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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30: 서만자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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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03 ㅣ No.942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30) 서만자에 도착


구교우촌을 징검다리 삼아 서만자에 이르니 반가운 얼굴이

 

 

- 북위의 첫 도읍지인 대동은 성채를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이다. 사진은 대동 중심가.

 

 

브뤼기에르 주교는 만리장성을 넘은 후 여행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평야 지대 그리고 산맥들 사이의 협곡들에서 이 성벽은 높이가 10~12m로서 방어용 요철을 갖춘 큰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산맥 위로 올라가면 이 성벽의 높이는 3m 정도 됐다. 산맥 위의 성벽은 각면 보루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작은 언덕들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인접해 있는 구릉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광무(廣武)에서 관원들에게 만리장성 통행증을 반납한 후 3일을 걸어 대동(大同)에 도착했다. 대동은 선비족인 북위(386~534)가 처음으로 도읍을 정했던 고도(古都)이다. 또 이곳은 돈황 막고굴과 낙양 용문석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꼽히는 운강석굴로 유명하다. 운강석굴은 약 1㎞에 달하는 사암층 40여 개 동굴에 5만여 개의 불상이 조각돼 장관을 이룬다. 

 

대동은 정사각형의 성채를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이다. 아마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대동 동문(東門)으로 들어가 방앗간을 운영하는 왕푸라는 사람을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브뤼기에르 주교보다 3년 늦게 같은 길을 간 앵베르 주교가 대동 왕푸의 집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박해시대 때 선교사들의 길 안내인들은 발각되지 않는 이상 고정된 비밀 루트와 신변이 보장된 특정 교우 집에 머물렀다. 앵베르 주교는 이 길을 오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반드시 왕푸를 만나도록 권고했다. 앵베르 주교는 “왕푸는 훌륭한 교리교사이고 그의 가족들은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추천했다.

 

대동교구 주교좌성당은 현재 한창 재건축중이다.

 

 

대동 동문인 ‘화양문(和陽門)’을 빠져나와 800여m를 걸어가면 대동교구청이 있다. 교구청은 비교적 번화한 네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주교좌성당은 재건축중이었다. 성당 외형만 그대로 있고 내부는 모두 새롭게 치장하고 있었다. 성당 주변 강당과 사제관 등도 모두 헐려 있었다. 신자들은 교구청 부속 건물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1696년 산서대목구가 생기기 이전부터 대동에 신자들이 살았다고 한다. 1922년 대동대목구가 설정된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와서 사목했다. 성문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네거리에 터를 잡은 대동교구청이 왕푸의 방앗간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떠나지 않는다.

 

 

대동 왕푸의 집에 머물렀다 장가구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대동 왕푸의 집에서 여독을 풀고 체력을 회복한 후 마지막 관문인 장가구(張家口)로 출발했다. 장가구만 통과하면 달단 즉 내몽고 지역이다. 대동에서 장가구까지는 걸어서 6일이 걸렸다. 

 

“이 성벽은 중국과 달단을 물리적으로 갈라놓고 있다. 따라서 남쪽에 있는 산비탈은 중국에 속하며, 북쪽의 것은 달단에 속한다. 나는 장가구라고 부르는 문으로 이 성벽을 통과했다. 러시아인들이 북경으로 갈 때 바로 이곳을 통과한다.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내가 고용했던 사람들은 아마 나와 내 뒤에 올 사람들이 대담하게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나를 모르는 척했다. 만약 감시가 엄격했더라면 산맥을 넘거나 아니면 세월이 흐르면서 생긴 좁은 길을 통해 만리장성을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 가구 고가영 교우촌에 있는 천주당. 지은 지 100년이 넘는 성당이다.

 

 

깊은 협곡에 숨어 있는 교우촌 

 

브뤼기에르 주교는 장가구에서 약 3리외(12㎞) 떨어진 고가영(高家營)으로 갔다. 이 마을은 서만자(西灣子)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고가영에서 서만자까지는 약 7~8리외(28~32㎞) 거리였다. 고가영 도로 오른편에 있는 집들은 모두 신자들 집이었다. 그곳에 마을 성당도 있었다. 이곳에서 서만자까지는 고가영 신자들이 선교사 일행을 안내했다.(앵베르 주교 「사천성에서 달단 지방의 서만자로 가는 여정」 참조)

 

하북성 장가구 숭례현(崇禮縣)에 위치한 고가영 마을에는 장가구교구 고가영진(高家營鎭) 천주당이 있다.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자그마한 성당이다. 신자가 1000명이 넘어 주일 미사 때면 성당 마당에도 신자가 가득 찬다고 한다. 고가영을 중심으로 숭례현 일대에는 교우촌이 흩어져 있다. 명ㆍ청시대 박해를 피해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든 신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그중 황토량(黃土梁) 천주당은 옛 교우촌의 형태를 잘 보여 준다. 깊은 협곡 속에 숨어 있는 이 마을의 30가구 주민 모두가 가톨릭 신자이다. 마을은 과거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이 지은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지금도 비교적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고향을 버리지 않고 척박한 땅에서 밭농사하며 가난하게 사는 항토량 교우촌 신자들의 모습에서 박해시대 우리 신앙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 박해를 피해 형성된 황토량 교우촌. 이 교우촌은 성당을 중심으로 30가구로 형성돼 있다.

 

 

1년 6개월 만에 모방 신부와 조우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10월 8일 서만자에 도착했다. 산서대목구청에서 시작해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까지 17일간의 여정을 마감했다. 앵베르 주교가 산서대목구청에서 장가구까지 14일이 걸렸다고 하니 거의 같은 여행 일정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모방 신부와 극적으로 다시 만났다. 모방 신부는 1833년 3월 9일 복안 주교관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사천대목구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조선 선교를 자원했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여 만에 서만자에서 두 조선 선교사가 만난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2월 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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