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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제6권 아우구스티노의 정치적 사랑 - 세상에 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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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20 ㅣ No.331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6권] 아우구스티노의 ‘정치적 사랑’ - ‘세상에 대한 사랑’과 ‘사회적 사랑’

 

 

“나의 중심은 나의 사랑”

 

「고백록」 제6권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자기가 세 여인에게 기울였던 애정(12.21-21.25), 친구 알리피우스에게 쏟았던 우정(7.11-11.20)을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회상한다. 그는 황실 교수로 채용되자마자, 퇴임 뒤 조그만 속주의 총독 자리 하나쯤은 돌아오려니 하는 기대에서, “특히 모친이 일을 꾸미는 바람에”라는 핑계로, 자기 나이 서른에 “결혼 적령에서 두 살가량이 모자란” 열 살짜리 양갓집 규수와 약혼을 한다(13.23).

 

그러고서 아들까지 낳아 주고 15년간이나 “품어 오던 여자를 결혼의 방해물이나 되듯이 옆구리에서 떼어 내” 아프리카로 쫓아 보낸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에게 매여 있던 제 마음은 찢어지고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는 감상이나, 떠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알지 않겠노라고 하느님께 맹세하더라.”며 자존심을 챙기는 말마디는 좀 치졸하게 들린다. 하지만 쫓겨난 여자가 남긴 공백, 두 살 모자란 약혼녀가 적령을 채우는 그 “틈새를 못 참고 딴 여자를 두었습니다.”(15.25)는 고백은 솔직하기까지 하다.

 

먼 옛날 고향에서 치기 어린 우정을 나누다 갑자기 사별한, 이름 없는 친구에게 쏟은 격정적인 파토스(4.4.7-4.12.19)와는 달리 알리피우스의 우정은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진리 탐구의 여정과 타가스테 수도 생활, 둘 다 주교로서 사목 활동을 함께한다. 여하튼 “친구들만은 무작정 사랑했고 아울러 그들에게서 제가 무작정 사랑받는다고 느꼈습니다.”(6.16.26)는 고백 그대로다.

 

삶이든 여성이든 학문이든 진리든, 아우구스티노는 치열하게 사랑하였다. 여성에 대한 애욕이든 친구에 대한 우애든 학문에 대한 집념이든, 인간 실존의 중심(重心), 곧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사랑의 한 발현이었다.

 

“물체는 제 중심에 따라서 제자리로 기웁니다.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나의 중심은 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내가 끌려갑니다”(13.9.10).

 

이 말은 ‘인간은 사랑이다.’라는 아우구스티노의 인간 정의에서 온다. 논변은 간결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 참조)라는 신약의 전제에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다.’(창세 1,27 참조)라는 구약의 명제를 대입하면, 모습은 원형과 비슷하므로, ‘인간은 사랑이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적 사랑’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

 

20세기에 아우구스티노의 정치 철학이 간직한 ‘정치적 사랑’을 맨 처음 간파한 사상가는 독일의 한나 아렌트다. 1500년 전 아우구스티노가 ‘국민’을 정의하여 “사랑할 대상에 대해서 서로 합의함으로써 한데 뭉친 이성적 존재들”( 「신국론」 19.24)이라고 한 말에서 영감을 얻어 아렌트는 ‘세상 사랑’(amor mundi)이라고 용어를 만들었다(1929년도 학위 논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노’). 사랑은 다른 사람과 연대를 만들어 가고, 사회 의식과 종교적 성숙에 따라 그 연대가 혈연에서 동포애로, 조국애로, 인류애로 확대되는 까닭이다.

 

서기 430년, 영원한 도성 로마가 고트족 장수 알라리크에게 점령당하고 약탈당하자 로마 제국의 지성계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노는 인류사를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 인간의 두 의지가 합작으로 전개하는 구세사의 지평에서 바라보면서 「신국론」(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2004년)을 집필한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이 사사로이 그리고 집단으로 발휘하는 모든 욕망을 ‘사랑’으로 환원시킨다. 그 사랑의 성격이 선하거나 악한지에 따라 ‘지상 도성’과 ‘하느님 도성’으로 갈라진다고, 사랑의 성격은 ‘사랑의 질서’에 따라 정해진다고, 사랑의 질서가 바로잡힌 상태가 곧 평화라고 역설하였다.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성을 건설했다. 하느님을 멸시하기까지 이르는 자기 사랑이 지상 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면서까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천상 도성을 만들었다”( 「신국론」 14.28).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지상의 도성’과 ‘하느님의 도성’이 갈라지는 기반을 ‘사사로운 사랑’(amor privatus)과 ‘사회적인 사랑’(amor socialis)이라고 하였다.

 

“두 사랑이 있으니 하나는 순수하고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상위의 도성을 생각하여 공동의 유익에 봉사하는 데 전념하고, 하나는 오만불손한 지배욕에 사로잡혀 공동선마저도 자기 권력 아래 귀속시키려는 용의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 복속하고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평온하고 하나는 소란스럽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하나는 모반을 일으킨다. 하나는 그릇된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앞세우지만, 하나는 무슨 수로든지 찬사를 얻으려고 탐한다.

 

하나는 우의적이고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바란다. 하나는 이웃을 다스려도 이웃의 이익을 생각하여 다스리지만, 하나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스린다.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랑은 선한 자들에게 깃들고, 한 사랑은 악한 자들에게 깃들어서 두 도성을 가른다”( 「창세기 축자 해석」 11.15.20).

 

 

엉뚱한 서품식 두 차례

 

우리가 읽는 「고백록」은 아우구스티노가 387년 부활절에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도중에 오스티아 항구에서 모친 모니카가 세상을 떠나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하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를 발견하고서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독백」 1.1.5)라고 선언한 이후의 여생은 ‘하느님 사랑’에서 동기를 얻어 ‘세상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파란만장한 투쟁이 된다.

 

오랜 정신적 방황을 마치고 고향 타가스테의 생가에서 지인들과 더불어 수도생활을 시작하여 오로지 진리 탐구와 수덕에 매진하던 3년여 세월은 목가적 행복이었다. 도회지를 피하여 시골에 은둔한 까닭은 그 인물만큼 교양과 학식을 갖춘 지식인은 자칫 신도들에게 붙들려 반강제로 사제직이나 주교직에 서품될 우려에서였다. 밀라노 집정관이던 암브로시오도 밀라노 교회가 주교를 선출하지 못하고 표류하자 이를 감독하러 들렀다가 신도들의 호선으로 그만 주교에 뽑혀 입교와 사제품과 주교품을 한꺼번에 받아야 했으니까.

 

아우구스티노가 타가스테에 정착한 지 3년 뒤 한 사업가에게서 수도원 입회 문제를 상의드리겠으니 도회지로 와 주십사 하는 편지를 받고서, 80km 떨어진 히포로 간 적이 있다. 이리저리 뜸을 들이던 사업가는 히포에 온 김에 대성당도 둘러보자고 제안해서 둘이는 성당에 갔다. 성당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문이 잠기고 아우구스티노는 장정들 손에 번쩍 들려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성당을 가득 메운 채 기다리던 신도들의 갈채와 환성 속에 아우구스티노는 그만 사제로 서품되고 말았다. 391년의 일이다(포시디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5장, 이연학 · 최원오 역주, 분도출판사, 2008년).

 

4년 뒤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히포의 늙은 주교 발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 주교가 공석이 된 교구 사람들이 히포에 나타나 서성거리면 아우구스티노 사제를 수도원 깊숙이 숨겨 놓곤 했다. 그를 납치해 자기네 주교로 삼아 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395년 6월 발레리우스는 인근 주교들을 히포로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아프리카 수석 주교 메갈리우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갈리우스가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아우구스티노 사제를 제단 앞에다 무릎을 꿇리고는 동료 주교들과 함께 손을 얹어 주교품을 줘 버렸다. 본인이 울고 불며 거절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8장).

 

그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노의 생애 후반은 히포의 주교로서 무너져 가는 로마제국의 악취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학과 가톨릭 윤리를 정립하느라 동분서주하는 분주한 투쟁으로 점철된다. 

 

* 성염 요한 보스코 - 「신국론」과 「삼위일체론」을 번역하고, 최근 「고백록」을 펴냈으며, 지금도 지리산 자락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원전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1986년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라틴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교황청 한국대사(2003-2007년)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7년 7월호, 성염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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