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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속 대구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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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09 ㅣ No.1730

[순교자 성월을 맞아]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속 대구 순교자

 

 

순교자들의 행적과 영성을 기리고 되새기는 순교자 성월을 맞아 현재 한국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2차 시복 추진 운동인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와 그 안에 포함된 대구대교구 순교자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운동은 지난 2014년 8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가 시복되기 전인 2009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전국 교구의 요청을 수용하여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들’에 대한 제2차 시복 추진이 결정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2013년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로 제목이 확정됐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는 1785년 포천에서 가문 처형된 이벽 요한 세례자부터 김범우 토마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철신 암브로시오,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정종호, 임희영, 유한숙, 송 마리아, 신 마리아, 이명호 요한, 이부춘, 권아기련, 황심 토마스, 조상덕 토마스, 옥천희 요한, 황사영 알렉시오, 이기연, 김일호, 신희, 이육희, 김흥금, 김장복, 안치룡, 고동이 바르바라, 김호연 바오로, 황석지 베드로, 이 에메렌시아, 조 바르바라, 장사광 베드로, 손 막달레나, 이 막달레나, 손경서 안드레아,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허대복 안드레아, 최영수 필립보, 권성여 프란치스코, 홍봉주 토마스, 서태순 아우구스티노, 이조여 요셉, 김면호 토마스, 박래호 요한 사도, 김이쁜 마리아, 이의송 프란치스코, 이붕익 베드로, 김한여 베드로, 김진구 안드레아, 김큰아기 마리아, 이기주 바오로, 이용래 아우구스티노, 박성운 바오로, 김준기 안드레아, 원윤철 요한 세례자, 박아기 막달레나, 정여삼 바오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고의진 요셉, 배문호 베드로, 황 요한, 안여집 요한 사도, 김선양 요셉, 심원경 스테파노, 김조이 수난나, 최 마리아, 김 아우구스티노, 서유형 바오로, 박 루치아, 윤평심, 홍창룡, 민윤명 프란치스코, 김사범, 여기중, 고시수 야고보, 유 마오로, 권중심, 이 요한, 문 막달레나, 정은 바오로, 정 베드로, 서태순 베드로, 김홍범 요한, 박의서 사바, 박원서 마르코, 박익서, 김화숙 베드로, 강 요한, 김양범 빈첸시오, 박 안드레아, 전 야고보, 이제현 마르티노, 정덕구 야고보, 고선양, 성백돌 베드로, 최사관 예로니모, 김윤심 베드로 알칸타라, 김성희 암브로시오, 정치도 요한, 심능석 스테파노, 서여심, 김입돌 베드로, 서응권 요한, 한용호 베네딕토, 손 빅토리아, 이유일 안토니오, 김조이 바르바라, 조치명 타대오, 김 우르시치나, 최제근 안드레아, 윤자호 바오로, 김 필립보, 박 마리아,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 최용운 암브로시오, 김 마르티노, 박태진 마티아, 김 마태오, 박선진 마르코, 이문홍 바오로, 지 타대오, 방 데레사, 유 베드로, 김성실 베드로, 이 요한, 원 프란치스코, 유문보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강영원 바오로, 피 가타리나, 최지혁 요한, 이아기 루치아, 이병교 레오이다. 이 가운데 대구대교구 순교자는 김흥금, 김장복, 안치룡, 서태순 베드로,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이다.

 

김흥금, 김장복, 안치룡 순교자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때 추대됐지만 세례명을 알 수 없어 보류됐다가 이번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제2차 시복 운동에 다시 포함됐다. 이 세 순교자는 세례를 받은 것이 분명하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는 기록이 있다. 김흥금, 김장복, 안치룡 세 순교자는 신유박해 때 박해를 피해 피신을 거듭하다 경상도 북부지역인 머루산 성지와 청송 노래산 성지에 숨어 살았다. 청송 노래산 교우들이 체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포졸들이 머루산 교우촌에 들이닥쳤을 때 부자(父子)인 김흥금(1815년 12월 26일 이후 순교)과 김장복(1815년 12월 26일 이후 순교)이 체포됐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김흥금은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했고 오래전 부인과 사별한 후 아들 김장복과 딸과 살았다. 김흥금, 김장복 부자는 안동 관아로 이송된 후 모진 고문과 형벌 속에서 신앙을 증거하다 열악한 감옥생활과 굶주림으로 1815년 12월 26일 이후 경상감영에서 각각 50세, 18세로 옥사했다. 이때 함께 잡혀온 김흥금의 딸은 배교하고 관비로 유배됐다.

 

신유박해 때 청송 노래산 교우촌으로 이주한 안치룡(1815년 12월 26일 이후 순교)은 충남 보은 출신으로 문맹이지만 귀로 듣고 입으로 외워 교리를 깨우쳐 수계생활을 열심히 했다. 을해박해 때 교우들과 함께 체포된 안치룡은 경주 관아를 거쳐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문초와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약 50세에 옥사했다.

 

서태순 베드로(1867년 1월 23일~24일경 순교)는 기해박해 무렵 가족과 함께 여우목으로 이주했다가 1840년 부친이 선종하자 모친과 가족들은 풍기로 옮겨갔고 서태순은 충주 중원으로 이사했다. 그는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6개월 동안 팔과 다리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는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했다. 이후 냉담을 하기도 했지만 다시 하느님을 찾은 서태순은 한실교우촌에 살다가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상주 감옥에 갇혀 심문과 고문을 받고 43세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서태순 베드로의 시신은 부인 김 데레사와 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한티에 안장됐다. 서태순 베드로의 묘가 있는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으로 현재 대구대교구의 대표 성지 중 하나이다. 한티순교성지에는 서태순 베드로의 묘 1기를 비롯하여 36기의 묘지가 있다. 이 가운데 서태순 베드로의 묘와 더불어 3기의 묘는 이름이 있고 나머지 33기는 이름이 없는 무명 순교자의 묘이다.

 

선대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1868년 10월, 음력)는 대구 경상감영의 아전이었던 부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웠고 모친과 두 여동생과 함께 대구 날뫼(현재의 비산동) 근처에 살았다. 부친이 선종하자 가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을 가지고 칠곡 산중 교우촌이 있는 한티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는 서책을 쓰고 묵상기도에 부지런했고 자기 육신에 채찍질하며 정진했다. 또한 잠잘 때도 마귀의 장막이라고 하면서 이불을 덮지 않았으며 자주 단식과 금육을 지키면서 육신을 오직 보속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병인박해로 교우촌의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그는 대구 성 안으로 들어와 2년 동안 살다가 한양에서 그를 잡기 위해 내려온 포졸을 피해 하양으로 피신했다. 그 후 다시 대구에 은신하다가 체포됐다. 그는 감옥에 갇혀서도 교우들을 권면하면서 아침·저녁기도와 묵상기도를 바쳤다. 그는 서태순 베드로의 형과 함께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30세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외에도 이름 없이 순교한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인 유일한 교회, 극심한 박해를 이겨내고 현재의 복음화를 이룬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신자로서 순교자들의 거룩한 순교 정신을 본받아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겠다.

 

[월간빛, 2017년 9월호, 김선자 수산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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