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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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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1-22 ㅣ No.39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

 

(1) 말을 좋아하는 소년



년의 김익진

낙엽을 밟을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가 참 좋다. 구두 밑창을 통해 전해오는 느낌도 새롭다. 싸늘한 초겨울의 정취가 싫지만은 않다.

“춥지 않으세요?”

“춥긴? 우리 수녀님이 꼭 붙어 있는 걸.”

순간 휘청한다. 발을 헛디딘 모양이다. 날이 갈수록 눈이 보이지 않는 탓이다. 요즘은 두 눈이 다 성치 않다. 뿌옇게 형상만 보일 뿐이다. 팔짱을 끼고 있던 화영이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아버지, 찻집에서 잠깐 쉬었다 가요.”

차 향이 은은하다. 귀에 익은 음악이 놀란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Le quattro stagioni(사계)로구나. 작품번호 Opus 8, No.4. F단조의 L‘inverno(겨울)!”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영이가 화답한다.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비발디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궁정연주회에서 즉흥적으로 ‘봄’ 악장을 연주하라고 했던 바로 그 곡!”

나는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화영이는 손뼉을 치며 웃는다. 이가 떨리고 발이 시린 추위를 피해 따뜻한 난로 곁에 앉은 평온함이 이럴까. 얼음판 위에 선 위태로움 뒤에 찾아온 따사로운 봄이 이럴까.

“어릴 적에 아버지께서 끓여주셨던 차 맛을 잊을 수 없어요.”

어릴 적? 어릴 적이라…… 참으로 오래된 기억들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누렇게 빛바랜 사진들이 선율을 타고 한 장 한 장 지나간다.

성인식 때의 김익진.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라!”

『논어』의 첫 대목을 읽었다. 근엄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게 무슨 뜻이냐?”

“배우고 그걸 때때로 익히면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맞았다는 표시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뜻을 뚜렷하고 굳건하게 세운 뒤에 제대로 배우고 익혀야 하느니라. 신학문을 배우기 이전에 동양 사천 년의 역사와 동양 종교가의 학설을 아울러야 해. 그때 스스로 깨닫고 일어서게 될 거야.”

목포공립보통학교에 다니는 내게 어려운 말이었다. 명심보감을 배울 때 들었던 ‘박학이독지(博學而篤志)’가 떠올랐다. 우리 것을 널리 배우고 뜻을 도탑게 해야 한다는 말로 짐작했다. 무릎 꿇고 앉은 다리가 저릴 때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랫동안 벼슬살이한, 빈틈없는 관리의 모습이었다.

나의 할아버지 김병욱은 안동 김씨로 문경 출신이었다. 느지막이 충청북도 연풍 현감을 지냈지만, 비판적이고 꼿꼿한 성품으로 인해 자주 무고를 받았다. 개항기에 척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펼쳤던 열린 지식인이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과 문화를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과 기기 등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실사구시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관운이 따르지 않아 그 주장은 묻히고 말았다.

나의 아버지 김성규 역시 실학을 바탕으로 서양 학문을 받아들여 유교의 부족한 점을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학문을 배운 뒤 광무국 주사로 벼슬길에 나갔다. 이어 동학란 때 전라감영 총서로 난국을 수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고창 군수, 장성 군수를 지낸 뒤 광무개혁 때 전라남도 양무감리로 농업 개혁의 선두에 섰다. 그 뒤 강원도 순찰사로 나갔지만, 탐관오리인 홍천 군수를 봉고파직한 일로 모함을 받았다. 후일 정2품 벼슬을 사양한 아버지는 목포와 장성에 학교와 회사를 설립하고, 일대의 땅을 사들였다. 그때부터 우리 집안은 목포에 살게 됐다. 나는 한 해 곡식 2만 석, 녹두 8백 석을 추수하는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아버지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책장을 덮었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뒤꿈치를 들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목을 빼고 나를 기다리는 벗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내일까지 ‘학이(學而)’ 편을 외우라는 지엄한 명은 이미 한 쪽 귀로 흘린 뒤였다.

마구간에 들어섰다. 벗은 나를 보자마자 코를 벌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방금 배운 글귀가 실감 났다.

“햐! 이게 바로 산 공부잖아.”

궤변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며 스스로 흡족해했다.

‘히히이잉! 푸우.’

벗의 반지르르한 몸을 쓰다듬자 반가운 시늉을 했다. 고삐를 잡고 집 밖으로 나섰다. ‘이랴!’ 소리와 함께 채찍으로 엉덩이를 내려쳤다. 박차로 옆구리를 툭 쳤다. 내 속내를 알았다는 듯 녀석이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드넓은 벌판을 달리는 말과 하나가 된 기분이 그만이었다. 아버지가 늘 읊조리던 물아일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옛 선비들이 자연과 하나 되어 성인들을 본받으려 했던 기분을 생생하게 느꼈다. 비록 요임금, 순임금, 우왕, 탕왕, 문왕, 무왕, 주공, 공자와 같은 분들을 만나는 느낌은 안 들었지만…….

그보다는 훈장을 단 제복에 깃털이 달린 금테 모자를 쓰고 목이 긴 장화를 신은 군인이 되고 싶었다. 긴 칼을 비껴찬 멋진 군인 말이다.

‘말고삐를 양손에 쥐고 늠름하게 개선하는 김익진 장군!’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입에서 연신 웃음이 배어 나왔다.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그런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홉 살 터울인 큰형 우진은 구마모도 농업학교에 다니는 일본 유학생이었다. 형의 빈 공부방에는 신기한 것들로 빼곡했다. 퀴퀴한 책 냄새가 나는 아버지의 방과는 사뭇 달랐다. 그중에서도 알록달록한 그림책과 미술책들이 어린 나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큰형은 그런 나를 신비한 예술의 세계로 인도하곤 했다.

“이게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조각한 피에타상이야.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여인이 마리안데, 슬프면서도 애통해 하지 않는 표정이 일품이지. 우리 동양의 애이불상(哀而不傷)을 참 잘 표현했단 말이지.”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큰형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 듯도 했다. 대리석 조각이 마치 종이를 구겨 만든 것 같아 놀랍기 그지없었다. 나는 심오하고 미묘한 예술의 세계를 그렇게 접했다.

그날도 말을 타고 산과 들을 쏘다니다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 시끌벅적했다. 하인들이 이리저리 달리며 붕 떠 있었다. 큰형이 오랜만에 귀국했던 것이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큰형의 손길이 따뜻했다. 나는 언제 큰형처럼 훤칠하게 자랄지 조바심이 나면서도 늘 부러웠다. 큰형이 귀여워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기분 나빴을 것이다. 장차 장군이 될 나를 꼬마 취급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큰형만은 예외였다. 

“오늘도 말을 탄 모양이구나. 익진이는 커서 뭐가 될 거야?”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군인이 되기로 했어요. 우리나라를 지키는 멋진 군인요.”

큰형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어진 무심한 말이 청천벽력과 같았다.

“군인? 일본 사람이 아니면 군인이 될 수 없는데…….”

내 가슴 속의 아름다운 꽃밭에 승냥이가 뛰어들어온 느낌이었다. 온실의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고, 소중히 가꾸던 꽃들이 무참히 꺾인 기분이었다.

“네? 차, 참말로 우리 조선 사람은 군인이 될 수 없어요?”

되돌아온 큰형의 말이 어린 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우리는 지킬 나라가 없잖아. 그런데 군인이 왜 필요해?”

잔칫날 판소리로 듣던 심 봉사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이 그런 것인가 싶었다.

“우린 왜 나라가 없어요?”


필자의 말

김익진은 고뇌하는 지성인, 실천하는 신앙인의 전범(典範)이었다. 그는 물려받은 토지를 교회와 소작농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다. 평신도로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삶을 20세기 한국 땅에서 재현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톨릭 영성과 관련된 주요한 책들을 번역하는 한편, 가톨릭의 토착화와 복음화와 관련한 주옥같은 글들을 써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였다. 그의 삶은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고 세속화하고자 하는 유혹 앞에 선 오늘의 평신도들에게 큰 빛과 위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김익진의 표면적 업적보다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이자 식민지 치하 지식인으로서의 내면적 갈등과 고뇌, 그리고 가톨릭 신앙으로 인한 삶의 변화와 복음적 삶의 실천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의 삶을 통해 500만 명이 넘는 오늘날 이 땅의 가톨릭 평신도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묵상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주안점을 둘 것이다. 이에 따라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며, 독자의 감정에 호소력과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유용한 ‘소설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지금 여기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여야 할 바를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으로 깨닫고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평화신문, 2014년 11월 23일,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

 

(2) 대륙의 꿈, 독립의 꿈

 

 

김익진과 큰형 김우진(오른쪽).


“이게 우리나라 국기야!”

대전중학교를 거쳐 중앙고보에 다니던 나는 와세다중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기미년 삼일운동 직후였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그 사건에 연루될까 저어한 듯했다. 중앙고보의 송진우 교장과 현상윤 교사가 만세 운동을 논의하고 실행에 옮겼으니 말이다.

1919년 3월 23일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하숙집에서 큰형을 만났다. 늘 그랬듯이 손으로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반겼다. 며칠 뒤 큰형은 버들궤짝에서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방문은 모두 닫혀 있었지만, 밖의 동향을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자기를 든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의 형답지 않았다.

보자기의 매듭을 풀자 곱게 접힌 천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태극기였다. 빼앗긴 나라의 국기였다. 만세운동 때 보긴 했지만, 그처럼 가까이에서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어루만지는 손가락에 전율이 일었다. 일본 땅 한복판에서 보는 태극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문득 독립문 정초식에서 불렀다던 애국가의 한 소절이 떠올랐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

나는 짬이 날 때마다 도쿄 교외에서 말을 탔다. 키가 작아 발판을 딛고서야 고삐를 잡고 등자에 발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말 위에 높이 앉아 주위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거리를 걸어갈 때의 기분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사뭇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거리로 나서면 천하가 내 것인 양 어깨가 으쓱했다. 군인이 되기 위한 꿈은 이미 산산조각 났지만, 새 희망이 생겼다. 독립군이 있는 중국에 가서 기마병이 되고 싶었다. 말 타고 끝없는 벌판을 달리며 일본군과 맞서고 싶었다. 상상의 날개를 단 소년은 이미 중국 대륙을 누비고 있었다.

애국심이 무르익어가던 1926년 8월이었다. 큰형의 소식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아내의 신행 때.


‘극작가 김우진 사망! 와세다대학 영문과 졸업한 조선의 수재,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 동반 투신.’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거짓말이라며 코웃음 쳤다. 신문을 보고서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큰형은 나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탐닉하던 사회주의는 내게도 관심거리였다. 그가 끼고 다니던 문학과 역사와 철학, 미술과 음악 서적들은 나에게도 읽을거리였다. 그의 말 한 마디와 몸짓 하나가 모두 내가 본받고 나아가야 할 길이었다.

해박한 스승이자 든든한 후원자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앞으로 어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갈증이 나서 못 견디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시도 때도 없이 타는 듯한 목마름에 괴로워했다.

“황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네 가는 곳 그 어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서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장남을 잃은 아버지는 절망감에서 벗어나려는 듯 내 혼인을 서둘렀다. 그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 해 12월에 여주 이씨 집안의 처녀와 초례를 올렸다. 그러나 21살 난 유학생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1929년에 와세다대학의 예과를 마쳤다. 공교롭게 그 해 광주학생운동이 터졌다. 학생으로 더 이상 일본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예전부터 꿈꾸던 중국으로 가고자 했다. 아버지는 만류했다.

“이제 목포에서 아비 사업을 이어 받아라. 혼인까지 하지 않았느냐?”

“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을 따르고자 합니다. 제대로 배우고 익혀 스스로 깨달아 일어서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자식의 뜨겁고 절절한 마음을 꺾지 못했다.

북경 시절.


나는 베이징에 도착해 우선 중국어를 익혔다. 1931년에 마침내 베이징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부전공으로는 미학을 택했다. 큰형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열혈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마르크스-레닌 사상을 파고들었다. 아버지가 가훈으로 삼은 위민(爲民)과 청렴(淸廉)을 가시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식인으로서 국민을 위하는 일은 무엇인가. 지도자로서 걸어야 할 고결한 길은 무엇인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환히 비춰주는 듯했다.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그 무렵 일본 관동군은 중국 북동부에 만주국을 세웠다.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러허성(熱河省)을 거점으로 중국 본토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대학생들은 만리장성에서 일본군을 막아야 한다며 분개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학우들이 전선으로 달려갔다. 대학 4학년생인 나 역시 항일대열에 뛰어들었다. 일본군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이자 조국 독립을 위한 애국심의 발로였다. 마오쩌둥의 1927년 선언이 뇌리에 꽂혔다.

‘槍杆子裏面出政權(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은 전투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마침내 주더(朱德)가 이끄는 마오쩌둥(毛澤東) 산하의 홍군에 입대했다. 중국인들과 함께 항일전투에 나섰다. 그간 익혔던 승마가 참으로 요긴했다. 독립을 실현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희망이 싹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홍군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에 쫓기기 시작했다. 내몽고로 밀리면서 1년 반 동안 초근목피로 연명해야만 했다. 배고픈 것보다 더 괴로운 건 일본군과의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전투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처참했던 전장을 뒤로 한 채 베이징으로 되돌아왔다. 비참했다.

집에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들이 나를 반겼다.

“도련님! 대체 어디 다녀오세요?”

“아휴!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

목포 집에서 일하는 이들이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몇 달 동안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녔으니 속이 숯덩이처럼 바싹 타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나를 알아보는 게 다행이었다. 옥에 갇힌 춘향이가 거지꼴로 찾아온 이몽룡을 만날 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유학생인 내가 홍군에 가담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복하던 일본경찰이 들이닥쳤다. 꼼짝없이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됐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자마자 감옥이라니…….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또래로 보이는 일본병사는 내가 일본말 하는 걸 둥근 안경 너머로 신기하게 바라봤다. 와세다대학을 다녔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놀라워하면서도 반가워했다. 자신의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아마 대학에 다니다 입대한 듯했다. 이튿날 밤, 철조망 곁에 허술하게 지어진 뒷간에 갔다. 그 일본병사가 따라와 지켰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시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생에는 헤어짐과 만남이 있으니 / 어찌 젊고 늙은 때를 가리겠는가 / 어느 마을인들 낙토가 있을까마는 / 어찌 아직도 맴돌며 서성거리나’

두보의 시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달아나라는 신호였다. 나는 허름한 철망을 빠져나와 죽을힘을 다해 내달렸다. 집에 도착해 다시 고향사람들을 만났다. 우리 일행은 그 길로 베이징을 떴다.

1934년 8월에 목포로 돌아온 나는 실의에 빠져 지냈다. 몸은 장맛비에 흠뻑 젖은 솜과 같았다. 마음은 잔잔한 호수에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홍군에 입대해 항일전투를 별로 해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오히려 장제스의 90만 대군과 맞서 싸우기에 바빴다. 국민당이 홍군을 압도하는 내전 양상이었다. 홍군의 뿌리가 뽑히는 현실을 보며 공산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인생관과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사상적 이념적 방황이 시작된 건 그 무렵이었다. 그간의 공부와 노력과 열정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허무함에 괴로워했다. 아울러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포부도 꺾였다. 졸지에 길 잃은 어린아이가 되고 말았다. 허공을 향한 절규에 메아리조차 없었다.

“어디로 가리까?” [평화신문, 2014년 11월 30일,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

 

(3) 아! 프란치스코

 

 

- 일본에서 방황하던 시기의 김익진.


‘댕! 댕! 댕!’

1935년 도쿄의 정월 초하루.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새벽 종소리가 은은했다. 아직 날은 어둡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환했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모자와 발에 맞지 않는 신,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모두 벗어버린 느낌이었다. 철이 들던 때부터 지고 다니던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그간의 갈등과 고뇌가 하룻밤 사이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니…….

섣달 그믐날의 들뜬 분위기는 부평초 같은 이방인을 더욱 쓸쓸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내게 도쿄의 거리는 친숙하였다. 어제는 유학 시절 울적할 때면 홀로 찾던 간다(神田) 고서점 거리를 일없이 거닐었다. 멋들어진 중절모에 반드르르한 양복을 입은 조선 청년은 일본인의 눈에도 부잣집 자제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찌른 채 방향 없이 걷는 모습은 허무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쯤으로 비쳤을지도 몰랐다.

책방에는 퀴퀴하지만 정겨운 내음이 풍겼다. 여느 때처럼 책꽂이에 빼곡히 꽂힌 책들을 왼쪽부터 손가락으로 죽 문지르고 지나갔다. 그때였다. 자석에 쇠가 달라붙듯 손가락이 멈췄다.

‘アッシジの聖フランシスコ’(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유교와 불교의 성인들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았다. 하지만 성인들의 삶이라는 게 워낙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 별 감흥 없이 지나쳐왔다. 그런데 가톨릭 성인이라니……. 책값을 내면서도 납득되지 않았다.

-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는 청년 김익진. 전쟁 참전 후 일본으로 유학간 그는 삶의 참 진리를 찾아 고뇌하는 시간을 보냈다.


항일의 일념으로 홍군에 입대해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신념이 내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귀국 후에는 불교에 심취했다. 불력이 있다는 백양사와 한용운 선사가 머물렀던 백담사를 찾아다니며 마음을 추슬렀다. 청담 스님과 몇 날 며칠을 토론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 역시 휑한 가슴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만난 프란치스코였다.

한기가 느껴지는 여관 다다미방 벽에 기댔다. 어스름한 전등 불빛 아래에서 그의 모습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부유한 포목상의 맏아들, 용맹한 군인, 포로와 투병 생활, 예수 환시, 걸인과 동거, 나병환자 간호, 벌거숭이 출가…….’

잠시도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쩌면 나와 그리 닮았을까. 그 역시 부잣집에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그러나 가슴 한쪽은 늘 비어 있었다. 어디에서 갈증을 달래야 할지 몰라 헤매고 다니는 그에게서 나를 봤다. 젊은 날의 그는 영락없는 김익진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나와 달랐다. 자신이 누리고 있던 모든 걸 버리고 스승 예수의 가르침을 전했다. 아니 온몸으로 실천했다. 평생 청빈한 삶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내놨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더라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찾지 않았던가. 나도 그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밤이 깊은 모양이었다. 멀리서 취한 사내들의 목소리와 여인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내게도 몹시 익숙한 소리였다. 나 역시 주지육림의 흥취를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잠시 후 그 흥겨운 소리도 한겨울의 추위에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전등 불빛이 흡사 어린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듯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가뜩이나 희미한 방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때였다. 성에가 낀 유리창에 실루엣처럼 사람 형상이 어렸다. 비몽사몽 간에 눈을 비비며 유리창을 노려보았다. 손에는 나무 지팡이를 짚고, 몸에는 포대 자루와 같은 누더기를 걸쳤다. 맨발로 얼음이 언 차가운 땅에 서 있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길게 늘어져 흡사 유령과 같았다. 하지만 얼굴에는 맑은 기운이 흘렀고, 눈에는 밝은 빛이 서렸다.

반사적으로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허리를 끌어당겼다. 무릎에 놓인 책을 접으며 물었다.

“누, 누구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요.”

놀라운 일이었다. 꿈을 꾸는 듯했다. 다시 유리창에 어린 그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다, 당신이 참말로 아시시의 성인, 바로 그 프, 프란치스코란 말이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대뜸 물었다.

“당신이 이 시간에 여기에 왜 있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도대체 벌거벗은 채 집에서 나간 이유가 뭐요?”

엄숙하던 실루엣이 그제야 낯빛을 바꿨다.

“난 떵떵거리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어요. 아쉬울 게 없었지요.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해 보란 듯이 전쟁터에 나가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포로로 잡혀 감옥에도 갇혀봤고, 병을 얻어 죽을 고비도 넘겼지요.”

급한 마음에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럼 산전수전 다 겪었기에 그런 엄청난 결심을 했다는 거요? 나도 당신처럼 남부럽지 않게 호사를 누려왔고, 으스대며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유학도 했소. 그리고 내 신념에 따라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 싸워도 봤소. 잠시나마 감옥에도 갇혀 봤고요. 그런데도 난 늘 공허했단 말이오.”

내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자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도 당신처럼 온 천하를 손에 쥔 것처럼 두려움 없이 살았지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요.”

순간 엉덩이가 용수철 튀듯 뛰어올랐다. 입에서 즉각 말이 쏟아져 나왔다.

“이천 년 전에 죽은 예수를 봤단 말이오?”

그가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난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준비하던 중 ‘주인을 섬기겠느냐? 아니면 종을 섬기겠느냐?’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그분은 또한 ‘네가 내 뜻을 알려면 그동안 사랑하고 탐해온 모든 것을 멸시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

“난 그날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어요. 아버지께 상속권 일체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지요. 그분께 받은 모든 걸 돌려드리고 알몸으로 집에서 나왔거든요. 그때부터 나병환자와 걸인을 친구로 삼아 그들과 함께 생활했지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다시 따지듯이 물었다.

“예수를 따르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소? 재산이 많으면 오히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좀 더 많이 도울 수 있었을 거 아니오?”

프란치스코가 지팡이를 곧추세우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마태 10,9-10)고 하셨지요. 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분의 가르침을 환하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청빈을 실천하기로 결심했지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던 거예요.”

나는 몸을 앞으로 굽히며 다급히 물었다.

“그렇게 모든 걸 버리고 난 뒤에 대체 무얼 얻었소?”

그의 미소가 어슴푸레한 방안을 환하게 밝혔다.

“내 영혼을 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지요.”

나는 체면 가리지 않고 철부지처럼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당신도 나처럼 해보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구령(救靈)과 영생(永生)이라……. 한참을 넋 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유리창에는 흩날리는 눈이 달라붙고 있었다. 더 이상 프란치스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늘 가슴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던 용암이 온몸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뜨거운 기운이 다다미방에 웅크리고 있던 차가운 몸을 달궜다. 신기하게도 몸은 후끈 달았는데, 타는 듯한 갈증은 가라앉았다. 가슴이 시원했다. 순간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깨달음의 환희였다. [평화신문, 2014년 12월 7일,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

 

(4) 성당에서 길을 찾다

 

 

“목포의 성모 마리아시군요.”

1935년 이국땅에서 우연치 않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만났다. 마치 망망대해에 빠져 허우적대다 쪽배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숨을 돌렸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또렷하진 않지만, 어둠 속에서 먼 등대의 한 줄기 빛을 봤다.

목포에 돌아오자 모든 게 새롭게 보였다. 중국에서 귀국할 때만 해도 잔뜩 불만에 차 있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조그만 일에도 신경질을 내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나고 온 뒤로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부글거리던 가슴이 가라앉고, 밤낮없이 괴롭히던 조갈증도 꽤 누그러졌다. 가족들이 살가웠고, 풍경이 정겨웠다. 아내는 물론이거니와 딸 우영이와 아들 효신이의 낯빛도 밝아졌다. 칙칙하게만 보이던 목포 바다와 하늘의 색도 푸르러졌다. 내가 변하자 주위가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며칠 뒤 무작정 집에서 멀지 않은 산정동성당을 찾았다. 1897년에 자리 잡았다는 붉은 벽돌 성당이 아담하게 보였다. 마당에 서자 목포가 한눈에 들어왔다. 먼 발치에 야트막한 산들이 빙 둘러싸고 있어 서먹한 느낌이 가라앉았다. 멀리 바다에서 풍겨오는 짭짜름한 내음이 어색한 느낌을 지웠다.

성당 한쪽에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었다. 낯설지 않았다. 어릴 적 큰형 방에 놓인 미술책에서 자주 봤던 터였다.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는 어머니와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가톨릭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그 성모 마리아를 이렇게 만날 줄이야……. 목포에서 만난 성모 마리아라서 더 친근했다. 늘 내 곁에 있으면서 말없이 나를 기다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감전된 것처럼 전율했다. 기쁨이나 감격이 아닌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젊은 시절의 김익진.


그때 누군가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이게 누구야? 익진이 아닌가?”

어릴 적 친구 김진옥이었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른 살이 됐지만, 서로를 알아볼 만큼의 옛 모습은 남아있었다. 진옥은 내 동향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긴 목포에 사는 사람치고 우리 집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비수 같은 말이 날아왔다. 비아냥거리는 투였다.

“근데 골수 사회주의자가 웬일로 성당엘 온 건가?”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머쓱하게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글쎄 말일세. 난 성당이 뭐 하는 덴지도 모르고, 가톨릭이 뭘 가르치는지도 모르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살고는 싶네.”

진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번개 맞은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머리끝이 쭈뼛한 진옥이 부르르 떨며 신음하듯이 물었다.

“그, 그게 참말인가? 자, 자네가 성당에 다니겠다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옥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재차 물었다.

“자네 같은 사회주의자가 대체 프란치스코 성인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나는 그간 중국과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심경의 변화가 있기까지의 일을 낱낱이 말했다. 일종의 고해성사를 한 셈이었다. 진옥의 얼굴이 마당에 소복하게 쌓인 눈만큼이나 환해졌다.

“나 이 성당의 회장일세. 신자들을 대표해서 성당 일을 돕고 있지. 나하고 자주 만나 얘기하세.”

“신자 대장이면 믿음도 대장이겠군. 갈팡질팡하는 이 사회주의자를 잘 좀 선도해주게.”

“걱정 붙들어 매게. 내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때려잡는 대장일세.”

농담이 오가는 가운데 호쾌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가슴속에서 우러난 시원한 웃음이었다. 얼마 만인지 몰랐다. 

그때부터 시간 나는 대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가톨릭 교회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진옥이 막히면 본당 신부를 만나 답을 들었다. 칠흑 같은 방에 빛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작열하는 사막에 소나기가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게 가톨릭은 여전히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하는 종교였다. 가톨릭은 우리 집 가훈인 청렴이라는 면에서는 인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위민(爲民)이라는 면에서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중세기의 부정적인 가톨릭 역사가 뇌리에 깊이 박혀 있던 탓이었다. 그런 가톨릭이 내게 남아 있던 갈증을 마저 풀어 주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두어 달 지난 봄날이었다. 진옥이 제안했다.

“내가 잘 아는 신부님이 서울 약현(지금의 중림동약현)성당에 계시네. 같이 가보지 않겠나? 자네의 의문을 속 시원하게 풀어줄 걸세.”

3월 초순이었지만, 동장군이 남기고 간 바람이 싸늘했다. 서울역에서 멀지 않은, 야트막한 언덕에 선 붉은 벽돌 성당이 서름하지 않았다. 내 또래의 오기선 보좌 신부가 자초지종을 듣고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 미사를 드려야 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다녀와서 말씀 나누시죠.”

진지함이 남달라 보이는 오 신부가 바삐 사제관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제야 방안을 휘둘러봤다. 사제관 거실에는 난로가 피워져 있었다. 그 위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주전자에서는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새롭게 보였다. 자그마한 난로가 싸늘한 방을 덥히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나는 추위에 떠는 사람들과 삭막한 세상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갑자기 가슴이 꽉 막혔다. 입에서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무 책장에는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간간이 라틴어와 불어와 영어 제목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일본어로 쓰인 책들이었다. 잠시 후 허공에서 책들을 가로지르던 집게손가락이 멈춰 섰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쓴 일본어 번역판 「カトリックと??問題」(가톨릭과 경제 문제)였다. 궁금증을 누를 길 없었다. 주인의 허락 없이 유리문을 밀고 책을 꺼냈다. 목차를 훑던 눈이 번쩍 뜨였다. 책장을 넘기며 무릎을 쳤다. 

책 사이에 꽂힌 몇 장의 라틴어 문서는 더욱 놀라웠다. 레오 13세 교종이 1891년 5월 15일에 공포한 ‘자본과 노동에 관한 회칙’인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새로운 사태)이었다. 입이 떡 벌어졌다. 고용주들의 무절제한 경쟁의 탐욕에 무참히 희생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유 재산을 공유화하고, 모든 재화를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주장을 낱낱이 비판하고 있었다.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관리를 통해 노동자의 자유와 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주장은 오히려 노동자의 투자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재산의 공유화는 각 개인의 타고난 권리를 침해하고, 국가의 기능을 변질시키며, 만인의 평화를 교란시킨다는 요지였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는 자연의 재화와 은총의 보화가 인류의 공동 유산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빈곤 구제 단체들을 설립 운영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직접 도와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허점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대안까지 내놓았던 것이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오기선 신부와 함께.


얼마쯤 지났을까. 등 뒤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앉아서 보시지 않고요?”

흠칫 놀라 돌아보니 오 신부였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치 않았다.

“신부님! 전 이제 모든 의문점의 마지막 고개를 이 방에서 넘었습니다. 저 영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오 신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그거 반가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런 결심을 이 난롯가에서 하시게 됐습니까?”

“제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빠져있을 때, 저는 가톨릭을 부르주아로 불렀거든요. 그런데 이 책과 이 문서가 날 지옥에서 구제해줬습니다. 이제 의심이 완전히 풀렸습니다.”

오기선 신부의 따스한 두 손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김 회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와 날 끌어안았다. 길 잃은 어린아이가 엄마를 만났을 때의 기쁨이 그럴까 싶었다.

“성모님! 제가 왔나이다.” [평화신문, 2014년 12월 14일,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

 

(5) 온 가족이 새로 태어나다

 

 

큰딸과 큰아들 첫영성체.


“… 김익진 프란치스코에게 세례를 줍니다.”

도쿄의 간다 거리에서 숙명적으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났다. 감성적인 측면에서 가톨릭에 큰 감동을 받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적 고뇌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이어 중림동약현성당 사제관에서 우연히 경제에 대한 가톨릭의 관점을 접했다. 이성적인 측면에서 가톨릭이 납득됐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념적 갈등이 해소되는 찰나였다. 거북 등처럼 갈라터진 땅에 단비가 내리는 듯했다.

나는 세례 받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가족들의 마음을 돌리는 게 급선무였다. 유교적 전통 속에서 살아오던 이들이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완고했다. 동도서기를 주장할 만큼 열려 있던 분이었다. 하지만 진리는 어디까지나 우리 쪽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서양에서 받아들일 건 기술이나 기기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달랐다. 하나밖에 없는 친아들이 이복형의 길을 갈까 늘 두려워하던 차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였다. 사별한 순천 박씨가 큰형 우진, 둘째형 철진을 낳았다. 어머니는 내가 큰형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그 역시 나를 끔찍이 아끼는 걸 보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런 큰형이 현해탄에 투신한 뒤부터는 태도가 달라졌다. 끈 떨어진 연처럼 방황하는 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혹시라도 큰형의 뒤를 따를까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내가 마음잡은 걸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어머니에게 제안했다.

“우리 모두 성당에 다니면 좋겠어요. 날 구해주신 천주님을 믿는 게 어떨지요?”

“성당이 어떤 덴진 모르지만, 우리 익진이를 꼭 붙들어준 걸 보면 틀림없이 좋은 곳일 게야.”

1936년 정월, 어머니 동복 오씨는 아녜스 성녀 축일에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우리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시작된 날이었다.

김익진의 어머니.


그러던 어느 날, 늘 밝던 어머니의 표정이 심각했다. 어머니의 한숨소리가 깊었다.

“저 장성 네거리에 골롬반 수도회라고 있대. 그 신부님들이 좀 근사한 성당을 짓고 싶은데, 땅이 없다지 뭐냐.”

장성은 일찍이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곳이었다. 선조들의 재실도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내 앞으로 많은 땅을 물려준 곳이기도 했다. 수도회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으며 언젠가 들은 부자 청년과 낙타의 비유가 떠올랐다. 문득 재물은 소용할 데에 쓰라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이 문제였다. 며칠간 곰곰이 생각하다 마침내 묘안이 떠올랐다.

“어머니, 장성 제봉산 아래에 있는 우리 과수원 아시죠?”

“암, 알다마다.”

“그 위에 성당을 지으면 어떨까요? 장성 읍내와 들판은 물론이고 황룡강까지 한눈에 다 보이잖아요. 그럼 많은 사람들이 성당 건물을 보며 궁금해서라도 찾아올 거 같은데요.”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러나 금세 시무룩해지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과수원 위쪽은 우리 땅이 아니잖니?”

“걱정 마세요. 장성 읍내에 있는 우리 땅을 내준다고 하면 그쪽 땅은 아주 쉽게 내놓을 거예요.”

말대로 이루어졌다. 읍내의 금싸라기 땅과 제봉산의 황무지를 바꾸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국 골롬반 수도회에 성당 지을 땅, 만 삼천 평을 봉헌했다. 백여 걸음 떨어진 바로 아래의 과수원에는 아담한 초가집을 지었다. 거기에 어머니와 막내 누이동생인 신득이 살도록 했다. 언덕을 넘어가면 바로 성당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길을 닦고 소나무를 심었다. 두 모녀가 평생 그곳에서 살 만큼 아름답고 평온하게 꾸몄다. 나중에는 내게도 마음의 고향이 됐지만 …….

아버지는 그 해에 선종했다. 비록 가톨릭에 입교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세례받는 걸 신기해 하며 흐뭇하게 바라보던 분이었다. 그 뒤 나와 가족들도 교리 교육을 받고 1937년 9월 26일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날 아내 이신영 모니카, 맏딸 우영 골롬바, 맏아들 효신 아오스딩(아우구스티노), 작은아들 충신 토마스가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됐다. 1925년에 시복된 한국 79위 순교 복자 축일이었다.

목포 집 서재에서.


“여러분은 천주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패트릭 모나한 신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여러분은 천주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죄를 끊어버립니까?”

우리 식구들의 합창이 우렁찼다.

“끊어 버립니다!”

나 김익진은 그렇게 과거를 참회하며 구령(救靈)과 영생(永生)의 길에 들어섰다. 맨발의 성자 프란치스코로 다시 태어났다. 그간 내가 벌였던 일 중 가장 잘 한 일이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불교를 넘나들며 방황했던 젊은 날을 마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토록 기쁜 날이 언제 있었던가. 세례식 내내 여러 차례 안경을 벗고 뜨거운 눈물을 닦았다. 갓난아기처럼 다시 태어난 감격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적처럼 내게도 일어났던 것이다.

세례 후 우리 가족은 모두 장성으로 이사했다. 과수원에 있는 어머니의 집 바로 아래에 집을 지었다. 세 칸 한옥에 양철지붕을 얹었다. 마당에는 빨간 장미와 흰 백합을 심었다. 한 쪽 구석에는 닭장을 만들었고, 그 뒤 텃밭에는 채소를 심었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집이었다.

성당으로 가는 솔밭 길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와 다름없었다. 주일마다 온 가족이 그 길에 올라섰다.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손을 맞잡고 걸었다. 우리 부부는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었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며 흥겨워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길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렸다. 소풍가는 날이 따로 없었다. 방랑길에서 누리지 못했던 행복에 흠뻑 젖었다. 성경 구절이 실감났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그런 행복은 그림책에서 만난 성모 마리아의 모성미로부터 비롯됐다. 그때부터 나는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을 공경하고자 했다. 묵주기도는 내게 음악과도 같았다. 동정 마리아의 반주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연주될 수 없었다. 묵주기도야말로 그리스도의 일생을 재현하는 뮤지컬이었다. 성모님의 반주가 있어 그리스도의 멜로디가 더욱 아름다웠다. 각 신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생각하면, 묵주기도는 인류 역사의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서로 엇갈리는 웅대한 교향곡이었다. 묵주만 손에 쥐고 있어도 힘이 났다.

세례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동(지금의 서울 혜화동) 성당을 찾았다. 오기선 주임 신부에게 내 뜻을 전했다.

“영세 본명을 프란치스코로 했으니 저도 그분의 길,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분이 향유하시는 행복을 지상에서부터 나누어 갖고 싶습니다.”

공교롭게도 내가 영세를 하던 날, 프란치스코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했다. 그에 발맞추어 오기선 신부와 이광재 신부가 프란치스코회 제3회에 입회했다. 나 역시 오 신부의 주선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해 착복식을 했다. 세례받은 지 두 달쯤 지난 11월 19일이었다. 평신도로서는 처음이었으니 감개무량하기 그지없었다. 흰 띠와 갈색 수도복이 그처럼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마치 프란치스코 성인이 된 느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청빈을 서약했다. 성인의 삶을 실천하고자 결심했다. 그러자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공에 솟구쳐 오르는 봉황처럼 자유로워졌다. 순간 환희의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주례하던 오기선 신부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바늘로 찔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나였다. 하지만 가톨릭을 알고 나서부터는 울보가 되고 말았다. 영락없는 눈물단지였다.

“주님! 오늘이 제 생일 맞죠?” [평화신문, 2014년 12월 21일,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

 

(6) 비우고 내려놓기

 

 

“오메! 참말로 땅을 그냥 준다고요?”

아담한 장성성당 바로 곁에는 어울리지 않게 큰 종탑이 서 있었다. 하지만 속 빈 강정처럼 그 안에는 종이 없었다. 더욱이 한국 최초의 콘크리트 성전 안에는 하느님을 찬송할 풍금조차 없었다. 새 성전 짓기에도 빠듯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중국 상하이에 종을 주문하는 한편, 서울에 가서 풍금을 사왔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심금을 울리는 풍금 소리는 여운이 풍부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거룩함이 솟아올랐다.

“그 양반 천주교 신자가 됐대. 알짜배기 땅까지 팔아서 성당 지으라고 줘버렸대.”

내가 가톨릭에 입교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목포와 장흥 일대의 지식인들과 유지들의 일대 관심사가 됐다. 명실공히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인텔리 아니었던가. 일거수일투족이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는 건 당연했다.

성탄절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잘 알고 지내던 외인 교사들에게 말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일세. 최초의 미사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었지. 그러니까 말뜻 그대로 크리스마스를 경축하는 데는 가톨릭 교회뿐 아닌가? 이번 크리스마스 때 우리 성당에 와서 보게.”

아뿔싸! 성탄 자정 미사에 술에 얼큰하게 취한 교사들이 정말 왔다. 그렇게 추운 날, 술 마시다 말고 미사에 올 생각을 했다니……. 때마침 나는 교우들이 많아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곤 반가워하며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렇게 사람이 많아서야 어디 미사 구경이나 하겠나?”

나는 급히 그들을 성당 옆으로 이끌었다. 옆문으로 들어가 그들을 제대 바로 앞에 앉게 했다. 우리 일행의 낌새를 챈 본당 신부의 얼굴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 나 역시 선교의 기쁨을 한껏 누렸다. 다음날 지청구를 사방에서 들었지만 말이다.

“술주정뱅이들을 미사에 끌고 오다니…….”

목포 북교동성당.


하지만 나로 인해 장성 일대가 가톨릭에 관심을 가졌던 건 사실이었다. 장성으로 이사한 이듬해에 79명이, 그 다음 해에도 42명이 세례를 받았다. 장성성당의 교세가 쭉쭉 뻗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외조카딸 영길이가 헐떡이며 달려왔다.

“아저씨! 큰일 났어요. 제 동생이 다 죽어가요.”

나는 일본인 의사를 데리고 단숨에 달려갔다. 이질이었다. 약을 지어 먹이자 한고비를 넘긴 듯했다. 그래도 다급한 상황이라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만에 하나 순탁이가 죽게 되면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자.”

외사촌인 오재복과 식구들이 모두 숙연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세를 줬다. 다행히 외조카는 며칠 뒤 건강하게 일어났다. 그 일을 계기로 외사촌 식구가 모두 그해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다. 순탁이는 나중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누나인 영길이는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해 수녀가 됐다. 우리 집 뜰에서 뛰놀던 김종남 로마노가 사제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한편 졸지에 남편을 잃은 큰형수도 나와 뜻을 같이했다. 26살에 청상과부가 돼 어린 남매를 키우던 그녀 역시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큰형의 빈자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웠던 것이다. 급기야 자신이 살던 좋은 집을 교회에 봉헌해 그 자리에 북교동성당이 들어섰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던 내 마음이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고 그 무엇이었으랴!

전남 장성성당 마당에 세워진 김익진 기념비.


나는 장성에 전통 차밭을 일구어 일본과 중국처럼 농업을 개량하고자 했다. 그리고 농업학교를 세워 기술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싶었다. 그 뒤 수도회를 초대해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 사업을 맡기고자 했다. 자그마한 하느님 나라를 일구고자 한 셈이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선 장성군 동화면 동호리 일대의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만여 평의 야산과 농지를 사들였다.

토지를 정리하고, 차밭을 조성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대동아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일본은 더욱 악랄해져 갔다. 탄피를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놋그릇과 놋수저를 강탈해갔다. 장성 성당의 종마저 떼어가 버렸다.

내 꿈의 터전 역시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다.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논밭을 마구잡이로 징발했다.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땅을 빼앗긴 건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하지만 토지 징발 과정에서 총독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들에 대한 분노는 참을 수 없었다. 일본에 대한 간사한 충성보다는 나에 대한 비열한 배신이 더 충격이었다. 그간의 내 호의와 자비를 그렇게 잔인하게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성에 터를 잡고 신심 깊은 교인으로 살고자 했던 지난 몇 년이 허망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경찰은 1945년 초에 나를 아무 이유 없이 장성경찰서에 가뒀다. 일본에 유학한 지식인임을 잘 알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런 내가 땅을 빼앗긴 울분 때문에 그들에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게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유학을 하고 온 나를 요시찰 인물로 주목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나의 홍군입대 경력을 그들에게 귀띔해 주었으리라는 짐작도 갔다.

“대한독립 만세!”

마침내 일본이 손을 들었다. 투옥된 지 6개월 만에 해방이 됐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은 잠시였다. 미군은 남쪽에, 소련군은 북쪽에 주둔하면서 분단이 시작됐다. 정치인과 정부 관리들이 나를 찾아와 미군정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미8군 정보처의 고문과 미군정의 자문을 맡아달라는 청이었다. 하긴 일본과 중국을 환히 알고, 일본어와 중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드물던 시절 아니었던가. 매일 미군 지프차가 집으로 와서 나를 데려갔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댔다.

“금방 고관대작이 되겠네.”

“몇 년 안에 이 장성 땅을 전부 사고 말 거야.”

부러움 반 시샘 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일은 오래 하지 않았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는 게 가슴 아팠다. 게다가 맨발의 성자를 따르고자 한 내게 재물과 지위는 걸맞지 않았다. 나는 미련 없이 손을 훌훌 털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찰서 감옥에서 한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라 생각했다. 한때나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부르짖던 사람이 지주로 산다는 게 늘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1945년 말 총 농가 206만 5,477호 가운데 자립농가는 28만 6,824호로 13.9%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자작을 겸한 소작농이거나 순소작농이었다. 묵상 중에 내 땅을 모두 소작농민들에게 나눠주기로 작정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비우고 내려놓았던 것처럼…. 성경 말씀이 결정적이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이들에게 모든 걸 내주고 싶었다. 장흥과 목포 일대의 소작농민들을 한 사람씩 불렀다. 1948년 정월 대보름 무렵이었다.

“형제여, 날 용서하시오. 지주 행세하며 토지세 받던 어제의 내가 아니오. 당신이 소작하던 그 논밭은 이제 당신 겁니다.”

일 년 뒤인 1949년 6월, 정부의 유상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었다. 나는 그 전에 무상으로 농지 개혁을 한 셈이었다. 소유권 양도 문서를 건네받은 농민들의 반응은 실로 다양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기만 하던 이, 기쁨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엎드려 절하던 이, 하염없이 흐느끼며 감사의 말을 쉬지 않고 하던 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이 그럴까 싶었다. 나 역시 온전히 비움으로써 모든 짐을 내려놓았다. 내게도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아버지! 위민(爲民)과 청렴(淸廉)을 이제야 실천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1월 1일,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

 

(7) 성가정 닮아가기

 

 

아내와 다섯 딸.


1948년 크리스마스 이브, 어머니 오 아녜스가 선종했다. 사별한 전처 소생인 두 형을 소리 없이 키워낸 분이었다. 해바라기인 양 평생 나만 바라보며 살았다. 늘 환하게 웃으며 시시콜콜한 일들을 맛깔나게 들려주었다. 일본에서 귀국해 중국으로 간다고 하자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마침내 할머니가 됐다며 아이들의 탄생을 누구보다 기뻐했다.

우리 집안에서 제일 먼저 가톨릭에 귀의했다. 성당 지을 땅을 기증하고, 그 아래에 살 집을 짓자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미사 드리러 갈 때마다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이 오솔길이 마치 천당 가는 길 같구나.”

그런 어머니가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과 평화를 맛보고 세상을 떴다. 그처럼 다행스런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장례를 치르자마자 그동안 가슴에 품었던 일을 실행하기로 했다. 언제부턴가 장성을 떠나고 싶었다. 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때 꿈의 터전을 빼앗긴 아픔을 잊고 싶었다. 그때 일제의 주구 노릇했던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 싫었다. 또한 내가 땅을 나눠준 농민들의 칭송도 부담스러웠다.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 미련 없이 떠나자.’

이왕이면 선조들의 고향으로 가고 싶었다. 마침 두 달 전에 결혼한 맏딸 우영이가 대구에 신접살이를 차리고 있었다. 사위 이철환은 경북 칠곡 신나무골 교우촌 출신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다. 결혼선물로 안팎에서 땀 흘려 일하라는 뜻으로 괭이와 빗자루를 줬다. 몹시 실망스럽고 서운했을 것이다. 하긴 둘째 딸 정영이가 시집 갈 때는 사위 김길수에게 덕담을 담은 <제우귀(題于歸)>라는 글만 주지 않았던가. 맏사위를 불러 일렀다.

“다 처분하고 이 돈만 남았네. 대구에 집 한 채 사놓게.”

280만 환을 건넸다. 대부분의 땅은 소작농들에게 나눠주고, 자투리땅은 광주교구에 봉헌한 뒤였다. 1949년 8월에 우리 식구는 그렇게 대구시 남산동으로 이사했다. 대지 80평에 건평 40평의 아담한 한옥이었다. 나와 아내, 그리고 2남 5녀의 자식들이 살기엔 그만이었다.

큰아들 효신과 둘째 아들 충신.


1926년 겨울에 혼인한 아내 이두필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선생의 후손이었다. 경북 영일군 신광면의 만석꾼 집안 막내딸이었다. 고생이라는 말조차 모르던 여인이 나를 만나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과 중국 유학에 이은 홍군 입대로 소식마저 끊기기도 했으니 얼마나 속이 탔을까. 그러다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 생면부지의 대구로 이사하자고 했으니 오죽이나 당황스러웠을까.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넘어서자 뒤주의 양식이 떨어지는 지독한 가난을 맞이하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내 뜻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나와 마찬가지로 대식구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지 걱정하지 않았다. 하느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루카 12,28-29).

우리 부부는 늘 단둘이 차를 마시며 사랑을 나눴다. 자스민차나 홍차의 달착지근한 향과 함께 속마음을 나눴다. 오랫동안 집안을 버리고 떠돈 것에 대한 참회의 시간인 셈이었다. 당면한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 시간이기도 했다. 비록 단칸 사랑방이었지만, 고대광실 부럽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셋째 딸에게 그런 은밀한 시간을 들키고 말았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던 모범생 화영이가 몰래 극장에 갔다가 정학을 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꾸지람 대신 우리 부부의 다과 자리에 끼워주었다. 화영이가 그날 마신 차의 맛과 향을 못내 잊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나는 아이들을 편애했다. 두 아들에게는 엄격했지만, 다섯 딸들에게는 자애로웠으니 말이다.

둘째 딸과 둘째 사위.


“아들은 나라의 자식이고, 딸은 내 자식이다.”

아들은 크고 강하게 커서 나라의 동량이 되길 바랐다. 반면 딸은 곱고 어여쁘게 자라서 현모양처가 되길 원했던 것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던 하느님 자녀의 참모습이었다.

장성에서 살던 어느 날이었다. 맏아들 효신이와 작은아들 충신이가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나는 둘을 마당 옆에 있는 커다란 곡간에 들어가게 했다. 거친 숨을 내쉬는 아이들에게 서릿발 같이 말했다.

“잘못을 뼛속 깊이 뉘우치기 전에는 나올 생각도 하지 마라.”

나는 큰 자물쇠로 곡간 문을 걸어 잠갔다. 눈이 휘둥그레진 일꾼들에게 큰소리로 명령했다.

“절대로 먹을 걸 넣어주지 마라. 내 말을 어기는 사람은 같은 꼴이 될 게야!”

아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감히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꾼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한없이 자비롭던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니었다. 그날 밤늦게 곡간 문을 열어주었지만, 끝내 저녁은 주지 않았다. 형제의 우애와 사내의 책임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를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내가 마냥 모진 아버지는 아니었다. 일제 말 효신이가 열서너 살 나던 무렵이었다. 세상을 보고 배우게 하기 위해 일본에 잠시 보내기로 했다. 이불과 작은 책상을 한데 묶어 어깨에 걸어 메게 했다. 봇짐에 일본도도 꽂아줬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체하며 일렀다.

“이제 너 홀로 설 나이가 됐다. 칼도 지니고 있으니 자신감을 가져라. 도쿄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마라. 전보치는 거 잊지 말고.”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효신이가 큰 짐을 지고 집을 나섰다. 아내는 뒤돌아보는 아들을 향해 연신 손을 흔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일꾼들과 동네 사람들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효신이의 뒤를 밟았다. 시모노세끼로 향하는 배도 따라 탔다. 물론 효신이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항구에 도착해 전보취급소를 찾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먼발치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효신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게 다가왔다. 마침내 나를 발견하곤 놀라며 울먹였다.

“아버지? 아, 아버지…….”

효신이는 여린 팔뚝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나는 그제야 달팽이집만한 짐을 벗겨 내 어깨에 짊어졌다. 땀에 흠뻑 젖은 짐이 꽤나 무거웠다. 아들의 온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괜스레 콧등이 찡해져 먼 하늘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도착한 도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화창하고 아름다웠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아이들은 내 의중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스무 살 난 효신이가 학도지원병으로 입대하겠다고 했다. 이듬해에는 열일곱 살 먹은 충신이도 해군에 입대하겠다고 했다. 아이들을 크고 강하게 키운 보람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아휴! 어쩜 자식들에게 저리 혹독하게 하는지 몰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쟁터에 자식을 보내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자식을 해외로 빼돌리거나 숨기는 부모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당시 미군정에서 통역하고 있던 내게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사로운 짓은 하느님의 정의가 아니었다. 나라가 없다면 자유와 평화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들의 등을 억지로 떠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국심으로 기꺼이 나섰던 아이들이 대견했다. 전선으로 가는 날,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였다. 목이 멨다. 어금니를 악물었다. 수저를 내려놓을 무렵에서야 비장하게 당부했다.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꼭!”

두 차례에 걸쳐 두 아들의 손을 맞잡았다. 그때마다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부모 자식의 끈끈한 정이 그런가 싶었다. 다행히 두 아들은 전선에서 무사히 돌아왔다. 혼란기를 지나며 아내와 일곱 자식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게 기적이었다. 아니,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주님께서 주신 생명, 주님께서 거두소서.” [평화신문, 2015년 1월 11일,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

 

(8) 교사의 길

 

 

1949년 8월초, 매미 소리가 한여름의 더위를 알리고 있었다. 우편배달부가 편지 한 통을 내려놓고 갔다. 발신자의 이름이 낯설었다.

‘김천 성의여자중학교 교장 최재선 신부’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석 달 전에 개교식을 했고 9월에 개학하는 학교의 초대 교감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주교의 명을 받고 보내는 글이라고 했다.

대구 남산동 성모당 앞에서


그제야 편지가 오게 된 사정을 짐작했다. 내가 빈 손으로 대구에 간다는 소식이 대구교구장인 최덕홍 요한 주교에게 들어간 모양이었다. 최 주교는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4년간 사목했다. 그러다 1949년 1월에 주교품을 받고 대구로 옮겼다. 나보다 4살 위인 최 주교와는 막역하게 지내던 터였다. 내 동향은 장성뿐만 아니라 목포에까지 퍼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또한 광주교구에 자투리땅을 마저 봉헌했으니 그 소식이 이웃 교구에 안 들어갈 리 없었다. 모든 걸 내려놓자 다른 길이 열린 것이다.

나는 교감으로 부임해 영어 교사도 겸했다. 나만큼 영어를 잘하는 교사가 드물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했다. 최 주교는 한 학기가 지난 이듬해 정월에 더 큰 소임을 맡겼다.

‘김천 성의여자중학교 교감 김익진 방지거. 임(任) 왜관 순심중학교 교장.’

어깨가 무거웠다. 하지만 그 소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부임한 지 4개월 만에 미8군 정보처 사람들이 찾아왔다. 해방 직후에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었다. 국가의 안위가 걸린 일이니 급히 도와달라고 했다. 그 길로 미군 지프차를 타고 최 주교를 찾아갔다.

“나라를 지키는 일이 급하다면 그리 해야지요.”

최주교는 나와 뜻을 같이 했다.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 여겼다. 나는 그날로 그들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며칠 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했다. 북한이 삼팔선을 넘어 침공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8군 소속 종군기자로 전선을 누볐다. 전쟁은 참혹했다. 밀고 밀리는 접전이 계속됐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아군은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금세 전쟁이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1ㆍ4후퇴의 고배를 마셨다.

그 와중에 만들어진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반공 포로와 친공 포로가 나뉘어 그들만의 전투를 하고 있었다. 어느날 미군 당국자가 전선을 오르내리는 나를 불렀다.

“당신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소. 어렵겠지만 중공군 복장을 하고 포로수용소에 들어가 주시오.”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내게 다급하게 말했다.

“친공 포로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고 있는 반공 포로들을 식별해 구출해주시오. 반공 의사가 분명하면 중공군뿐만 아니라 북한군도 은밀하게 데리고 나오시오.”

나는 수용소 안에서 물 흐르는 듯한 중국어로 반공 포로들을 구출해냈다. 수용소 밖으로 나와서는 막힘 없는 영어로 그들을 미군에게 인도했다.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하는 내게 딱 맞는 임무였다. 그간의 배움을 사람 살리는 데 쓰라는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었으랴!

지지부진하던 전쟁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미8군에서 더 이상 다급하게 할 일도 없었다. 유엔군사령부 요원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다는 제안도 거절했다. 재산과 지위를 내려놓은 지 오래된 나였다. 무작정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실을 안 교회는 나를 다시 학교로 불렀다. 1953년 4월, 경주의 근화여자중학교 교감으로 발령이 났다.

전쟁이 끝난 직후라 너나없이 먹고 살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도둑이 적지 않았다. 어느날 허름한 우리 집에도 밤손님이 들었다. 잠자다 인기척에 놀라 눈을 떴다. 검은 그림자가 반닫이를 열고 옷가지를 꺼내고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검은 몸통을 잡고 굴렀다. 한밤중의 소란에 온 식구가 안방으로 몰려왔다. 도둑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불을 켜고 보니 이제 막 솜털이 나기 시작한 십대 소년이었다.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소년에게 교사이자 아비의 마음으로 타일렀다.

“몹시 힘들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남의 것을 훔쳐서야 되겠느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내일부터 무조건 책을 읽어라. 네 힘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게다.”

나는 다음날 소년에게 임시 일자리를 구해줬다. 그도 하느님의 귀한 자녀라는 자존감을 갖길 바라며……. 그리고 몇 년이 지났을까. 소년은 듬직한 청년이 돼 찾아왔다. 큰절을 한 뒤 말문을 열었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 경찰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셨으면 도둑으로 한평생 지낼 뻔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청년은 방바닥에 엎드려 한없이 흐느꼈다. 우리 식구 모두가 기쁨의 눈물을 찍어낸 건 물론이었다.

나는 2년간 교장 신부를 도와 근화여자중학교 교감으로 재직했다. 물론 전처럼 영어 교사도 겸했다. 그러면서 여성들에게 실업과 기술 교육을 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내 다섯 딸들에게 그랬듯이……. 실제로 나는 둘째 딸 정영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고등기술학교 양재과에 가길 원했다. 여성들은 가사 일을 잘 배워 현모양처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부임 이듬해 추석 무렵이었다. 교육청에서 추석 전날까지 수업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교무실이 술렁거렸다. 고향이 먼 교사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추석을 쇠러 가지 말라는 거잖아요.”

학생들에게 엄하기로 소문난 수녀도 거들며 나섰다.

“우리 여학생들도 이럴 때나 집에서 일을 배워야죠. 송편도 빚어보고, 전도 부쳐보고요. 현모양처 교육이 별건가요?”

학생들이 ‘할매’ 별명을 붙여준 수녀는 나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셋째 딸 화영이가 근화여중에 다니던 때였다. 아버지가 교감이자 영어 교사로 있으니 적지 않게 부담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더욱이 내가 부임한 학기에는 한 학년에 한 학급만 있었으니 더욱 그랬던 듯했다. 화영이는 아버지가 답을 몰래 가르쳐주리라는 급우들의 의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급기야 기말시험에서 영어 답안지를 백지로 냈다. 그 사실을 안 나는 교무실에서 백지 답안지를 자랑스레 흔들었다.

“이거 보세요. 우리 딸이 영어시험에서 빵점을 먹었어요!”

그런데 그때 회초리를 들었던 담임 교사가 바로 ‘할매’ 수녀였다. 화영이의 종아리를 치며 그렇게 꾸짖었단다.
 
“우리 교감 선생님은 한국의 체스터턴이시다. 화영이 네가 교감 선생님 얼굴에 먹칠을 했다. 알겠나?”

그런 응원군이 포문을 열자 힘이 솟았다. 나는 그간 품었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추석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추사이망의 날(지금 위령의 날)입니다. 가족 친지들이 화목하게 지내고, 보름달을 보면서 자연미를 키우는 것도 큰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날 낳아주신 조상님과 풍요로움을 내려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그게 진정 산교육 아닙니까?”

교무실이 떠나갈 듯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에 놀란 학생들이 교무실 안을 기웃거렸다. 마침 교장 신부가 며칠 자리를 비워 내가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추석 전날 학생들을 등교시키지 마세요.”

다행히 교장 신부도 교육청도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 내 진심을 알아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근화여중의 운영권이 대구교구에서 성바오로수녀원으로 이양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2년 임기를 채운 나는 미련 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교육자로서 내게 맡겨진 소임은 거기까지라고 여겼다.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8군 정보처에서 일할 무렵부터 관여했던 일이었다. 「가톨릭시보」(지금의 가톨릭신문) 편집동인의 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시보 관계자들의 눈이 보름달만큼 동그래졌다.

“정말 무보수로 봉사하겠다는 겁니까?” [평화신문, 2015년 1월 18일,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 교육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

 

(9)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나는 「가톨릭시보」의 편집동인으로 봉사하는 한편, 문필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했다. 그간 가슴에 품어왔던 걸 글로 풀어내는 일이 즐거웠다. 특히 그리스도교와 우리의 문화를 접목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가톨릭 교회가 우리의 고유한 전통과 신앙 안에서 육화(肉化)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자연스럽고도 효과적인 선교의 길이라 여겼다. 아울러 우리 교회의 발전과 개혁에 도움이 될 만한, 바티칸을 비롯한 외국의 글들을 번역해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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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유적지에서 김익진 선생.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런 내 생각에 날개를 달아 준 일대 전기였다. 요한 23세 교종이 1962년에 소집해서 바오로 6세 교종이 1965년에 폐막한 공의회는 교회의 현대화를 촉구했다. 평신도의 사도직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개별 민족을 존중하는 문헌이 잇따랐다. 그에 따라 미사도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서서 자국어로 드릴 수 있게 됐다. 미사가 공동체 전체의 행위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미사 끝날 때의 강복이 가슴 속에 파고들었다. 감동이 물결치듯 일었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라틴어로 ‘베네디깟 보스 옴니뽀뗀스 데우스 빠떼르 엣 필리우스 엣 스삐리뚜스 상뚜스’(Benedicat vos omnipotens Deus Pater et Filius et Spiritus Sanctus)라 하지 않았던가. 감격적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교회 건축과 미술과 음악은 물론이고, 기도문도 쉬운 우리말로 바꿀 수 있게 됐다. 나는 문필 작업을 통해 공의회 정신을 실현하고, 우리 교회에 기여하고 싶었다. 로마 가톨릭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가톨릭의 토착화에 대한 생각은 신라 천 년의 고도인 경주에서 살며 구체적으로 모양을 갖춰나갔다. 우리의 전통문화 유산에 대한 참맛을 보며 자부심과 자긍심이 샘솟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정치의 수도는 서울이고, 달러의 수도는 부산이며, 예술의 수도는 경주지. 그러니까 진짜 서울은 경주 아닌가?”

어릴 적 큰형의 방에서 키웠던 예술미, 그리고 북경대학에서 전공한 미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경주박물관과 손을 잡고 박물관학교를 만들기도 했다. 주말에는 학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문화 유산의 아름다움을 실감나게 일러주었다. 안압지에 있는 임해전(臨海殿)을 찾을 때마다 학생들이 물었다.

“선생님! 여기선 바다도 보이지 않는데,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죠?”

나는 신이 나서 설명하곤 했다.

“임해전은 글자 그대로 바다를 내려다보는 집이라는 뜻이지. 여기서 바다는 안 보이지만, 안압지의 저 수면이 한없이 펼쳐진다고 상상해봐. 그럼 저 멀리 떨어진 바다가 바로 코앞이라고 느껴지지 않니? 작은 연못에서도 바다를 느낄 수 있도록 설계했던 옛사람들의 지혜란다.”

첨성대는 겨울 풍경이 가장 신비로웠다. 눈 내린 화강암에 석양빛이 깃든 자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자그마한 건축물이지만 1300여 년 세월이 묻어나는 유구함 앞에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석굴암은 신라 문화의 백미였다. 어두운 밤, 석굴에서 촛불을 켜면 12면 보살의 옷자락이 물 흐르듯 부드럽게 흩날렸다. 촛불의 위치가 바뀌고 흔들릴 때마다 본존 여래불의 얼굴은 다채로운 미소를 띠었다.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나 할까.

경주의 매력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나는 문화유산마다 감상하는 법이 달라야 한다고 외쳤다. 우리 문화는 그만큼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만큼 소중했다.

“신라의 고분 앞에 서면 신발을 벗고 풀밭을 걸어야 제맛이지.”

제사만 해도 그랬다. 초기 교회 때에는 윤지충 바오로가 제사를 지내지 않고 위패를 불살라 순교했다. 북경 구베아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령에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1939년 12월 8일에 비오 12세 교종은 조상 제사가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효심의 발로인 유교 제사가 그리스도교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을 떠난 조상을 살아 있을 때처럼 모시는 제사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제4계명과 어찌 다를까.

어느 설날, 차례를 지내고 나서 음복하고 있었다. 막내딸 경영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우린 왜 다른 집하고 차례 지내는 게 달라요?”

나는 이때다 싶어 빙 둘러앉은 가족 친지들을 행해 일장 연설을 했다.

“가톨릭이 이 땅에 뿌리내리려면 우리의 전통문화를 잘 끌어안아야 해. 지방을 쓸 때 세례명을 넣으면 그리스도교식이 될 수 있잖아. 차례는 예전처럼 과일과 떡국을 진설하되 조상님을 위해 연도 바치고, 참석 못한 친척들을 위해선 묵주기도 바치면 되는 거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분위기가 나를 더욱 부추겼다.

“전례 음악만 해도 그래. 우리의 악기와 악곡을 교회의 전례에 넣어야 해. 시골 본당들은 이미 농악대가 있으니까 사설만 우리 그리스도교식으로 바꾸면 되잖아. 그러면 외인들이 익숙한 가락을 통해 우리와 한 데 어울릴 수 있지 않겠니? 비신자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가톨릭에 젖어들 테니 그보다 효율적인 선교가 또 어디 있어?”

식문화도 매한가지였다. 우리의 전통적인 음식으로는 단연 개장국을 들 수 있었다. 개장국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가톨릭 정신이 흠뻑 젖어 있는 음식이었다.

‘부활 축일에 개를 삶고 술을 걸러 온 마을 교우들과 함께 희락경(지금의 부활삼종기도)을 외우고 노래를 불렀나이다.’

‘황사영 백서’에는 초기 가톨릭 신자들이 개를 잡아 술 마시며 부활의 기쁨을 누렸다고 적혀있다. 목숨을 걸고 길가에 앉아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그리곤 포졸들에게 들통이 나 모두 붙들려가 순교했지만…….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올해 부활에는 서양식인 부활 계란(Easter egg) 대신 민족음식인 도그탕(Easter dog 국)을 먹읍시다. 신앙 선조들이 경기도 여주 어느 깊은 산 속에서 벌였던 부활 잔치에 한몫 끼어봅시다.”

내가 유학과 불교를 연구하는 동방 문화 연구 기구를 창설해야 한다고 한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였다. 타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가톨릭 정신이 더욱 풍부해지고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스도교 정신이 민속의 미풍양식과 일치할 때, 민족 문화의 그리스도교화가 실현될 것이었다. 우리 것도 모르면서 외국 것만 추종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는 없었다. 몸은 우리나라 사람이지만, 정신은 외국인인 ‘국산품 외국인’이 되는 어수룩함에 빠지는 걸 경계했다.

“진정한 한국인이 되려면 촌놈이라야 하고, 개장국을 먹을 줄 알아야 하며, 막걸리를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막걸리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덧붙여야겠다. 나는 경주를 방문한 주한 외교사절의 안내를 도맡다시피 했다. 여러 언어를 구사할 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과의 술자리가 길어져 자정이 되면 으레 괘종시계 추를 붙들어 맸다. 물론 술은 막걸리였고, 안주는 우리의 문화와 전통과 역사였다. 우리 것을 자랑하느라 흥이 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외국인들에게 말했다.

“한국인들은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흐르는 세월을 동여매 놓고 놉니다.”

그러면 벽안의 외국인들도 박장대소하며 내 뜻에 흔쾌히 따르곤 했다. 밤새도록 우리의 문화와 역사와 전통이 전 세계를 향해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그때 비로소 아버지의 유훈을 실천하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평생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금과옥조를…….

“신학문을 배우기 이전에 동양 사천 년의 역사와 동양 종교가의 학설을 아울러야 해. 그때 스스로 깨닫고 일어서게 될 게야.”

동도서기론을 실현한 듯한 기쁨도 있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과 문화를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과 기기 등을 받아들이자던 크고 넓은 마음을…….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1월 25일,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 교육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

 

(10 · 끝) 장님이 된 프란치스코

 

 

수입이 거의 없어서 가재도구와 아내의 패물들이 팔려 나갔다. 자식들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 할 지경이었다. 간간이 글을 써서 받는 고료가 수입의 전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심낙원 출간.


초근목피라는 말이 연상되던 어느 봄날이었다. 반가운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 영어판 「레지오 마리애」 교본을 한국어로 번역해주시기 바랍니다. 번역료로 500달러를 미리 보내드립니다. … 1955년 3월 15일. 광주교구장 현 하롤드 주교.’

작년까지 광주교구장 서리로 목포 산정동본당에서 사목했던 주교였다. 1953년 5월 31일에 현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로 산정동본당에 레지오 마리애 남성, 여성, 혼성 쁘레시디움을 세웠다. 말하자면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산파역이었다. 번역 의뢰는 모든 걸 나눠주고 떠난 나를 위한 배려였다. 아니, 하느님이 베풀어준 은혜였다. 나는 곧바로 번역에 착수해 이듬해 유월에 「레지오 마리애 직무 수첩」을 냈다. 그것이 한국 교회에 레지오 마리애가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됐다.

그 무렵 나는 미국 예수회의 주간지 「아카데미」에 실린 서평을 보고 꼭 번역하고 싶은 책이 한 권 있었다. 우징숑(吳經熊)의 「동서의 피안」이었다. 저자는 사상 편력 끝에 느지막이 가톨릭에 귀의한 중국의 법리학자였다. 그 책에서는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과 성경의 말씀을 비교하며 진리를 찾고 있었다. 동서양의 종교 사상을 비교 분석하여 동서를 초월한 피안의 세계가 바로 그리스도교임을 제시했다. 일종의 자기 신앙고백서였다. 나는 당시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던 우징숑 박사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 저는 일본과 중국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불교 등을 섭렵하다 가톨릭에 귀의했습니다. 선생님도 저와 비슷한 길을 걷다 가톨릭에 입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선생님의 귀중한 책을 번역해 한국의 지식인들이 영적으로 깨우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얼마 후 답장이 왔다.

‘… 형이 영세하신 것이 저와 같은 해이기는 하지만, 주님께 나아가기를 저보다 두 달이나 먼저 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느님의 뜻이기에 마땅히 형으로 모시겠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저자였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위인 그는 나를 영적인 형으로 불렀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나는 그 책을 번역하는 데 꼬박 7년이란 세월을 들였다. 영어판 책을 적당히 의역하고 싶지 않았다. 한문으로 쓰인 원문을 꼼꼼히 대조하며 번역해나갔다. 미심쩍은 대목이 있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인 신부와 교수들을 찾아가 의견을 들었다. 마침내 1961년 12월에 가톨릭출판사에서 번역판이 나왔다. 지식인들은 동서고금을 아우른 걸작에 환호했다.

나는 여세를 몰아 우징숑의 또 다른 신심 서적인 「내심낙원」 번역에 착수했다. 저자는 그 책에서도 동양 철학을 통해 그리스도교 사상을 탐구했다. 극기, 온유, 박애, 평화, 기쁨을 통해 사랑의 발아, 개화, 결실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저자의 삶과 견해가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낄수록 더욱 신중하게 번역에 임했다.

1966년 4월, 성바오로출판사에서 소포가 도착했다. 드디어 「내심낙원」 번역본이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소포를 뜯는 순간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눈알이 쏟아질 것 같이 흔들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앞이 희미하게 보였다. 안과 의사의 목소리가 근엄했다. 

“왼쪽 눈은 완전 실명! 오른쪽 눈은 망탈(網脫), 안저생혈(眼底生血)입니다.”

신경과로로 인한 고혈압 때문이었다. 번역을 위해 일 년 동안 객지에서 주야로 과로한 탓이었다. 나는 이미 「동서의 피안」 번역에 몰두하던 6년 전에 왼쪽 눈을 실명한 처지였다. 그때도 신경과로가 원인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쪽 눈마저 그리되었다니…….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눈이 아파 글을 통 쓸 수 없었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하느님을 원망하며 따지기도 했다.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그러나 그때 어두움 속에서 분명하게 깨달은 게 있었다. 시력을 잃어 고생하고 있는 건 회심에 필요한 주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게 진정한 통회의 생활을 하라는 계시였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묵상 기도 중에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세속에서 멀리 떠나 내심의 낙원을 더욱 절실히 맛보아라!”

나는 하느님이 내려주는 고통의 은혜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내 통회와 보속이 끝나는 날 건강을 되돌려 줄 것이라 믿었다. 그날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문서 전교에 힘을 쏟으리라 다짐했다.

내 영적 지도자이자 동반자인 오기선 신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셋째 딸 화영이를 지팡이 삼아 사제관을 방문하자 오 신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허! 큰일 났군요. 두 눈이 저렇게 어두워서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답했다.

“내 주보이신 오상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도 봉사가 돼 세상을 마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눈을 잘 못 보는 것까지도 그분을 닮으렵니다.”

1967년 초겨울, 아내와 나는 대구 대명동에 있는 대지 40평에 건평 15평의 시멘트블록 집으로 이사했다. 가르멜 수도원 근처였다. 나는 매일 2㎞를 걸어가 수도원 성당에서 성체조배와 묵상을 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하느님에게 의탁하는 시간이었다. 텅 빈 껍데기에 밝은 빛이 넘치도록 가득 차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하루에 한 시간씩 노인들에게 시조창을 배웠다. 목소리를 길게 빼기도 하고 떨기도 하며 천천히 시조를 읊조렸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마음이 유쾌해졌다. 뿐만 아니라 심호흡을 하면서 내장 운동을 하게 돼 소화에도 도움이 됐다. 우리 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여백의 미를 즐겼다. 날이 갈수록 지치고 힘들었지만, 지나온 날을 성찰하며 지복직관의 희망을 꿈꾸었다.

“아버지!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화영이의 목소리에 빛바랜 사진첩이 스르르 닫힌다. 애련한 음성이 찻집 분위기와 어울린다. 은은한 차향이 감미롭다. 비발디의 ‘사계’가 대미로 치닫고 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내 선종 준비로 눈병을 허락하신 게 틀림없구나. 난 삼왕이 아기 예수를 찾아오신 날 떠나고 싶어.”

장례미사.


수녀가 안경을 벗고 눈가를 훔친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오래 오래 저희 곁에 계셔주세요.”

나는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약속한다.

“우리 수녀님이 원하면 그러지 뭐.”

난 그날 화영이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한 달 뒤인 1969년 12월 29일에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64세 되던 1970년 1월 6일에 눈을 감았다. 삼왕내조축일(지금의 주님 공현 대축일)이었다. 인자한 주님이 내 소원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일본과 중국 유학을 하며 진리를 찾아 방황했다. 마침내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나 가톨릭을 알게 됐다.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찾았다. 그 뒤 가진 걸 나누고 봉사하며 빛과 소금처럼 살고자 애썼다. 평생 지니고 다녔던 곰방대와 만년필만 남겼다. 

나를 인도한 맨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긴 한 건가. 후세의 우리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나와 같은 평신도가 이 땅에 살다갔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길까. 아니, 기억이나 해줄까. 내 장례 미사는 대구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됐다.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덕분에 범물동 성당묘지의 묘비명이 참 길다.

‘天主公敎會友方濟各安東金公益鎭之墓(천주공교회우방제각안동김공익진지묘)’ [평화신문, 2015년 2월 1일,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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