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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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교부들의 신앙: 빛이신 예수님 -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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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25 ㅣ No.586

[교부들의 신앙 – 빛이신 예수님]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빛’을 만드시어 ‘빛과 어둠을 가르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셨다”(창세 1,3-4 참조). 첫째 날에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넷째 날 한 번 더, 빛과 어둠을 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1,16-18).

 

 

빛과 어둠, 그리고 식별

 

두 번 반복되는 ‘빛과 어둠을 가르셨다.’는 말씀을 두고 이런 묵상을 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도 빛과 어둠을 가르시기 위해 두 번이나 노력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빛과 어둠을 가르고 구별하고자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또 어떠한 것을 얼마나 쉽게 빛이라고 혹은 어둠이라고 단정 짓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빛과 어둠을 가르신 분께서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단지 주위를 밝혀 볼 수 있게 하는 데 그치지는 않습니다. 완전한 어둠 속에 있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공간도 느끼지 못합니다. 시간 감각을 상실해서 낮인지 밤인지,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공간도 느끼지 못합니다. 더듬더듬 조심스레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빛이 없으면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그때 빛이 밝혀지면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넘어, 새롭게 시간과 공간이 주어집니다. 결국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선물하셨다고 불 수 있습니다.

 

빛이신 그분과 함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요한 20,19)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잔혹 행위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제자들은 그들의 집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닫아걸었습니다. 어떤 빛도 그들의 감각에 와 닿지 못하도록 완전히 차단한 채 갈수록 더 큰 슬픔에 젖어 들었고, 밤의 어둠도 갈수록 더 큰 슬픔에 젖어 들었고, 밤의 어둠도 갈수록 더욱 짙게 스며들었습니다. 어떤 어둠도 그들이 느낀 슬픔과 두려움의 어둠과 견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위로와 충고의 빛으로도 그것을 옅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베드로 크리솔로고, 「설교집」, 84,2).

 

 

빛이 실현하는 쇄신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놓인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두려움에 닫았던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변한 것입니다.

 

빛이신 분을 모셔 들임으로써 제자들은 빛과 어둠을, 선과 악을,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육신도 모두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참조)라는 말씀처럼, 옳게 두려워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간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구원자께서 오시어 참빛을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빛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어둠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이 어둠이 그들을 눈멀게 하고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해가 눈이 병든 이들을 밝히려고 환한 광선을 내뿜듯이, 지지 않고 밤도 없으며 빛이신 영적 태양도 세상에 오시어 이루 말한 수 없는 당신의 거룩한 기적들을 통하여 신성의 눈부신 섬광을 널리 비추십니다”(오리게네스, 「요한 복음 주해 단편」, 9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21). 이때 ‘기대하였다’라는 말은 ‘기대하였지만, 그 기대가 무너졌다’는 뜻을 내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엠마오로 가는 길은 ‘체념과 절망의 시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되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아마도 ‘아, 이쯤에서 예수님을 만났었지…. 여기서 이런저런 말씀을 해 주셨지…’ 하고 기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길, 그 시간이 예수님을 채워졌습니다. 그리하여 같은 길이었지만, 전혀 다른 길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고, 새로운 시간 속을 걸었던 것입니다. 해가 있었을 때 걸었던 길은 빛 속에서도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밤에 돌아가는 길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죄와 무지에 눈이 먼 채 오랜 원수의 속임수와 오류에 빠져 있는 우리를’(루카 1,79 참조) 보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알게 하는 참빛을 우리에게 주셨고, 오류의 어둠을 거두어 가셨으며, 하늘로 가는 확실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을 이끌어 당신께서 보여 주신 진리의 길을 걷게 하셨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평화의 거처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존자 베다, 「복음서 강해」, 2,20).

 

 

빛을 바라보며 살아갈 이유

 

새로운 시간, 새로운 공간을 산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약속하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하느님께서 머무실 자리를 없애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삶과 생각 안에서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시지 못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두운 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에게 등대의 불빛이 생명줄과 같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빛이요 생명줄이십니다. 빛과 어둠을 가르신 분께서 우리에게 생명줄을 던지시고 빛이 되어 오셨습니다. 어둠을 뚫고 빛으로 이끄시는 분, 우리에게 살아갈 빛과 시간과 공간을 주시는 분, 그분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19.21). 빛과 어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두 번이나 빛과 어둠을 가르셨는데, 우리가 빛과 어둠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빛이시며 진리이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믿는 모든 이들은 빛이지만, 그들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며,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이는 누구나 어둠에 감싸일 것입니다. 어둠 속에 남아 있지 않으려면, 세상에 온 빛을 믿어야만 합니다. 세상이 본디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54,4).

 

* 김현웅 바오로 – 성아우구스티노수도회 신부로 강화에 있는 돌렌띠노의 성 니콜라오 수도원에서 양성 담당을 맡고 있다.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교부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20년 6월호, 김현웅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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