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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작가를 감동시킨 작품: 하느님, 맙소사!(구상 시집 인류의 맹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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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05 ㅣ No.356

[작가를 감동시킨 작품] “하느님, 맙소사!”

 

 

세상에는 종교가 참 많다. 당연히 각 종교를 신봉하는 종교인의 숫자도 덩달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종교란 말의 사전적 풀이는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 나와 있다. 그러나 종교란 한마디로 규정지어 부를 수 없는 것이며, 침묵 속의 산책에서 마주하는 새벽안개 같은 것이다.

 

시인 구상(具常, 1919-2004)의 시집 『인류의 맹점(盲點)에서』(문학사상사, 1988)를 <작가가 감동한 작품>으로 정하고 생전의 선생을 떠올린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가톨릭적 영성을 담은 시인’하면 떠오르는 분이 늘 구상 시인이다. 시인의 굴곡 많고 뒷말이 다양했던 사회생활과 네편 내편 가리지 않고 마주하는 수많은 인물들과의 교류를 통한 후일담은 그의 삶을 그물코처럼 엮어 내고 있다.

 

인생 말기 한강변에 위치한 그의 집을 관수재(觀水齋)라 이름 부르며 시인은 멋스런 하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지만, 시인은 늘 그의 긴 그림자를 부끄러워했다. 위에 말한 선생의 시집도 사실 관수재시초(觀水齋詩抄)로서 발간된 것이다. 거기에 실린 선생의 시다.

 

어느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고 읊었지만 / 나는 마음이 하도 망측해서 /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고 어쩌구커녕 / 숫제 두렵다. (‘고백’ 일부)

 

나는 날마다 / 성당에 나가듯 윤중제(輪中堤)에 나아가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 걸레처럼 더럽고 추레한 내 마음을 / 그 물에 헹구고 씻고 빨아보지만 / 절고 찌들은 땟국은 빠지지 않는다. (‘근황’ 일부)

 

이제 머지않아 나는 /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 저런 추악망측한 나의 참 모습과 /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 하느님, 맙소사!(‘임종고백’ 일부)

 

시인은 평생 자신이 걸어갔던 삶의 길과 신앙의 대상 앞에 선 마음을 “하느님, 맙소사!”란 시어로 가름했지만, 그 외마디를 가로지르는 그림자의 깊이는 더듬어 짐작할 뿐이다. 21세기 초엽 한반도 남쪽 인구 중 절반을 훌쩍 넘는 종교 인구는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현실의 삶과는 간격이 더욱 커질 뿐이다. 우스운 것은 각 종단이 밝힌 종교인의 수가 총인구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종교를 이중 혹은 삼중으로 등록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어디선가 허깨비 숫자가 들어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현재의 우리나라는 다종교국가임과 동시에 종교인의 국가임에 틀림없다.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종교전쟁 혹은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서 벌어지는 종교를 바탕으로 한 분쟁만 없을 뿐이지, 대도시의 지하철이나 터미널은 선교경쟁의 장소이고, 웬만한 지역에는 각 종교들이 겹겹이 포진해 있다. 그뿐이랴, 같은 종교 안에서도 이른바 ‘내 식’으로 믿어야 한다는 교리 근본주의와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한편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들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종교생활은 하나의 필수이기도 하다. 사실 정치권에서 종교인의 통계를 내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를 두루 섭렵하는 ‘개불천교’ 신자가 포함된 까닭에 각 종단이 자기네 사람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들은 세상의 종교를 모두 초월한 해탈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해탈은커녕 아수라에 가깝게 보일 따름이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움 이전에 이미 자신의 얼굴에 숯덩어리를 올려놓았다는 말일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움의 연속이며, 스승의 가르침과 달리 행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책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니는 길이다. 시인이기에 그 마음을 “하느님, 맙소사!”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이기에 그런 마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종교인은 많고 넘치지만, 신앙인이 없는 세상이라고들 말한다. 더욱이 맑은 신앙인을 찾기는 더더욱 어렵다고 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을 찾을 필요가 있는가? 교회와 성당을 가는 사람들, 사찰을 찾는 사람들, 기품어린 서원에서 예를 갖추는 사람들이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의 길로 들어서면 될 일이다.

 

‘열성’이 아니라 ‘영성’이 종교 창시자들의 의도를 생활로서 실천하게 하듯이, ‘열성’의 종교인의 아니라 맑은 ‘영성’의 신앙인이 그리운 날들이다. 사랑이란 말은 이제 빛이 바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라는 말이며, 자비롭단 말은 허공에 사라진 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비로워야 한다는 낮은 목소리다. 휘파람새의 맑은 소리와 물가를 노니는 도요새의 한가로운 모습에서 밝고 맑은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신앙인이다. 바위틈을 비집고 올라온 동자꽃과 온몸에 가시를 박고도 해맑은 가시꽃을 보며 소박한 땅의 발걸음에 충실한 것이 신앙인이다.

 

하늘과 땅의 만남, 그 만남 속에 통로이기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존재. 아마도 그것은 선택이나 성별(聖別)의 존재가 아닌 그저 ‘있음’으로서 충만한 그런 존재일 것이다. 그런 ‘있음’으로 아름답고 내밀한 신앙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더운 밥 한 공기 서로 나누는 것이 교리 한 구절 외우는 것보다 우선이며, 생명과 평화가 모든 경전의 마침표이길 바라는 사람들 속에서 오늘도 교회의 종이 울리고, 사찰의 운판이 화답하며, 모스크에서 맑은 기도 소리가 나온다. 얼마나 서럽도록 고마운 일인가.

 

오랜만에 시인 구상의 시집 『인류의 맹점(盲點)에서』를 다시 펼치면서 그는 사라진 듯해도 여전히 시 행간에서 울리는 마지막 고백이 된 선생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요 속에 나 또한 / 고요히 잠겼노라니 / 그 고요가 고요히 속삭였다. / 이제 너의 참 마음을 열어 보라고 // 그러나 나는 말은 못하고 / 눈물만 흘렸다. (‘고요’ 일부)

 

나의 거짓 사연에 / 그대들은 속지 말라. // 그리고 정녕 속 깊은 사연은 / 아직 한 번도 내지 못하였음을 / 이제사 그대들에게 고백하노라. (‘나의 시2’ 일부)

 

[평신도, 2018년 여름호(VOL.60), 김유철(시인, 삶예술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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