題 : 《大韓帝國》 末期廣梁灣鹽田築造工事の苦力を中心に〉, 《朝鮮史硏究會論文集》 第47集, 朝鮮史硏究會, 2009.

임정의, 《명동 성당 100년》, 코리언북스, 1998.

鄭昶源, 〈韓國ミッション建築の歷史的硏究〉, 東京大學大學院工學系硏究科建築學專攻博士學位論文, 2004.

조선은행 조사부, 〈재한화교의 경제적 세력〉, 《경제연감 1949년》, 1949.

朝鮮總督府, 《朝鮮に於ける支那人》, 1924.

- - -, 《昭和五年 朝鮮國勢調査報告 全鮮編 第一卷 結果表》, 1934.

최선혜,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와의 교류와 그 의의 : 1911~1923〉, 《교회사연구》 49, 2016. 12.

파리 외방전교회 저 · 김승욱 옮김, 《조선 천주교 그 기원과 발전》, 살림, 2015.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85년사 편찬위원회, 《바오로 뜰안의 哀歡 85年》, 가톨릭출판사, 1973.

 

…………………………………………………………

 

1) 김정신,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2) 알빈(Alwin Schmid, 1904~1978) 신부는 1958년부터 1978년까지 20년 동안 122개의 성당(경당, 공소 포함)을 비롯하여 185개에 달하는 가톨릭 건물을 설계했다. 그의 설계 활동에 대해서는 김정신, 《건축가 알빈 신부》, 분도출판사, 2007을 참조 바람.

 

3) 鄭昶源, 〈韓國ミッション建築の歷史的硏究〉, 東京大學大學院工學系硏究科建築學專攻博士學位論文, 2004, 208~214쪽.

 

4) 조선 화교의 노동자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선행연구가 있다. 李正熙(2009), 堀內稔(2000 · 2002 · 2003 · 2005 · 2006 · 2007 · 2008 · 2011).

 

5)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1~8》, 1986~2008.

6)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1911~1937》, 1987.

7) 이종흥 역, 《안세화 주교 공문집 : 대구대교구 초대교구장(1911~1938)》, 영남교회사연구소, 2003.

8) 영남교회사연구소 편역, 《대구의 사도 : 김보록(로베르) 신부 서한집 1~2》, 1995.

9) 김정신,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 41~42쪽.

10) 공세리 본당 100년사편찬위원회 편, 《공세리 본당 100년사》, 천주교대전교구공세리교회, 1998.

11) 가실 성당 100년사편찬위원회 편, 《가실(낙산) 성당 100년사(1895~1995)》, 분도출판사, 2011.

 

12)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선교 활동은 그들이 직접 기록한 다음의 자료를 참조 바람. 파리 외방전교회 저 · 김승욱 옮김, 《조선 천주교 그 기원과 발전》, 살림, 2015. 이 책은 원래 1924년 홍콩에서 출판되었다.

 

13) 파리 외방전교회 저 · 김승욱 옮김, 위의 책, 197~198쪽. 성 베네딕도회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펴낸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2009)을 참조 바람.

 

14) 파리 외방전교회 저 · 김승욱 옮김, 위의 책, 203~204쪽. 메리놀회의 조선 선교 활동에 관한 기존 연구 정리는 최선혜,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와의 교류와 그 의의 : 1911~1923〉, 《교회사연구》 49, 2016, 99~100쪽)에 잘 정리되어 있다.

 

15) 오엔 맥폴린(Mcpolin)이 정식으로 교구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1934년 10월이었다. 그에 의해 순천(1933년), 나주(1934년), 광주 북동(1934년), 장성(1937년)에 각각 성당이 건축되었다(강길선 · 임영배, 〈한국 성당 건축의 공간 변천에 관한 연구 - 광주대교구를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학술발표논문집》 8-2, 1988, 250~251쪽).

 

16) 金子政太郞, 〈韓國に於ける工事上の淸人(上)〉, 《建築世界》 제2권 제9호, 1908. 9, 12~15쪽. 金子政太郞, 〈韓國に於ける工事上の淸人(下)〉, 《建築世界》 제2권 제10호, 1908.10, 21~24쪽.

 

17) 金子政太郞, 위의 글, 1908. 9, 13쪽.

18) 金子政太郞, 위의 글, 1908. 9, 13쪽.

19) 金子政太郞, 위의 글, 1908. 9, 14쪽.

20) 金子政太郞, 위의 글, 1908. 9, 14~15쪽.

21) 金子政太郞. 위의 글, 1908. 10, 21쪽.

22) 金子政太郞, 위의 글, 1908. 10, 21~22쪽.

23) 金子政太郞, 위의 글, 1908. 10, 22쪽.

24) 金子政太郞, 위의 글, 1908. 10, 22쪽.

25) 金子政太郞, 위의 글, 1908. 10, 22~23쪽.

26) 金子政太郞, 위의 글, 1908. 10, 23쪽.

27) 金子政太郞, 위의 글, 1908. 10, 23~24쪽.

 

28) “Contracting in the Orient”, The Korea Mission Field, 1926년 10월호(정창원, 앞의 글, 2004, 208쪽에서 재인용).

 

29) 朝鮮總督府, 《昭和五年 朝鮮國勢調査報告 全鮮編 第一卷 結果表》, 1934년. 일본인 건축청부업주는 2,997명, 조선인은 1,040명으로 수적으로는 화교 건축청부업주를 훨씬 능가했다.

 

30) 朝鮮總督府, 《朝鮮に於ける支那人》, 1924, 60~61쪽.

 

31) 商業興信所, 《第十六回 商工資産信用錄》 (복각판, 《明治大正期商工資産信用錄》 第8卷 大正四年(下)》, クロスカルチャー出版, 2009), 外國人 10~15쪽.

 

32) 商業興信所, 위의 책, 2009, 外國人 9~17쪽.

33) 朝鮮總督府, 위의 책, 1924, 60~61쪽.

34) 朝鮮總督府, 위의 책, 1924, 170쪽.

35) 朝鮮總督府, 위의 책, 1924, 136쪽.

3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42쪽.

37) 임정의, 《명동 성당 100년》, 코리언북스, 1998.

38)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앞의 책 1, 314쪽. 책 1의 의미는 《뮈텔 주교 일기 1》의 의미이다.

39)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103쪽.

40)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467쪽.

41)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앞의 책 1, 76쪽.

42)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1, 86쪽.

43)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1, 95쪽.

44)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1, 113쪽.

45)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1, 113~114쪽.

4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앞의 책 2, 315쪽.

47) 예를 들면, 1892. 11. 21. 1893. 4. 8. 1894. 3. 26. 일기.

 

48)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앞의 책 1, 120쪽. 당시 당소의는 용산상무서(龍山商務公署)의 분판(分辦, 영사)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1889년 8월부터 1894년 6월까지 4년 10개월 동안 용산상무공서의 분판으로 일했으며 청일전쟁 때 일시 귀국한 후 전후, 다시 총영사로 조선에 돌아왔다. 당시 청국의 상무공서의 조직과 외교관에 대해서는 이은자(2008)의 연구를 참조 바람.

 

49)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앞의 책 2, 283쪽.

50)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앞의 책 1, 112쪽.

51)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1, 137쪽.

52)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앞의 책 2, 304쪽.

53)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85년사편찬위원회, 《바오로 뜰안의 哀歡 85年》, 가톨릭출판사, 1973, 211~212쪽.

54) 영남교회사연구소 편역, 《대구의 사도 : 김보록(로베르) 신부 서한집 2》, 대건인쇄출판사, 1995, 131쪽.

55) 영남교회사연구소 편역, 위의 책, 105쪽.

56) 영남교회사연구소 편역, 위의 책, 108쪽.

57) 영남교회사연구소 편역, 위의 책, 109쪽.

58) 영남교회사연구소 편역, 위의 책, 116쪽.

59) 대구대교구사편찬위원회 편, 《大邱本堂百年史 1886~1986》, 계산본당창립100주년기념행사위원회, 1986, 216쪽.

60) 영남교회사연구소 편역, 앞의 책, 135쪽.

61) 대구대교구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216쪽.

62) 이원희, 〈원주 · 횡성지역의 천주교 전래와 정착연구〉, 《강원문화사연구》 6, 2001, 172~173쪽.

 

63) 대구직할시 · 영남대학교문화연구소, 《대구지역 건축물 조사 보고서》, 1999, 31~35쪽 ; 이정희, 〈20세기 전반기 대구지역 화교의 경제적 활동(1905~1955년)〉, 《대구사학》 80, 2005, 20~25쪽.

 

64) 中華民國駐京城總領事王修善이 朝鮮總督府外事課長에 보낸 공문, 〈在留民國人姜銀貴大邱中學校入學願ニ關スル件〉, 《昭和三年 各國領事館往復》(한국 국가기록원 소장), 1927년 2월 22일.

 

65) 朝鮮總督府, 앞의 책, 1924, 60~61 · 136쪽.

66) 大邱華商公會, 《本會成立及關聯一覽表》(대구화교협회소장), 1930.

 

67) 中華民國駐釜山領事館이 中華民國南京國民政府外交部에 보낸 공문, 〈大邱中華商會轉慕文錦創設僑校請求補助〉, 《汪僞僑務委員會檔案》(中國第二歷史檔案館所藏, 2088-569), 1943년 2월 접수.

 

68) 中華民國駐釜山領事館이 中華民國南京國民政府外交部에 보낸 공문, 〈大邱中華商會轉慕文錦創設僑校請求補助〉, 《汪僞僑務委員會檔案》(中國第二歷史檔案館所藏, 2088-569), 1943년 2월 접수.

 

69) 大邱華僑學校發起人, 《大邱華僑學校發起及成立》(대구화교협회소장), 1943년 2월 21일.

 

70) 中華民國駐釜山領事館이 中華民國南京國民政府外交部에 보낸 공문, 〈大邱中華商會轉慕文錦創設僑校請求補助〉, 《汪僞僑務委員會檔案》(中國第二歷史檔案館所藏, 2088-569), 1943년 2월 접수.

 

71) 大邱華僑學新築講堂校舍建立發起人, 《大邱華僑學新築講堂校舍建立》, 1950. 4. 4.

72)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1911~1937》, 1987, 128쪽.

73)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57~58쪽.

74)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60쪽.

75)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67쪽.

76)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73쪽.

77)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77쪽.

78)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87~88쪽.

79)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90쪽.

80)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79쪽.

81)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96 · 119쪽.

82)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128쪽.

83)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105쪽.

84)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106쪽.

85)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151쪽.

86)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189쪽.

87)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08쪽.

88)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31 · 241쪽.

89)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42~243쪽.

90)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43쪽.

91)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53쪽.

92)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58쪽.

93)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58~259쪽.

94)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30 · 240쪽.

95)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56쪽.

96)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58쪽.

97)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60쪽.

98)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262쪽.

99) 가실 성당 100년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171~172쪽.

100) 가실 성당 100년사편찬위원회 편, 위의 책, 179쪽.

101) 드망즈 주교 저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앞의 책, 773쪽.

102) 조선은행 조사부, 〈재한화교의 경제적 세력〉, 《경제연감 1949년》, 1949, 74쪽.

 

[교회사 연구 제51집, 2017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정희(인천대 중국학술원 중국 · 화교문화연구소 교수)]



파일첨부

3,49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