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강론자료

요한복음 20,1-9 빈 무덤 (2017. 4. 16. 예수 부활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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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4-12 ㅣ No.217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날이 아직 어두웠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으로 가서 입구를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가 사랑한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알렸다.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냈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갔다. 둘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서 아마포를 보았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 와서 곧바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의 머리를 감쌌던 천은 아마포와 함께 펼쳐져 있지 않고 따로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랐던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는 보고 믿었다. (그들은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야 한다고 성서에 기록된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날로서 지금의 일요일에 해당한다. 새로운 창조사업이 시작됨을 상징한다.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로 탄생됨으로써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일차적 목적이 완성된다.(창세기 2:1) 그 다음에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더불어 세상에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제 2의 창조사업을 펼치신다. ‘날이 아직 어둡다.’라는 상황 설정은 제자들이 아직 영적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였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때는 매우 임박해 있다.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은 육정의 집착을 상징한다.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은 예수가 참된 돌(베드로)인 성령의 힘으로 죽음을 이기고 하늘과 땅을 서로 소통시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살아계신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아는 왜 무덤으로 갔을까? 예수를 잃은 것이 섭섭하여 그 시신이라도 보기 위해서이다. 예수는 그녀를 이끌어주는 주님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엇이 그녀를 이끌어 왔는가? 그녀는 그것이 바로 성령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육정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깨달음을 막는 장벽이다. 집착과 두려움은 같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누군가’, ‘그들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박탈감에 대하여 타인을 탓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서 예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른 제자는 앞서 예수가 사랑한 제자(13:23)’로 언급된 복음 저자 요한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 장면에서 마리아, 요한, 베드로는 각각 망덕, 애덕, 신덕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마리아는 제일 먼저예수의 무덤을 찾는다. 비록 육정이 눈을 가리고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진리를 계속 갈망하고 있다. 그녀는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당황한다. 이것은 다른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요한은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에 빨리예수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무덤 안을 들여다본다. 요한에게 아마포만 보인 것은 예수의 시신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매우 이상한 사태이다. 베드로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시신을 감았던 아마포가 바닥에 펼쳐져 있는 것은 예수가 더 이상 시신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머리를 감쌌던 천이 따로 개켜져 있는 것은 예수가 살아있음을 상징한다. ‘머리는 자아의 정체성 또는 영적 자아를 상징한다.

 

마리아는 열린 무덤을 제일 먼저 보았고 요한은 무덤에 제일 먼저 다다랐지만 베드로는 무덤으로 제일 먼저 들어간다. 베드로는 예수를 믿고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자아의 내면으로 뛰어든다. 이것은 육정의 유혹을 물리치면서 자신을 통째로 否定하는 일이다. 거기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닫고 그때에야 비로소 예수가 살아있는 주님임을 믿는다. 그는 예수의 시신을 보는 대신에 성령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예수를 본 것이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앞장서서 행동으로 믿음을 실천함으로써 지도자의 모범을 보인다. 요한도 베드로를 따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고믿었다. 요한은 베드로의 말을 전해 듣고 믿은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믿은 것이다.

 

시신이 사라진 것은 누군가가 시신을 치웠기 때문이라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추리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오히려 예수의 부활에 대한 두 제자의 믿음은 상식에서 벗어난다. 두 제자의 믿음은 이성적 추리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활로부터 온 깨달음이다. , 두 제자는 무덤으로 투신하여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부활하였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은 것이다. 믿음은 이성보다 높은 차원의 지혜이다. 이성은 눈에 보이는 사건에 머무는데 비해 믿음은 보이지 않는 신적인 사건으로 도약한다.

 

성서에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야 한다고 딱 부러지게 말한 구절은 없다. 시편이나 이사야서 등에 메시아가 죽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들은 많이 있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하여는 논쟁적인 요소가 있다. 복음 저자는 성서를 근거로 논쟁을 벌이자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의도는 다른 데에 있다. 성서가 기록된 것은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백성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라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죽을 운명에 맡겨 두실 리는 없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메시아와 그를 믿는 이들이 죽음에서 일어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성서는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책이다. 그러나 영적 깨달음에 입각하여 성서를 해석해야만 비로소 그 의미가 밝혀질 것이다. 제자들도 죽음의 허상을 뚫고 영적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성서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은 자아를 상징한다.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것은 자아의 내적 어두움을 탐색하기 시작하였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자아의 내면으로 뛰어들어 그곳에서 설치는 죽음의 세력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이때 자아의 내면은 죽은 사람의 무덤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으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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