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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 주교의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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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17 ㅣ No.594

장익 주교의 삶과 신앙


종교를 넘어 언어와 예술까지… 깊은 영성과 넓은 식견 겸비한 목자

 

 

병상에 누운 장익 주교 손에 때때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자그마한 나무 십자가를 쥔 손이었다. 암세포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주치의에겐 평소 진통제도 필요 없다고 해뒀다.

 

7월 말경 장 주교를 병문안하고 온 이들은 한결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주교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함께하고 있는 듯하다”고. 평소 장 주교 곁을 지킨 춘천교구 사회사목국장 김학배 신부는 “진통제도 마다하신 주교님께선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셨다”고 말했다. 마지막엔 눈을 뜰 힘조차 없던 장 주교는 자신을 찾아온 이들의 인사에 말없이 눈물로 대답을 대신했다. 8월 5일 오후 6시 9분. 예수님께선 그의 고통을 거둬 가셨고, 장 주교는 비로소 세상의 십자가를 내려놓았다.

 

초대 주미대사이자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 박사의 삼남, 김수환 추기경의 비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한국어 교사라는 굵직한 이력은 장 주교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다.

 

2010년 16년간의 춘천교구장직을 내려놓고 은퇴한 그가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 중 하나는 아버지 장면(요한, 1899~1966) 박사의 삶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운석장면기념사업회 이사로서 아버지의 정치적, 외교적 삶과 신앙의 발자취가 재조명되기를 바랐다. 어느 자리에 있건, 어떤 역할을 맡건 언제나 반듯하고 정확했던 그의 성격은 장면 박사와도 닮아있다. 집안끼리 친분이 있어 어린 시절부터 장 주교를 알고 지내온 권경수(헬레나) 전 이화여대 교수는 “자기 자신에겐 엄격하고, 교회에 헌신했던 주교님의 삶은 아버지 장면 박사의 가르침과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한국어 선생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식과 103위 성인 시성식을 위해 한국을 찾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어로 미사를 주례해 한국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교황의 한국어 실력은 오롯이 장 주교의 공이었다. 바티칸에 한국 대사관이 없던 시절 교황청립 그레고리안대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장 주교는 한국 교회와 교황청 다리 역할을 하며 교황의 한국어 교사가 됐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장 주교가 영어는 물론 여러 유럽 언어에 능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믿고 맡겼다. 장 주교의 언어 구사 능력엔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어쩌다 보니 여러 나라에서 공부하게 됐고, 공부하려면 그 나라 말을 먼저 알아야 하니 책 보고 배워서 조금 말할 줄 알게 된 것”이라고 했다.

 

보편 교회와 한국 교회 두 수장 곁을 지킨 그에게도 때때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지만, 그는 항상 두세 걸음 물러나 있었다. 한홍순(토마스)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는 “1960년대 말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김수환 추기경님 비서로 동행했던 장 주교님을 뵌 적이 있는데 추기경님을 빈틈없이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을 모시는 데는 정말 최고라는 생각을 했다”고 회고했다.

 

 

춘천교구 첫 한국인 교구장 주교

 

장 주교는 서울 세종로본당 주임을 맡던 중 1994년 춘천교구장 주교로 임명됐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는 한없이 서툴렀던 그는 자신의 주교 임명 사실조차 본당 신자에게 제때 알리지 못했다. 신자들은 주임 신부가 주교가 됐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전해 들었다. 게다가 장 주교는 자신을 챙기고 무언가 소유하는 데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이 살았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 생기면 주변 사람에게 모조리 나눠줬다. 겨울 외투 한두 벌로 십수 년을 지낸 그는 “혼자 사는 노인이 무슨 옷이 필요하냐”며 웃을 뿐이었다. 자신이 지내는 공소 사제관으로 찾아온 이들에겐 손수 만든 파스타를 대접하곤 했다. 그와 함께했던 이들이 “그렇게 겸손하고 검소하실 수가 없다”고 입을 맞춘 듯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예술적 조예로 가톨릭미술가회 지도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장 주교는 오랫동안 가톨릭미술가회를 지도하며 교회 미술 발전에 애써왔다. 미술가들이 있는 곳에는 장 주교가 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는 사제시절 가톨릭미술가회 회원들을 주일마다 만나 전례와 교회 역사를 직접 가르쳤고, 성당 건축에 미술가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춘천교구장 시절에는 교구에 작은 공소 하나를 지어도 꼭 미술가들과 상의하도록 했다. 장 주교의 묵상 글에 그림을 그리며 10년간 춘천교구 달력을 만들어 온 김형주(이멜다) 화백은 “주교님께서는 작품에 담긴 작가의 숨은 뜻도 알아채실 정도로 작품을 보는 깊이가 남다르셨다”고 말했다. 그의 미적 감각은 집안 내력에서 기인했을 터다.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을 지낸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이 그의 작은 아버지였다. 그는 교회 미술의 중요성과 예술 작품이 지닌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춘천교구가 생긴 이래 55년 만에 탄생한 첫 한국인 교구장 주교였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외국인 사제들이 닦아 놓은 터에 장 주교는 기틀을 세웠다. 그가 춘천교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교구 본당은 38개에서 58개로 늘었다. 교구 사제는 58명에서 97명으로 신자는 5만 2000명에서 7만 7000명으로 증가해 교구 성장을 이끌었다. 겉으로 보이는 성장만큼이나 사제와 신자들의 신앙은 한층 깊어졌다. 성서백주간을 한국 교회에 처음 도입했던 만큼 신자들이 말씀의 삶을 살기를 강조했다. 이와 함께 교구의 첫 한국인 주교로서 외국인 사제와 주교가 미처 보듬지 못한 교구민 정서와 교구 사정을 살뜰히 살폈다. 교구 사제들은 “주교님께서 당시 생각지도 못한 제도를 만들어 실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며 “교구 사제라면 누구든 주교님께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 사목에 큰 관심, 나눔과 사랑 실천

 

신부시절부터 남북 화해와 일치를 위한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1987년 북한을 방문했던 장 주교는 북한 형제를 돕는 일이 신자들 일상에 스며들도록 노력했다. 한솥밥한식구 운동을 펼치며 교구 내에 한삶위원회를 설립, 인도적 대북 지원에 앞장섰다. 이 밖에도 함흥교구장 서리였던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북한에서 순교한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와 덕원자치수도원구, 함흥교구 및 연길교구 사제들의 시복 예비심사도 기꺼이 도맡았다.

 

장 주교는 생전 가까운 이들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갖추며 살가운 곁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찬찬히 사랑을 전해줬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춘천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이곳에 뼈를 묻겠다”고 했고 그의 다짐대로 많은 이의 기도 속에 춘천 죽림동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16일, 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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