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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유한숙 · 송마리아와 신마리아 · 이명호 요한 · 이부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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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5-12 ㅣ No.1820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5) 유한숙 · 송마리아와 신마리아 · 이명호 요한 · 이부춘

 

 

유한숙(?~1801)

 

‘사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한숙은 경기도 양근 동막골 향반 출신 교우로 열심히 신자 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양근 관아에서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했다. 경기 감사가 조정에 올린 유한숙의 사형 선고문에는 “천주교를 독실하게 믿어 마땅히 지켜야 할 사람의 도리를 끊어 버렸고, 형벌 아래 죽는 것을 달게 여겨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한숙은 1801년 4월 27일 윤유오(야고보) 등과 함께 양근 대로변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송마리아(1753~1801)와 신마리아(?~1801)

 

송마리아는 정조 임금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부인이다. 신마리아는 은언군 이인의 장남 상계군 이담의 부인으로 송마리아의 맏며느리이다.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1786년 상계군이 역적으로 몰려 자살하고, 은언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양제궁에서 함께 살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1794년 말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둘은 왕족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집 안에서 열심히 교리 공부와 기도 생활을 했다. 또 양제궁 나인인 강경복(수산나)과 서경의 등을 입교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위험을 무릅쓰고 주문모 신부를 양제궁으로 피신시켜 화를 피하게 했다. 이 사실이 체포된 신자들의 문초 과정에서 밝혀지자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이들을 사사(賜死)하라고 명했다. 이에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1801년 4월 28일 사약을 마시고 순교했다. 현재 절두산순교성지에 송마리아의 묘비가 있다.

 

 

이명호(요한, ?~1801)

 

이명호(요한)는 문신 이정운의 아들로 태어나 숙부 이익운의 양자가 되었으며, 이겸환의 딸과 혼인했다. 양부인 이익운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다.

 

이명호는 1795년 이전에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입교 후 지나치게 격한 자신의 성격을 고치고 모든 행동을 주님과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 조절하는 데 힘썼다. 또 언제나 금욕하고자 노력했으며 세상일과 모임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집 근처에 별채를 마련해 혼자 생활하면서 주일에 신자들과 만나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신앙을 전파했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부친 이익운은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 그에게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했다. 이명호가 이를 거절하자 이익운은 사람들을 시켜 강제로 독약을 먹여 아들을 죽였다. 

 

다블뤼 주교는 이명호의 죽음에 대해 “이 찬탄할 만한 죽음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하느님 대전에서 아주 고귀하고 또 값어치 있는 죽음이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이부춘(1735~1801)

 

이부춘은 충주의 아전 출신으로 이기연에게 교리를 배운 뒤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그는 교회 가르침에 따라 조상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신자로서 본분을 지키는 데 충실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충주에서 아들 이석중과 함께 체포돼 1801년 10월 4일 이부춘이, 다음 날 아들 이석중이 순교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5월 12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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