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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와의 교류와 그 의의-1911~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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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11 ㅣ No.899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와의 교류와 그 의의 : 1911~1923*

 

 

국문 초록

 

이 연구의 목적은 한국 천주교회와 미국 천주교회의 교류를 검토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사를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는데 있다. 유럽의 천주교회와 달리 미국 천주교회는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외방 선교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에 아시아 선교를 목표로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를 창설(1911)하였고, 한국 천주교회는 메리놀회 창설 직후부터 교류를 시작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무엇보다 아시아 선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촉구하였으며, 한국은 동양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영성이 일어나는 준비된 선교지임을 강조하였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여 전쟁이 장기화되자 한국 천주교회는 더욱 절박하게 미국 천주교회가 선교지에 대한 책임을 깨닫게 되기를 촉구하였다.

 

메리놀회는 외방 선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촉구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청에 진지한 반응을 보였다. 창설자 월시 총장은 선교사 파견을 위한 초석으로 아시아 천주교회 순방길에 올랐고, 직접 진출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여정에서의 경험을 담아 여러 출판물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하고 한국에서 순교한 선교사의 전기도 출간하며 한국 교회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호소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일제의 압박에도 시달리고 있음을 전하며 일본 정부가 일본과 한국 모두를 파멸시키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천주교인이 되는 것과 관련해 한국인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는 것이며, 교묘하게 자행되는 일본 정부의 그리스도교 압박으로 개종자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하였다. 메리놀회도 이러한 요청에 적극 반응하며 한국에 진출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집중해 다루었다. 마침내 교황청은 메리놀회의 한국 선교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고, 메리놀회는 순교자의 나라인 한국은 메리놀에게도 감동적인 곳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회를 향한 선교의 책임과 당위성에 대한 호소, 아시아 선교를 목표로 한 미국 외방선교회의 적극적 호응, 이에 대한 교황청의 후원과 승인으로 마침내 미국 천주교회의 한국 진출은 이루어졌다.

 

 

1. 머리말

 

18세기 말 신앙 공동체가 성립된 이후 조선의 천주교회는 오랜 박해기를 견디면서 성장해 나갔다. 19세기 후반을 지나서야 한국 천주교회는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얻었지만 곧이어 일제 식민정권의 통제 아래 들어갔고, 다종교 사회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천주교 수용과 박해, 그리고 근대사회로 진입하기까지의 여정에 한국 천주교회는 물론 아시아 천주교회는 미국 천주교회와 직접적인 소통을 한 일이 거의 없었다.

 

미국 천주교회가 외방 선교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20세기가 넘어서였다. 그 출발이 1911년에 월시(James Anthony Walsh, 1867. 8. 19. ~ 1936. 4. 14) 신부와 프라이스(Thomas Frederick Price, 1860. 8. 19. ~ 1919. 9. 12) 신부가 주도하여 창설한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 외방전교회)였다.1) 미국 천주교회가 아시아 선교를 목표로 외방선교회를 창설하여 활동에 들어간 것은 천주교회 전체에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는 일이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메리놀회 창설 직후부터 교류를 시작하였고,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은 1922년에 이루어졌다.2) 박해기에 진출했던 유럽 천주교회와 달리 미국 천주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원칙 아래 다종교 사회로 변한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 태평양 전쟁으로 추방되었고, 해방 이후 돌아왔지만 분단된 한국에서 본래의 선교지인 평안도를 상실하였다. 메리놀회는 서울 명동 성당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뒤 한국 사회에서 선교만이 아니라 정치 · 사회적으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20세기 한국과 미국은 정치 · 군사 · 외교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경제 · 문화 · 종교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고, 그 교류에 천주교회도 한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아직 한국 천주교회와 미국 천주교회와의 교류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 그것이 갖는 변화와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한국 천주교회가 미국 천주교회와 본격적으로 소통하게 된 계기와 내용을 분석하고 그 활동이 갖는 의의를 검토하여 근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미국 천주교회가 아시아 선교를 목표로 외방선교회를 창설한 배경과 동기를 알아보려고 한다. 둘째,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정리할 것이다. 20세기 이후 서구의 천주교회가 바라본 한국 천주교회를 분석하는 작업은 전체 교회사에 위치한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과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셋째, 한국 천주교회가 미국 외방선교회를 향해 전개한 활동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미국 천주교회가 중국에 이어 바로 한국에 진출한 직접적 계기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미국 천주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도 전에 한국 천주교회와 가진 교류를 분석하는 이 작업은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을 보다 국제적인 관점에서 검토하는 작업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이 글에서 주로 활용한 자료는 미국 천주교회가 국제적으로 외방 선교의 진작과 홍보를 위해 발간한 잡지인 《그 먼 땅에》(Field A Far)3)이다. 아시아 천주교회에 대한 소식과 선교 활동을 소개한 《그 먼 땅에》는 미국 천주교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소통을 보다 국제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 메리놀회에서 발간한 서적과 메리놀회 소장 한국 천주교회 관련 문서 역시 절대적으로 긴요한 자료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4) 이 글에서 다루는 시기는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 창설 이후 한국에 직접 진출하기 이전까지(1911~1923)이다.5)

 

 

2. 미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외방선교회의 창설(1911)

 

미국 천주교회는 20세기에 접어 들어서야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를 창설(1911년)하여 외방 선교를 시작하였다.6) 1914년 프라이스 신부 주도로 4명의 신부가 중국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하여 한국에는 1922년 로마 포교성성에서 평안도의 포교권을 위임받아 1923년에 전교 신부를 파견하였고, 1932년 만주 무순 지역, 1935년 일본 교토 지역으로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미국이 외방선교회를 창설하고 중국에 이어 바로 한국으로 진출하여 선교 활동을 펴 나간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미국 천주교회가 역사상 최초로 외방선교회를 창설하고 아시아 선교에 나서게 된 역사적 배경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1) 미국 천주교회의 성장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 창설 배경으로 가장 먼저 주목되는 점은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 사회에 천주교 신자가 급증한 사실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미국에 천주교 신자는 있었지만, 미국은 청교도를 중심으로 한 프로테스탄트가 주류를 이룬 사회였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 가톨릭 국가의 사람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민해 왔다. 밀려들어오는 아일랜드 · 독일 이민자에 놀라 가톨릭 이민을 제한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특히 1830년대 아일랜드인들은 미국 전체 이민의 3분의 1을 차지했을 정도였다.7) 남북전쟁 이후 이민자는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숫자로 증가하였으며, 아일랜드, 폴란드, 중남미, 독일 등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이민해 왔다. 천주교 신자의 급증과 교세의 확장에 직면한 프로테스탄트계 영국계 미국인들은 미국이 가톨릭 세력권에 흡수될 가능성이 있다고 엄포를 놓을 정도였다.8)

 

그런데 이민자들은 가톨릭 신자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다양한 국가 출신으로 각자의 배경에 따라 매우 광범위하고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아일랜드 이민자는 강한 국가적 특징을 갖고 있어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다른 집단과 어우러지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미국 천주교회는 가톨릭 이민자 공동체를 형성하여 미국의 국가적 이념과 사회에 융합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와 더불어 활발한 선교 활동도 펼쳤는데, 외방선교회를 창설하기 이전까지 미국 천주교회에서 선교의 주된 관심은 국내에 집중되어 있었다. 주로 국내의 소수자(아프리칸 아메리칸, 네이티브 아메리칸, 그리고 비 천주교 이민자 등)를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9)

 

메리놀회가 창설된 뉴욕은 당시 마치 압축된 유럽과도 같았다. 약 5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거주하여 로마보다 더 많은 이탈리아 이민자가 살고 있었다. 뉴욕은 또한 세계 최대의 유대인 거주지도 공존하는 도시였다. 외방선교회 창설자 월시 주교의 소속 교구인 보스턴은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인구의 3분의 2정도에 달하는 아일랜드인이 거주하였다. 월시 주교 역시 보스턴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닌 아일랜드 이민자 후손이었다.10) 메리놀회의 공동 창립자인 메리 조셉 로저스(Mother Mary Joseph Rogers, 1882~1955)도 보스턴의 아일랜드 가톨릭 가정 출신이었다.11) 월시 주교와 메리 조셉 수녀처럼 부모가 아일랜드 출신인 아이들까지 계산하면 보스턴은 당시 세계 제일의 아일랜드인 거주지였다. 한국에서 메리놀회 소속 선교사로 첫 문을 연 번 주교 역시 아일랜드 이민자였다.12) 이처럼 미국의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시카고 등 대도시는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폴란드 등으로부터 온 이민자로 채워졌다. 이미 1900년에 이르러 미국에는 인구 4명당 1명 정도가 외국인 태생이었고, 이는 미국이 창건된 이래 처음 있는 현상이었다.13)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 미국 천주교는 “이민 배척주의=반(反) 가톨릭주의”에 대응하면서 부상해 나갔다.14) 사실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사회의 천주교 신자들은 이민자이거나 이민자 출신으로, ‘가난, 낮은 계급, 이민 공동체’로 상징된 차별적 분위기에 처한 소수자였다.15) 그들은 미국사회에서 반(反) 이민 분위기 속에 무시당하면서 천주교 학교에서 기술을 배워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 가톨릭교회도 이민해 들어온 다양한 국가 출신의 천주교 이민자를 미국사회에 융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특히 고아 · 과부 · 빈민을 위한 활동에 이어 노동자를 위한 ‘사회적 활동’(Social Action)을 전개해 나갔다.16)

 

미국 내에서 천주교회의 성장은 급증하였지만 미국 자체는 아직 선교대상 국가였다. 외방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미국 천주교회 자체의 신학교나 수도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찍부터 외방 선교에 나선 유럽 천주교회의 지원과 관심은 미국에도 집중되었다. 1791년에는 프랑스의 쉴피스회에서 네 명의 사제와 다섯 명의 신학생이 볼티모어에 도착, 성 마리아 신학교를 개설하여 운영하였다.17) 특히 프랑스의 전교후원회(The SPF)18)는 1822년 처음 조성한 후원금 가운데 상당한 금액을 특별히 미국에 보내왔다. 1884년에 전교후원회는 직접 미국에서의 활동에 들어갔는데, 1884년 볼티모어의 쉴피스회 신학교 내에 설립이 승인되었고, 1897년에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프랑스의 귀족인 샤를 드 포르뱅-장송(Charles de forbin-Janson) 주교가 1843년에 프랑스에서 설립한 영해회(또는 성영회, the Holy Childhood Association)는 1866년에 이미 미국에 책임자를 두고 37개 교구에 이르는 조직으로 확대되어 활동하고 있었다.19)

 

2)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창설

 

양적인 성장을 거듭해 온 미국 천주교회는 외방 선교에 나서야 할 책임과 필요를 크게 인지해 나갔다. 이에 미국 천주교회 자체 내에서 선교 활동을 보다 조직화하고 정기화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찍이 엘리엇(Elliott, Walter, 1842~1928)과 도올(Doyle, Alxander, 1857~1912) 신부는 미국의 비 천주교인을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정기적인 회합을 결성하였다. 첫 번째 위원회가 1901년 테네시주 윈체스터에서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두 신부는 천주교 선교 활동의 기본 원칙을 공표하였다. 선교 소명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최우선적 소명이라는 것과 사제가 책임져야 할 대상은 신자이건 아니건 본당이 있는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라는 것 등이었다.20)

 

마침내 미국 내에서 외방 선교를 향한 새로운 발걸음이 내딛어졌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를 창설한 프라이스 신부, 월시 신부, 그리고 메리 조셉 로저스 수녀(Mother Mary Joseph Rogers, 1882.10.27~1955.10.9)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1) 메리놀회를 창설하고 초대 총장을 지낸 월시 신부는 프로테스탄트 선교회의 활동이 매우 강한 전통을 갖고 있는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서 성장하였다. 이 프로테스탄트 선교회는 선교 활동 진작을 위한 프로그램과 선교 정보를 간행하였고, 월시 신부는 그러한 활동을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이 지역의 소수자였던 천주교회는 프랑스의 전교후원회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었고, 월시 신부는 어릴 때부터 전교후원회의 연간 보고서(The Annals of the Propagation of the Faith)를 접하였다.22) 대학에서 월시 신부는 파리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전개한 외방 선교 활동과 순교에 대해 배우며 큰 감동을 받았고, 1892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외방 선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키워나가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미국 가톨릭 사이에 선교의 영성이 일어나는 것과 미국 외방 선교사들을 위한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선교에 관한 출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찍부터 선교 활동을 한 유럽의 순교자들에 대한 책을 쓰고 출판을 해온 월시 신부는 마침내는 1907년 《그 먼 땅에》(Field Afar)의 간행에 들어갔다.23)

 

프라이스 신부는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에서 그 지역의 마이노리티인 천주교 신자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주일 미사는 신자 가정에서 열렸고, 신부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미사를 집전하는 상황이었다. 월시 신부는 물론 프라이스 신부, 그리고 번 주교 역시 모두 쉴피스회 사제들에게 직접 교육을 받았다. 쉴피스회 신부들을 통해 외방 선교에 헌신한 유럽 선교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월시 신부, 프라이스 신부를 포함해 많은 미국의 신학생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24)

 

해외 선교를 열렬히 지지하는 교육 환경 속에 프라이스 신부는 드디어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첫 번째 사제 서품(1886)을 받은 사람으로 노스캐롤라이나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매우 적극적이고 대담한 선교활동을 수행했다. 수백 마일을 걸어 다니며, 주로 프로테스탄트가 있는 지역에서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선교에 있어 천주교 진리를 알려주는 잡지 출간이 매우 긴요한 문제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진리》(Truth)라는 잡지를 창간(1897)하여 천주교 신앙과 실천을 알려나갔다. 신학교 건립과 고아원 운영 등의 활동도 아울러 수행하며 점차 외방 선교를 진지하게 고려하였다. 그는 선교 활동에 대한 생각을 《진리》지에 발표하였고, 이는 점차 여러 신부와 주교에게 알려졌다.25)

 

마더 메리 조셉 로저스는 1904년 가톨릭 학교인 스미스 대학(Smith College)에 들어갔는데, 젊은 개신교 여성들이 외방 선교를 위해 떠나는 것에 큰 인상을 받았다. 스미스 대학에 강사로 돌아온 로저스(뒷날의 메리놀 수녀회 설립자 로저스 수녀)는 ‘가톨릭 미션 클럽’(Catholic mission club)을 조직하였고, 보스턴의 월시 신부에게 서신을 보내 관련 조언을 구하였다. 로저스의 서신에 큰 인상을 받은 월시 신부는 즉시 답장을 보내 보스턴 전교후원회로 올 것을 청하였다. 1906년 12월에 로저스가 오자 월시 신부는 《그 먼 땅에》 창간호를 보여주었고, 로저스는 월시 신부의 비전과 목적에 크게 공감하였다. 그녀는 선교 활동을 위한 조직을 창설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월시 신부를 돕기로 결심, 《그 먼 땅에》의 편집진으로 합류하였다. 로저스는 전교후원회 사무실에서 성무를 도우면서 관련 자료와 도움을 위해 전교후원회 지도자도 만나고, 프랑스 자료번역, 사진 수집과 정리, 그리고 종종 글도 작성하였다. 월시 신부는 비록 로저스의 이름을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선교에 관해 쓴 글을 《그 먼 땅에》에 출판하곤 하였다. 로저스는 메리놀회의 창설과 발전에 월시와 더불어 협력자로서, 영적인 틀과 실질적인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일에 매우 귀중한 역할을 한 지도자였다.26)

 

이처럼 미국에서 최초로 외방선교회를 창설한 주역은 일찍부터 외방 선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유럽 천주교회의 외방 선교 활동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마침내 월시 신부는 프라이스 신부를 만났고, 서로 여러 차례 의논한 끝에 외방선교회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어 기본(Gibbons, James, 1834~1921) 추기경이 후원하여 1911년 4월 27일 미국 주교회의는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 (The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를 승인하였고, 6월 29일 교황 비오 10세가 공식 인준하였다. 이로써 특별히 외방 선교에 초점을 맞춘 미국 최초의 천주교 외방선교회가 창설되었다.27)

 

미국 천주교회의 외방선교회 창설에는 창설자 세 사람의 활동과 더불어 그 필요를 자각하도록 자극한 주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젊은 사제 시절부터 외방 선교를 향한 열정을 지녀온 영국의 바우한 주교(Herbert Alfred Vaughan, 1832~1903)는 일찍부터 아직 선교지였던 미국 천주교회를 향해 외방 선교를 위한 미국 자체 내의 신학교 창설을 제안하였다. 그는 특히 미국 선교를 위한 선교회까지 세우는 등 각별한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28) 볼티모어의 대주교 기본스(Gibbons, James, 1877~1921, 뒷날 추기경)는 바우한 주교의 제언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1889년 11월 10일부터 12일까지 볼티모어에서 열리는 미국 천주교회 창설 100주년 축하 자리에 그를 초대하였다. 11월 13일 워싱턴 D.C.에 소재한 미국 가톨릭 대학(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개교식에서도 바우한 주교가 연설하도록 하였다. 바우한 주교는 미국 천주교 주교들에게 외방선교를 위한 신학교를 시작하라고 권하였고, 미국인은 선한 동기를 위해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는 열정과 모험심이 있다고 격찬하며 외방 선교에 나설 것을 독려하였다.29)

 

월시 주교 역시 바우한 주교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월시 주교는 밀힐 선교회에 체류하는 동안 바우한 주교가 1889년에 미국 천주교회를 향해 외친 연설문의 사본을 보았다. 이어 1905년 보스턴의 종교 잡지인 The Sacred Heart Review에 미국에 외방 선교를 위한 신학교 창설을 강조하며 그의 편지를 인용하였다. 월시 주교는 미국이 외방 선교에 나서지 않는다면 향후 또 다른 백년의 축복은 없을 거라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자극받아 미국 천주교회는 외방 선교를 위한 신학교 건립과 해외에 대한 선교 책임감에 직면하고 있다는 공감대를 확보해 나갔다.30)

 

마침내 외방 선교를 갈망한 사람들이 모여 창설을 결의했고, 월시 주교는 “우리는 서로 낯선 사람들이었고, 나이와 교육, 그리고 성향도 서로 다 달랐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불러 모아졌고, 외방 선교에 헌신하고자 하는 공동의 소망으로 뭉쳤다.”고 술회하였다. 이어 월시 신부는 《그 먼 땅에》에 “많은 유럽 국가가 그들의 ‘국가적’ 외방선교회를 가진 것과 같이, 이 선교회도 그 명칭이 묘사하듯이 외방 선교를 위한 미국의 공식적인 국가 선교회가 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31)

 

 

3.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의 한국에 대한 인식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를 창설한 주역들의 열정과 동기에는 아시아에서의 선교 활동에 대한 감동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32) 《그 먼 땅에》를 창간하여 중국, 일본,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천주교회에 대한 소개와 해당 선교지로부터의 소식을 꾸준히 보도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창간 초부터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내었다. 《그 먼 땅에》 1909년 2월호에는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병인박해로 상징되는 ‘정부의 폭력적 박해’와 그 이후 천주교회의 성장을 소개하였다. “《그 먼 땅에》의 독자들은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피에르 앙리 도리 신부가 두 명의 주교들과 5명의 다른 신부들과 함께 순교한 한국의 박해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하며, 리델 주교의 서신을 게재하였다.

 

수천 명의 신자들이 이곳에서조차 유례를 볼 수 없는 가장 잔혹한 박해의 희생자로 희생되었다. 일부는 굶주림과 추위와 참혹함으로 죽었으며, 다른 사람들, 특히 젊은 여인들은 노예로 팔려갔고, 어디로 팔려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발견한 사람들은 몸과 영혼이 가장 참혹한 상태였다. 도망하고 숨은 사람들은 그들의 땅과 집, 가진 것을 모두 잃었으며, 생계를 이을 아무 수단이 없다. 여기의 나는 사방이 이교도로 둘러싸여 있는 곳에 숨어있다. 나는 단지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어두워진 이후에야 그리스도인을 돌보기 위해 나간다.33)

 

직접 리델 주교의 말을 인용하여 병인박해를 알리는 등 《그 먼 땅에》는 창간 초기부터 박해와 순교로 이어진 한국 천주교회사를 소개하였다. 그런데 그 가장 심했던 마지막 폭력적 박해를 “그것은 삼십년 전이었다”고 지적하며, 한국은 오히려 지금 “영성회복”이 일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박해에서 살아남은 신자들과 더불어 매년 성인세례와 유아세례가 증가해 1900년에는 42,441명의 신자들과 41명의 유럽 선교사들, 12명의 한국인 신부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 한해에만도 4,752명의 성인세례와 2,507명의 유아세례가 있었다고 감탄하였다. 현재까지 수만 명의 신자가 증가하였고, 뮈텔 주교 아래 46명의 유럽 선교사와 10명의 한국인 사제가 활동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서울 주교좌성당은 하나의 ‘상징물’이며, 그것을 선하게 사용하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자랑스러운 자부심의 원천이라고 사진과 함께 소개하였다.

 

메리놀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소개해 왔을 뿐만 아니라, 보다 주목되는 일은 폭력적 박해가 있은 지 불과 30년이 지났을 뿐인데 지금 한국에 영성회복이 일고 있다고 평가한 점이다. 특히 창립자이며 《그 먼 땅에》 편집자이던 월시 주교는 병인박해 순교 성인인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브르트니에르 신부, 피에르 앙리 도리 신부 등의 활동과 순교를 전하며 한국은 순교자의 나라이며 박해를 딛고 영성회복이 일고 있는 주요한 곳이라고 강조하였다.34) 《현대 순교자의 사색》(1908) · 《믿음을 위해》 (1922) 등 한국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선교사의 전기도 출간하였다. 그는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사제 서품 뒤 첫 미사에서 순교의 특은을 고백하였고, 마침내 첫 임지로 한국에 가게 되었을 때, “저의 사랑하는 새 조국은 한국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저에게 가장 최고의 것을 주셨습니다… 순교자의 땅인 한국을 환호합니다!”라는 서신을 남겼다는 일화를 각별히 소개할 정도였다.35) 《현대 순교자의 사색》을 읽은 독자는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할 때 상복으로 변장한 것을 떠올릴 것이라고 하며 ‘한국의 상복’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보내온 상복을 입은 한국 남성의 사진을 게재하기도 하였다.36) 이처럼 메리놀회는 한국을 순교자의 땅, 믿음의 씨앗이 뿌려진 땅이라는 인식 아래 현재 영성회복이 일고 있는 선교지로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직접 선교사를 파견하기에 앞서 월시 총장은 1917년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순방하였다. 그 경험과 아시아 선교에 대한 비교와 전망을 담아 《동양 관찰기》(Observations in the Orient, 1919)를 저술 · 출판하였다.37) 그는 선교사로서 동양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이 책을 통해 수많은 미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세계를 향한 선교라는 신의 섭리에 대한 분명한 소명을 온전히 깨닫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월시 주교는 선교 영성이 미국 교회의 발전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지탱하고 강화시켜 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저술을 통해서도 월시 주교는 한국을 순교자의 나라, 박해를 딛고 이제 영성이 일고 있는 나라로 선교의 큰 가능성을 가진 국가로 강조하였다.

 

이미 여러 저술을 통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던 그의 인식은 이 책에서 소개한 한 한국인과의 만남에서 잘 드러난다. 선교지 개척을 위해 동양을 향한 여정에 오른 월시 주교는 선상에서 한 한국인을 만났다. 중국인이 알려주기 전에는 그가 한국인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월시 주교는 그 한국인이 호놀룰루 항에서 왔으며, 그동안의 자기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하였다. 월시 주교는 이 한국인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며, 그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대목에서 월시 주교는 한국에 대한 인식을 한마디로 정리하였다. 그것은 “한국은 순교자의 피로 물들여진 나라로서 초대받은 선교지”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메리놀회가 처음부터 관심을 가진 지역”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한국인은 매우 영적인 사람들이며, 한국은 씨를 뿌리면 곧 거둘 수 있는 지역”이라고 단언하였다.38)

 

한국에 도착하여 직접 보고 느낀 기록을 통해서도 월시 주교는 선교지로서 한국에 대한 인상과 희망을 보다 잘 드러냈다. 그는 한국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린 곳”, “순교자가 잠든 곳” 등으로 정의하였다. 뮈텔 주교 안내로 주교관에 머물면서 ‘소박하고 저급한 기름을 사용하며 편안함이라고는 누릴 수 없는 건물이지만, 건물 속속들이 배어 있는 영성을 느꼈다’고 하며, 너무나 따뜻하고 순수하고, 너무도 영적이었다고 하였다. 신학교를 방문하여 102명의 신학생을 만난 뒤에는 그들이 매우 진지하고 훌륭한 태도를 지녔다고 격찬하면서, “만일 내가 사람의 영혼을 위한 선한 투자를 하기를 원하는 돈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면, 그 자신을 위해 서울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장학회를 세울 것을 권할 것이다.”고 하였다. “한국의 천주교는 귀하다”, “(한국은)순교자가 잠든 곳”이라 하며, “우리는 감히 희망한다. 자신의 피로 이 척박한 땅 위에 믿음의 꽃을 가져온 순교자가 존재하는 이 아름다운 교회에 들어올 때, 대를 이어 언제까지나 영원히 감사함으로 기억하게 될 것을!”이라고 기원하였다.39)

 

월시 주교가 한국은 메리놀회가 처음부터 관심을 가진 지역이라고 단언한 것과 같이 《그 먼 땅에》에는 한국의 천주교회사, 박해와 순교, 현재 교회의 상황 등이 자주 보도되었다. 《믿음을 위해》(For the Faith)에도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한국에 입국하여 다블뤼 주교, 베르뇌 주교 등과 만나 한국말을 배우고 전교활동을 전개하다 박해로 치명하기까지가 기록되어 있다.40)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정과 순교로 이어진 역사, 그 안에서 성장한 한국인의 영성, 선교사의 활동과 순교, 선교지로서 한국의 가치 등에 대한 여러 출판물은 체계적으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알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브르트니에르 신부에 관해서는 일찍이 1888년 그의 동창인 뒬스트 신부가 프랑스에서 간행한 전기가 있었다. 뒬스트 신부는 서문에서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당했던 조선 교회가 마침내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 시작하였고 순교자의 영광을 노래할 때가 왔다고 하며, 병인박해에 관한 기록을 접하기 어려운 프랑스 신자를 위해 이 책을 쓴다고 밝혔다. 본문에서는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삶과 신앙, 그리고 한국 선교 활동과 관련해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한국인 성직자 양성, 교회 현황과 박해 등 한국 천주교회를 개괄적으로 기술하였다.41)

 

월시 주교가 브르트니에르 신부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인 까닭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시아 선교를 염두에 둔 상황에서 이와 같은 서적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월시 주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에 대한 《믿음을 위해》(For the Faith)를 저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먼 땅에》를 통해 “지난 세기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하고 기꺼이 자신의 선교지에서 고문당하고 선종한 젊은 선교사의 영감 있는 자서전”으로 여러 번 소개하였다.42) 이러한 출판물과 《그 먼 땅에》의 기사를 통해 메리놀회는 천주교 신앙의 자발적 수용과 교회 창설, 박해와 순교로 이어진 한국 천주교회사를 핵심적으로 정리 · 소개하였다. 이는 한국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선교지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라는 주요한 의의를 지닌 활동이었다.43)

 

한국에 대한 인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일본에 대한 인식과 비교해 보는 일도 유용하다. 메리놀회는 선교지로서 일본에 대해서 다소 회의적인 전망을 드러내었다. 월시 주교는 하와이에서 영어가 유창한 일본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일본인은 미국에서 수년간 살았고 뉴욕에서 가끔 성당도 방문했다고 하였다. 그는 매우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월시 주교에게, 미국 천주교회에는 훌륭한 추기경과 대주교, 주교, 사제 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동양에서 미국인 신부들을 볼 수 없습니까? 왜 아무도 일본으로 가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월시 주교는 일본에도 미국인 신부가 갈 것이지만, 사실 일본에 대해서는 현재 아주 작은 희망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일본인은 영적인 문제보다는 너무 물질적 발전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일본인은 월시 주교의 진실한 진술에 대해 웃으면서 인정하였다고 한다. 요코하마를 방문한 자리에서 월시 주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천주교 신앙이 조금은 발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고 하며 미래에 대한 ‘희미한 희망’조차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44)

 

아시아에 특별한 선교 열정을 갖고 있던 월시 주교는 중국을 처음 출발한 미국 외방선교회의 활동이 성공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또한 미국과 정확하게 반대편에 있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지리적 요건을 크게 고려하였다. 월시 주교는 중국 진출을 통해 미국 천주교회의 선교영성은 지역적으로 제한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다.45) 한국에 대한 관심과 진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상황에 비추어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지역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4.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에 대한 활동

 

1) 한국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 요청

 

외방선교회를 창설하고 활동에 들어갔지만 미국 천주교회는 아직 아시아에 직접 선교사를 파견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먼 땅에》를 통해 외방 선교에 대한 현실적인 지원과 관심을 위한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아시아에 대한 선교 활동에 있어서 《그 먼 땅에》의 간행 · 보급은 당시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파리 외방전교회도 자체적으로 선교잡지를 간행하고는 있었다. 프랑스어로 간행되는 Bulletin(뷜탱), Compte Rendu(쿵트 랑뒤), annales de la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등의 잡지를 돌려보고 있었다. 또한 파리외전 잡지는 아니지만, 리용에서 발간한 선교 후원회 잡지인 les missions catholiques, an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등이 존재하였다.46)

 

그런데 《그 먼 땅에》는 각 지역 천주교회가 서로의 활동과 상황을 전하는 주요한 소통의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영어권에 아시아 천주교회를 알리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그 먼 땅에》는 발행 초기 35,000부 정도 보급되다가, 중국에 진출한 이후인 1918년 6월에 이르러 중국 선교지에서 현저한 증가를 보였다. 여러 선교지로부터 구독신청이 이어져 1920년에는 75,000부를 초과했고, 1923년 3월에는 월시 주교 스스로가 매우 만족한다고 기록할 정도로 100,000부 이상의 구독신청과 약 5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하였다. 《그 먼 땅에》는 뉴욕시에서 매우 잘 알려진 잡지였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지역 천주교회에도 구독자를 확보해 나가면서 1924년에는 125,000부를 기록하였다. 미국 공황기에 잠시 주춤했지만, 1935년을 지나면서 다시 회복하여 1941년 4월 216,000부까지 증가하였다. 중국대륙 공산화로 추방되기 직전에는 600,000부 이상이 발행47)될 정도로 급증하였다. 《그 먼 땅에》는 지속적으로 한국, 아프리카, 중국, 인도, 인도차이나, 일본, 필리핀 등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소개하였고, 선교지 상황을 보도하며 동참과 후원을 호소하였다. 《그 먼 땅에》는 미국 천주교회와 아시아 각 지역의 천주교회가 서로 소통하는 선교 활동의 매개였던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도 일찍부터 《그 먼 땅에》를 받아보며 미국 천주교회와의 교류를 이어가고 있었다.48) 한국 천주교회의 드망즈 주교와 뮈텔 주교를 비롯해 아시아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에게 《그 먼 땅에》의 의미는 각별했다. 소속 선교지의 소식을 보다 널리 전할 뿐만 아니라 관심과 후원을 부탁하며 어려움 속에서 보다 더 선교에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한국 천주교회가 《그 먼 땅에》를 계기로 미국 천주교회를 향해 낸 중요한 목소리는 아시아 선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촉구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 뮈텔 주교, 드망즈 주교 등 한국 천주교회에서 외방선교회에 보낸 서신을 주의 깊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드망즈 주교의 서신은 《그 먼 땅에》에 여러 차례 사진과 더불어 게재되었다. 메리놀회는 드망즈 주교가 메리놀회의 선교 활동에 대해 몇 가지를 제안하였다고 보도하였다.49) 드망즈 주교는 《그 먼 땅에》의 정기구독을 신청하면서 메리놀회에 협력하는 목적은 천주교회의 선교 활동을 돕는다는 것 이외에 두 가지가 있다고 밝혔다.

 

첫째, 미국의 그리스도교를 한국에 알리는 일을 돕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한국은 미국의 개신교를 매우 우호적으로 보고 있으며, 미국은 오직 개신교만 있고 천주교는 없다고 알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를 미국 가톨릭교회가 깨달아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자신의 삶을 순교로 마감하면서 한국 땅에 뿌린 씨를 조국으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수확하고 있다고 하였다. 매일 돈과 사람이 넘쳐나는 개신교 선교의 파도에 가톨릭교회가 침몰하지 않도록 적극 활동해야 한다며 미국 천주교회의 역할을 강하게 촉구하였다.

 

둘째, 빈곤 속에 있는 가난한 선교지인 한국을 위한 도움을 요청한다고 하였다.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인 한국 신자들이 땅을 기부하는 등 가진 것을 내 놓았지만, 신학교 건립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위해 여전히 비용이 부족함을 호소하였다.50) 드망즈 주교는 개신교의 대표국가로 알려진 미국으로부터 천주교회를 위한 기금이 온 것을 한국 신자들이 알게 되면 잘못된 사실이 바로 잡아져 미국 천주교 신자의 명예가 바로 설 것이라 하였다.

 

한국을 위한 후원과 관심을 요청하면서 드망즈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가치를 강조하였다. “한국은 하느님이 계획한 질서 안에서 동양의 그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가톨릭 신앙을 향해 준비된 나라”라고 하며, 수많은 순교자가 있는 한국은 지금도 곧 개종할 그리스도교 영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다. 메리놀회는 드망즈 주교가 친절하게도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에 참여하여 미국 가톨릭의 명예를 바로잡고, 순교자의 나라인 한국의 준비된 영혼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안해주었다고 발표하였다.

 

이 당시 황해도에서 활동하던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洪錫九, 1860~1936) 신부 역시 메리놀회에 서신을 보내 한국 천주교회의 소식을 전하며 미국이 외방 선교에 나선 것을 적극 환영한다고 하였다. 《그 먼 땅에》에는 <한국으로부터>라는 제목으로 1912년 10월 11일자 빌렘 신부의 서신이 인용 소개되었다. 미국에 외방 선교를 위한 신학교 창설을 크게 기뻐하며, 미국이 외방 선교에 나선 것은 미국 가톨릭 신자의 생명력 넘치는 믿음의 증거이며 그들에 대해 가해지던 비판에 대한 승리의 대답일 것이라 하였다. 더욱이 극동에서 선교하는 프랑스인의 선교 활동에 미국이 동참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믿음의 영광이냐고 하며, 미국 천주교회 역시 모든 국가를 향해 성 베드로가 보여준 모범을 따라 이를 수행하고 있음이라 하였다. 이어 한국에 믿음은 계속 확산되고 있으며 연간 대개 5천여 명의 성인 세례가 보고되고 있다고 하였다. 12년 전만해도 빌렘 신부가 사목하는 곳은 완전 이교도의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그리스도인으로 찼으며, 한국에는 이러한 마을이 많이 있다고 하였다.51) 한국 천주교회가 주장한 핵심은 외방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미국 천주교회의 명예를 세우는 일이라는 것, 유럽 천주교회가 헌신해 온 아시아 선교 활동에 미국 천주교회도 참여하라는 것, 그리고 한국은 동양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영성이 일어나는 준비된 선교지라는 것으로 함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와중에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였고,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메리놀회에 창설 이래 요청해 온 아시아 선교에 대한 책임을 연이어 강력하게 호소하였다. 1914년 11월에는 서울 뮈텔 주교, 제물포의 드뇌 신부52) 등이 보내온 한국 천주교회의 소식이 보도되었다. 《그 먼 땅에》에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선교사인 드뇌 신부의 서신을 소개하면서 전쟁 때문에 선교사가 선교지를 떠난 것에 대한 그의 논평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고 하였다. 드뇌 신부는 많은 선교사들이 조국의 방어에 복무하기 위해 소집되었고, 그들이 자리를 비워 그리스도인들은 사제가 없는 실정이라고 호소하였다. 그런데 ‘목자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의 양떼로 돌아간 행운이 있었는가?’라고 물으며, 전쟁이 여기 저기 도처에서 너무 많은 희생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였다. 드뇌 신부는 수백 명 사제들의 공백이 선교지에 커다란 틈을 초래한 반면, 수백 명의 군인이나 자선 도우미가 있어도 나라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이어 드뇌 신부는 한국의 그리스도인이나 이교도 가운데 영어를 읽을 줄 아는 젊은이들을 위해 영어로 된 책을 보내줄 것도 요청하였다. 그들에게 이미 《그 먼 땅에》를 읽을 것을 권했는데, 이는 그들이 천주교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을 없애주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트 선교는 천주교보다 25배가 월등하다고 하며, 천주교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어도 그들을 탓할 수 없다고 하였다.53) 이어 뮈텔 주교가 보내온 가부좌를 하고 부처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는 한국소년의 사진이 “당신이 일어날 차례입니다.”는 제목과 함께 게재되었다.54)

 

1915년 5월에 《그 먼 땅에》에는 “우리의 독자들이 우리의 선교사명에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하였다. 여기 한국 드망즈 주교로부터 추가적인 증언이 있다.”고 하며 드망즈 주교의 서신을 인용 보도하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람들은 유럽이 전쟁으로 말할 수도 없이 고통받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선교지는 말할 수 없이 심한 고통을 받았으며, 안타깝게도 지금부터 몸과 영혼을 돌보는 책임을 가진 선교사들도 절망(좌절)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합니다. 유럽은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엄청난 파괴의 한 복판에 처한 멀리 떨어져 있는 선교지는 누가 생각해 줄 것인지? 하느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를, 하느님이 미국에 많은 소명을 일으켜 세워 주시기를!”(《그 먼 땅에》, 1915년 5월호, 70쪽)

 

메리놀회 창설 이래 아시아 선교에 대한 미국의 책무를 강조해 온 드망즈 주교는 미국 교회가 전쟁 이후 더욱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선교지를 돌아볼 것을 적극 호소해 왔다.

 

“이 끔찍한 전쟁이 너무 장기화되고 있기에 저는 절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많은 선교지가 파멸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저희는 분명하게 희망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유럽에 의존해 왔는지를 미국 가톨릭이 깨닫게 되기를.”(《그 먼 땅에》, 1916년 4월호, 54쪽)

 

메리놀회는 드망즈 주교의 서신을 인용 · 보도하며 외방 선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촉구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목소리를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중국에서도 아시아에 대한 메리놀회의 후원을 호소해왔다. 《그 먼 땅에》에는 <전쟁과 선교지>라는 제목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프레이저 신부55)의 서신이 인용 · 보도되었다. 프레이저 신부는 전쟁으로 인해 선교사들이 군복무를 위해 소환된 것만이 아니라 주로 프랑스로부터 오던 후원금마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며 메리놀회의 활동으로 재정적 압박을 해소하게 되기를 진실로 믿는다고 하였다.56) 메리놀회도 전쟁 발발 직후 <전쟁과 (메리놀의) 언덕>(The War and the Knoll)이라는 글을 통해, ‘우리가 조용한 언덕에 살고 있어서 전쟁의 소리를 못 듣고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며, 전쟁은 이미 우리 진영을 공격했다고 하며 선교지의 소식을 전하였다.57)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더욱 절박하게 미국 천주교회를 향해 아시아 선교에 나설 것을 외쳤고, 메리놀회는 그러한 내용을 연이어 보도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상심과 절망 속에서 미국 가톨릭이 선교지에 대한 책임을 깨닫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한국에 자신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나이도 있어 군복무는 벗어났지만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안타까워하였다. 그는 “저의 사명은 가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한국)의 상황은 비참함 자체입니다.”고 하며 미국에 간절히 도움을 부탁하였다는 소식이 실렸다.58)

 

2) 미국 천주교회의 반응과 한국 진출(1923)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1차 대전은 천주교회 상황도 급변하게 만들었다. 1차 대전으로 유럽의 천주교회는 본국 자체는 물론 외방 선교 활동도 큰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프랑스는 국내의 사제는 물론 선교지에서 활동하던 신부들도 본국으로 소환하여 전쟁에 징집하였다. 일본에서는 군복무를 위해 11명의 프랑스 사제가 본국으로 돌아갔고 오직 20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몇몇은 나이와 질병으로 매우 쇠약해져 있는 상태라는 소식이 올라왔다.59) 인도에서도 마드라스60)의 메르케스 몬시뇰(Vicar-General Msgr. Merkes)이 기고한 글에 따르면, 선교적으로 참담한 상황이라고 하며 신부와 재정적 지원을 잃었고 물가는 치솟았다는 고충을 토로하였다.61)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아프리카 등등 여러 지역에서는 ‘이 끔찍한 전쟁 때문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식과 유럽의 어려움에 따른 선교지의 재정적 · 인적 어려움을 전해왔다.62)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 천주교회 자체 내에서도 그 동안 유럽 천주교회가 전담하다시피 해 온 아시아 선교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메리놀회는 ‘이 격변의 시기 유럽의 어두운 기간에 우리의 위로와 기도를 전한다’며 안타까워하였고, 각 지역의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선교지에서의 소식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63) 창간한 이래 여러 선교지의 소식을 보도해 온 《그 먼 땅에》는 당시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200여 명 이상의 선교사들과 소통하고 있었다.64) 그들과 소통하면서 외방 선교에 대한 미국 천주교회의 책임을 놓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스스로 지적하고 나섰다. 그것은 미국 선교사가 아시아 선교 현장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미국 가톨릭은 외국 선교를 진정시키기에는 장애가 있다, 왜냐하면 현장에 직접 나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65)

 

직접 선교사를 파견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메리놀회는 자체 칼럼을 통해, “태평양 연안은 메리놀에게 호소한다. 그것은 외방 선교를 위한 떠남이라는 예상된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하며, 어느 항구에서 떠나 언제 도착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새로운 사도직 사명을 보게 될 것임을 분명히 안다고 발표하였다.66) 메리놀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드디어 월시 총장은 직접 1917년 9월부터 1918년 4월까지 중국, 한국, 일본 등의 아시아 천주교회를 순방하였고, 그 길에 한국 천주교회를 적극 소개하였다. 한국에는 1917년 10월 24일 부산을 통해 입국하여 대구, 서울 등을 돌아보고 1917년 11월 2일 압록강을 통해 만주로 떠났다.67)

 

한국을 돌아본 직후인 1918년 2월 《그 먼 땅에》에는 표지에 명동 성당 사진과 더불어 “한국의 땅은 지난 세기 수많은 순교자의 피로 물들었다.”는 문구로 시작해 여러 지면에 걸쳐 한국 천주교를 크게 소개하였다. 월시 총장은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과 현황은 앞서 방문했던 일본 도쿄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하였다. 대구를 방문하여 드망즈 주교를 만난 월시 총장은 신학생과 신자들의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는 매우 큰 신뢰감을 주었다고 하였다. 서울 뮈텔 주교를 만나 명동 성당에 머문 경험을 통해서는 맨 바닥에 누추한 곳이었지만 영적으로 충만한 곳이라 하며, 특히 앵베르 주교 · 모방 신부 · 샤스탕 신부와 4명의 한국인 신자 등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지하성당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 천주교회의 현황을 전하면서 박해와 순교, 김대건 신부의 탄생 등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소개하였다.68) 뮈텔 주교는 월시 주교와 신학교, 베네딕도회, 숭공학교, 제물포 성당 등 여러 곳의 방문에 동행하였고, 11월 2일 용산역에서 월시 주교는 펑텐[奉天]69)을 향해 떠났다.

 

한국 방문 뒤 메리놀회는 한국 뮈텔 주교가 그의 아시아의 고향인 한국에서 우리의 그리스도 군사들의 소식을 듣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혀 한국 진출을 시사했다.70) 뮈텔 주교, 드망즈 주교도 서신을 보내어 메리놀회 총장의 한국 방문에 대한 특별한 기쁨과 감사를 전하였다. 미국 선교사를 만날 기회를 가졌음에 감사하며 가슴으로 서로를 이해했다고 밝혔다.71) 뮈텔 주교는 월시 주교가 소박하고 원만하며 매우 기쁘게 한국에 대해 나쁜 인상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일기에 남겼다.72)

 

이미 창설 초기부터 《현대 순교자의 사색》 · 《믿음을 위해》 · 《선교사의 고향에서》 등 한국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선교사의 전기를 출간하여73)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지속해 온 메리놀회는 한국 천주교회에 상당한 선교자금도 지원하였다. 아시아 선교에 대한 미국 천주교회의 참여를 호소하던 한국 천주교회는 미국에 서신으로 후원을 부탁하기도 하였고, 직접 방문도 하였다. 1915년 클라우디오 페랑 신부는 드망즈 주교에게 미국으로의 모금 여행을 제안하였고,74) 드망즈 주교는 1920년 9월부터 두 달여 동안 메리놀회 본부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방문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이 미국 여행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하며 보고서와 여러 통의 편지를 포교성성으로 보냈다.75) 월시 총장이 순방을 마치고 한국 진출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다시 《1866년 한국의 순교자 - 파리 신학교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이야기》(1919)라는 신간서적이 삽화를 곁들여 출판되었다. 한국을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자고 하며 《그 먼 땅에》에 적극적으로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홍보와 관심을 호소하였다.76)

 

그런데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이와 관련해 참고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메리놀회 선교사 프라이스 신부의 서신을 볼 필요가 있다. 프라이스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활발한 평신도 활동을 소개하면서 일본 정부가 일본과 한국 모두를 파멸시키고 있다고 우려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관련해 한국인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일본 정부는 매주 의심자 신문을 제출하도록 강요하는 등 한국의 그리스도교를 압박하였고, 그 결과 서울 부근 개종자의 수가 50%이하로 떨어졌다고 안타까워하였다.77)

 

이러한 상황에서 메리놀회는 한국 천주교회를 크게 후원해 왔다.

 

미국에서 모두 900대나 되는 많은 미사예물을 받았는데,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것이 온 것은 처음이다. 뮈텔 주교도 그것을 어떻게 할 지 모르고 있다.78)

 

이어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천주교회가 한국으로 진출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집중해 다루었다. “한국은 윌슨 대통령이 항공편으로 방문할 것을 기대하며, 일간지의 머리기사로 달렸다. 몇 년 전만 해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발언일 것인가! 미국 대통령이 자기의 자리를 떠나 비행기에 오르다니!”로 시작하여 미국이 이기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에서 벗어나 그 벽을 허물기 시작한 것을 하느님의 맷돌이 강렬하게 돌기 시작한 것으로 비유하며 환영하였다. 자유와 정의에 바탕을 둔 믿음을 전 세계에 전하는 수단으로 미국이 사용된다면 얼마나 영예로운 운명이겠냐고 하였다. 인류의 진보가 볼셰비즘의 진흙에 빠져버리고 유럽은 혼돈에 있는 바로 지금 미국의 명성은 정점에 달해있다고 하였다. 유럽은 미국을 돈만을 숭상한다고 생각하고, 아시아는 미국에 개신교만 있다고 알고 있으니, 이런 잘못된 것을 세상에 반증하기 위한 황금의 기회가 지금 미국 천주교에게 왔다고 하였다.

 

이 모든 일에 있어, 한국은 평판이 좋지 않은 일본의 통치 아래에서 “미국 정부”, 즉 영웅을 칭송하였고, 우리의 국가적 장벽의 붕괴를 진심으로 환호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의 권리에 대한 우리의 지지에 대한 신뢰로 가득하여, 한국은 희망적으로 미국의 도움의 손길의 축복을 기다리고 있다.79)

 

앞서 중국의 프라이스 신부의 평가처럼 메리놀회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통치를 비판하며, 한국이 미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고 강조하였다.80) 이어 뮈텔 주교는 <진실한 이야기>(A True Story)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궁궐 안의 그리스도교, 황후가 세례를 모색하다, 비밀 의식, 왕궁 안에서의 첫 번째 성찬식, 그리스도교인에 이교도의 장례의식’이라는 소제목으로 나누어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가 세례 받은 이야기를 전하였다.81) 여기에서 뮈텔 주교는 마침내 고종 황제의 친정(親政)으로 박해가 종식된 것을 지적하며 ‘그리스도교는 법정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승리하였다’고 하였다. 주교와 신부, 셀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이 고문 받으며 죽어가는 동안에도 수천의 한국인 신자들은 교리를 공부하며 세례를 준비해 나갔다고 마무리하였다.82) 뮈텔 주교는 이 ‘진실한 이야기’를 통해 박해 가운데에 오히려 신자는 늘어간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의 ‘진실’을 전하였다.

 

이때 특히 《그 먼 땅에》는 <선교지 논설>이라는 칼럼에서 한국의 삼일독립운동, 독립선언서 낭독과 공약삼장 등을 철도역 사진과 더불어 소개하였다. “조선은 주권을 가진 독립국”임을 선포한 독립선언서를 읽었다고 하면서, 공약 삼장을 번역하여 게재하였다. 《그 먼 땅에》는 이 선언은 독립협회(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가 주관한 일이라 보도하고, 독립협회는 이십만의 한국인을 대표하며 1,500,000명의 회원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83) 그리고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며 아시아 선교에 관해 논평하고 한국에 가기를 희망하며, 한국인은 점잖고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라고 평하였다.84)

 

메리놀회가 한국을 선교지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관심을 기울이던 것과 더불어 한국 천주교회의 지속적인 선교 요청이 이어지던 끝에 드디어 《그 먼 땅에》는 교황청이 메리놀회의 한국 선교를 허락했다고 공식 발표하였다.85) 메리놀회는 <한국의 메리놀>이라는 제목 아래 뮈텔 주교 사진과 더불어 한국 관련 기사를 통해 보다 상세하게 그 과정을 보도하였는데, 월시 총장이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본격적으로 포교성성 추기경과 아시아 선교를 논의하였음을 알렸다. 교황청은 매우 적극적으로 미국 외방선교회가 한국과 일본의 큰 도시 가운데 하나를 확보하여 이를 담당하기를 희망하였다.86) 이어 메리놀회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그 뒤로 부터, 로마와 한국 서울에 성인 같은 뮈텔 주교는 서신을 주고 받아왔고, 새로운 구역의 범주를 확정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상당한 정도의 편의를 위해 공식적인 통보는 늦추어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올해에는 우리의 중국 선교지에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쏟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포교성성이 다시 한 번 [한국 선교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였고, 그리고 또 우리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수 없이 들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선교 활동하는 것에 특권을 갖게 되어 대단히, 아주 대단히 기쁘다.87)

 

《그 먼 땅에》는 <이제 한국에 대해 말한다>고 하면서 한국의 지리, 기후, 그리고 인구와 신자수, 교구, 사제들의 활동 등 천주교회의 현황을 보도하였다. 특히 한국의 선교를 놓고 “이삼십 년 전 만에도 이 선한 의지를 가진 토양(한국)에는 신부만이 있었는데 오늘날은 매우 달라진 상황”이라고 하며, “지금은 개신교 목사들은 매우 많고, 한국인들은 다양한 종교에 의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들이 이 나라에 새로운 사고를 들여오고 있다.”고 전하였다.88) 과거는 정부의 박해가 문제였지만, 이제는 다종교 사회에서 개신교회의 왕성한 선교 활동이 이어지고 있음과 일본에 의한 새로운 종교와 이념의 유입에 대한 우려를 전하였다. 여기에 메리놀회가 우려한 일본에 의한 새로운 사고가 무엇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기존 종교의 억압이나 왜곡만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바람직하지 않은 사조의 유입을 지적한 것이라는 짐작이다. 당시 성행한 사회주의, 또는 메리놀회가 누누이 일본인 개종의 어려움으로 지적한 물질주의나 신도이즘 등으로 유추해 볼 수 있지만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리스도교의 시각에서 부정적인 사고라는 점만이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이 순교자의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가톨릭 사제들이 순교의 왕관을 쓴 한국은 메리놀 선구자들에게 흥미로운 곳이 될 것이다. 이는 또한 어려운 임무도 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지금도 이전에도 우리가 이 새로운 선교지역에 달러나 사람을 보내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독자들에게 이 새로운 임무를 위한 빛과 힘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부탁한다.”고 당부하였다.

 

이어 한국 진출이 결정된 메리놀회에서는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을 것을 권유하며 한국을 소개하였다. “미국 천주교 사제가 한국 선교지에 임명되었다.”고 하며 한국에는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매우 많이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유럽 국가 출신의 사제들이 소수가 있다“고 전하였다. “한국에 가톨릭교회의 설립과 발전의 완전함을 위하여, 1866년을 끝으로 그 곳에서 순교한 가톨릭 사제들을 위하여, 한국인의 삶과 관습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함께 하기 위하여 메리놀의 책을 읽자.”고 하며 한국 선교를 위해 병인박해로 선종한 선교사인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에 관한 책을 소개하였다.89)

 

이와 같이 《그 먼 땅에》는 한국의 종교 · 관습 · 지리 · 기후 등에 관한 소개와 더불어 한국의 가톨릭 역사에 대해 소개하고, 정부의 박해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선교 활동을 펴다가 순교한 사제들에 대해 적극 홍보하였다. 이러한 기사를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어권 천주교회는 물론 선교지 현장에도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고 한국에 대한 선교의 열정을 고취시켜 나갔다. 특히 정부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 선교사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그러한 참혹한 박해를 딛고 지금 영성부흥이 일어나는 곳으로 한국을 소개해 나갔다.

 

 

5. 맺음말

 

한국 천주교회와 미국 천주교회의 교류와 만남은 천주교회사의 새로운 시기가 열렸음을 의미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급속도로 양적인 성장을 거듭해 온 미국 천주교회는 외방 선교에 나서야 할 책임과 필요를 크게 인지해 나갔다. 미국 천주교회 자체 내에서도 선교 활동을 보다 조직화하고 정기화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영국 등 유럽천주교회로부터의 후원과 격려도 한몫하였다. 마침내 미국 내에서 외방 선교를 향한 새로운 발걸음이 내딛어졌는데, 그 창설 주역은 월시 신부, 프라이스 신부, 그리고 메리 조셉 로저스 수녀였다. 이들은 유럽 천주교회의 아시아 선교에 큰 인상을 받았으며 당시 프로테스탄트의 활발한 외방 선교 활동에도 크게 자극받았다. 마침내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목적 1911년 미국 최초의 천주교 외방선교회(The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창설되었다.

 

아시아 선교를 목표로 한 메리놀회는 직접 선교사를 파견하기 이전부터 한국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설립 초부터 발간한 선교잡지인 《그 먼 땅에》를 통해 한국은 순교자의 나라이며 폭력적 박해를 이겨내고 영성회복이 일고 있는 주요한 지역으로 강조하였다. 한국 관련 서적의 발간도 이어져 《현대 순교자의 사색》 · 《믿음을 위해》 등 한국에서 순교한 선교사의 전기를 출간하였다. 창설자 월시 총장은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순방한 뒤 《동양 관찰기》를 저술 · 출판하여 한국을 영성이 일고 있는 나라로서 선교의 큰 가능성을 가진 곳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월시 주교가 한국은 메리놀회가 처음부터 관심을 가진 지역이라고 단언한 것과 같이, 미국 천주교회는 잡지와 서적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정과 박해, 선교사의 활동과 순교, 그 안에서 성장한 한국인의 영성, 선교지로서 한국의 가치 등을 핵심적으로 정리 · 소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소개라는 주요한 의의를 지니는 일이었다.

 

한국 천주교회도 일찍부터 《그 먼 땅에》를 받아보며 미국 천주교회와의 교류를 이어갔다. 그런데 무엇보다 한국 천주교회가 미국 천주교회를 향해 낸 중요한 목소리는 아시아 선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촉구하고 후원을 요청한 일이었다. 대구의 드망즈 주교는 메리놀회에 서신을 보내 한국은 미국의 개신교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며, 미국에는 오직 개신교만 있고 천주교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를 미국 가톨릭교회가 깨달아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순교로 삶을 마감하면서 한국 땅에 뿌린 씨를 개신교 선교사들이 수확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가톨릭교회가 침몰하지 않도록 미국 천주교회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한국 신자들에게 외방 선교를 위한 미국 천주교회의 활동이 알려지면 미국 천주교 신자의 명예도 바로 세워질 것이라 하였다. 황해도의 빌렘 신부 역시 메리놀회에 서신을 보내 미국이 외방 선교에 나선 것은 미국 가톨릭 신자의 생명력 넘치는 믿음의 증거이며 그들에 대해 가해지던 비판에 대한 승리의 대답일 것이라 하였다. 이어 한국에 믿음은 확산되고 있으며 연간 대개 5천여 명의 성인 세례가 보고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 천주교회를 향한 한국 천주교회의 핵심적 목소리는 외방 선교는 미국 천주교회의 명예를 세우는 일이라는 것, 이를 위해 유럽 천주교회가 헌신해 온 아시아 선교 활동에 참여하라는 것, 그리고 한국은 동양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영성이 일어나는 준비된 선교지라는 것으로 함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와중에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였고,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더욱 절박하게 미국 천주교회를 향해 아시아 선교에 나설 것을 외쳤다. 전쟁으로 인한 상심과 절망 속에서 미국 천주교회가 선교지에 대한 책임을 깨닫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전하였다.

 

메리놀회 역시 한국 천주교회에서 보내온 서신을 인용 · 보도하며 외방 선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촉구하는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월시 총장은 보다 적극적인 움직임을 시작하여 1917년 9월부터 1918년 4월까지 아시아 천주교회를 직접 순방하였다. 이 일정을 통해 아시아 진출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고, 한국도 방문하여 부산, 대구, 서울 등을 돌아보았다. 귀국한 직후에는 《그 먼 땅에》를 통해 한국 천주교를 크게 소개하였다. 월시 총장은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과 현황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하였다. 월시 총장의 한국 방문 뒤 메리놀회는 한국 뮈텔 주교가 그의 아시아의 고향인 한국에서 우리 그리스도 군사들의 소식을 듣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하며 한국 진출을 시사했다. 이미 한국에서 순교한 선교사의 전기를 여러 권 출간한 것에 더하여 《1866년 한국의 순교자 - 파리 신학교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이야기》라는 신간서적도 출판하였다. 한국을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자고 하며 한국 천주교회를 적극 홍보하고 관심을 호소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선교사들은 일본 정부가 일본과 한국 모두를 파멸시키고 있다 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관련해 한국인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는 것이라고 전하였다. 일본 정부가 매주 의심자 신문을 제출하도록 강요하며 한국의 그리스도교를 압박하였고, 그 결과 서울 부근 개종자의 수가 50% 이하로 떨어졌다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리놀회는 한국 천주교회를 크게 후원해 왔고, 미국 천주교회가 한국으로 진출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집중해 다루었다. 자유와 정의에 바탕을 둔 믿음을 전 세계에 전하는 수단으로 미국이 사용되는 것은 영예로운 운명이라고 하며 유럽은 미국을 돈만을 숭상한다고 생각하고, 아시아는 미국에는 개신교만 있다고 알고 있으니, 이런 잘못된 것을 세상에 반증하기 위한 황금의 기회가 지금 미국 천주교에게 왔다고 하였다.

 

마침내 교황청은 메리놀회의 한국 선교를 공식적으로 허락하였으며, 메리놀회는 <한국의 메리놀>이라는 제목 아래 한국 관련 기사를 보다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이어 월시 총장이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본격적으로 포교성성 추기경과 아시아 선교를 논의하였음을 알렸다. 메리놀회는 순교자의 나라인 한국은 메리놀 선구자에게도 감동적인 곳이 될 것이라고 하며 후원과 기도를 부탁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회에 선교의 책임과 당위성에 대한 호소, 아시아 선교를 목표로 한 미국 외방선교회의 적극적 호응, 이에 대한 교황청의 후원과 승인으로 미국 천주교회의 한국 진출은 마침내 이루지게 된 것이다.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재원(교육부)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NRF-2014S1A5B5A0201171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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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M. O'Toole, The Faithful: A History of Catholics in America, Belknap Press, 2008.

Jay P. Dolan, In Search of an American Catholicism: A History of Religion and Culture in Tens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Jay P. Dolan, The Immigrant Church: New York's Irish and German Catholics, 1815~1865,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92.

Jean-Paul Wiest, Maryknoll in China : A History, 1918~1955, Orbis Books, Maryknoll NY, 1988.

 

3. 인터넷 홈페이지

메리놀회 아카이브 (http://maryknollmissionarchives.org)

천주교회 총람 (http://www.catholic-hierarchy.org)

메리놀외방선교회 아카이브(http://maryknollmissionarchives.org/?page_id=2766)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http://saenamteo.or.kr/martyrs/1040),

Goodnews (http://info.catholic.or.kr/saint/view.asp?ctxtSaintId=1093&Orggubun=101)

스카버러 선교회 (https://www.scarboromissions.ca/about-us/history/john-mary-fr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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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최초 외방전교회의 공식적 명칭은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이다. 뉴욕 대교구 호돈(Hawthorne)에 임시본원을 설치하며 출발했고, 1년 뒤 지금의 뉴욕주 오시닝(Ossining)으로 이전하여 활동하면서 ‘메리놀’이라고 불렸다. 이에 가톨릭 사전에도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Maryknoll) 라고 병기된다(http://www.catholic-hierarchy.org/diocese/dqmm0.html). 이 글에서는 자료 출처와 서술의 편의에 따라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 또는 메리놀 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를 병용하였다. 월시 신부는 1892년 5월 20일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33년 4월 20일 주교로 성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특별히 묘사하지 않는 한 ‘월시 주교’로 통일하여 서술하였다.

 

2) 메리놀회에 대한 사전적 설명은 김성희,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4, 2004, 2595쪽 참조. 한국 진출 이후 전개한 메리놀회의 활동은 천주교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편, 《천주교평양교구사》, 1981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과 활동에 대한 개괄적 소개는 방상근, <선교회 · 수도회의 정착과 활동>, 《한국천주교회사》 5, 2014 참조. 최근 김수태는 주로 1930년대를 중심으로 메리놀회의 활동에 대한 일련의 글을 발표하였다.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 《교회사연구》 19, 2002 ; <1930년대 평양교구의 신사참배거부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8, 2004 ;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 《한국사학사학보》 11, 2005 ; <1930년대 천주교 평양교구의 문서선교 - 《가톨릭연구》 · 《가톨릭조선》을 중심으로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7, 2006 ;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 《교회사연구》 29, 2007.

최선혜는 메리놀회의 한국관련 문서를 본격적으로 검토 · 분석하여 다음의 글을 발표하였다. 최선혜, <한국 근 · 현대와 외방선교회의 활동>, 《교회와 역사》 350, 2004 ; <서양 선교사의 한국전쟁 예견 - 외방선교회 관련 문서에 대한 소개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23, 2004 ; <냉전시대 캐롤 몬시뇰의 구호 활동과 그 의의>, 《교회사연구》 34, 2010 ; <한국전쟁기 천주교회와 공산정권 -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Bishop Byrne)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4, 2014 ; <1940년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 《교회사연구》 47, 2015.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과 활동에 대한 방상근의 개괄적 소개와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과 활동에 관한 김수태의 연구에 대해서는 최선혜, <1940년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 《교회사연구》 47, 2015, 126~127쪽, 각주 5)에 소개 정리하였다.

 

3) 《그 먼 땅에》(Field A Far)는 편집장이나 발행인 없이 보스턴 대교구의 전교회 책임자였던 월시(J.A. Walsh) 신부가 각 선교지로부터 받은 편지를 기사 형태로 간행한 것이 창간호였다(1907년 1월). 두 번째 호부터는 보스턴의 가톨릭 해외선교 사무소가 발행을 맡아 격월간지로 발행하였다. 1918년에 잡지명이 The Field Afar - Maryknoll로 바뀌었고, 1939년에 Maryknoll - The Field Afar로 다시 변경되었다. 1957년에 창간 50돌을 맞아 Maryknoll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글에서는 서술의 편의를 따라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지부에 소개된 번역인 《그 먼 땅에》로 통일하였다. 한국에 관해서는 창간 직후인 1909년 2월호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게재되었다.

 

4) 이 자리를 통해 본 연구의 진행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메리놀회 소장 자료를 검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한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지부장 함제도(Hammond, Gerard E.) 신부님과 미국 메리놀회 본부의 Maryknoll Mission Archives의 관계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함제도 신부님은 뉴욕 메리놀회에 필자를 위한 아카이브 방문을 청원하는 등 여러 수고를 베풀어 주셨다. 메리놀회의 Archives Director인 Ellen Pierce는 메리놀회의 아시아 활동에 관한 여러 자료에 대한 안내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Archives인 Jessica Di Silvestro, Stephanie Conning Jennifer Halloran 등은 까다로운 자료 안내와 복사, 정리 등을 성심껏 협조하여 주었다. 이러한 도움이 없었다면 본 연구는 진행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발표자의 메리놀회 한국 관련 문서에 대한 소개는 최선혜, <한국 근현대와 외방선교회의 활동>, 《교회와 역사》 350, 2004년 7월호 ; 최선혜, <서양 선교사의 한국 전쟁 예견 - 외방선교회 관련 문서에 대한 소개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23, 2004 참조.

 

5) 1923년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이후, 한국과 미국 천주교회의 교류와 의의에 대해서는 별고로 발표할 것을 약속한다.

 

6) 미국의 외방전교에 주목한 연구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 진행되었다. 그 가운데 이 글의 작성에서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의 창설 배경과 활동에 관해서는 Angelyn Dries, TheMissionary Movement in American Catholic History, Orbis Books, Maryknoll, NY, U.S.A., 1998. 특히 Chap. 4, “The Spanish-American War, the Americanist Period, and a National Focus for Missions Overseas, 1898~1919”를 크게 참고하였다. 미국 외방전교회 창설 주역과 관련 선교사에 대한 기본적인 약력은 메리놀회 아카이브 홈페이지 (http://maryknollmissionarchives.org)와 천주교회 총람 홈페이지(http://www.catholic-hierarchy.org)에서 얻었다.

 

7) 같은 시기 영국계 이민자의 수는 75,810명이었던 것에 비해 아일랜드 이민자는 무려 207,654명이나 되었다. 이에 1830년부터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대개 프로테스탄트계 영국계 미국인들과 나중에 이민 온 아일랜드인들 사이에는 서로 배타적인 문화적 갈등이 심각하게 벌어질 정도였다.

Jay P. Dolan, The Immigrant Church : New York's Irish and German Catholics, 1815~1865,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92 참조 ; Jay P. Dolan, The American Catholic Experience, Doubleday, 2011, p. 147. ; 김봉중, 《오늘의 미국을 만든 미국사》, 역사의 아침, 2013, 251~253쪽.

 

8) 1870년대 280만 명에서 1880년대는 520만 명의 이민자가 미국에 왔다. 그 뒤로도 이민자의 수는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유럽이 어두운 형편까지 겹쳐 1889년부터 1915년까지 미국에는 2천만 명 이상이 이민해 왔다. Angelyn Dries, The Missionary Movement in American Catholic History, Orbis Books, Maryknoll, NY, U.S.A., 1998, pp. 22~42 ; 김봉중, 앞의 책, 268, 277쪽.

 

9) 미국 천주교회사에 관해서는 상당히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있다. 일찍부터 미국 사회에 어떻게 로만 가톨릭교회 신자들이 수천만 명에 이르게 된 역사를 갖고 있는가에 주목하여, 특히 유럽 가톨릭 국가 이민자들은 왜 ‘개신교 국가로 색칠돼 있는 미국’으로 왔는가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미국사회 내부의 가톨릭교회사, 가톨릭공동체의 역사 등에 집중한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필자는 이러한 연구를 온전히 소화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그것을 정리하여 소개하는 일은 조금 장황한 작업이다. 하지만 이 글의 작성과 관련하여 긴요하다고 판단되어 크게 참고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Aaron Ignatius Abell, American Catholicism and Social Action - A Search for Social Justice : 1865~1950,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63.

James J. Hennesey, American Catholics : A History of the Roman Catholic Community in the United States, Oxford Univ Press, 1981. ; Jay P. Dolan, The American Catholic Experience, Doubleday, 2011. ; Jay P. Dolan, The Immigrant Church : New York's Irish and German Catholics, 1815~1865,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92. ; Jay P. Dolan, In Search of an American Catholicism : A History of Religion and Culture in Tens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 James M. O'Toole, The Faithful : A History of Catholics in America, Belknap Press, 2008.

아벨은 미국사회의 가톨릭 이민자에 주목하여 그 사회적 움직임을 추적하였으며, 특별히 뉴딜 정책기간과 2차 세계대전 기간에 발전된 강한 노동운동과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그는 이민자를 위한 가톨릭교회의 지속적인 ‘사회적 활동’(Social Action)을 분석하여 미국 가톨릭시즘의 형성과 발전을 검토하였다.

헤네시(James J. Hennesey)는 가톨릭 이민자의 다양한 국가적 문화적 인종적 특징을 염두에 두고 미국 사회 내부의 가톨릭 공동체 역사를 추적하였다. 이들이 가톨릭 공동체로 어우러지기에는 미국 가톨릭이 미국의 민주주의 이념, 법, 정부, 다종교, 실용주의, 적극 행동주의 등의 역사적 흐름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미국 천주교사에 대한 이해는 특히 돌란(Jay P. Dolan)의 일련의 연구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일어난 가톨릭교회의 변화를 성직자만이 아니라 일반 평신도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다. 돌란은 미국 가톨릭 신자는 가난하고 하위계층이며 이민자라는 고정관념이 있었지만, 20세기 이후 미국에서 태어난 아일랜드, 독일 이민자 자녀들이 광범위한 중산층 계급으로 발전해 나간 것을 추적하였다. 특히 가톨릭 학교를 통해 교육과 기술을 익히며 성장해 나간 점을 지적하였다. 다른 한편 교황 비오 10세가 1907년 7월 3일 교령 《비통한 결과에 대해서》(Lamentabili Sane Exitu)를 반포하여 근대주의를 비판하고, 《반근대주의 선언》(Sacrorum antistitum)을 작성하여 모든 성직자에게 근대주의를 명백하게 반대할 것을 서약시키는 등 가톨릭교회가 근대주의와 맞선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 이로써 교회는 무거운 대가를 치렀다고 평가하였다. Jay P. Dolan, The American Catholic Experience, Doubleday, 2011. pp. 147, 318~319 참조.

오툴레(James M. O'Toole)는 흑인, 히스패닉, 그리고 아시안 등 미국 사회의 다양한 인종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이와 같이 미국 가톨릭교회사는 대개 이민자와 국내의 다양한 인종 등에 주목하여 미국 사회 내부의 가톨릭 역사에 대해 주목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외방 선교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흡한 실정이다.

 

10) 메리놀 외방선교회 아카이브(http://maryknollmissionarchives.org/?page_id=2766)

11) 클라우뎃 라베르디에 지음, 김선실 옮김,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나이테미디어, 2013, 11쪽.

 

12) 레이먼드 A. 레인 지음, 박준영 옮김, 《기억의 돋보기》, 성 바오로출판사, 1994, 18쪽. 번(Byrne, J. Patrick, 1888~1950) 주교의 아버지는 가톨릭 서점에서 일하였으며 아일랜드 여성과 결혼하였고, 번 주교를 비롯해 자녀들은 가톨릭 학교를 다니는 등 전형적인 아일랜드 이민자 천주교 가정이었다.

 

13) Angelyn Dries, The Missionary Movement in American Catholic History, Orbis Books, Maryknoll, NY, U.S.A., 1998, pp. 22~42. 클라우뎃 라베르디에 지음, 김선실 옮김, 앞의 책, 10쪽 ; 김봉중, 앞의 책, 269, 276쪽. 이러한 변화 속에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은 국제무대에 거리를 둔 고립주의 국가에서 국제주의 국가로 전환하였고, 중남미와 태평양을 향한 팽창을 시도해 나갔다. 1898 스페인과의 전쟁 Spanish-American War를 계기로 미국은 과거 고립주의 국가에서 국제주의 국가로 전환하였으며, 매킨리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중남미와 태평양을 향한 팽창을 시도해 나갔다.

 

14) 미국 천주교회는 이민 배척주의와 경쟁하면서 미국의 국가적 가치와 융화해 나갔다. 미-스페인 전쟁(1898)에 국가와 국기에 충성하며 매우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미국 시민으로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신부들도 군종을 자원하였다. 또한 여성 수도회는 전쟁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간호하였다. Angelyn Dries, 앞의 책, 1998, p. 64.

 

15) Dolan, Jay P, The American Catholic Experience, 1985, pp. 262~274.

Abell, Aron, American Catholicism and Social Action : A Search for Social Justice, 1865~1950, Garden City, NY : Hanover House, 1960.

 

16) Aaron Ignatius Abell, American Catholicism and Social Action - A Search for Social Justice : 1865~1950,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63. 1860년까지 가톨릭인구는 전체 인구의 3% 미만이었지만 학교, 병원, 고아원 등을 건립하는 등 사회적 활동(Social Action)의 전개와 더불어 개종자가 늘어난 것에 대한 분석은 일찍이 Edward G. Mannix, The American Convert Movement, NY, Literary Licensing LLC, 2012, pp. 12, 107~110에 의해 이루어졌다.

 

17) 레이먼드 A. 레인 지금, 박준영 옮김, 《기억의 돋보기》, 성 바오로출판사, 1994, 30~34쪽.

 

18) 전교후원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 Latin : Propagandum Fidei, Franch : oeuvre de la propagation de la foi)는 1822년 프랑스 리용에서 폴린 자리코(Pauline Jaricot, 당시 19세)에 의해 창설된 선교후원단체. 폴린은 1822년 첫 번째 상당한 후원금을 중국, 루이지애나, 그리고 켄터키에 후원했다. 전교후원회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고, 파리외방전교회와 라자리스트에게 많은 후원을 했다. 현재도 전교후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사와 관련해 전교후원회에서 조선 선교지에 보냈던 후원금을 분석한 연구인 장동하, <개항기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프랑스 교회의 재정지원 연구>, 《가톨릭 신학과 사상》 31, 2000이 있다.

 

19) Angelyn Dries, 앞의 책, 1998, pp. 71~72.

20) Angelyn Dries, 앞의 책, 1998, p. 67.

 

21) 세 명의 창립자에 관해서는 Jean-Paul Wiest, Maryknoll in China : A History, 1918~1955, Orbis Books, Maryknoll NY, 1988, pp. 11~14의 <3명의 창립자>와 메리놀 외방전교회 홈페이지의 “Maryknoll Mission Archives”의 ‘창립자 전기’ 참조.

 

22) 이 당시 미국은 선교 대상국으로 간주되었기에 전교후원회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었다. 월시 신부가 영향을 받은 이 프로테스탄트의 선교회는 매우 유명한 외방선교회인 the American Board of Christian Foreign Missions이다. Angelyn Dries, O.S.F., 앞의 책, pp. 75~76.

 

23) 앞의 주 20)과 같음.

 

24) 쉴피스 회(Society of Saint-Sulpice)는 1642년 올리에(Jean Jacques Olier, 1608~1657) 신부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정한 신학교 관련법에 부응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한 사제회이다. 쉴피스회 사제의 교육은 미국의 신학생에게 외방 선교에 대한 영향을 주었고, 쉴피스회가 운영하던 성 마리아 신학교 출신 신학생이 메리놀회에 입회하여 아시아 선교에 나섰다. 당시 성 마리아 신학교의 사제들은 해외 선교를 열렬히 지지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레이먼드 A. 레인 지음, 박준영 옮김, 《기억의 돋보기》, 성바오로출판사, 1994, 34~36쪽. 월시 주교 전기(http://maryknollmissionarchives.org/?page_id=2766)

 

25) 프라이스 신부는 선교를 위해 중요한 3가지를 결정하였는데, 첫째 잡지 간행, 둘째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천주교 신자의 삶을 진작시키기 위한 사제 양성, 셋째 너무 가난해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위한 가정이었다. 첫 번째 사항의 실천에 이어, 두 번째를 위해 1897년에 신학교를 건립하였으며, 세 번째를 위해 나자렛 고아원을 개원하여 노스캐롤라이나 벨몬트회 수녀를 초청하였다. Angelyn Dries, O.S.F., 앞의 책, p. 75. 프라이스 신부 전기(http://maryknollmissionarchives.org/?page_id=2760).

 

26) 로저스가 이끌던 여성 신자를 중심으로 한 미국 최초의 여성 외방 선교단체인 메리놀 수녀회(The Foreign Mission sisters of St. Dominic)는 조금 시간이 걸려 1920년 2월에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Jean-Paul Wiest, 앞의 책, pp. 12~13 ; Angelyn Dries, O.S.F., 앞의 책, p. 77. 마더 메리 조셉 로저스 전기(http://maryknollmissionarchives.org/?page_id=2763). 메리놀 수녀회는 1921년에 홍콩에 첫 선교 수녀를 파송하였고, 바로 뒤 이어 1924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27) Angelyn Dries, O.S.F., 앞의 책, p. 77.

 

28) 바우한 주교는 영국에 밀 힐 선교회(Mill Hill Missionaries)로 알려진 유명한 St Joseph's Foreign Missionary College를 세웠으며(1866), 미국 선교를 위해 사제단을 이끌며 가톨릭진리회(the Catholic Truth Society)를 창설하였다(1871). 이것을 다시 미국을 위한 외방선교회로 예수성심 성 요셉회로 재조직(1893)하였다. 이는 Saint Joseph's Society of the Sacred Heart, Inc., 흔히 S.S.J.로 약칭하여 the Josephite Fathers로 알려졌다. 그는 미국에 외방 선교를 위한 신학교를 시작하라고 촉구하면서 이를 위해 전국을 다니며 기금을 조성하는 등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Angelyn Dries, 앞의 책, 1998, p. 74. 각별히 각주 43) 참조.

 

29) Jean-Paul Wiest, Maryknoll in China : A History, 1918~1955, Orbis Books, Maryknoll NY, 1988, pp. 14~18. 기본스 주교는 선종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미국 천주교회 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서 외방 선교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미국 가톨릭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전환하게 한 주역이었다.

 

30) Jean-Paul Wiest, 위의 책, pp. 17~18.

 

31) 《그 먼 땅에》의 편집장 월시 총장은, “우리는 우리가 속한 미국의 교회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기도한다 - 가톨릭이 미국가톨릭 활동의 위대한 국가적 결과의 하나로써 메리놀에 신학교(건립)에 착수하는 날이 오게 되기를”라고 발표하였다. Angelyn Dries, O.S.F., 앞의 책, pp. 74~77.

 

32) 월시 주교는 특별히 파리 외방전교회 전례를 상당 부분 수용하여 메리놀 전례를 기획할 정도였다. Angelyn Dries, O.S.F., 앞의 책, p. 79.

 

33) 《그 먼 땅에》 1909년 2월호, 10쪽. <선교지 소식>에 <한국>(Korea).

 

34) 위 기사는 1878년 드게트(Deguette, Victor Marie, 1848~1889. 한국명 崔東鎭) 신부의 수감을 한국 정부의 마지막 폭력적 박해로 지적하였다.

 

35) 월시 주교가 저술한 책의 원제목은 A Modern Martyr(1905), Thoughts from Modern Martyrs(1908), For the Faith(1922), In the Homes of Martyrs(1922), Observations in the Orient(1919)이다. 베트남 통킹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버나드 성인(Saint Jean-Theophane Venard, 1829.11.21~1861.2.2)에 대한 《현대의 순교자》(A Modern Martyr)(1905), Saint Peter Chanel(1803.7.12~1841.4.28)을 그린 《퓌튀나 섬의 순교자》(The Martyr of Futuna)(1917) 등 아시아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여러 선교사에 대한 책을 출간하였다.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일화는 Walsh A. James, For The Faith,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NY, 1922(?), pp. 60~61 ; 뒬스트 주교 지음, 강진수 신부 옮김, 《성 유스토》, 가톨릭출판사, 2004, 112~113쪽. 브르트니에르 신부에 관해서는 차기진, <브르트니에르,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한국가톨릭대사전》 6권, 2004, 3738~3739쪽.

 

36) 《그 먼 땅에》 1909년 4월호, 15쪽, “《현대 선교사의 사색》이라는 책에 익숙한 우리의 독자들은 브르트르니에르 신부와 앙리 신부가 한국에 들어갔을 때를 회상할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상복(큰 모자와 헐렁한 흰 도포)을 입고 갔었다.”

 

37) James A. Walsh, Observations in the Orient,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 NY, 1919. 월시 신부가 선교지 진출을 위해 아시아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 공석은 번 신부(뒷날 초대 주한 교황사절)가 총장대리로 활동하였고, 《그 먼 땅에》의 편집장도 맡았다. 번 신부는 1916년 9월 3일 월시 신부의 비서로 임명됨과 동시에 참사위원을 맡고 있었다. 레이먼드 A. 레인 지음, 박준영 옮김, 앞의 책, 1994, 45~46쪽.

 

38) James A. Walsh, Observations in the Orient,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 NY, 1919. p. 29.

39) James A. Walsh, Observations in the Orient,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 NY, 1919. pp. 91~92.

 

40) Walsh A. James, For The Faith,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NY, 1922는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한국에 도착한 이후의 활동에 관해 책의 절반 정도의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전체 180페이지 가운데 106페이지 이후가 한국에서의 활동).

 

41)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신학교 시절일 때부터 ‘사람들이 조선에 가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고 할 정도로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은 유럽 천주교회에 알려져 있었다. 뒬스트 주교 지음, 강진수 신부 옮김, 《성 유스토》, 가톨릭출판사, 2004, 137쪽. 조선에 입국한 이후의 활동과 박해에 대해서는 145~195쪽 참조.

 

42) Walsh A. James, For The Faith,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NY, 1922, pp. 58~61.

 

43) 한국 진출 직후에는 The Catholic Church in Korea(1924)를 불어에서 영어로 번역 · 출판하였다. Jean-Paul Wiest, 앞의 책, p. 413. 한국 천주교회사는 단행본으로만이 아니라 《그 먼 땅에》의 지면을 통해서도 수시로 게재되었다. 이는 본격적으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작업이었으며, 이후 한글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꾸준히 체계화하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 먼 땅에》에 소개된 한국천주교회사의 예는 최선혜, <1940년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 《교회사연구》 47, 2015, 133~135쪽 참조.

 

44) James A. Walsh, Observations in the Orient,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 NY, 1919. pp. 26~27, 34~35, 40.

45) Jean-Paul Wiest, 앞의 책, p. 409.

46) 프랑스어로 된 선교잡지에 대해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조현범 교수가 가르침을 주었다.

47) Jean-Paul Wiest, 앞의 책, pp. 410~411.

 

48) 《드망즈 주교 일기 - 1911~1937》, 131쪽. 1915년 2월 16일, ‘오늘 도착한 《그 먼 땅에》를 통해 전쟁에 소집된 선교사들이 그의 교구 임지에서 탈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접했다.’고 하였다.

 

49) 《그 먼 땅에》, 1911년 12월호, 9쪽.

50) 드망즈 주교는 프랑스에 서신을 보내기는 했지만, 이미 과중한 부담을 안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부탁이지만 미국에 요청한다고 하였다.

51) 《그 먼 땅에》, 1912. 12월호, 11쪽.

52) Eugene Deneux(全學俊 에우제니오). 당시 5대 제물포 성당 주임, 현 답동 주교좌 본당.

53) 《그 먼 땅에》, 1914년 11월호, 5쪽.

54) 《그 먼 땅에》, 1914년 11월호, 13쪽.

 

55) 프레이져(John Mary Fraser, 1877~1962) 신부는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한 스코틀랜드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중국, 마닐라, 일본 등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캐나다에 가톨릭 선교회인 ‘스카보로 외방선교회’를 창설하였다.

(https://www.scarboromissions.ca/about-us/history/john-mary-fraser)

 

56) 《그 먼 땅에》, 1915년 2월호, 22쪽. 

57) 《그 먼 땅에》, 1914년 9월호, 12쪽.

58) 《그 먼 땅에》, 1916년 5월호, 69쪽.

59) 《그 먼 땅에》, 1916년 1월호, 6쪽.

60) 첸나이. 인도 타밀나두 주, 벵골 만 연안에 위치한 도시. 마드라스(Madras)라는 이름이었으나 1996년 첸나이로 이름을 바꿈.

61) 《그 먼 땅에》, 1916년 4월호, 54쪽.

62) 《그 먼 땅에》, 1917년 7월호, 102쪽, 104쪽, 9월호, 134쪽.

63) 《그 먼 땅에》, 1916년 5월호, 69쪽.

64) <우리의 선교사들에게>, 《그 먼 땅에》, 1916년 5월호, 69쪽.

65) <전쟁과 선교>, 《그 먼 땅에》, 1915년 2월호, 22쪽.

66) 《그 먼 땅에》, 1917년 4월호, 52쪽.

 

67) 월시 주교의 《동양관찰기》(Observations in the Orient)에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소개는 James A. Walsh, Observations in the Orient,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 NY, 1919, pp. 82~97.

 

68) 《그 먼 땅에》, 1918년 2월호, 표지 및 23~26쪽. 서울의 장승과 소년, 숭공학교 학생들의 작업하는 장면, 서울의 시장, 한국의 성당 등의 사진과 한국 천주교회를 소개하였다.

 

69) 현 선양[瀋陽]

70) 이에 비해 일본인들은 그들 조상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개종이 매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그 먼 땅에》, 1919년 1월호, 14쪽.

71) <아시아의 선교사들이 말한다>, 《그 먼 땅에》, 1919년 3월호, 51쪽.

 

72)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6, 2002, 155쪽 각주 30)에는 이때의 월시 신부를 메리놀회 제2대 총장을 역임한 James E. Walsh 신부라고 하였다. 여기의 월시 신부는 메리놀창립자로서 1대 총장으로 아시아 순방길에 올랐던 James A. Walsh 신부이다. James E. Walsh 신부는 1915년 12월 7일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3년 뒤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 광동(廣東)에서 활동하였다. 메리놀아카이브 홈페이지 월시(James E. Walsh) 신부 약전(http://maryknollmissionarchives.org/?deceased-fathers-bro=bishop-james-e-walsh-mm)과 Catholic-Hierarchy의 이력(http://www.catholic-hierarchy.org/bishop/bwalshje.html) 참고.

 

73) 앞의 주 35) 참조.

74) 페랑(Ferrand, 夫) 신부는 부산의 일본인 신자 담당 선교사였다. 《드망즈 주교 일기》, 1915년 6월 30일, 48, 56, 142쪽.

 

75) 드망즈 주교는 모금을 위한 노력으로 1920년 9월 13일 뉴욕에 도착, 메리놀회를 방문하여 며칠 간 머물렀다. 메리놀회의 신학교와 수녀원 등을 돌아보고, 《그 먼 땅에》 사무실도 방문하였다. 드망즈 주교 저,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 1911~1937》, 가톨릭출판사, 1987, 1920년 9월 13일. 381쪽, 11월 12일, 20일. 396~397쪽.

 

76) 《그 먼 땅에》, 1919년 2월호, 24쪽. 본 발표자가 메리놀회에 머무는 동안 아카이브 책임자 Ellen Pierce에게 문의하였지만 이 책의 현존본은 구할 수 없었다.

 

77) 《그 먼 땅에》, 1919년 2월호, 28쪽. 서신의 날자는 1918년 10월 27일. 프라이스 신부는 이어 일본 본국에도 선교사들은 별로 희망을 보지 못하겠다고 고백하였다. 일본인은 황제는 신성하며 모든 것은 국가 아래에 종속되어야만 한다고 배웠기에,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지 않는 한 희망은 없어 보인다고 하였다.

 

78) 《드망즈 주교 일기》, 1919년 2월 8일, 272~273쪽.

79) 《그 먼 땅에》, 1919년 6월호, 111~112쪽.

 

80) 메리놀회의 일본의 한국 통치와 천주교회의 상황에 대한 비판과 제언은 최선혜, <1940년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 《교회사연구》 47, 2015에서 조금 다루었다. 그런데 그 글은 태평양 전쟁을 전후한 시기만을 검토한 것이었다.

 

81) 대원군의 부인이며 고종 황제의 어머니 부대부인 민씨(1818~1898, 마리아)는 1896년 10월 11일 뮈텔주교의 집전으로 세례를 받았다.

82) 《그 먼 땅에》, 1919년 12월호, 168~169쪽.

 

83) 《그 먼 땅에》, 1919년 12월호, 268쪽. 회원 수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한국 국내의 인구를 참고하면 1919년 현재 총 17,731,977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만주, 일본 등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이다. 박경숙, <식민지 시기(1910년~1945년)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한국인구학》 32-2, 2009, 32쪽.

 

84) 《그 먼 땅에》, 1920년 1월호, 281쪽.

85) 《그 먼 땅에》, 1922년 12월호, 367쪽.

86) 《그 먼 땅에》, 1922년 12월호, 371쪽.

87) 위와 같음.

88) 위와 같음.

 

89) 《그 먼 땅에》, 1922년 12월호, 372쪽. “이 책은 지난 세기 영혼구원을 위해 헌신하고 기꺼이 자신의 선교지에서 고문당하고 선종한 젊은 선교사의 영감 있는 자서전이다.”는 소개가 뒤따랐다. 분량은 180쪽에 달하며 16개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교회사 연구 제49, 2016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선혜(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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