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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2: 만남과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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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04 ㅣ No.791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2) 만남과 충돌


전통 경시와 문화적 몰이해로 ‘중국 선교 금지’ 당해

 

 

- 중국 북경 남당 입구에 서 있는 마태오 리치 신부상. 리길재 기자.

 

 

선교는 만남과 충돌의 역사다. 

 

‘예수님이 구세주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복음 선포는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제시했다. 동시에 선교는 종교와 문명, 문화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서로 다른 종교ㆍ문화ㆍ정치ㆍ사상적 배경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 충돌은 박해와 전쟁이라는 극단적 행동으로 표현됐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역시 선교사로서 만남과 충돌의 양날 검을 차고 동방에 왔다. 

 

19세기 초ㆍ중반 중국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 새로운 혼돈은 외세에 의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 혼돈을 야기한 주인공들이었다. 

 

서양 국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는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최대한의 부를 중국에서 획득했다. 서양인들은 차, 도자기, 비단 등을 수입하면서 상품 대금으로 은 대신 아편을 냈다. 아편 흡입이 중국 사회에 관행처럼 퍼졌다. 가난한 하층민은 고된 노동과 배고픔의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을 흡입했다. 만주족 관리와 환관들은 궁중 안에서, 부녀자들은 집 안에서, 반란군과 대치한 군인들은 막사 안에서 무료함과 두려움을 잊기 위해 아편을 가까이했다. 영국이 1820년대 중국에 공급한 아편량은 100만 명을 중독시키고도 남았다. 중국 전체가 아편굴이 됐다. 청 조정은 아편을 뿌리 뽑기 위해 법으로 금하고 모든 아편 흡연자를 처벌했다. 이에 영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은 무력으로 대응했다.

 

만주족이 통치하는 청에 대한 중국 내부의 반란도 18세기 후반부터 빈번하게 일어났다. 19세기 중반까지 네 차례 큰 내란이 일어났다. 이슬람 세력이 일으킨 두 번의 독립 전쟁은 곧 소멸했다. 하지만 태평천국(太平天國)과 염군(捻軍)의 난은 청 왕조를 전복시킬 만큼 파급이 컸다. 태평천국은 그리스도교와 평등주의에 근거해 유교 전통을 기반으로 한 정치 및 사회의 핵심 가지를 뒤흔들었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백련교(白蓮敎)의 비밀결사단인 염군은 게릴라 전술을 통해 국가를 위협에 빠뜨렸다.

 

그리스도교 선교사에 대한 중국인의 반감도 어느 때보다 컸다.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서양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은 우호적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선교사가 중국에 진출했다. 예수회는 명나라 말기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청나라 제3대 황제인 순치제(1638~1661)는 예수회 벨 신부를 ‘할아버지’라 부르며 정치와 종교 문제를 다루는 어전 회의에 그를 정기적으로 초빙했다. 아담 샬 신부는 1652년 자금성 인근에 마태오 리치 신부가 지은 소성당을 유럽풍으로 확장했다. 또 마갈하에스 신부와 부글리오 신부는 순치제가 하사한 땅에 1655년 동당을 지었다. 

 

제4대 황제 강희제(1654~1722)는 오보이(보정대신으로 강희제 초기에 잠시 집정) 섭정을 물리친 후 궁중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호의적으로 대했다. 강희제는 가톨릭 선교사들을 흠천관 책임자로 임명했고, 지도 작성과 공학 문제에 대한 자문역을 맡겼다. 또 북경을 비롯한 각 성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강희제는 또 1692년 가톨릭에 대한 관용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으로 예수회는 10년간 중국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 청나라 사람들은 아편을 퍼뜨린 서양인들에 대한 반감의 표시로 가톨릭 선교사들을 박해했다. 가톨릭평화신문 자료사진.

 

 

하지만 중국인의 조상 제사와 공자에 대한 존경이 선교의 걸림돌이 됐다. 마태오 리치 신부의 적응주의 노선을 따르지 않던 같은 예수회 출신 롱고바르디 신부가 중국인들의 예제(禮祭) 문제를 공론화했다. 롱고바르디 신부는 조상 제사와 공자 존경이 우상 숭배라고 했다. 이 논쟁은 중국에서 100년간 계속됐다. 클레멘스 11세 교황은 1715년 중국 교회에 조상 제사와 공자 존경을 금지했다. 조상 위패 앞에 향을 피우며 음식과 술을 차려 놓고 절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했다. 베네딕토 14세 교황도 1742년 7월 칙서를 통해 중국의 모든 선교사에게 조상과 공자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하는 데 서약하도록 했다. 

 

중국인들은 예제 문제에 대한 서양 선교사들의 태도와 선교 활동에 대해 자신들의 풍속과 전통을 존중하지 않고 문화와 사상을 멸시한다고 여겼다. 또 선교사들이 신분제 철폐, 평등, 독신 등을 주장하면서 중국 법을 위반하고 사회 질서를 혼란시킨다고 봤다. 그래서 강희제는 조상 제사와 공자 존경은 종교 의식이라기보다 백성이면 누구나 따라야 할 의무이므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이들도 이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강희제는 이를 따르겠다고 서명하지 않은 선교사 모두를 추방했다.

 

이 문제로 청 조정은 18세기 초부터 유럽 선교사들의 중국 내 선교를 금지했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황위에 오른 옹정제(1678~1735)는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이후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중국 당국의 박해는 지속하고 있다. 가경제에 이어 1820년 황위에 오른 도광제(1782~1850)는 즉위 다음 해인 1821년 청 왕조의 대법전인 ‘대청율례’(大淸律例)에 가톨릭을 금지하는 조항을 넣었다. 이 법에 따르면 만주족 기인(旗人)은 청나라의 건국 공신이었지만 천주교를 학습하면 교수형에 처했다. 또 가톨릭을 배교하지 않으면 신분을 낮추어 신강성 액노특(額魯特, 몽골족 가운데 하나)의 노비로 보냈다. 그리고 서양인의 토지 구매를 불허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사로서 중국을 여행할 1830년대 당시 서양 선교사에 대한 중국인의 반감은 폭발 직전이었다. 중국인들은 아편을 자신들에게 퍼뜨린 서양 세력 특히 영국인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가톨릭 교회를 박해했다. 도광제는 1827년 북당을 몰수해 선교사가 거주하지 못 하도록 헐어버렸다. 북당을 지은 지 134년 만의 일이다. 

 

이처럼 중국에서의 가톨릭 교회 박해는 선교사와 중국인 모두가 상대의 문화와 그 문화의 지향점에 대한 몰이해로 촉발됐다. 무엇보다 중국 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편향적이고 일방적인 인식이 화를 자초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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