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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쓸모없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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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16 ㅣ No.1794

[지금 여기, 복음의 온도] 쓸모없어도 괜찮아!

 

 

“우리나라는 사회복지를 좀 줄여야 돼요! 일 안 하고 놀고먹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대한민국이 점점 빨갱이 세상이 되어간다며 걱정하는 어느 택시기사의 말이다. ‘사회복지’를 ‘사회주의’란 말과 헷갈려하는 것 같았다. 근데 일 안 하고 놀고먹게 만드는 것이 사회복지가 아니요 사회주의는 더더욱 아닐 텐데 SNS에 떠도는 반사회적 괴담과 막말들을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저렇듯 아무렇게나 이야기하는 것이다. “근데 일 안 하고도 놀고먹을 수 있는 세상이면 그게 빨갱이 세상이든 뭐든 간에 좋은 세상 아닙니까?” 그 택시기사에게 이렇게 대꾸하니 나를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본다.

 

사실 그 택시기사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실제로 사회복지를 예산낭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자리한다. 사회복지란 것이 쓸모도 없는 것에 공을 들이는 짓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서 ‘쓸모없는 것’이란 결국 ‘쓸모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쓸모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투자’가 되지만 쓸모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낭비’가 된다는 철저히 영리적인 사고로 사회복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쓸모없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 택시기사의 말대로라면 일 안 하고 놀고먹는 사람을 뜻하겠지만 실제로는 일을 안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일을 못하는 사람들 모두를 의미한다.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의 처지가 일 안 하는 게으름뱅이와 어찌 같을까마는 그저 그들 모두를 사회에 보탬이 안 되는 쓸모없는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사회복지란 단지 예산낭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시선은 사실 은연중에 우리 삶 저변에 깔려 있다. 쓸모없음, 무능함, 무기력함에 대한 경멸과 혐오의 시선들이다. 노동자들을 부지런히 착취하는 악덕 기업주보다 하는 일 없이 배회하는 거리의 노숙자를 더 한심하게 바라보는 시선, 일도 안 하고 쉽게 돈을 벌려고 한다며 걸인에게 동전 하나도 내어주지 않는 모습, 나이 먹도록 취직도 못하고 집에서 빈둥댄다며 못마땅해 하는 부모의 잔소리, 집값 떨어진다며 장애인 시설을 혐오시설인 듯 배척하는 지역주민들의 이기심이 다 그렇다. 그렇게 이 시대 쓸모없는 이들의 삶이란 이유 불문하고 사회적 낭비에 불과할 뿐인 거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쓸모없는 사람보다 쓸모 있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좋은 세상 아닙니까? 쓸모없는 것보다 쓸모 있는 것에 공을 들이는 것이 맞는 것 아닙니까?” 틀린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이 말, 그러나 이 말이 정말 맞는 말일까?

 

아니란다. 예수님께서 그러신다. 그거 아니라고!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느님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그러니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0.34-36)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삶이다. 쓸모 있음과 없음을 구분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 그리하여 모든 이들을 이롭게 하는 공동선의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 말씀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포도밭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밭에 나와 일한 일꾼에게나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는 저녁이 가까운 오후 다섯 시쯤에 나와서 일한 일꾼에게나 한 데나리온이라는 똑같은 품삯을 지불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얼마나 불합리한가! 아니나 다를까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일한 사람들이 포도밭 주인에게 따져 묻는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 20,12) 일 안 하고 놀고먹는 사람들이 없도록 사회복지를 줄여야 한다는 그 택시기사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포도밭 주인은 대답한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마태 20,14-15) 이 모습, 그야말로 낭비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하늘나라의 모습이 바로 이런 거라고 말씀하신다(마태 20,1 참조).

 

이처럼 쓸모와 낭비를 따지지 않는, 모든 이를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은 복음서 곳곳에서 드러난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은 좋은 땅에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 위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도 떨어지고(마태 13,1-9 참조) 하늘나라 혼인잔치에의 초대는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모두에게 이루어지고(마태 22,1-14 참조) 아버지의 사랑은 곁에서 열심히 일한 큰 아들에게나 집 나가서 가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에게나 한결같다(루카 15,11-32 참조).

 

그러면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부당하다 말할 수 있을까? 만일 하느님의 사랑이 쓸모를 따진다면 비천한 히브리인들이 어찌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겠으며 나아가 우리 중에 그 누군들 하느님의 자녀라 나설 수 있을까! 그러니 어찌 우리가 서로를 향해 쓸모를 따지고 낭비를 논하겠는가!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 자체가 그 시작부터 쓸모없음과 낭비의 연속이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면 그 쓸모없음과 낭비를 감내하는 무모한 사랑의 연속이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갓난아기를 가장 필요한 존재로 받아들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은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던가! 우리의 존재는 쓸모없음과 낭비를 감수하는 무모한 사랑에서 시작되고 형성되어 간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내 덕분에 일도 안 하고 놀고먹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라니!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는 그 바위 아래 뿌리내린 꽃나무에게 으스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바위 덕분에 비바람을 피해서 자라는 꽃나무는 바위에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소나무는 송충이에게 과시하지 않고 송충이는 소나무에게 기죽지 않는다. 그렇게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며 울창한 숲을 이룬다. 그렇게 우리도 쓸모를 따지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서 울창한 숲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쓸모 있어 좋은 게 아니라 네가 있어서 그냥 좋은 것, 그것이 우리 사는 세상이어야 하지 않겠나!

 

김용태 - 대전교구 소속 사제. 도마동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으며 교구 정의평화위원장을 맡고 있다.

 

[생활성서, 2020년 11월호, 김용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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