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이웃사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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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08 ㅣ No.539

[허영엽 신부의 ‘나눔’] ‘이웃사촌’이 그립다

 

 

어린 시절 하교 길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낭패였다. 남의 집 처마 밑에 서서 주룩주룩 내리는 빗물을 피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우산 밑으로 살며시 들어가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우산 좀 같이 써주세요.” 그러면 대부분 거절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처럼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도 다가가 우산을 같이 쓰자고 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서로 어려움에 닥치면 지체 없이 자신의 곁을 내어줬다. 나 역시 갑작스런 비 소식에 남의 우산을 같이 쓰기도 하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우산 속 옆자리를 내어주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 젊은이들은 “에이! 설마” 하며 내 말을 의심할 것이다. 요즘 그런 행동을 한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거나 아주 심한 경계의 눈총을 받을 것이다.

 

그뿐인가.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이사한 집에서는 이웃집에 떡을 나누며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일종의 신고식이었던 것이다. 또한 떡을 받은 사람들은 받은 접시에 과일이나 먹을거리 같은 것이라도 담아서 되돌려 주고는 했다. 아주 오래된 일도 아니지만 우리네 인심이 그랬다. 최근에 한 지인에게 이사 떡을 돌린 이야기를 들었다. 지방에서 서울의 한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어 인사차 떡을 이웃에 돌렸는데, 마치 외계인을 보는 듯한 이상한 시선을 느껴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한다. 세상이 많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다. 그 단어에는 인심이 담겨있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웃사촌’이란 말조차 생소하다. 언론에 보면 심심찮게 쓸쓸하게 혼자 지내다 고독사한 노인들의 소식이 들린다. 숨을 거둔지 몇 주, 몇 달이 지나서야 가족이나 이웃, 사회복지사에게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특히 노인이 되면 여러 가지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젊었을 때는 별 문제도 아닌 것들이 노인의 삶에서는 큰 문제가 된다. 하다못해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고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 된다. 침대에서 낙상하거나 화장실 등에서 넘어져 골절을 당한 후에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어르신도 종종 보았다. 특히 몸이 아프거나 병들었을 때 혼자 있게 되면 너무 고통스럽다. 인생에서 느끼는 고통 중에 소외감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다. 만약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방안에 혼자 며칠을 누워 있어야 한다면, 그것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말을 주고받을 말벗이 가장 필요하다고 한다.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 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

 

그래서인지 노인들은 찾아오는 사람을 아주 반갑게 맞이하신다. 예전에 본당에서 사목할 때, 혼자 사시는 할머니를 방문했더니 그분은 여기저기 숨겨 놓았던 과자며 과일이며 군것질 거리를 한아름 내놓으셨다. 그리고 근처에 살고 있는 젊은 자매님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신부님, 이 아주머니는 내 아들, 딸보다 낫답니다.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나절이면 나를 찾아와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내가 필요한 것을 챙겨 놓고, 청소도 빨래도 해줘요. 그리고 가끔 오후에도 찾아와서 이 늙은이의 말벗이 되어준답니다. 자식들은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든데, 이웃사촌이 가족보다 훨씬 더 낫지요…” 그 자매님은 자신의 몸이 성치 않으신 데도 불구하고 주변 노인들을 보살피고 계셨다. 알고 보니 본당에서 구역장일과 레지오 단원으로 성실하게 활동하고 있는 분이었다. 나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사람의 자선은 그분께는 인장과도 같아 그분께서는 인간의 선행을 눈동자처럼 보존해 주시고 인간의 자녀들을 회개하도록 하신다.”(집회 17,22). 하느님은 이웃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행을 귀하게 여기신다. 하느님에게는 만사가 명백하다. 그래서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숨은 선행까지도 하느님의 눈에서 숨길 수는 없다. 옥새처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보증해주시고 소중히 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 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 27,10). 특별히 진정한 가족 간의 사랑, 이웃과의 우정은 환난을 당했을 때 잘 나타난다. 별로 어려움이 없고 상대가 필요한 시기에는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알 수 없다. 어려울 때 동기의 집을 찾지 말라는 말씀은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오히려 평소 진실한 우정을 나눈 이웃사촌이 더 큰 힘이 될 때가 많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먼저 도움을 청하는 이웃형제를 피하지 말라는 교훈의 말씀이다.

 

피를 나누었다고 다 형제는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나눌 때 진정한 형제가 되는 것이다. 평소 진실한 우정을 나눈 이웃사촌이 형제나 친지보다 더 큰 힘이 될 때가 많다. 오죽하면 성경에도 이웃사촌이 먼 동기보다 낫다고 했을까. 과거의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좋은 전통이 사라져 그저 아쉽기만 하다. 문득 이웃사촌이란 단어가 그리운 날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9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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