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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49: 12세기 (3) 베네딕도회에 끼친 베르나르두스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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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15 ㅣ No.1060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9) 12세기 ③ 베네딕도회에 끼친 베르나르두스의 영향


이성적 사고로 기울던 수도 생활에 경종을 울리다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영성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영성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1153)는 12세기에 시토회를 넘어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영성 생활 방향을 가늠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콜라학의 출현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베르나르두스는 수도 생활이란 지성 활동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는 탐구 작업이 아니고 관상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생 티에리의 기욤의 신비신학

 

베르나르두스와 교류했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언급할 때 생 티에리의 기욤(Guillaume de Saint-Thierry, 1185경~1148)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벨기에에 위치한 리에주(Lige)의 귀족 가문 출신인 기욤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랭스(Reims)에서 운영한 주교좌 성당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1113년 랭스의 베네딕도회 생 니케즈(Saint-Nicaise) 수도원에 입회한 기욤은 1119년 랭스 근처 베네딕도회 생 티에리(Saint-Thierry)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됐습니다. 또 1130년 기욤은 수아송(Soissons) 근처 생 메다르(Saint-Mdard) 수도원에서 랭스 지방 베네딕도회 수도원 첫 총회에 참석해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생 티에리의 기욤.

 

 

그런데 1118년부터 베르나르두스와 친분을 쌓았던 기욤은 1120년대 초반 원장으로서 행정직을 수행하는 것보다 수도자로서 침묵과 관상 생활을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시토회로 옮기고 싶어 했지만 베르나르두스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1120년대 클뤼니 수도회와 시토회 사이에 다툼이 있었을 때에 기욤은 베르나르두스와 은총 문제로 논쟁했습니다. 하지만 1128년 베르나르두스가 기욤에게 「은총과 자유 의지(De Gratia et livero arbitrio)」라는 작품을 헌정하자 기욤도 베르나르두스에게 「제대의 성사(De Sacramento Altaris)」라는 작품을 헌정했습니다. 결국 1135년 베네딕도회 수도원 원장직을 사임한 기욤은 랭스 교구에 위치한 시토회 싱니(Signy) 수도원으로 옮겨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시토회 수도자로 살면서 베르나르두스와 우정을 더욱 돈독히 했습니다.

 

기욤은 수도 생활의 핵심을 관상 생활로 봤습니다. 특히 수도 생활의 이론적인 배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수도 신학을 펼친 동방 교부들을 비롯해 베네딕도회 설립 이전의 서방 교부들을 연구했습니다. 기욤은 1120년대 초반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저술한 저서 「하느님 관상(De Contemplando Deo)」과 「사랑의 본질과 품위(De Natura et Dignitate Amoris)」에서 정감적인 사랑과 이성적인 지식과의 관련 안에서 영성 생활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욤은 시토회로 옮긴 이후인 1140년대 전반에 저술한 저서 「신앙의 거울(Speculum Fidei)」과 「신앙의 수수께끼(Aenigma Fidei)」 및 「하느님 산의 형제들에게 쓰는 편지(Epistola ad Fratres de Monte-Dei)」에서 삼위일체 신비 교리를 통해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신비체험의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즉, 인간은 초보 단계에서 동물적이고, 진보 단계에서 이성적이며, 일치 단계에서 영적인 본성으로 발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동물적인 본성에 남아 있는 삼위일체 흔적이 인간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그 본성을 넘어서는 차원의 형상을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최종적으로 인간 영혼 안에 있는 삼위일체 형상이 인간에게 신적인 본성을 지니도록 변화시켜 신비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욤의 신학은 베르나르두스의 영향으로 사변적인 면과 관상적인 면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빙엔의 힐데가르트.

 

 

빙엔의 힐데가르트의 신비체험

 

여성이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어려웠던 중세 유럽에서,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 1098~1179)는 여성 수도자 신분으로서 신학뿐 아니라 문학, 예술, 의학, 정치 분야에서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독일 남서부 베머스하임(Bermersheim)에서 태어난 힐데가르트는 유아기에 병치레가 잦았다는 이유로 8세부터 디지보덴베르크(Disibodenberg)의 베네딕도회 수녀원에 봉헌되어 슈폰하임의 유타(Jutta von Sponheim, 1091~1136)의 지도 아래 양육됐습니다. 힐데가르트는 12세에 유타의 수도 생활을 본받아 은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14세에 수도 서약을 했습니다. 1136년에 유타가 사망하자 힐데가르트는 38세에 만장일치로 수녀원 원장에 선출됐습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신비체험을 했다고 여겨지는 힐데가르트는 1138년부터 ‘환시’(vision)와 ‘말씀’(locution)을 통해 체험한 것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신비체험을 영적 지도자인 폴마르(Volmar, ?~1173)와 상담하고, 1141년부터 그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신비체험을 묘사한 첫 번째 작품인 「길을 알아라(Scivias)」를 저술했습니다. 1146년 베르나르두스는 이 작품의 일부를 읽고 힐데가르트에게 저술을 계속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PP. III, 재임 1145~1153)도 1147~1148년 트리어(Trier) 교회 회의에서 베르나르두스의 견해를 참고해 힐데가르트의 신비체험을 인준하고 저술 작업을 격려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1150년 루페르츠베르크(Rupert -sberg)에 수녀원을 설립하고 18명의 수녀와 이주했습니다. 1158년엔 남자 수도원의 지도를 받지 않는 독립된 수도원의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힐데가르트는 1158년부터 두 번째 중요 작품인 「책임 있는 인간(Liber Vitae Meritorum)」에서 환시를 통해 본 덕행과 악습의 대결을 예언적인 관점으로 저술하기 시작했습니다. 1163년 이 작업을 끝낸 힐데가르트는 세 번째 중요 작품인 「세계와 인간(Liber divinorum operum simplicis hominis)」에서 태초에 일치를 다시 실현할 수 있는 중심이 인간이라는 점을 저술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힐데가르트는 1158년부터 설교 여행을 다니면서 성직자의 타락상과 교회의 방임주의 등을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1165년 라인강 건너편 아이빙엔(Eibingen)에 두 번째 수녀원을 설립했는데, 평민 출신의 여성들도 수도자로 받아들였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자칫 마녀 사냥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신비체험에 식견이 깊었던 베르나르두스가 힐데가르트의 체험담과 작품들을 식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계속 이어가며 베네딕도회 여성 수도자들의 수도 생활을 안정적으로 도울 수 있었습니다.

 

시토회의 출현과 베르나르두스의 가르침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자극이 되었습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수도 생활에서 육체노동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수도 생활의 중심에 하느님을 향하는 관상 생활이 있다는 점을 깊이 명심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자들은 끝내 수도 생활에서마저 사변적인 분위기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12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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