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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동양고전산책: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7) 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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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14 ㅣ No.295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하늘처럼 성실할 수 있기를…”

-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 ⑦ 성실

 

 

어짊을 중요시한 공자도 화를 낼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재여(宰予)라는 제자가 낮잠을 자는 것을 보고,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가 없고, 썩은 흙으로 쌓은 담은 손질할 수가 없다.”라며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재여는 공자의 제자였지만 열심히 배우지도 않았고 실천으로 행하는 데도 게을렀나 봅니다. 재여를 야단친 공자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처음에 나는 사람을 대할 때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동을 믿었다. 지금은 사람을 대할 때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게 되었다. 재여 때문에 이렇게 바꾸었다.”1)

 

말과 행실이 같아야 하는 것이 동양에서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은 지난달에도 강조했었지요. 상대방에 대한 믿음은 그가 뱉은 말대로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볼 때 생겨납니다. 공자는 예전에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당연히 그의 행동까지 그러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의 말을 듣더라도 일단 그의 행동이 성실히 수행되는지 살펴본 다음에야 그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이 재여 때문이라고 하니 얼마나 심한 질책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재여는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했지만 행동이 말을 따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낮잠 한 번 잔 걸 가지고 이렇게나 심하게 야단을 치지는 않았겠지요. 평소 행실이 성실함과는 거리가 한참 머니 이 일을 계기로 정신 차리라고 심하게 질책하셨을 겁니다.

 

비단 재여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지요. 요즘 세상에 남이 하는 말만 듣고 그 사람을 온전히 믿기는 힘듭니다.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사람도 많고, 열심히 하겠다고 하고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행동을 잘 살펴본 연후에, 성실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제야 비로소 신용이 싹틉니다. 그래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일곱 번째인 “성실”은 “신용”과 통하는 말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신용”이라고 번역되었지요. 『가톨릭대사전』에서도 “신용의 열매란 거짓이 없어 믿을 수 있고 착수한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충실성을 의미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히 임하는 사람은 참으로 믿음직하지요. 반면에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거나, 처음에는 열심히 시작하지만 얼마 못가 지쳐 포기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구요. 작심삼일(作心三日)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실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성경의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1)가 떠오릅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시켰습니다. 맏아들은 싫다고 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꿔서 일하러 갔습니다. 다른 아들은 일하러 가겠다고 하고는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복음의 이 비유는 하늘나라에 초대받았지만 응하지 않는 이들을 둘째 아들로 비유하여 꾸짖는 내용입니다. 반면에 세리, 창녀들처럼 처음엔 응하지 않았지만 늦게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칭찬하는 내용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복음을 읽으며 아버지가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대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실행한 아들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요. 가장 바람직한 아들의 모습은 대답도 잘하고, 성실히 일하는 아들이겠지요. 둘째 아들은 대답은 시원하게 해 놓고는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대놓고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나중에라도 뉘우치고 실천한 건 잘한 일이지만, 대답도 잘하고 일을 마칠 때까지 끝까지 성실하게 임하는 자세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성령의 도움으로 맺는 “성실(신용)”의 열매는 주님의 부르심에 거침없이 응답하고, 그 응답에 성실하게 실천하며 끝까지 완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뒤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지요. 유가철학의 전통에서도 성실함(誠)은 최고의 덕목이었습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 실행해나가는 것, 올바로 배우고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며 타인을 사랑하는 삶은 잠시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나 선조들은 살아생전 성실히 삶에 임하고 죽음을 맞아 의연할 수 있는 기상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유가사상의 심오한 철학을 담은 『중용(中庸)』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아주 중요한 구절이지요.

 

“성실함은 하늘의 도이며, 성실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2)

 

하늘은 성실합니다. 자연의 운행은 지치거나 쉼이 없고, 게을러지는 법도 없습니다. 지구는 멈추지 않고 한결같이 태양 주위를 돌며, 봄·여름·가을·겨울은 끊임없이 되풀이됩니다. 우리 선조들은 신비하지만 쉼 없이 성실하게 운행하는 대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성실함이야말로 하늘의 도(天之道)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 하늘의 도를 보고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人之道) 성실함은 하늘의 도입니다. 인간이 성실함을 온전히 이루어 낼 수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다만 하늘의 도를 보고 배워 최대한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나아갈 길(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제시해 준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들을 대하시는 성실함의 전형이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성실한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쟁기를 잡고도 자꾸만 뒤돌아볼 유혹거리가 많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 한마디, 무심함에 마음은 너무도 쉽게 상처받고 흔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물론 나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성실의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성실이란 앞뒤 재지 않고 무식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내가 응답했고, 한 번 가기로 결심한 길이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가는 힘입니다. 주님께서 포도밭에 일하러 가겠느냐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모두 가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처럼 응답은 잘 해 놓고 일하기 싫어 늑장을 부리거나 다른 핑계를 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성실함이 더욱 절실히 느껴지는 시절입니다.

 

* 최성준 신부는 북경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겸 월간 <빛> 편집주간으로 있다.

 

1)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9장. “子曰,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 而觀其行. 於予與改是.”

2) 『중용(中庸)』 20장. “誠者, 天地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월간빛, 2016년 9월호,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겸 월간 <빛>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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