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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길에서 쓰는 교구사: 조원동 주교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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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12 ㅣ No.523

[길에서 쓰는 교구사] 조원동주교좌성당 (상)


1977년 준공된 교구 두번째 주교좌 ‘평화의 모후’이신 마리아께 봉헌

 

 

- 조원동주교좌성당 외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조로 978번길 5 조원동주교좌성당 성모상 앞에 섰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아든 성모상 아래에는 ‘평화의 어머니’라고 적혀있다. 교구장 이용훈 주교가 늘 강의나 강론의 마지막에 신자들과 함께 바치는 기도가 떠올랐다.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평화의 모후. 교회가 마리아를 부르는 전통적인 호칭 중 하나다. 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17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성모호칭기도에 평화의 모후를 삽입하면서, 평화의 모후에 전구를 청하는 신자들의 기도가 더 활발해졌다. 하지만 교구에 있어 평화의 모후는 단순히 마리아의 여러 호칭 중 하나가 아니다. 교구의 주보가 ‘평화의 모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 조원동주교좌성당의 설립을 계기로 교구의 주보는 ‘평화의 모후’로 정해졌다.

 

교구 제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는 1974년 주교 서품 당시부터 새 주교좌성당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첫 주교좌였던 고등동성당이 최대 500여 명밖에 수용할 수 없어 교구의 행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뜻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김 주교는 회고록을 통해 주교 서품식 성인호칭기도 중 “‘주교좌성당이 너무 작아서 안 되겠다. 좀 더 큰 것으로 지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면서 “엎드려서 성당 한 채를 다 지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 조원동주교좌성당 성모상.

 

 

물론 김 주교뿐 아니라 교구 안에서도 이미 고등동성당이 주교좌성당으로 협소해 더 큰 규모의 주교좌성당을 지어야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김 주교의 착좌식을 계기로 교구 참사회는 차성화(수산나)씨가 교구에 기증한 수원시 조원동 부지에 새 주교좌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성당 건축을 준비하면서 어려움도 많았다. 1만4390㎡ 상당의 대지를 기증받았지만, 도시 계획에 따라 그 터를 가로질러서 십자형의 길이 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네 갈래로 나뉜 대지 중에서 가장 큰 터에 성당을 지어야했다. 또 당시 조원동 일대는 미개발 지역이 대부분으로, 신자 수가 2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들의 힘으로는 건축 예상비용인 1억2000만 원을 마련하기가 너무 버거웠다. 여러 어려움들로 인해 성당 건축은 잠시 보류됐지만, 교구 사제모임에서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 재개할 수 있었다.

 

조원동주교좌성당의 건축은 주교좌성당의 주임이라 할 수 있는 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직접 관리했고, 비서실장 신부가 총감독을 담당하기로 했다. 교황청에서 보조금으로 4만 달러(당시 한화 6000만 원 상당)를 받았고 북수동본당을 비롯한 교구 내 모든 신자들이 성당건축에 힘을 모았다.

 

마침내 1976년 6월 28일 조원동성당 기공식을 거행했다. 이날 조원동성당은 ‘평화의 모후’이신 마리아께 봉헌됐고, 1977년 5월 18일 성당 준공과 함께 교구의 주보도 ‘평화의 모후’로 공식 선포됐다. 아울러 첫 교구좌였던 고등동본당은 준교구좌 본당으로 선포됐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8년 3월 11일, 이승훈 기자]

 

 

[길에서 쓰는 수원교구사] 조원동주교좌성당 (하)


주교좌성당으로 사용된 20년간 교구는 급성장 · 신자 수 8배 증가

 

 

- 조원동주교좌성당 내부.

 

 

조원동주교좌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지은 지 40년이 넘은 성당이지만, 성당 내부는 오히려 세련돼 보인다.

 

공간의 구성부터 눈길을 끈다. 정방형에 가까운 성당 내부 천장은 왼쪽보다 오른쪽이 높은 사선 형태다. 오른쪽 벽면에만 창문과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해, 천장의 사선 형태와 조화를 이뤄 오른편에서 빛이 쏟아지는 모습을 연출한다. 앞뒤가 긴 직사각형 형태에 중앙이 높은 전통적인 성당 공간구조가 신성함을 강조한다면, 조원동주교좌성당은 신자들에게 더욱 열린 공간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사무실을 방문해 본당사를 살펴보니 왜관 성베네딕도수도회 남도광 신부(南道光·호노라토 밀레만 Honoratus Millemann)가 설계했다고 적혀있다. 남 신부는 평생 한센병 환자와 소외된 이웃을 위해 헌신한 것으로 더 유명한 신부다. 1960년대 왜관 성베네딕도수도회 수사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신자들의 전례 참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현대적인 성당건물을 여럿 설계했는데, 남 신부도 그런 흐름의 일환으로 조원동주교좌성당을 설계한 것이다.

 

더 많은 신자들에게 열린 성당. 조원동주교좌성당의 건립과 함께 펼쳐간 교구의 사목이 그런 모습이었다. 제2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김남수 주교는 성당 건립사업을 전개하는 동시에 교구 조직을 개편하고 교구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특별히 평신도지도자 교육을 강화하고 전교활동을 촉진시켜, 신자들은 물론 비신자들에게도 더욱 열린 교회로 변화시켜 나가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제대의 모습도 달랐다. 여느 성당이라면 십자가상이 걸려 있을 자리에 부활 예수상을 설치해 십자가가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상징임을 알렸다. 제대 뒷면에는 삼위일체와 칠성사를 상징하는 모자이크가 펼쳐져 있다. 20년 동안 세례성사에서부터 성품성사에 이르기까지 교구의 일곱가지 성사가 이곳 조원동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됐다.

 

조원동주교좌성당의 모습처럼 열린 교회를 지향하던 교구의 활동에 부응해 교구는 빠른 성장을 거듭했다. 성당을 건립하기 시작하던 1976년 교구 신자 수는 5만 명에 불과했지만, 20년 사이에 그 8배에 해당하는 40여만 명에 달하게 됐다. 게다가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교구에 조원동주교좌성당은 주요 행사를 치르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교구는 1997년 새 교구청 건립과 함께 새 주교좌성당, 정자동주교좌성당을 세웠다. 비록 새 주교좌성당이 생겼지만, 여전히 조원동주교좌성당은 교구의 공동주교좌성당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교구는 교구의 주보 ‘평화의 모후’를 기념하는 7월 9일 평화의 모후 대축일엔, 정자동주교좌성당이 아닌 조원동주교좌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8년 3월 18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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