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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27: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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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04 ㅣ No.416

[추기경 정진석] (27)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큰 어른 노기남 대주교가 쓸쓸히 명동을 떠나고…

 

 

- 1967년께 학교를 방문한 노기남 대주교와 함께한 정진석 신부(오른쪽).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교구청으로 밀려드는 채권자들은 기본적인 예의도 없었다.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고 멱살잡이를 했다. 이날따라 더욱 흥분한 채권자들은 눈에 띄는 물건이 보이면 냅다 걷어차고 주먹질을 했다. 평생을 모은 피 같은 돈을 잃어버리게 생겼으니 화난 이들의 심정은 이해할 만도 했다. 그러나 빚쟁이들 대부분이 신자였기에 돈 앞에서 믿음도, 예의도, 신앙도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빚쟁이들의 주먹이 날아왔지만 정진석 신부는 분풀이하라는 심정으로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멱살을 잡으면 멱살을 잡히고, 발길질하면 발길질을 그대로 받았다.

 

‘퍽’ 

 

“아이고!” 

 

로만 칼라를 하고 가톨릭 사제로서 최대한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매질에는 장사가 없었다. 심하게 발길질을 당하면 바닥에 뒹굴며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다. 참으려고 해도 입에서 울컥 터져 나오는 앓는 소리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신체적인 고통은 물론 심한 모욕감은 참기가 어려웠다. 도망칠 수도 없는 마당이니 정진석 신부는 그냥 참는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매 맞고 욕설을 들으셨을 때도 이러셨을까….’ 주님도 이런 고통을 당하셨으니 이 악물고 참으려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까만 수단이 흙먼지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한참 욕설이나 손찌검을 한 후에도 분이 안 풀린 듯 집기를 때려 부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어디 내일 또 두고 보자!” 

 

그렇게 한참 홍역을 치르고 나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잠이 오지 않고, 몸도 여기저기 아팠다. 무엇보다 날이 밝아 다음날이 오는 것이 또 걱정이었다. 다음날도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채권자들이 몰려들어 행패를 부렸다. 정진석 신부는 똑같이 그들에게 당해야 했다. 이런 시간이 한 달 가까이 지속됐다. 정 신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자신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다.

 

- 1966년께 서울대교구 신부들과 구호품을 싣고 춘천에 있는 보육원인 천혜원을 방문한 정진석 신부(오른쪽에서 두 번째). 정 신부는 당시 서울대교구 상서국장 겸 노기남 대주교 비서였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교황청에 사의 표명

 

당시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는 1966년 2월 교황청과 비밀리에 1차로 이 문제를 협의하고 사의를 표명한 상태였다. 노 대주교는 교황대사에게 중대 결심을 피력하고 1967년 2월 말께 사표를 제출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앉아 있는 것이 사태 수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 대주교로서는 어려운 뒷수습을 후배에게 떠맡기는 것이 가장 큰 부담이었다. 자신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을 끌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좋아질 가능성 없이 악화일로에 빠졌고, 노 대주교는 개인적인 생각보다는 공적인 판단으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노 대주교가 사임을 표하고 한 달 뒤인 3월 24일 교황청은 이를 수락한다고 통보해 왔다. 그러나 이때는 교회가 1년 중 가장 바쁜 부활절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노 대주교는 교황대사와 후임자인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 등과 의논해 자신의 은퇴 사실을 당분간 공표하지 않기로 했다. 

 

노 대주교는 부활절 행사를 치르는 틈틈이 은퇴 메시지를 준비했다. 메시지는 교구 신부들에게 보내는 것, 신자들에게 보내는 것, 그리고 국민에게 보내는 것 등 세 가지였다. 이를 비서인 정진석 신부에게 은밀히 인쇄하도록 지시해 놓고 부활 대축일이 끝나면 발표할 준비를 했다. 교구청이나 명동대성당 사제들도 이에 대해 들은 바가 없어 전혀 알지 못했다. 노 대주교가 옷가지를 챙기는 것을 보면서도 주교가 며칠간 부활 휴가를 떠난다고만 생각했다.

 

1967년 3월 27일 노기남 대주교는 교구장직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공직을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그리고 은퇴 후 머물 곳으로 나환자 정착촌인 경기 의왕의 성 라자로 마을을 택했다. 노 대주교로서는 사제 수품 37주년, 주교 수품 25주년이 되는 해에 은퇴를 맞게 됐다. 당시 노 대주교의 나이는 만 65세였다. 1942년 1월 18일 한국인 최초 주교로 서임돼 서울교구장에 취임한 이래 25년간 한국 교회를 대표해온 노 대주교는 그렇게 돌연 사퇴했다. 당시로서는 사람들이 근처에 가기조차 꺼리는 나환자촌으로 은퇴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었다. 

 

노 대주교는 길을 떠나면서 정진석 신부를 불렀다.

 

“정 신부! 잘 부탁해.”

 

짧은 인사와 함께 멀어져 가는 노 대주교를 바라보자니 정진석 신부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렇게 오래 머물고 계셨던, 고향과 같은 명동을 떠나면서도 제대로 된 환송식 하나 받지 못하고 떠나는 슬픈 현실 때문이었다. 고생만 하고 떠나는 어르신이 못내 안쓰러웠다.

 

나중에서야 이 소식을 알고 채권자들이 교구청에 몰려들었다. 군중 속에는 카메라를 든 기자도 다수 있었다. 상서국장인 정진석 신부가 나서야 했다. 기자들에게 공식적으로 노 대주교의 은퇴 소식을 알렸다.  

 

“교황 요한 23세는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의 사임을 허락하셨고….”

 

“사임의 이유가 뭡니까?”

 

“건강상의 이유도 있으며…,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정진석 신부의 발표에 기자들은 영 마뜩잖은 듯한 눈치였다. 그저 이 상황에 대해 코웃음만 치는 것 같았다.

 

 

명동대성당에 도착한 윤공희 주교

 

노 대주교의 후임으로 수원교구장이던 윤공희 주교가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았다. 윤공희 주교는 노 대주교가 떠난 당일 오후 명동대성당에 도착했다. 윤 주교는 조심스럽게 정진석 신부를 불렀다. 

 

“정 신부, 교회법상 내가 취임식을 해야 해. 그리고 교황대사관에서도 오신다고 해.” 

 

정진석 신부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 말씀이 참사회를 소집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부랴부랴 교구 참사회를 소집해야 했다. 당시 명동대성당에는 매일 저녁 6시에 미사가 있었다. 그래서 정 신부는 6시에 맞춰 참사위원들을 소집했다. 

 

저녁이 되자 급하게 소식을 들은 참사위원들이 명동대성당으로 모였다. 참사위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제대 뒤편 좌석에 자리를 잡자 정진석 신부는 윤 주교를 모시고 들어갔다. 

 

“노 대주교님의 후임으로 오신 교구장 윤공희 주교님입니다. 여기에서 윤 주교님의 취임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정진석 신부의 말에 참사위원들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많은 참사위원이 새 교구장의 임명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정진석 신부는 교황청에서 온 임명장을 그 자리에서 번역해 한국어로 소리 내어 읽었다. 노 대주교의 은퇴 당시 로마에서 새 교구장 임명장을 우선 전보로 보낸 것이었다. 임명장 내용을 듣던 참사위원들은 이내 이 자리가 새 교구장의 취임식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네”라고 대답했다. 새 교구장의 취임은 그렇게 이뤄졌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4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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