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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39: 배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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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07 ㅣ No.437

[추기경 정진석] (39) 배티성지


잊힌 순교자의 땅 배티성지 살리기 박차

 

 

- 복원된 옛 성당. 가톨릭평화신문 DB.

 

 

전임 교구장이었던 파디 주교가 초창기 청주교구의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면 한국인인 정진석 주교는 기반을 다지는 데서 나아가 교구의 순교자들에게 애정을 쏟아부었다. 메리놀회 신부들은 전교에 전념하느라 순교자 영성까지 관심을 쏟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을 알고 있던 정 주교는 교구장에 임명되자 교구 내 순교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구교우 집안에서 자라난 정 주교가 순교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신앙은 전수되어 내려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정 주교는 신자들에게 특히 순교자들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마침 교구의 이중건 신부가 정 주교를 찾아왔다. 군종 신부였던 그는 배티성지 출신이었다. 정 주교가 어린 시절부터 존경했던 사제 윤형중 신부의 저서 「은화」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배티성지였다. 정 주교에게는 괜스레 친근함이 드는 곳이었다. 

 

군종에서 사목하다가 제대를 한 이중건 신부가 불쑥 정 주교에게 말했다.

 

“주교님! 저희 고향에 순교자들과 연관된 곳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그곳에 한번 같이 가볼까?”

 

배티성지 잔디광장에 건립된 최양업 신부 동상. 가톨릭평화신문 DB.

 

 

이전부터 궁금했던 곳이었기에 단번에 이 신부가 운전하는 지프에 몸을 실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산 중이라 길이 사라져버렸다. 이 신부와 정 주교는 차에서 내려 더듬더듬 산비탈을 올라갔다. 곧이어 이 신부와 약속을 한 공소 회장이 나타났다. 그는 익숙한 듯 정 주교 일행을 안내하더니 이내 한 묘지 앞에 다다랐다. 

 

“주교님! 이것이 순교자 묘입니다.” 

 

정 주교는 깜짝 놀랐다. 묘가 어찌나 오래 방치됐던지 묘 옆에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정 주교는 선조들에게 면목이 없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후 장봉훈(현 청주교구장 주교)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진천본당 보좌로 임명됐다. 두 달 동안 보좌 생활을 하던 장 신부는 주임 신부가 떠나면서 진천본당 주임이 됐다. 정 주교는 장 신부에게 신신당부했다. 

 

“이 근방이 성지니까 성지 개발에 관심을 가져줘. 우리 교회에 매우 귀중한 곳이야.” 

 

장 신부는 정 주교의 애정에 버금가는 열성으로 성지 지키기에 나섰다. 그는 최양업 신부에 대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인 최석우 신부를 한달음에 찾아가 최양업 신부에 관한 자료를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러한 장 신부의 열성 덕분에 그동안 찾지 못했던 최양업 신부의 편지들까지 발견하는 큰 소득이 있었다.

 

1981년 9월 배티성지 순교자 현양대회 미사에서 강론하는 정진석 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그런데 새로운 문제에 부닥쳤다. 라틴어 편지 원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어찌하다 보니 정 주교가 그 번역을 맡게 됐다. 정 주교는 뜻밖의 일이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최양업 신부의 편지를 번역했다. 임충신 신부의 의역본을 참고해 번역할 수 있었다. 

 

탁덕 최양업 신부의 편지를 번역하면서 정 주교는 글의 첫 장에서부터 푹 빠져버렸다. 최양업 신부의 라틴어 문장은 그 구조나 표현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글씨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번역하고 싶은 마음에 정 주교는 일상 업무 시간을 피해 틈틈이 작업했다. 이른 아침이나 업무 이후 잠깐 짬이 나는 낮 시간, 그리고 퇴근 이후인 저녁에 번역 작업을 이어갔다. 한 글자 한 글자 번역하다 보면 어느새 정 주교 자신이 그 시대와 그 상황에 가 있는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날은 자꾸만 더워져 갔다. 당시엔 에어컨도 없었고 선풍기도 잘 틀지 않았던 정 주교는 땀을 뚝뚝 흘리며 작업에 몰두했다. 낮에는 땀이 흘러 원고지 종이가 손에 들러붙기 일쑤였다. 정 주교는 고육지책으로 새벽 3시에 일어나 번역에 매진했다. 어떤 날은 술술 번역이 잘 됐고 어떤 날은 단어 하나를 어떤 한국어로 번역할까 고민하다가 동이 튼 적도 있었다. 단순히 단어를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저자의 의도와 시대 상황, 역사와 풍속 등 모든 것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만 좋은 번역이 나온다는 생각에 당시 시대상을 공부하고자 꾸준히 노력했다.

 

또한 그는 국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국어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좋은 번역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전을 뒤적이며 조금이라도 정확한 단어와 바른 어법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아름다운 문장을 쓴 최양업 신부에 대한 후손의 최대한의 예우라는 생각에서였다.

 

번역한 원고는 가장 먼저 최석우 신부에게 감수를 부탁했다. 그랬더니 얼마 후 김대건 신부의 원고 번역도 부탁한다는 전갈이 왔다. 선배 신부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정 주교는 그렇게 김대건 신부의 편지 번역도 이어가게 됐다. 그렇게 정 주교는 번역자로서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났다. 정 주교는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믿었다. 이후 이 번역물들은 책으로 출판됐고, 많은 이들이 두 신부의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됐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장봉훈 신부 조상이 최양업 신부의 복사였다고 한다. 그런 사연이 있던 장 신부는 자료 수집에도 큰 열성을 보였고 많은 결과를 냈다. 그런 도움으로 정 주교는 드디어 배티성지의 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신앙 선조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청주교구는 유서 깊은 배티성지 성역화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사제 서품 150주년을 맞은 1999년에는 양업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신앙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현양 활동과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장봉훈 신부가 성지담당 사제로 사목하는 동안 주교로 부르심을 받았다. 정 주교는 최양업 신부 현양 사업에 앞장섰던 장 주교를 최양업 신부가 지켜주셨을 것으로 생각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5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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