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성경자료

[인물] 성경의 세계: 요압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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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2 ㅣ No.3673

[성경의 세계] 요압 장군 (1)

 

 

요압(Joab)은 다윗의 누나인 츠루야(1역대 2,16)의 아들이다. 친동생 아비사이와 아사엘과 함께 최측근으로 활약했으며 평생 군인으로 살았다. 다윗 휘하 용사들의 구심점이었으며 다윗 말년까지 군사령관을 지냈다. 츠루야의 아들이란 말은 이들을 가리키는 성경 용어다. 숱한 전쟁에서 끝까지 다윗을 도왔으며 의리를 지켰다. 하지만 다윗이 통합 이스라엘 왕이 되자 사이가 멀어진다. 결정적 사건은 사울의 측근 아브네르를 죽인 일이다.

 

사울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을 때 아브네르는 북쪽 사령관이었다. 그는 살아남아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한다(2사무 2,9). 그리하여 다윗 군대와 맞섰다. 양쪽 진영은 예루살렘 북서쪽 기브온 못 가에서 부딪쳤지만 남쪽 승리로 끝난다. 다윗은 아브네르를 설득해 북쪽 군대를 흡수하려 했다. 하지만 요압은 속임수를 써서 아브네르를 살해해 버린다. 그런데도 다윗은 별다른 조치 없이 저주하는 선에서 끝내고 만다(2사무 3,29). 요압은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군부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이때부터 제거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무튼 다윗에게 요압은 버거웠다. 성경에도 그의 하소연이 있다. “내가 비록 왕이지만 츠루야의 아들들은 나에겐 너무 벅차오.”(2사무 3,39) 그런데도 끝까지 곁에 둔다. 군부 실세들이 저항 없이 받들고 있었기에 다윗에겐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 무렵 다윗은 통합 이스라엘 수도로 예루살렘을 지목한다. 그곳엔 여부스족이 살고 있었다. 군대를 투입해 점령에 나섰지만 난공불락이었다. 이때 요압이 예루살렘 취약점을 찾아낸다. 성 아래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있는 비밀통로를 발견한 것이다. 즉시 통로를 따라 내부로 침입했고 예루살렘 점령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요압은 다윗 다음가는 확실한 이인자가 되어 있었다.

 

다윗과 밧 세바 사건에도 요압은 관련되어 있다. 당시 밧 세바의 남편은 요압의 부하로 전쟁터에 있었다. 다윗은 그를 불러 밧 세바의 임신을 떠넘기려 했다. 하지만 아내와의 동침을 끝끝내 거절했기에 죽임을 당한다. 요압에게 밀서를 보내 전사를 명령했던 것이다. 이렇듯 요압은 다윗과 깊이 얽혀 있었고 크고 작은 전투를 책임지고 있었다. 다윗 역시 전쟁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었다. 두 명장이 있었기에 통합 이스라엘은 이민족 사이에서 순탄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2017년 4월 30일 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 ·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생명 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요압 장군 (2)

 

 

다윗의 장남 암논은 이복동생 압살롬에게 살해당한다. 그의 친누이를 겁탈했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도주했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다윗은 아들의 입장을 이해했지만 용서하길 주저했다. 중재에 나선 이가 요압이다. 과부와 두 아들의 비유로 설득한다. 두 아들이 서로 싸우다 하나가 죽자 친척들이 남은 아들을 죽이려 한다는 내용이다(2사무 14,6-17). 이후 압살롬은 돌아올 수 있었다. 요압은 다윗의 내면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압살롬은 때를 기다리다 쿠데타를 일으킨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는 처지가 된다. 반란 세력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다윗은 요압을 전면에 내세우며 반역자 토벌을 명했다. 그러면서 압살롬은 죽이지 말라 했다. 에프라임 숲에서 두 진영은 부딪친다(2사무 18,6). 반란군은 이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항복했고, 압살롬은 요압에게 살해된다. 쿠데타 세력은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요압은 해임되고 새로운 사령관으로 아마사(Amasa)가 임명된다. 그는 압살롬 군대의 사령관이었다. 반란군 병력을 포섭하기 위한 다윗의 조치였다. 그러면서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 요압에 대한 견제였다. 그의 세력이 너무 커져 있었던 것이다. 특단의 조치였다.

다윗이 노쇠해 힘을 못 쓰게 되자 요압은 아도니야를 후계자로 지지한다. 대사제 에브야타르와 함께 왕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왕위는 솔로몬에게 돌아간다. 다윗은 요압 제거를 유언으로 남겼다. ‘너는 요압이 나에게 한 행동을 알고 있다. 지혜롭게 처신하여 평안히 저승으로 가지 못하게 하라(1열왕 2,6).’ 명대로 살게 놔두지 말라는 뜻이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제거하고 대사제 에브야타르는 해임시켜 고향으로 보냈다. 그리곤 측근이었던 브나야(Benaiah)를 보내 요압을 살해하고 그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1열왕 2,35). 성경엔 짧은 기록만 있지만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군부를 장악한 인물을 쉽게 숙청할 순 없기 때문이다.

이후 요압과 같은 장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솔로몬 치세는 분명 화려했지만 군사력은 약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중앙집권 체제가 아니다. 철저하게 독립된 부족 연합체였다. 틈이 벌어지면 언제라도 대립하고 부딪치는 지파 공동체였다. 요압은 이런 상황을 군사력으로 커버해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인물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숙청되었다. 솔로몬이 죽자 북쪽 지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독립해버린다. 기원전 931년의 왕국분열이다. [2017년 5월 14일 부활 제5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요압 장군 (3)

 

 

구약에선 아들 이름을 말할 때 대개 아버지 이름을 먼저 내세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 눈의 아들 여호수아, 이런 식이다. 그런데 요압에겐 어머니 이름이 등장한다. 츠루야의 아들이란 표현이다. 츠루야(Zeruiah)는 역대기에서 다윗의 누나로 소개되어 있다(1역대 2,16). 요압 장군은 다윗의 조카인 셈이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 이름을 내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엔 츠루야가 나하스(Nahash)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2사무 17,25). 다윗을 낳은 이사이(Yishay)의 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사이는 두 번 혼인했다. 두 번째 혼인에서 아내로 맞이한 여인이 츠루야의 어머니다. 그녀 역시 재혼이었다. 전 남편 나하스 사이에서 태어난 츠루야를 데리고 재혼했던 것이다. 따라서 츠루야는 다윗의 누나이지만 아버지가 다른 누나였다. 훗날 츠루야는 혼인해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요압이었다(2사무 2,18). 츠루야의 남편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다. 베들레헴에 묻혔다는 사실만 언급되어 있다(2사무 2,32). 요압은 다윗과 나이가 비슷했다. 츠루야는 다윗보다 훨씬 연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츠루야가 낳은 세 아들(요압과 아비사이와 아사엘)은 평생 전쟁터를 누볐고 다윗군대의 뛰어난 장수들이었다. 그런데 막내 아사엘이 제일 먼저 죽는다. 사울군대와 다윗군대가 맞붙은 기브온 전투에서 적장 아브네르를 추격하다 그의 창에 찔려 죽은 것이다(2사무 2,23). 아브네르는 사울군대 사령관이었다. 동생의 죽음을 요압은 잊지 않았다. 승리한 다윗은 화해 차원에서 아브네르를 기용하려 했다. 하지만 요압은 속임수를 써 그를 살해해 버린다(2사무 3,27). 이렇듯 츠루야의 아들들은 용감하고 거칠면서 한 가닥 하는 성격들이었다.

 

요압형제는 다윗의 측근이었다. 집권 초기에는 힘을 실어주는 확실한 세력이었다. 하지만 차츰 짐이 되어갔다. 사건을 만들어 왕을 힘들게 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한다. 통제가 힘든 인물로 떠올랐다는 기록이다. 말년의 다윗은 요압 제거를 유언으로 남긴다. 그로선 만감이 교차되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솔로몬은 즉위하자 왕명으로 요압을 처단한다. 사약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 시대의 영웅은 조용히 사라졌다. 한때 기세등등했던 명문 츠루야 가문의 몰락이기도 했다. [2017년 5월 21일 부활 제6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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