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주님의 종이라는 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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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06 ㅣ No.558

[레지오 영성] ‘주님의 종’이라는 신앙고백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다양하게 표현되는 성모님 호칭 중에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필요한 근본적인 조건이며 신앙고백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신앙을 고백하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육화와 강생의 신비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모 마리아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고 모델이라 하겠습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뜻이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고백합니다. 사실, 종이라는 개념은 과거 노예시대에 주인과 종의 주종관계와 억압적인 순종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고백한 종의 의미는 단순히 주인이 시키는 대로 마지못해 실행하는 수동적인 종이 아니라, 주인 손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내맡긴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루카복음서를 따른다면, 주님의 종은 ‘비천한 종’(루카 1,48)과 ‘쓸모없는 종’(루카 17,10)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먼저, 주님의 종으로서 스스로를 낮추신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에 모든 세대에 걸쳐 행복한 분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은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루카 1,52)시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비천한 종으로서의 자기 인식은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관한 정확한 인식은 ‘겸손의 영성’ 계보와 맞닿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표현을 빌린다면,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만한 자격조차 없는 존재(요한 1,27)라 하겠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모래알과 같다고 고백하며, 모래알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한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한 마디로, 성모님처럼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비천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뜻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래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의 두 번째 차원은 ‘쓸모없는 종’에 관한 것입니다. 성모님이 고백한 주님의 종은 하느님 앞에서 쓸모없는 종과 일맥상통합니다. 물론 탈렌트의 비유 이야기(마태 25,14-30)에 나오듯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림받는 쓸모없는 종이 아니라,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종입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종’이라는 고백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시가 떠오릅니다. 인도의 시성으로 알려진 타고르의 기탄잘리 1편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 가냘픈 갈대피리를

님은 언덕을 넘으나 골짜기를 건너나 지니고 다니셨고

이 피리로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십니다.”

 

갈대는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어 직접 입을 대고 숨을 불어넣어서 소리를 냅니다. 이 시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갈대피리’입니다. 여기서 갈대피리는 우리 자신이고, 피리 속으로 불어넣어지는 숨은 하느님의 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하십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소리가 나기 위해서는 속이 비어있어야 합니다. 속이 꽉 차 있다면 소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속을 비워야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자기를 비우는 작업입니다. 속이 비워질 때 비로소 하느님은 우리를 악기로 사용하여 아름다운 소리를 내실 수 있습니다.

 


속이 비워질 때 하느님은 우리를 악기로 아름다운 소리 내셔

 

쓸모없는 종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피리 속에 속을 꽉 채우려고 합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하느님의 아름다운 소리는 잘 나오지 않게 됩니다. 비운다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하느님 앞에 비천한 종으로, 쓸모없는 종으로 살고 계신가요?

 

요즘 무한경쟁 시대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비천한 존재라든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유능한 존재로 보이게 하고, 어떻게 하면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지 경쟁을 합니다. 경쟁에서 이기면 남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위상이 높아지며, 남보다 우월하게 보일 것입니다.

 

남보다 우월하다는 자존심을 내세우고, 자신의 생각이나 말을 절대화시켜 교만한 마음과 태도로 남을 지배하려고 하고, 자신의 편안한 삶을 위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채우려고 한다면 결코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될 수 없고,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 자기의 생각, 자기 고집만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 중에 가장 큰 유혹은 바로 하느님을 이용하거나 조정하려는 교만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의 종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을 하느님 앞에 비천하고 쓸모없는 종으로 끊임없이 비우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란 한낱 자기 뜻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님의 종이신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으로 우리의 신앙을 리셋하시기 바랍니다. 리셋은 컴퓨터가 오작동하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제대로 운영이 안 될 때 초기화하는 것입니다. 세례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하느님의 뜻이 자신의 삶과 이 사회에서 이루어지는데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2월호, 김민수 이냐시오 신부(서울 청담동성당 주임, 강남 바다의 별 Co. 지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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