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9-10: 제4차 귀국 여행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24 ㅣ No.1582

[다시보는 최양업 신부] (9) 제4차 귀국 여행 (상)


고군산도까지 갔으나 고국 땅은 밟지도 못하고

 

 

최양업 부제는 1846년 12월 말 제3차 변문을 통한 귀국 여행을 실패한 후 이듬해 홍콩으로 가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생활했다. 그는 이곳에서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 글로 작성해 보내온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파리외방전교회 르그레즈와 신부의 교정을 거쳐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져 시복 자료로 활용됐다. 

 

“지금은 지루하고 긴 여행을 한 후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홍콩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하루하루 프랑스 함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함선을 타고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명하신 대로 조선에 상륙하는 길을 다시 찾아보려 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번만은 다행히 성공하여 지극히 가난한 우리 포교지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홍콩에서 1847년 4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편지에서처럼 최 부제가 기다리던 프랑스 함선은 라 피에르 대령이 함장인 라 글로와르 호와 리고 드 즈누이 소령이 지휘하는 라 빅토리외즈 호였다. 두 함선은 중국ㆍ인도 주재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제독의 명령에 따라 코친차이나(지금의 베트남) 감옥에 억류된 가톨릭 선교사들을 구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그해 4월 15일 다낭에서 전투를 벌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두 함선은 중국 광동성 광주에서 정비를 마친 후 세실 함장이 1846년 6월 1일 자로 1838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참수한 것에 대해 조선 조정에 보낸 항의 서한에 대한 답을 받아내려고 조선 원정길에 오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 본 목적은 코친차이나 침공과 마찬가지로 통상 조약을 체결해 경제적 외교적 이득을 취하는 데 있었다.

 

최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1847년 7월 30일 이 함대에 승선해 귀국 길에 올랐다. 라 글로와르 호에는 장교 21명, 수병 406명이, 라 빅토리외즈 호에는 장교 8명, 수병 125명이 승선했다. 수병 대다수가 전투 경험이 있는 정예 함대였다. 최 부제는 1차 귀국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통역사 역할을 했다.

 

- 1858년 새로 건조한 프랑스 함선 라 글로와르 호. 아마도 신치도에 좌초된 라 글로와르 호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둘을 태운 프랑스 함대는 중국 광동성 광주 황포(黃浦)를 출발해 주강(珠江) 입구인 호문을 지나 조선 근해까지 순조롭게 항해했다. 8월 9일 제주도 해상을 지나 다음 날 아침 일찍, 서양인 가운데 그 누구도 탐사한 적이 없는 고군산도 인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때 두       함선은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가는 포구에서 심한 돌풍을 만나 파도에 휩쓸려 모래톱에 좌초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날까지 바닷물이 거의 빠지지 않자 좌초된 두 함선은 곧 파선하고 말았다. 

 

라 글로와르 호 함장인 라 피에르 대령은 8월 12일 아침, 모든 수병에게 하선해 ‘북쪽 또는 북서쪽 2마일(약 3.2㎞) 지점에 있는 섬’으로 철수할 것을 명했다. 철수 과정은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하역 중대가 구성돼 가장 먼저 대포를 비롯한 무기류와 탄약 그리고 환자와 어린 수병들이 섬으로 옮겨졌다. 초병들이 수량이 많은 물줄기를 찾아내자 다음으로 식량과 남은 인원들 모두가 상륙했다. 철수 과정에서 승선자 562명 중 최 부제를 비롯한 560명은 무사했으나 수병 2명은 거친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고 말았다. 이 과정을 조선 수병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고군산진 요망감관((瞭望監官-관측병) 윤승규는 프랑스 함대의 좌초 사실을 유진장(留陣將) 조경순에게 즉각 보고했고, 조경순은 다시 전라감사 홍희석에게 알렸다. 그런 후 즉각 군사를 이끌고 함께 배를 타고 좌초된 함선을 조사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의 야영지를 주시했다. 

 

전라감사 홍희석은 바로 헌종에게 장계를 올렸으나 프랑스 함대가 좌초된 지 9일이 지난 8월 18일에서야 처음으로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됐다. 홍희석의 장계에는 “부안 화도(현 부안군 계화리) 뒷바다의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개펄의 해초 언덕)에 프랑스 함대가 표착했고, 두 함선이 좌초한 신치 풀두렁에서 10리쯤 되는 신치산 아래 남쪽 기슭에 혹은 신치산 아래 모래사장에 프랑스 해군이 상륙해 야영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 라 빅토리외즈 호 함장 리고 드 즈누이 소령. 훗날 제독이 되어 코친차이나를 점령해 베트남을 프랑스 식민지로 만든 인물이다.

 

 

라 피에르 함장은 8월 13일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조선 수군에게 서한을 통해 ‘1846년 세실이 조선 조정에 보낸 서한의 답을 받기 바란다’는 뜻을 전달하고, 식량과 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라감사는 이 요청을 다시 조정에 보고한 후 물과 식량, 배 등 필요한 물품을 프랑스 야영지에 공급했다. 또 만경현령, 부안 겸 고부군수, 위도첨사, 여산부사, 익산군수 등을 차사원(差使員, 관찰사가 중요한 임무를 지어 파견하는 관원)과 문정관(問情官, 외국 배가 들어오면 그 사정을 알아보는 임시 관리)으로 임명해 동정을 살피도록 하고, 우수사와 연해 각 읍과 진에 관문을 보내 경계토록 했다.

 

조정은 라 피에르 함장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것은 그들이 표류인이 아니라 잠입자였기 때문에 정당하다. 우리는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설사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처벌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회문(回文)을 보냈다. 조선 조정이 서양 함선과 처음으로 주고받은 외교 문서였다. 최양업 부제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직접 관여했을 것이다. 통역사였던 최 부제는 라 피에르 함장이 조선 조정에 보낸 한문 서한을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라 피에르 함장은 조선 조정의 답을 전달받지 못했다. 조정의 회문이 신치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프랑스 군인들은 철수하고 없었다.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장) 박사는 최양업 신부 편지, 라 피에르 함장 보고서와 홍희석의 장계, 일성록, 헌종실록 등을 근거로 프랑스 함대의 좌초 지점과 야영지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차 박사는 2013년 11월 전주교구가 주관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프랑스 함선 좌초 지점은 북위 35도 79분, 동경 126도 50분 인근(현 신시도 33센터 배수갑문 안쪽 인근)이며 야영지는 북위 35도 81분, 동경 126도 48분 인근(신시전망대 광장 일원)이라고 밝혔다. [평화신문, 2016년 9월 25일, 리길재 기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0) 제4차 귀국 여행(하)

 

신치도에서 눈물을 삼키며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으니…

 

 

- 최양업 부제와 프랑스 해군 560명이 한달간 표착생활을 했던 신치산 아래 남쪽 기슭 모래사장터. 전주교구에서 세운 최양업 부제 일행 난파 체류지 팻말이 있다.

 

 

라 피에르 함장은 함대의 고군산도 좌초 사실을 알리고 영국이나 미국 함선에 구조 요청을 위해 8월 25일 오늘날 구명정에 해당하는 종선(從船)을 상해로 급파했다. 이 종선은 중국 광동성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대에 구조를 요청했다. 

 

영국의 수해(Suhae) 함장은 주함인 다이달로스(Dadalus)호와 에스피에글(Espiegle)호, 칠더스(Childers)호를 함대로 편성해 8월 31일 중국 광주 주강을 출발, 9월 5일 고군산도 신치도 앞바다에 도착한 뒤, 12일 프랑스 해군을 모두 태우고 그곳을 떠났다. 라 피에르 함장을 비롯한 300명의 글로와르호 대원들은 다이달로스호를 타고 9월 23일 홍콩에 도착했다. 즈누이 함장과 257명의 빅토리외즈호 수병은 나머지 두 배에 나눠 타고 상해로 갔다.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도 빅토리외즈호 해군들과 함께했다.

 

 

신치산 아래서 한달간 머물러 

 

프랑스 해군은 1847년 8월 10일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에 좌초된 다음 배를 버리고 12일 신치산 아래 남쪽 모래사장에 상륙해 영국 함대에 구조될 때까지 꼬박 한 달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최양업 부제도 1847년 8월 12일 프랑스 해군과 함께 조선 땅을 밟았다. 조선을 떠난 지 무려 11년 만의 일이었다. 최양업은 신치도에 한 달간 머물면서 프랑스 해군 장교와 조선 관리들 사이의 통역을 맡아 육지로 들어갈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저는 혹시나 신자들에 대해 무슨 소식이라도 좀 알아내고 싶어서 날마다 수소문하며 기웃거렸습니다. 저의 동포들을 보기도 하고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니 크게 위로가 됐습니다. …저녁이 되면 혹시 신자의 거룻배가 우리에게로 오지 않을까 해서 사방을 두루 살피면서 기대도 하고 기도도 하느라고 애가 바짝바짝 탔습니다”(상해에서 1847년 9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통역할 때 조선말을 하지 않고 한자만을 사용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리고 협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함께 배를 탄 조선인에게 손바닥에 한자를 써가며 천주교에 대해 조심스럽게 묻곤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그토록 찾던 신자였다. 바로 1847년 9월 9일이었다. 

 

“한 사람이 제게 가까이 와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말고요. 나는 잘 압니다. 당신도 압니까? 당신은 그들을 공경합니까?’하고 제가 그에게 대답하는 동시에 조급하게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시인했습니다.…그는 자기 온 집안이 모두 다 신자이고, 대공소(오늘날 전북 부안군 변산면 석포리 대소 공소)에 살고 있는데 그곳은 우리가 있는 고군산도에서 백 리가량 떨어져 있다고 대답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최양업은 그에게서 9월 11일 “신자 배가 신치도로 올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구조선인 영국 함대는 이미 신치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었고, 조난자들을 모두 승선시켜 12일 떠나기로 돼 있었다. 최양업은 드디어 입국한다는 희망과 함께 신자 배를 꼭 타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꼬박 이틀 밤낮을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최양업은 약속한 11일에 신자 배를 만나지 못했다. 조선 수병들의 경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태운 프랑스 함대가 좌초한 고군산도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 자리로 지금은 방조제 간척사업으로 새만금 33센터가 들어서 있다.

 

 

신자 배가 오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끝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조선 거룻배들이 사방에 횃불을 켜고 경비했으며, 낮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이날 신자 배를 만나지 못한 최양업은 신자들이 자신을 태우러 올 때까지 신치도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라 피에르 함장을 찾아가 “혼자만이라도 신치도에 남겠다”고 간절하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저는 고군산도에 남아 있기를 원하여 함장에게 여러 번 청하였으나 함장은 저의 뜻에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원까지 하면서 간절히 소망해 마지않았고, 또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손안에까지 들어온 우리 포교지를 어이없이 다시 버리고 부득이 상해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신치도에 혼자라도 남겠다는 최양업의 판단은 맞았다. 실제로 최양업의 이종사촌 형이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거룻배를 가지고 고군산도에 와서 그해 여름 내내 기다렸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양업은 크게 가슴 아파했다.

 

최양업은 1847년 9월 12일 참담한 심정으로 영국 함선에 올랐다. 눈앞에서 조금씩 작아졌다 끝내 사라지고만 고군산도를 보면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 안에서 항상 영원히 희망을 가질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으니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같은 편지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며 기도

 

최양업은 스승에게 보낸 이 편지 내용처럼 스스로 낙담하여 무너지지 않으려고 더더욱 하느님께 의지했다. 라 피에르 함장이 신치도를 떠나면서 “올해 안으로 다시 프랑스 함선이 조선으로 올 것”이라고 자신에게 밝힌 다짐을 되뇌면서 최양업은 조국을 위해 기도했다.

 

“주님, 보소서. 저희의 비탄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소서. 저희의 죄악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눈길을 돌리시어, 당신을 향해 부르짖는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같은 편지에서).

 

고군산도로 다시 올 것이라는 최양업의 기대와 희망은 프랑스 해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에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로써 최양업의 제4차 조선 입국 여행도 실패로 끝나고 만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2일, 글 · 사진=리길재 기자]



4,70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