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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수리산 성지 심포지엄에 즈음하여(강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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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5 ㅣ No.1113

[강연문] 수리산 성지 심포지엄에 즈음하여1)

 

 

전 생애를 걸고 갖은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천주신앙을 봉행하는데 전력을 다하였으며, 조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다 마침내 장렬하게 순교하신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수원교회사연구소는, 해마다 성지 한 곳을 택하여 성지 현장에서 ‘성지 학술 심포지엄’의 이름으로 학술회의를 개최해 왔다. 금년 제5차 성지 심포지엄은 이곳 수리산 성지에서 열리게 되었다. 해마다 거르지 않고 성지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는 수원교회사연구소에 대해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전국 각 교구 가운데서 가장 많은 성지를 공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수원교구의 교회사연구소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수고해주시기 바라는 마음 간절함을 전하는 바입니다.

 

 

1.

 

‘성지 심포지엄’은 특정한 성지의 역사와 그 성지와 관계되는 순교자들의 역사를 학술적으로 다루어 보려는 학술회의만은 아니다. 지난 9월 12일은 수리산 교우촌을 이루고 교우촌민들의 천주 신앙생활을 주도하시던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옥사치명’으로 순교하신지 170돌이 되는 날이었다. 그 옛날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 그리고 수리산 성지의 교인 다수가 체포되어 한양으로 연행되는 소동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던 수리산 교우촌 유적지에서 ‘수리산 성지를 주제로 하는 성지 심포지엄’이 수원교회사연구소의 주관으로 오늘 열리고 있다.

 

오늘의 심포지엄은 학술회의인 동시에 순교자를 현창하는 한편, 순교자들의 순교 영성의 현대적 계승과 실천을 다지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한 신심회의이기도 하다.

 

 

2.

 

수리산 성지는 장렬하게 주님을 증거하고 치명한 순교자들의 피어린 순교 현장인 이른바 ‘순교 성지’는 아니다.

 

103위 순교 성인의 한 분이신 최경환 프란치스코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비밀리에 안장했던 묘소가 80여 년 간 모셔졌던 성지이며, 현재에도 성인의 유해 일부를 보장하고 있는 성지이다. 1839년 9월 12일에 서울 형옥에서 옥사치명하신 최경환 프란치스코 순교자의 시신은 마포 서강 소재의 노고산에 일시 가매장되었었다. 그 후 후손과 교인들에 의해 순교하시기 전에 거주하셨던 수리산 담배촌 앞산으로 이장되어 오랫동안 모셔졌다. 1925년 7월 5일 79위 복자의 한 분으로 시복되신 후, 복자나 성인의 묘소와 유해는 교회가 공적으로 관리하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규례에 따라, 1930년 5월 6일 복자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수리산 묘소에서 서울 명동대성당 지하묘소로 이장 안치되었던 것이다(현재는 1967년에 절두산 순교자 기념 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리산 성지는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마리아와 그 밖의 순교자들의 순교적 신앙을 견실하게 굳힐 수 있었던 순교자들의 신앙생활 터전이던 수리산 교우촌의 유적지이며,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천주교도를 색출 체포하기 위해 포졸들이 산협 교우촌으로 밀려 닥쳤을 때, 온 마을 60여 교우 가운데 40여 명의 교인들이 분란없이 체포에 응하고 고난이 닥칠 한양으로 연행 압송되면서도 최경환 회장의 인도 하에 기도드리며 한양으로 연행되어 간 교우들의 ‘확신적인 믿음의 삶’을 살던 교우들의 혼이 서려 있는 신앙 유적이기도 하다.

 

 

3.

 

1838년 수리산 산중 협곡의 하나인 담배촌 오지로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일가를 이끌고 입주하게 된 ‘수리산 교우촌’은 그보다 앞서 각지에 형성된 여러 교우촌의 형성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과정을 거쳐 형성된 교우촌 공소임이 주목된다.

 

한국천주교회 창설 이후 100년간의 박해시대에 각지에 생겨나게 된 교우촌은 격렬한 박해에 쫓기는 천주교들의 ‘신앙적 삶’을 위한 처절한 비상대책으로 형성된 것으로, 동일한 신앙을 가진 특정 종교인들의 집주로 생겨난 현대 사회의 ‘신앙촌(信仰村)’과는 역사성을 달리하는 박해시대 천주교인들의 신앙공동체로의 교우촌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의 교우촌은 당국의 지속적 박해와 철저한 교도 색출의 강행으로 다수의 교인들이 체포되어 심한 곤욕을 겪은 끝에 처형 살해되는 격한 박해 상황 가운데서, 다행히 살아남은 교인들이 위급을 피하는 한편 천주 신앙의 계속적 봉행을 위해 이미 교인으로서의 신색이 들어난 원주지를 떠나, 인적이 드물고 세인의 이목이 닿지 않은 심산 오지나 산협 산골짜기로, 또는 포졸의 추적이 어려운 먼 원방 타처로 황급하게 피난 이주하게 된 교인들이 숨어 살게 됨으로서 생겨났던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박해가 거세게 벌어지던 서울에서 지방으로 ‘하방은거(遐方隱居)’하게 된 교인들에 의해 형성된 은거 취락으로, 또는 위급의 극한 상황에서 신앙적 삶을 계속 견지하려는 교도들의 ‘피난 이합(避難離合)’에 의해 오지에 숨어살게 됨으로서 새로 형성된 소규모 신앙공동체적 마을이었다.

 

박해가 장기간에 걸쳐 거세게 진행되면서 초기에 긴급 피난 정착으로 생겨났던 비밀한 교우촌에도 박해자의 손길이 미치게 되었다. 다시 위급에 직면하게 된 교우촌민들은 보다 험악한 타처로, 박해자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지역으로 ‘원방재천(遠方再遷)’하게 됨으로서 2세대적인 교우촌이 삼남지방 일대의 산협 오지나 원방 각지에 계속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천주교를 발본 쇄원하고 천주교도를 박멸하려는 박해 당국의 의도와 달리, 지방 각지에 생겨나는 교우촌 형성으로 천주 신앙의 지방 확산을 촉진하게 되었다. 각지에 생겨난 교우촌을 거점으로 하여 암암리에 주변으로 천주교가 파급 부식되었던 것이다.

 

수리산 교우촌은 박해의 위험지에서 멀리 떠난 지역으로 이주하여 은신처를 마련하는 ‘하방은거’ 취락이나, 박해가 격동하는 위급 상황에 직면하여 원주지로부터 긴급 탈출 피난한 교인들이 ‘피난이 합’으로 형성된 교우촌, 그리고 자리 잡혔던 교우촌이 위급에 처해져 다시 더 멀고 험한 곳으로 황급히 떠나야 하는 ‘원방재천’으로 생겨난 교우촌과는 생과정이 사뭇 다르다.

 

조선 천주교회 창설 초기에 서울에 거주하던 양반 교우 가문 일족이 서울을 떠나 멀리 향촌으로 이거하여 오랜 기간 천주교도로 살아온 후,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도성으로 상경 이주하려는 뜻을 품고 일가를 이끌고 북상하여 다년간 시련을 겪은 후, 수리산 협곡에 입주하게 된 역사는 그 보다 앞서 형성된 다른 교우촌 공소 형성의 역사와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닥쳐 올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경향으로 북상한 한 구교우 가문 가장의 신앙적 결단과 집념적 노력으로 결실된 신앙촌 형성이었다.

 

이 특성적 교우촌 형과정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진취적이고 헌신적이던 천주 신앙 생활과 참 신앙 실천을 위한 과감한 추진력과 그 교우촌에 걸었던 그의 영성적 신앙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4.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791년의 신해박해 후, 서울로부터 홍주 다래골(현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한 마을인 누곡[樓谷])로 낙향하여 살며 천주 신앙을 착실하게 지켜오던 최인주의 소생 3형제 가운데 막내로 1805년에 출생한 태생 교우였다.

 

그는 4대조 최상진 어른이 진보현감을 지낸 양반가문의 후예이며, 3대조 최한일 어른이 그의 동생 한기와 같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이존창의 영향으로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구교우 가문 후손이었다.

 

최경환이 홍주 땅 다래골에서 부친 최인주의 삼남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조부이신 최한일 어른이 외독자 인주 소년을 두고 사망한 후, 조모이신 이씨가 어린 아들 인주를 데리고 낙향하여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주가 장성하여 성혼한 후 인주 어른 소생 3형제의 막내로 1805년에 태어났다.

 

다래골에서 일가를 이루고 착실하게 수계하며 살던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그 일가가 근 30년간 다래골 한 곳에서만 살아 왔기에 일가의 신앙생활의 사실이 차차 주위에 널리 알려지는 한편, 일족의 신앙생활이 점차 타성에 흐르게 되는 사정을 안타까이 여겨 마침내 일가의 수계 생활을 일신하고 영혼 구원을 바르게 할 신심 생활을 하기 위해, 23세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827년 온 가족을 이끌고 조선 왕국의 천주 신앙 생활의 근원지인 수도 한양으로 상경하게 되었다. 한양 연동에 한 때 거처를 마련했지만, 한양 정주가 여의치 않게 되자 이후 9년간 가족과 더불어 강원도 각지를 전전하며 살다가 한 때 부평 접푸리에 자리 잡고 거주하게 되었다.

 

이 격동 유랑의 생활 중에 그는 어린 15살의 큰 아들 양업 토마스를 신학생으로 간택하여 수 천리 이국 땅 마카오로 유학 보내려는 조선대목구 소속 선교사인 모방 신부의 요청을 받게 되었다. 32세의 가장으로 그는 서슴없이 어린 큰 아들을 천주의 일꾼으로 나서도록 용단을 내렸던 것이다. 장자를 천주대전에 봉헌한다는 결정은 당시의 사회 사정과 가정 윤리로 생각한다면 어렵고 중대한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천주 신앙생활을 꾸준히 추구해오던 그였기에 큰 아들을 선뜻 천주님의 일꾼으로 봉헌하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이 결단에 따라 양업 토마스는 접푸리에서 한양으로 상경하여 몇 개월간 준비 교육을 받은 후, 1836년 연말에 최방제, 김대건 등과 같이 마카오를 향해 출국하였다.

 

장자 양업을 중국으로 떠나보낸 후인 1837년 7월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도성에서 한강 건너 안양 땅 수리산 산협 오지를 그가 바라던 은거지로 택하고, 수리산 북쪽의 한 협곡 오지인 담배촌으로 입주하게 되었다. 해발 478m의 수리산은 그리 높다고 할 수는 없으나 산세가 험하며, 서로 솟은 316m의 수암산 사이의 협곡, 수암천 상류 시내물이 흐르는 협곡으로 직계 가족 7명(아내 이성례 마리아와 신학생으로 봉헌한 최양업을 제외한 어린 아들 다섯)과 그 밖의 일가권속과 따르는 교인을 이끌고 이동하여 숨어살게 됨으로서, 뒷날 수리산 교우촌이라고 속칭되고 있는 교우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 심포지엄에서 밝혀져야 할 문제의 하나는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일가를 이끌고 담배촌에 입주하기 전에 교인들이 숨어 살던 곳이 아니었는지를 이 심포지엄 발표자들이 밝혀주어야 할 한의 문제이다. 설사 이미 선주교인들이 있었던 마을로 입주하였다 하여도,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가족을 이끌고 수리산 담배촌으로 입주한 후 그 교우촌이 조선대목구 사목자들에 의해 그 마을이 ‘공소’로 제도적 자리를 굳히고, 최경환이 공소회장으로 임명되어 그 마을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기에, 수리산 교우촌의 공적 형성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그의 가족의 입촌으로 출발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이 심포지엄에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또 밝혀주기 바라는 일은 전후 6년간에 걸친 병인박해의 박해선풍이 지난 후, 수리산 교우촌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밝혀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쳐 형성된 수리산 교우촌은 생성된 지 2년 후인 1739년 7월 31일 도성에서 내려온 일단의 포졸들의 급습으로, 60여 명의 교우촌민 가운데 40여 명이 체포되어 도성으로 연행되는 박해 소동을 계기로 급속 쇄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나, 공소회장 최경환 프란치스코 일가를 중심으로 굳은 믿음으로 일치하고, 그리스도적 사랑과 나눔이 있는 교우촌을 이루었었다.

 

수리산 교우촌은 도성과 백리 상거한 수리 협곡에 위치한 곳이기는 하지만, 도주재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성직자와 어렵지 않게 연락이 가능한 곳이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사목 당국에 의해 수리산 공소의 첨례 생활을 이끌 공소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다래골에서 자라며 한문을 익혀 한문 교리 서적을 가까이 할 수 있었기에, 교리에 밝았고, 첨례 규식을 바르게 준수하며 신앙생활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던 지도자, 이를테면 준비된 공소회장이었다.

 

그가 수리산 공소에서 얼마나 촌민들의 신망을 얻었던 회장이었는가는 기해박해 초기에 서울에서 많은 교인들이 곤욕을 치루고 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리산 교우들을 이끌고 상경하여 살해 처형된 교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도왔으며, 교인을 위로 구휼하는 활동을 폈다는 일이나, 또 포졸들이 교우를 색출 연행하기 위해 수리산에 밀려 닥쳤을 때 소란 없이 순순하게 대응했고, 60여 명의 교우촌민 가운데 40여 명의 남녀 교인들이 악형과 고초를 겪어야 할 도성으로 연행되면서도 기도드리며 행진했다는 사실로 충분히 입증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839년 7월 31일 수리산에서 체포되어 서울 형옥으로 연행되어 고문과 악형이 가해지는 심문의 옥고를 겪다가 옥주에서 치명하여 35세의 장년 나이로 순교하셨다.

 

 

5.

 

마카오 유학생으로 간택되어 소년의 몸으로 모국을 떠났던 신학생 최양업 토마스가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모친 이성례 마리아의 순교 소식을 접한 것은 유학하던 곳 마카오를 떠나 중국 동북부안 만주 땅에 주류하며 모국 귀환의 기회를 탐색하던 시절이었다. 의주 변문에서 조선 교인과 비밀 접촉을 가졌으나 모국으로 입국하지 못하고 팔가자로 다시 귀환한 유학 동료 김대건을 통해 그 비보에 접했던 것이다. 부모님이 순교하신 후 2년 반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 후 만주에서 홍콩으로 옮겨가 여러 해를 두고 본국 귀환의 방도를 찾게 되었다. 홍콩에 체류하던 1847년, 조선에서 전교 활동을 펴고 있던 페레올 주교로부터 프랑스어로 번역된 ‘기해일기’ 원고를 받아 그 기록 내용을 검토할 수 있었다.

 

그 기록이 목격자의 증언보다 교인들 사이에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작성된 순교자 열전이어서 내용이 부실하고 누락된 일도 많아 귀국하게 되면 그 내용을 바로잡고 보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한국인 두 번째 방인 성직자로 모국에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1849년 말이었다. 그는 곧 주교님의 명을 받들어 전국을 누비며 사목 활동을 펴게 된다.

 

최양업 신부는 마카오에서 귀국 길에 오른 후로부터 1965년에 선종하시기까지 간간히 중국에 주재하고 있던 신학교 시절의 은사 신부들에게 그의 활동과 조선교회 사정을 보고하는 서한 19통을 송신했다(현재까지 수습된 19통의 편지는 모두 번역되어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이라는 이름으로 청주교구 주선으로 발간되어 시판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하여 전국을 누비며 사목 활동을 펴고 있던 시절인 1851년 10월 15일에, 중국에 주재하고 있던 은사 르그레즈와 신부 앞으로 서한을 올렸다. 이 라틴어 서한은 최양업 서한 19통 가운데 8번째로 해외로 송신된 서한으로, 최양업 서한 가운데 가장 장문으로 된 통신문이다(앞서 소개한 최양업 신부 서한집에 한글 번역문이 84~117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최양업 신부는 이 서한의 전반부에서 자신의 사목 활동과 조선교회 사정을 보고 드리고 있으며, 그 후반부에서 자신 가문의 천주 신앙과,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신앙생활 및 체포에서 순교에 이르는 과정과, 모친 이성례 마리아의 수난과 순교 상황을 자세히 적어 놓은 한편, 모친 순교 과정에서 발휘된 어린 동생들의 눈물겨운 효행 등에 관해 담담하면서도 자세하게 긴 글로 보고드렸다(앞서 소개한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양업교회사연구소 간행본 101~117쪽을 참조). 페레올 주교의 분부로 기해박해의 순교자의 기록을 하명받은 현석문에 이어, 이재의와 김대건 신부 그리고 최양업 신부 등이 계속 조사 보완하여 펴낸 ‘기해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담당했던 최양업 신부의 순교자 사실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가족의 순교 영성을 바르게 후세에 전고하려는 노력을 그의 서한을 통해 넉넉히 파악할 수 있다.

 

 

6.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 순교자는 1984년 5월 6일 모든 가톨릭 교인들의 공적 공경을 받으시는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한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모친이신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는 현재 한국교회가 지극한 정성으로 시복 시성을 청원하고 있는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124위 순교자’ 가운데 한 분이기에, 오래지 않아 기어이 서품되어 복자의 반열에 올라 한국교회의 공적 공경을 받게 될 것이다.

 

한편 최경환 성인의 장자인 최양업 토마스는 하느님의 종으로 간택되어 이국땅으로 유학하여 소정의 과업을 마치고 서품 받은 한국인 두 번째 방인성직자이시며, 귀국한 후 교구장의 명을 받들어 12년 간의 긴 세월에 걸쳐, 박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삼남지방 5도를 누비며 순회 사목에 헌신적으로 종시하시다가 사목 활동 도상에서 발병하시어 선종하셨음으로서 ‘땀과 발의 성자’로 추앙되어 왔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도 시복시성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천주 대전에 쌓으신 공로와 영성적 사목 활동으로 기어이 시복될 것임을 우리들은 확신하고 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그분의 성스러운 신앙 생활의 동반자이시던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순교 영성은 두 분 순교자의 아드님이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로 이어졌고, 최양업 신부의 다섯 형제 가운데 유아이던 막내 스테파노는 어머니와 옥중 생활을 하다가 아사했으나, 다른 동생 4형제(희정, 선정, 우정, 신정)의 직손계 후손과 외손계 후손들이 4대를 두고 배출한 9명의 신부와 1명의 부제, 그리고 7명의 수녀와 1명의 수사 등, 약 20명이 성직자와 수도자로 이어졌고 가문의 전통처럼 현양되고 사목 활동을 통해 실천되어왔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가문에는 대대로 순교자의 영신앙이 행동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밖으로 그 후손들의 성직 수행으로 궁행되어 온 것이다.

 

오늘 ‘성지 심포지엄’이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학술회의에 직접적으로 간여하고 계신 분들과 바쁜 시간을 쪼개어 청중으로 참여하고 계신 분들 모두 한국 천주교회의 성인 복자 그리고 순교자의 ‘신앙 후손’들이시다.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성직자와 수도자로 나서 순교 신앙을 현양하며, 그 순교 영성을 세상에 펴기 위해 이 세상에서 실천해 옴과 같이, 한국 성인의 신앙 후손인 우리들 모두도 우리 복자와 성인의 영성을 확인 현양하고, 자신의 신앙에 내면화하여 자기 신앙으로 계승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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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원고는 2009년 11월 3일 수리산성지에서 주최하고 수원교회사연구소가 주관한 ‘수리

산성지 학술심포지엄(주제: 최경환 성인과 수리산성지)’의 기조강연문을 수정한 것이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6, 2009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원순(서울대 명예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15677&Page=19&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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