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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하느님을 만나서 무엇을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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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16 ㅣ No.882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하느님을 만나서 무엇을 하시나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느님께 전달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 동안 기도 생활 열심히 하셨습니까? 아니, 하느님을 잘 만나셨습니까?

 

지난 시간에 우리는 ‘기도’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 만남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기도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아보았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이해하더라도 우리의 궁금증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럼 하느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는 물음에서부터, 하느님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는지, 하느님과 만나서 뭘 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 묻게 됩니다. 과연 하느님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요?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참 많습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일들이 있지요.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앞으로 차근차근 말씀을 드리겠지만, 오늘은 먼저 ‘대화’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인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의 기본은 바로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다’라는 말은 이제는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처럼 기도를 대화의 차원으로 풀어 설명하는 것을 마뜩지 않아 하시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기도가 대화라는 것은 참 맞는 말이다 싶습니다. 대화 없는 만남이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이는 우리들 사이의 만남에 대해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함께 사는 가족을 만나게 되죠. 멀리 외떨어진 곳에서 홀로 은수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자신만의 개인적인 공간을 벗어나게 되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집 문을 열고 나서면 만나게 되는 이웃들, 직장 동료, 학교 친구, 같은 쁘레시디움 단원들, 또 그 외에 식당에서,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등등.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만남이 어떻습니까? 다 똑같은 만남일까요?

 

어떤 사람과의 만남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가족이어도 좋고 이웃이어도 좋고 직장 동료여도 좋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마음이 어떻습니까? 반갑고 기쁜 마음이 드시나요? 아니면 반대로 불편하고 싫은 마음이십니까? 어쩌면, 버스에서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함께 있게 된 사람이라면 별다른 마음이 생기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접하게 되는 만남은 굉장히 많지만, 만나는 대상이 누구인지 또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만남의 내용과 질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정말 기쁘고 반가운 만남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함께 있어서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라면 그 안에서 우리는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잘 시작했느냐는 인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정말 다양한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요. 왜 그럴까요? 물론 이에 대한 답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만남 안에서 대화를 하게 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또 상대방을 ‘알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둘 사이의 참된 ‘만남’은 그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고 그럼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가 더 깊어질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소통의 부재’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거창하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할 필요도 없지요. 잠시만 고개를 들어보면,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자신의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식당이나 찻집에 들어가 보면,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으면서도 제각각 스마트폰을 들고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대화가 만남의 전부는 아닙니다. 서로 아무런 말없이 있더라도 그 눈빛만으로 또 함께 있는 느낌만으로도 좋은 만남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그 만남의 첫 시작부터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서로의 눈빛, 몸짓만으로도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을 알고 편히 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훨씬 더 많은 대화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기도 생활 곧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중에서 가장 기본은 바로 대화입니다.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알아듣게 되고 또 우리의 마음과 생각도 하느님께 알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도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이요 대화’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고해성사 안에서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지 못했습니다’라는 죄 고백을 많이 듣습니다.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지 못한 것. 이것이 왜 죄가 될까요? ‘죄’에 대해서도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먼저 조금 말씀드리면, 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거나 혹은 하지 않은 어떤 행위 자체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들로 인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지요.

 

기도 생활. 구체적인 형식으로 정해진 기도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 생활을 잘 못했다는 것은 일상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않았고 또 하느님과 이야기 나누지 않았다는 의미이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시고 또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데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 또 대화하지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루 종일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공부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다들 각자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고 또 거실에 앉아서도 TV만 보거나 스마트폰만 하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 드세요? 많이 서운하고 속상하실 겁니다. 한 공간에 함께 있더라도 참다운 만남의 모습은 아니죠. 하느님의 마음도 이와 같으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당신께 말을 건네기를, 또 당신 말씀을 알아듣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아가 2,10)

 

하느님과 이야기 나눌 준비, 다 되셨나요?

 

*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월 15일,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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