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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뿌리: 존 에드워드 모리스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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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25 ㅣ No.564

[영성의 뿌리] 존 에드워드 모리스 몬시뇰


일제강점기에 첫 한국인 수녀회 창립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시기인 민족말살통치가 시작될 무렵인 1932년 평양 상수구리에 최초의 한국인 수녀회가 설립됐다.

수녀회의 설립자 존 에드워드 모리스(John Edward Morris) 몬시뇰은 한국 선교에 있어서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메리놀수녀회에 한국인 수녀회의 회원 양성을 위촉했다.

이렇게 창립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박해시기 수절과 동정을 지키며 교회에 봉사한 여성들의 맥을 이어받고, 민족과 온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봉사하고자 했다.

모리스 몬시뇰은 1889년 1월 1일 미국매사추세츠 팔 리버에서 태어나, 1914년 사제품을 받고 팔 리버 교구의 세인트 조지프 본당 보좌 신부로 7년 동안 사목했다. 1921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그는 1923년 한국 선교사로 임명돼 입국했다.

한국어와 풍습을 익힌 그는 평안도 영유본당 주임 신부로 임명됐고, 새로 부임하는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어학원을 세우고 각종 교육 사업과 사회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초대 평양 지목구장 번 신부가 메리놀회 부총장으로 선임돼 본국으로 돌아가자 1930년 모리스 신부는 제2대 평양 지목구장에 임명되는 동시에 몬시뇰로 불리게 됐다.

그는 본당 신설과 사목조직 확충에 전력을 다했고, 청년회 주최로 많은 강연회를 개최해 평양 일대에 천주교가 널리 전교되도록 했다. 아울러 한국인 성직자 및 수도자 성소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모리스 몬시뇰은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3년 ‘제1회 평양 지목구 전교 회장 강습회’를 개최해 성서 해설과 호교론, 교회사, 전례, 주일학교 교리 등을 교육받게 했다. 1934년에는 월간 잡지 「가톨릭 연구」를 창간했고, 이어 ‘평양 지목구 가톨릭 운동 연맹’을 조직해 신자들의 신앙생활 활성화는 물론 문맹 퇴치, 계몽에도 앞장섰다.

1936년 메리놀회 총장의 의견에 따라 지목구장직을 사임하고 본국에 돌아간 모리스 몬시뇰은 일본선교사, 미국 한인 사목 등을 역임하다 1959년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교사로 재임명돼 입국했다. 그러나 1961년 건강상 이유로 귀국해 1970년 은퇴, 1987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암울한 시기에서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사회 선교는 물론 통일 사목, 북방 선교, 외방 선교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5년 9월 20일, 김
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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