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만주국과 천주교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11 ㅣ No.900

만주국과 천주교회*

 

 

국문 초록

 

만주국은 건국 이전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탄생하게 되었는데, 천주교와는 과연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를 위해 본고는 만주국 성립 배경, 교황청의 만주국 승인 여부, 만주국 및 주변국(일본, 중국, 한국)과 천주교회와의 관계 그리고 만주국 내 천주교 전교 상황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첫째, 만주국은 태생이 독립 자주적인 국가로 발전하기란 애시 당초 가능하지 않았다.

 

둘째, 관동군과 일제는 만주국의 황제와 대신들과는 동상이몽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만주국은 교황의 권위와 교황청의 국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국제적인 공인을 얻고자 하였다. 만주국의 천주교 인식은 국가에 봉사하는 일환으로만 종교를 인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비단 만주국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본국 및 일본이 통치하고 있던 조선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강요하였다. 넷째, 일본과 만주국은 천주교를 일본의 국가신도 내지는 신사신도(神社神道)의 하위 종교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괴뢰정부인 만주국과 교황청의 관계 형성을 이유로 중국에서는 교황청으로부터 분리 독립된 교회를 지속시키고 있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만주국은 멸망하게 되었으나, 만주국으로 인한 중국과 교황청과의 관계는 아직도 소원한 관계에 있다. 여러 이유로 중국 대륙에서는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천주교 선교사에 대한 추방 및 탄압 그리고 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과 자립을 뜻하는 애국교회의 삼자운동 실시 등으로 교황청으로부터 분리된 독립 교회를 지속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성경의 한 부분으로 그 마무리를 지어 본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 12~14).

 

 

1. 서론

 

중국 동북지역에 만주국의 성립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왜 만주국이 건립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일제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왜 만주국을 건립하고자 무던히 애를 쓸 수밖에 없었을까? 이러한 상태에서 어떻게 로마 천주교와의 관계를 설정하려고 하였던 것인가?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낳고 있는 만주국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그리 많지는 않은 상태이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부분이 많이 있고, 또 많은 나라에서는 일본의 꼭두각시 정부라고 일컫기도 하였고, 특히 중국 측에서는 만주국을 괴뢰정부1)로 보기 때문에 만주국 앞에 위(僞)라는 말을 붙여 위만주국(僞滿洲國)2)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등은 만주국이 일반의 다른 국가와는 그 성립배경과 성격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음은 충분히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만주국의 건립은 그 성립배경에서부터 중국인과 만주인의 개입이 아니라, 일본과 관동군의 깊숙한 개입이라는 것이 만주국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일본과 관동군은 어느 정도 만주국 건국에 관여를 하였는지에 대한 궁금증 역시 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정리된 수순에 의해 만주국은 건국되었고, 이러한 만주국 건국에 동참한 중국인들은 서로 다른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동참하게 된 것이다.

 

만주국은 건국 이전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탄생하게 되었는데, 천주교와는 과연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왜 일제와 만주국은 교황청으로부터의 국가적 승인을 받는 것을 중요시하였던 것일까? 천주교를 통해서 일제와 만주국이 얻고자 하였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나? 또 당시 교황청에서는 일제와 만주국의 이러한 접근과 접촉에 어떻게 대처하였으며,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는 중국의 천주교사를 연구함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본고는 1차 사료들과 1차 사료에 준하는 자료인 야마무로 신이치[山室信一]의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3)과 요시고로 타구치[田口芳五郞]의 《滿洲帝國とカトリック敎》4)와 《滿洲敎務年鑑》 上, 下5) 등의 자료를 토대로 만주국 성립배경과 당시 만주국의 천주교 인식, 로마 교황청과 관계6), 주변국가의 천주교 전교 상황 및 만주국에서의 천주교 전교 상황 등을 살펴봄으로써 만주국에서의 천주교의 위상과 일제와 만주국에서는 어떻게 천주교를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자 함이 그 목적이다.

 

 

2. 만주국 성립 배경

 

만주국은 일제의 만몽영유(滿蒙領有)에 의해 성립된 결과물의 하나였다. 일본이 만주와 몽골7)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만주, 몽골에 대한 특수권익은 중국 내셔널리즘의 고양과 격렬하게 충돌하여 만몽문제의 해결은 일본의 운명이 걸린 초미의 과제로 떠올랐다.8) 미국의 중국학자 오웬 라티모어(Owen Lattimore)가 ‘분쟁의 요람’(Gradle of conflict)이라 명명한 만몽에서 1920년대에 가장 첨예한 대립의 국면을 형성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과 중국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의 만몽정책은 만몽을 특수 지역으로서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하고 나아가 그곳에 대한 일본의 배타적 권익을 인정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9)

 

그러나 1928년 6월 장쭈오린[張作林] 폭살사건에 의해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뿐만 아니라 일본의 만몽정책은 결정적으로 좌절되었고, 일본 그리고 관동10)군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어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때에 니치렌[日蓮]11)의 신자이며, 독일에 유학하여 총력전론을 배워 귀국한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12)가 관동군 작전주임참모로 부임하게 되면서, 1928년 10월 이후 만몽영유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게 되었다. 아울러 1929년 5월 고코토 다이사쿠[河本大作] 대좌의 후임으로 이타카키 세이시로[板垣征西郞]13)가 부임하면서 새로운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관동군 정보회의를 개최하였고, 여기에서 만주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전면적 군사행동에 대비해 구체적 방법의 책정에 착수하도록 결정되었다.

 

특히 만몽의 영유가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였던 이시하라는 무엇이 일본의 국운을 결정하는 과제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보고 있었다. 첫째, 총력전 수행을 위한 자급자족권의 확립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당연히 일본의 국가개조와 연동하고 있었다. 둘째, 국방, 전략상의 거점의 확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또한 조선통치와 방공(防共)이라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는 만몽을 영유함으로써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14)

 

이러한 만몽영유 계획은 실행에 옮겨졌고, 관동군의 점령지는 점차 확대되었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류탸오호[柳條湖]에서 만철선(滿鐵線)을 폭파하면서 일제히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주변의 여러 요인15)으로 인해 관동군은 초반 강세를 나타냈다. 일본은 전세를 확장시켜 북만주로 진출하였고, 다음 해인 1932년 2월에는 하얼빈 점령으로 동북 3성을 제압하였다.16)

 

그러나 사변이 발생한 후 겨우 나흘이 지난 22일 관동군은 미야케 미쓰하루[三宅光治] 참모장 이하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西郞], 이시하라 간지,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대좌, 가타쿠라 다다시[片倉衷] 대위 등의 막료들이 협의한 결과, 만몽영유 계획을 단념하고 만몽에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안으로 전환되었다.17) 독립국가의 수장으로 푸이[溥儀]를 새 국가의 수장으로 앉히게 된 직접적인 요인은 육군 중앙에서 파견된 다테카와 요시쓰쿠 소장이 1931년 같은 날(1931년 9월 22일) 관동군 사령관과 참모에게 “현 동북정권을 무너뜨리고 선통제를 맹주18)로 하여 일본의 지지를 받는 정권을 수립하는 게 득책이다”19)라고 제안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20) 관동군 막료들은 1932년 2월 5일부터 10차례에 걸쳐 건국회의를 개최하여 건국 일정과 국제(國制)의 세부 항목 확정을 거듭하였다.21) 이를 이어 받아 2월 16일 펑톈[奉天]에서 장징후이[張景惠]22), 짱쓰이[臧式毅]23), 시치아[熙洽]24), 마잔산[馬占山]25), 탕위린[湯玉麟]26), 치무트셈필(Chimedsempil, 齊默特色木丕勒)27), 링성[凌陞]28) 등 만몽의 유력자를 모아 동북행정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8일 동위원회 명의로 “이로써 당국(국민) 정부와 관계를 끊고 동북 성구(省區)는 완전히 독립하였으니(…중략…) 이는 한편으로 우리 동아 각 종족 인민을 위해 행복을 찾는 길이다”라고 선언하였으며, 마침내 3월 1일 동북행정위원회 위원장 장징후이의 저택에서 만주국 건국을 선언하게 되었던 것이다.29) 만주국은 독특한 형태로 건국되었는데, 1932년 3월 1일 동북의 4개 성 즉, 펑톈[奉天], 지린[吉林], 헤이롱장[黑龍江], 러허(熱河, 실제상의 러허성 개설은 1933년 5월)의 4성을 주요 판도로 하였고, 만주국 정부는 ‘건국선언’을 발표함과 더불어 연호를 대동(大同), 국기(國旗)를 신오색기로 한다고 포고하였다. 여러 번에 걸친 추대30)와 동북 3천만 민중의 추대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9일 푸이[溥儀]가 집정(執政)에 취임, 이날 정부조직법과 관제, 인권보장법 등이 공포되었고, 정부 수뇌 인사도 결정되었다. 이어서 12일 외교부 총장 세제쓰[謝介石]의 이름으로 세계 17개국에 대해 신국가의 승인을 구하는 대외통고를 발했다. 그리고 수도로 정한 창춘[長春]을 14일 신징[新京]으로 개명, 이로써 만주국(滿洲國)이 태어났던 것이다.31) 그러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만주국의 모든 정책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지하는 측면으로 집중되기에 이르렀다.32) 만주국은 1942년 9월 건국 10주년을 기해 일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거 관리로 발탁되었다.33) 이러한 만주국은 1945년 8월 18일 황제 푸이의 퇴위 선언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모습을 감춘 국가로 13년 5개월의 기간을 유지하였다.34)

 

 

3. 교황청의 만주국 승인 여부

 

우여곡절 끝에 성립된 만주국은 국가로서의 위신을 갖추기 위해 많은 내부적으로 국가적인 면모를 갖추어 나갔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제적인 승인을 얻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먼저 일본이 만주국을 승인해야 했다. 1932년 6월 14일 일본중의원 본회의에서 만주국 승인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이어서 8월 19일 정부는 각의에서 만주국 승인에 관한 <일만의정서>35)를 결정하였고, 관동군 사령관 겸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된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는 만주국 정부의 국무총리인 정샤오쉬[鄭孝胥]와의 교섭을 통해 <일만의정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철도, 항만, 수로, 항공로 등의 관리를 관동군에 위탁할 것, 일만 합작의 항공회사를 설립할 것, 광업권을 일본 내지 일만 합병회사에 허여할 것을 골자로 하는 협정을 차례로 맺었다.36) 당시 일본의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는 9월 15일, “일본국은 만주국이 주민의 의지에 기초하여 스스로 독립된 한 국가를 이루기에 이르렀음을 확인한다.”는 이유를 들어 만주국 승인에 나섰다.37) 이것과 함께 우리가 중요시해야 하는 내용은 1932년 3월 6일 푸이가 서명하여 관동군 사령관인 혼조 시게루[本庄 繁]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서신은 1932년 9월 15일에 체결된 <일만의정서>의 부속문서가 되었는데, 전후(1945년)까지 공표되지 않은 채 푸이 · 혼조 비밀협정이라고 불리고 있다.38) 이러한 문서에 대한 서명으로 1931년 9월 22일 만몽영유론에서 전환할 때 관동군이 결정한 “국방 · 외교는 신정권의 위촉에 의해 일본제국이 장악하고 주된 교통 · 통신도 관리한다”39)는 내용이 관철되고 시행된 것으로 만주국은 스스로 자신의 손발을 묶는 하나의 족쇄 역할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만주국에 대한 일본의 승인은 당시 국제연맹에서 만주국에 대한 실질 조사를 벌이고 있던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40)가 나오기 이전에 만주국에 대한 승인을 함41)으로써 이후 일어날 일에 대한 방비를 하고자 함이었다. 한편 만주국에 대한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에 의하면, “현재의 정권은 순수하고 자발적인 독립운동에 의해 출현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위에서 일본 우치다 고사이 외상이 말한 것과는 아주 상반된 견해를 주장하였다. 이에 국제연맹은 1933년 2월 24일, 이른바 만주국 비승인 결의안을 찬성 42, 반대 1(일본), 기권(샴 : Siam, 현재의 태국)으로 채택되자, 일본 대표단은 총회에서 퇴장하였고, 일본은 정식으로 3월 27일 정식으로 국제연맹에 탈퇴를 통고하였다.42)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은 만주지역에 대한 통치의 정당성을 다른 측면에서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그 하나는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측면에서의 접근을 통해 여러 나라로부터 승인을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군사적 측면은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1933년 1월 일본군은 산하이관[山海關]을 점령한 후, 무토 사령관은 “작전상 결말을 지을 중요한 시기가 목전에 다가왔다.”라고 하며, 애초부터 만주국의 판도로 상정되어 있던 러허성[熱河省]을 점령하는 군사행동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43) 이로써 일본은 실질적으로 만주에서의 실권을 장악하여 나갔다.

 

종교적 측면의 접근으로 만주국이 일본의 세력을 업고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당시 로마 교황청도 일련의 변화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은 1929년 2월 11일 로마의 라테란 궁전의 <교황의 방>에서 라테란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으로 인해 44에이커의 면적에 1,000명 정도의 인구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로 바티칸 시국이 출현하게 되었다.44) 이 당시 로마 교황은 분쟁을 조정한 중재자 역할을 담당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만주국 성립에 대한 국제적인 문제를 교황이 중재를 하게 함으로써 만주국의 국제적 지위를 확립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역대 교황의 국제분쟁의 중재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레오 13세는 <위대한 국제 중재자>라는 존칭으로 불렸고, 비오 11세인 현 교황도 1928년 볼리비아와 파라과이와의 양국 간의 분쟁을 해결에 도움을 주었던 것과 또 1930년 1월 24일에는 스페인과 페루와의 영구중재자로 로마교황 혹은 교황이 지명한 자로 결정됐다.45)

 

이러한 로마 교황의 국제적 지위와 권위를 일제와 만주국은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만주국에서는 적극적으로 교황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였다.46) 특히 만주국은 교황청과의 관계를 많은 매스컴이나 여론을 통해 홍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만주국과 일본의 노력에 대해 교황청에서는 만주국을 종교적인 승인47)을 하였던 것이지 외교적 승인은 하지 않았다48)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로마 교황이 파견한 사절을 살펴보면 그러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로마 교황의 사절에는 보통 3종류가 있는데, 외교적 사절과 종교적 사절을 겸한 사절로는 교황대사(敎皇大使, Apostolic Nuncio)49)와 교황공사(敎皇公使, Apostolic Internuncio)50)가 있다. 이러한 교황대사나 교황공사의 파견은 바티칸에 외교사절을 보내 온 국가에 교황청의 공식 사절을 파견하였다. 외교사절은 없었으나, 부임국가의 정부와 가톨릭교회의 관계 사항에 대한 교섭의 임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교황사절(敎皇使節, Apostolic Delegate)이라고 불렀는데, 만주국의 가스페 주만(駐滿) 대표51)는 지린[吉林] 주교로 있던 사람으로 만주지역을 대표하는 주교도 겸직하도록 임명하였으므로 제3의 카테고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52)

 

교황청과 만주국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로마 교황청에서 1934년 2월 20일에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성) 장관인 푸마소니 비온디(Pietro Cardinal Fumasoni, 福馬遜尼 米溫地 또는 畢翁弟나 畢翁第라고도 함, 1872~1960)는 지린[吉林] 및 신징[新京]교구의 교구장으로 오거스틴 가스페 주교(Mgr. Augustin Gaaspais, 高德惠)를 만주국 영토 내의 전 천주교 주교의 대표자로 임명하고, 이로써 동 제국 정부에 대해 심심한 경의를 표명하였다. 이로써 가스페 주교에게 만주지역의 천주교회와 만주국과의 교섭53) 임무를 잠정적으로 위탁한다.54)고 하였다. 가스페 주교는 이 문서를 받고, 만주국 내의 전교구를 단독으로 중국에서 분리시켜 관계를 단절시켰으며, 만주국 외교부 대신인 세제쓰[謝介石]에게 공식 방문을 희망한다는 공문을 1934년 4월 18일에 보냈다. 1934년 4월 20일에 세제쓰를 공식방문한 후, 신징[新京] 천주당에서 천주교공교회발표서(天主敎公敎會發表書)55)를 발표함56)으로써 향후 천주교인은 만주국과 어떠한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때부터 교황청과 만주국과의 공식 관계가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57) 5월 1일에는 만주국 황제인 푸이를 알현하였고, 5월 7일에는 만주국 황제의 특사로 우방인 일본 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샤오쉬[鄭孝胥] 총리를 만났다. 정샤오쉬 총리는 종교 관계를 책임지는 주관 대신으로 가스페 주교의 방문은 한층 그 의의가 있었다.58)

 

당시 국제적 지위에 비추어 볼 때, 단순한 외교적 의미에 있어서도 교황청과의 외교사절 교환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었다. 이번 교황청의 만주국 종교적 승인은 도덕적, 정신적 관점에서 세계적인 의미를 포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59)

 

 

4. 만주국 및 주변국과 천주교회와의 관계(일본, 중국, 한국)

 

만주국과 일본은 만주국에서의 천주교를 호국 종교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상황은 푸이가 만주국의 황제로 등극한 1934년 3월 1일 이후로 쉽게 볼 수 있다. 로마 교황청의 지원 아래, 1934년 3월 1일, 가스페는 <지린교구 주교 통령>[吉林敎區主敎通令]에서 “3월 1일, 2일, 3일 미사 중의 기도문 <황제송>(皇帝訟)과 <관부송>(官府訟)을 외우게 하여, 만주국에 축복과 은총을 내려달라는 기도를 하게 하였고, 아울러 각 교구, 공소 대문 위에 만주 국기를 게양하라”고 규정하였다.60)

 

특히 1934년 6월 13일에 만주국 전체 주교 명의로 발표한 포고의 내용은 신자들이 행하는 모든 행동이 만주국에 반하는 행동은 피하며, 애국심을 고양하고 솔선수범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 또 황제에 대해서는 무병장수하고, 평안하며, 성교회 및 교인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아울러 전 국민은 이를 이행하도록 요구하며, 만주지역의 전체 주교들이 공동 서명한 내용이므로 더욱 신빙성이 있게 되었다.61) 선교사들이 앞장서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이러한 일을 신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종교를 통해 만주국 사람들의 단합을 이루게 하려고 하였던 좋은 자료인 것이다.

 

또 한편으로 만주국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교황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것은 친선사절단의 교황청 방문 등이 그것이었다. 만주국에서는 1938년 9월 10일 만주국의 한윈지에[韓雲階]를 수석대표로 하는 “친선사절단”을 독일과 이탈리아로 보내면서 교황청에도 파견하여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하게 하여 만주국 황제의 서신과 예물을 전달하였고, 이에 파첼리 추기경과 가스페 주교는 교황 비오 11세의 서신을 받아 만주국 황제인 푸이에게 전달하였다.62)

 

천주교를 만주국 정권을 공고히 하고자 이용하였던 것과 같이 일본에서도 천주교를 정권을 공고히 하는 한 방편으로 활용하였다. 당시 일본 천주교에서 사용되는 공인기도서의 241쪽에는 <황실을 위한 기도>가 있고, 1934년에는 또 <황국을 위한 기도>를 첨가하였다. 일본 전국의 천주교회는 자주 황실 및 황국을 위한 기도를 바쳤고, 또 국가의 기념일에는 특히 황실과 국가를 위하여 가톨릭교의 장엄 예식인 미사성제와 성체 강복식을 거행하였다.63) 더 나아가 당시 일본에 정부와 천주교회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만주국에서 천주교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에는 마렐라 교황사절이 있었으므로 그의 행동에 대한 이해는 만주국에서의 가스페 주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당시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천주교에 대한 그들 정부의 입장 역시 종교를 자신들의 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먼저 활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당시 일본과 조선에서의 가장 큰 논쟁거리가 되었던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었는데, 이것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1936년 5월 26일, 신사참배에 대한 교황청 포교성의 훈령()이 발표되었다. 여기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다, 그러므로 신사참배를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64) 그러나 이러한 신사참배를 허용한 교황청 포교성의 훈령은 교황청의 변화된 동양선교 정책, 초대 주일 교황사절이었던 당시 포교성장관이었던 비온디(Pietro Cardinal Fumasoni Biondi, 福馬遜尼 米溫地) 추기경의 이해와 마렐라 주일 교황사절의 적극적인 노력65)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66)

 

중국의 경우는 일본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이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이 없었을 때인 1927년 국공합작이 해체되자, 천주교와 개신교는 적극적으로 반공부장(反共扶將) 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국민당과 합작하여 공산당 토벌을 벌이게 되었다. 1927년 남경 국민당정부의 성립에 교황은 즉각 코스탄티니(Celso Benigno Luigi Cardinal Costantini, ?恒毅, 1876.4.3.~1958.10.17.)를 특사로 보내 축하하였다.67)

 

특히 중국 문제에 있어 반공과 방공을 강조하는 교황의 명령이 하달됨에 따라, 천주교에서는 더욱 반공과 방공을 주장하게 되었다. 1928년 북벌 성공으로 8월 1일에는 교황 비오 11세가 중국의 국민정부를 승인하였으며, 1928년 8월 1일에는 교황 비오 11세가 중국 문제에 대한 ‘특별통유’(特別通諭)를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천주교 교우들은 중국에서 합법적으로 조직된 정부를 존중하고 따라야 됨을 선교, 교훈, 권도한다. 천주교 선교사와 교우들은 법률이 보장한 자유와 안전을 향유한다.”이다. 이러한 “통유”는 정식으로 국민당 정권을 지지한다는 표현이었다.68)

 

그러나 동북지역에 만주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그 관계가 더욱 모호해졌다. 로마 교황 비오 11세는 만주국 성립 이후인 1934년 2월 10일 사절을 파견하여 축하하였고, “만주국”을 외교적 승인하며, “만주국”에 천주교회를 건립하였으며, 가스페 주교를 그 지역의 대표로 임명하였다. 1939년 2월 비오 12세는 교황 취임 후 오래지 않아, 만주국을 지지하는 입장이 변하지 않았음을 서신으로 표시하였다.69) 당시 코스탄티니 대주교의 뒤를 이은 교황의 종좌대표인 짜이닌(Mario Zanin, 瑪利奧 蔡寧)70)은 1939년 3월 14일에 전국 주교들에게 서신을 보내, 전국에 있는 사제와 신자들에게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는 기간에도 “이데올로기의 좌나 우에 치우치지 말 것”을 요구하며, “절대적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는데, 실제상 이것은 일제 침략에 반항하지 말고, 일본 제국주의의 순민(順民)이 되라고 언급한 것이었다.71)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인 장제쓰[蔣介石]도 짜이닌의 이러한 서신이 중국 국책에 위배되므로, 구웨이쥔[顧維鈞]에게 프랑스 주재 교황공사인 바레리(Vce Lerio Valeri) 주교에게 짜이닌의 이러한 지적은 중국의 국방정책과 중국 교우들의 애국주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지적하였다.72)

 

이러한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에서는 만주국 국민의 단결을 위해 공자 의례를 의무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교회 당국은 공자 의례의 성격을 만주국 정부에 질의하게 되었고, 만주국 정부는 그것이 단순히 국가적, 사회적 예식일 뿐이라고 답변하였다. 만주국 주교들은 이러한 정부의 답변을 교황청에 제출하였으며, 교황청에서는 1935년 5월 28일 공자 의례를 허용하였다. 교황청은 의례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1939년 11월 8일 <중국의례에 관한 훈령>을 공포하였다. 이 훈령에서는 공자 참배를 허락한 것뿐만 아니라, 고인의 시신이나 영정, 또는 위패에 절을 하거나 다른 존경의 표현도 허락하였다.73) 특히 만주국에서는 1940년 6월 22일 관동군의 책동으로 푸이의 두 번째 일본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3종 신기(神器)74)를 가져옴으로써 만주국에서 “건국신묘”(建國神廟)가 건립75)되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천황폐하의 보호에 의존하고자 하였던 푸이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후, 만주국에서는 《建國神廟, 建國忠靈 廟祭祀令》을 발표하여 각지에 “건국신묘”(建國神廟) 건립을 요구하였으며, 1942년까지 동북의 신묘(神廟)는 240곳에 달하였다.

 

일제치하에 있던 조선 천주교회는 일제가 발표한 <포교규칙>76)과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 전례 및 포교문제에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일제는 그리스도교를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은 하였으나, 일제가 발표한 <포교규칙> 중에서도 제4조의 조항을 천주교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 반발하였으나, 이 내용은 신도와 불교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천주교회의 반발을 무마하였다.77) 신사참배에 대한 것은 《한국교회 공동지도서》가 1932년 3월 15일 자로 교황의 승인을 받은 후, 9월부터 효력을 발생하는 것으로 주일 교황사절에 의해 6월 26일 자로 공포되었다. 주일 교황사절도, 교황청도 신사참배가 이단이므로 천주교에서 거부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신사참배 거부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32년에 발간된 《천주교요리》 즉 1925년판 《천주교요리》의 재판본을 보면 신사참배를 허용한다고 수정되어 있다.78) 이러한 신사참배 찬반의 혼란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36년 4월 기관지 《경향잡지》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공식 허락하였다.79) 이렇게 신사참배를 공식허락하게 된 것은, 한국과 일본 천주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로 어려움을 겪자, 1935년 5월 8일 주일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는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에 보고문을 보내 신도(神道) 예식에 대한 교회의 결정을 새롭게 내려줄 것을 요청한 것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80) 이에 1936년 5월 26일 신사참배에 관한 교황청 포교성의 교령(Pluries Instanterque)이 공포되었다. 즉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신사참배81)를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포교성성이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허용함에 따라 신사참배 문제를 둘러싼 정부와 교회의 긴장관계는 해소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신사참배의 강요에서 더 나아가 가정이나 교회에 ‘가미다나’82)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본 정책에 반발하는 성직자나 신자들이 적지 않았다.83) 그러나 일제는 전시 총동원령을 성직자와 신도들에게 강조하며 주지시켰고,84) 교구장들의 교서 발표 내용에도 황국신민을 강조하는 내용의 글을 함께 게재함으로써 신자들을 황국신민화 시키는데 노력하고 있었다. 1940년 6월 13일에 조선 八 교구 모든 감목의 교서를 발표하였는데, 교서 내용 아랫부분에 황국신민 서사가 박스 란에 게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85)

 

한국에서 발행된 《경향잡지》에서 재미있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일본군부 당국의 가톨릭에 대한 호의”라는 제목의 글이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파리 외방전교회 전교 잡지에서 최근 “일본 군부 당국은 왜 가톨릭을 좋아하나”라는 제목 아래에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한 내용은 나름대로 군부가 천주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내용이라 언급해 본다. 황군 측에서 가톨릭교회를 특별히 애호함을 본 북경주재 일본인 기자들이 이를 이상히 여겨 그 이유를 군부 당국에 질문하였더니, 군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고 한다. “첫째는 어떠한 박해를 당하든지 굴복하지 않고 순교까지 하는 가톨릭의 위대한 힘을 우리는 존경치 않을 수 없다는 것, 둘째는 가톨릭 선교사들은 완전히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있으므로 그들의 말은 각국 외교관의 말보다 한층 더 신용할 수 있다는 것, 셋째는 가톨릭은 불교나 회회교(回回敎)처럼 어느 지방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세계의 보편된 종교로 되어 있다는 것, 넷째는 가톨릭교회는 로마 교황의 회칙에 의해 철저하게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있다는 것, 다섯째는 가톨릭 선교사들은 희생적 정신이 풍부하고 또 독신생활을 하므로 아무리 위험한 지경이라도 용감히 들어가 자기 직무에 충실하므로 극동의 정세에 대하여 가장 정통하고 있는 것 등을 들어 대답하였다”86)고 전하였다. 이러한 말을 고려한 일제와 만주국은 천주교회와의 관계를 호의적으로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5. 만주국 내의 천주교 전교 현황

 

만주국 내의 천주교회는 기존의 중국의 교구87)와 비교해서는 작은 숫자인 9개의 교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 광활함과 향후 발전 가능성으로 볼 때, 결코 작은 곳이 아니었다. 8곳은 펑톈[奉天], 지린[吉林], 쓰핑지에[四平街], 푸순[撫順], 치치하르[齊齊哈爾], 옌지[延吉], 이란[依蘭], 러허[熱河], 츠펑[赤峰] 교구이다. 이러한 교구 상황을 언급하는 것은 당시 교황청에서의 만주국 내의 천주교 상황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의화단이 8국 연합세력에 의해 진압된 후 체결된 베이징의정서[北京議定書] 이후 배외양이(排外攘夷)사상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서양 종교의 전교가 수월해졌고, 이에 개신교 세력이 크게 신장되고 있던 상황88)에서 교황청의 만주국에 대한 판단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간단한 내용을 언급해 본다.

 

① 펑톈[奉天]89) 교구90) : 만주 천주교의 모교구로 먼저 북만교구[吉林]을 분리시켰다. 이후 1929년 8월 2일에는 쓰핑지에[四平街] 교구를, 1932년에는 푸순[撫順] 교구를 분리시켰다. 펑톈에 주교좌성당이 있었다. 현임 주교로는 쟝 마리 브로아(J. M. Blois, 衛宗藩) 주교가 선교 소임을 맡고 있다.91) 이 교구는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선교사를 파견하며 선교하였다. 이 교구에는 1934년 8월 통계에 의하면, 신자 수는 26,783명92)이었고, 프랑스 선교사는 30명, 만주인 선교사는 20명, 외국인 수녀 21명, 만주인 수녀 48명, 대성당이 18곳, 소성당이 98곳이 있었다.93) 펑톈 교구 내에서 가장 신자가 많았던 곳은 역시 펑톈 시에 있던 예수성심성당[耶?聖心總堂]으로 신자 수는 2,731명이나 되었다.94)

 

그러나 1941년에 이 교구는 주교 1명, 외국인 선교사 31명, 중국인 신부 27명, 대신 학생 22명, 소신 학생 35명, 외국인 수녀 33명, 중국인 수녀 104명이고, 본당 수는 34곳이었으며, 신자 수는 30,906명으로 늘어나 있었다.95) 펑톈 교구의 1934년, 1939년, 1941년을 비교해 보면서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이 지역에서 천주교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96) 각주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인과 외국인 성직자 수도자의 증가와 신학생의 증가 및 교우 수의 증가 등의 천주교의 발전적인 현상은 당시 일제와 만주국에서 천주교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황청에서도 만주국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97) 그러므로 교황청과 만주 교구의 주교단은 일제나 만주국에 일정 정도의 협조를 함으로써 천주교 발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② 지린[吉林] 교구98) : 지린 교구는 대부분의 지린성과 헤이롱장성의 일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교구 역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가 담당하고 있었고, 가스페[高德惠] 주교가 현임 주교이며, 신자 수는 26,797명이고, 포교구역은 29개 지역이며, 프랑스 선교사가 28명, 만주인 선교사가 29명, 대소 신학교가 각 1개씩 있었으며, 신학생은 102명이었다. 외국인 수녀는 30명이었고, 만주인 수녀는 152명에 달하였다.99) 특히 지린 교구의 샤오빠지아즈(小八家子 ; 300戶 정도의 인구로 구성된 당시 부촌으로 138년 전인 1796년에 천주교가 전교되었으며, 아편 환자는 한 명도 볼 수 없는 평화 마을)는 일만(日滿)의 요구에 적극 협조하여 모범촌이라는 명성도 얻은 지역이다.100)

 

③ 푸순[撫順] 교구 : 이 교구는 1932년 펑톈 교구에서 분리되었으며, 펑톈 성의 12개 현과 관동주(關東州)가 주된 지역이었다. 이 교구는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다른 이름으로는 지명이름을 따서 메리놀회라고도 한다.)101) 당시 주교로는 레인(R. Lane, 林) 주교가 선교 소임을 맡고 있었다.

 

이 푸순 교구에서 천주교의 역사적 도시는 차쿠(叉谷 ; 현재는 白家店이라는 명칭으로 불림)이다. 베롤 주교가 1841년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그 후 이곳은 조선에 박해가 있을 때, 피난을 하였던 장소였고, 또 조선으로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 지나던 경로였다. 현재(1934년)에는 이곳 차쿠의 신자가 550명이 있고, 전부 천주교 신자이며, 정부로부터 인가받은 소학교에 남녀 학생 35명이 있었다.

 

푸순 교구의 전교지 면적은 약 81,000㎢이고, 거주민은 550만 명에 이르며, 그중 대략 8,000명이 신자였다.102) 미국인 선교사가 21명, 만주인 선교사가 5명, 미국인 수사가 2명, 미국인 수녀가 20명, 만주인 수녀가 4명이었고, 만주인 수녀 지원자가 30명, 만주인 처녀회원이 22명이었으며, 대성당이 11곳, 소성당이 33곳, 소신학교 1곳으로 학생이 30명 있었다.103)

 

이 교구의 특징은 《펑톈푸순천주교당》(奉天撫順天主敎堂, The Manchu-Knoller)이라는 영문신문을 1927년 메리놀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도착한 후 오래지 않아 창간하였다. 레인(R. Lane, 林) 주교가 발행 책임을 졌고, 반월간(半月刊)으로 발행되어 해외로도 보내졌다. 이러한 간행물은 교무활동 자금을 모금하는 중요한 가치성을 지니고 있었고, 또 간행물은 4면으로 간행되었는데, 그중 한 면은 지방 사무의 생동감 있는 그림으로 장식하였다.104)

 

⑤ 치치하르[齊齊哈爾] 교구 : 치치하르 교구는 1928년 지린 교구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교구의 범위는 롱장[龍江]과 헤이허[黑河]를 제외한 헤이롱장성[黑龍江省] 전체와 씽안성[興安省] 일부이다. 치치하르에 주교좌성당이 있고, 스위스의 베들레헴 선교회가 선교를 담당105)하였다. 치치하르의 최초의 주교는 이모프(Imof) 주교였으나, 치치하르 부근에서의 교통사고로 급사하였다. 교구의 통계를 보면, 신자 수는 11,841명이며, 스위스 선교사는 27명, 만인 선교사 1명, 외국인 수녀는 21명, 소신학교는 1곳으로 학생 수는 53명이었다. 대소성당은 25곳이 있었으며, 사제가 상주하는 성당이 20곳이었다.106)

 

⑥ 옌지[延吉] 교구 : 1928년까지는 조선의 원산(元山) 교구에 속해 있었으나, 같은 해 분리되어 독립교구107)가 되었다. 교구의 범위는 지린성의 옌지도[延吉道]이다.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도회에 의한 전교를 하였다. 옌지에 베네딕도회 대수도원이 하나 있었는데, 옌지 교구장 주교인 브레허(Mgr. Theodor Hermann Breher, 白化東, 1889~1950)가 수도원 원장과 주교직을 겸직하게 되었다. 이 교구는 490,000㎢의 면적으로 230만 인구가 거주하였는데, 19,000명이 천주교 신자였으며,108) 유럽인 베네딕도회 선교사 16명, 유럽인 수사 8명, 신학생 31명이 있었고,109) 《가톨릭소년》(Catholic Youth)이라는 월간110)을 1935년에 창간111)하였다. 이 간행물은 만주의 청년뿐만 아니라, 중국 내지 및 조선과 일본 청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학교문제에 있어서도 일본에 굴복하였지만,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대해서도 일부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유일신을 믿는 천주교는 1942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경배하는 것에 적극적인 반대112)를 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브레허 주교는 1942년 12월 8일에 옌지 각지 본당의 신부들에게 “대동아 성전의 승리를 위한 기도”[爲大同亞聖戰的勝利而祈禱]의 내용을 하달하였고, 일본 제국주의가 전쟁에서 패하기 이전까지 교구 전체의 각 본당 신부를 모두 교구 내에 모이게 하여 《성전승리》(聖戰勝利)의 대미사를 집전하였으며, 각 본당신부들은 이러한 교구의 지시를 따랐다.113)

 

⑦ 이란[依蘭] 교구 : 이란 교구는 1928년 조선의 원산(元山)대목구에서 분리 독립되었다.114) 교구의 범위는 지린성[吉林省]의 이란도[依蘭道]가 주요 범위였다. 이란 포교지는 다른 선교회에 위임될 때까지 사우어 주교의 관할 하에 있게 되었다. 사우어 주교는 부족한 인원으로 거리가 먼 이란 지역을 관리할 수가 없어 가능한 한 빨리 이 지역을 다른 선교회에 넘기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이란 포교지는 1933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위임되었고, 카푸친회에서는 9월에 북티롤(오스트리아 티롤 주의 북부)관구에 이 지역을 맡겼다. 이후 이란지역은 1940년 4월 9일 ‘쟈무쓰[佳木斯]지목구’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지목구장에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헤르메네질드 힌트링거(Isidor Hermenegild HIntringer, 1905~1990) 신부가 임명되었다.115) 카푸친회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13세기에 설립하였으며, 현재 세계 각국에 많은 포교지를 두고 있다. 작년에 3명의 선교사가 만주로 들어왔는데, 그중 2명은 일본에서 왔으며, 일본어 및 일본 사정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교구는 옌지[延吉] 교구와 같은 모양으로 조선인 신자가 많았으므로, 그들에게 전교할 기회가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이 교구의 신자 수는 1,156명이었고, 오스트리아 선교사는 3명, 전도자는 6명, 학교는 6곳이 있었으며, 학생 수는 138명이었다.116)

 

⑧ 러허[熱河] 교구 : 러허 교구는 이전에는 동몽골 교구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1883년 몽골교구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교구의 범위는 러허성[熱河省]의 대부분이었다. 쏭수쭈이즈[松樹嘴子]에 주교좌성당이 있었다. 이 교구는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두고 있는 쓰구토의 성모 원죄 없이 잉태되신 수도회의 선교사에 의해 포교가 이루어졌다. 현재는 동회의 콘라드 아벨스(Mgr. Conrad Abels, 葉) 몬시뇰이 선교를 담당하고 있으나, 그는 80세 이상의 고령이라서 현재는 보좌 주교인 루이스 얀센스(Louis Janssens, 南) 주교가 교회행정을 맡아보고 있으며, <성심수사회>(聖心修士會)라는 만주인 수도회가 있었으나, 쏭수쭈이즈의 모수도원에는 22명의 수사와 4명의 지원자가 있었다. 또 <마리아 요셉 수녀회>라는 수녀회가 있었는데, 네덜란드 사람이 주관하였고, 만주인도 몇몇 있었다. 신자총수는 23,052명이었고, 주교 2명, 유럽 선교사(네덜란드인, 벨기에인)가 51명, 만주인 선교사 5명, 신학생 58명, 유럽인 수사 1명, 만주인 수사 25명, 유럽인 수녀 17명, 큰 교회부락은 86곳, 작은 교회부락은 1,064곳이 있었다.117)

 

⑨ 츠펑[赤峰] 교구 : 이 교구는 1932년 러허[熱河]교구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범위는 츠펑[赤峰], 지앤핑[建平], 닝청[寗成], 웨이창[圍場]의 여러 현(縣)들로 구성되었으며, 주교좌성당은 츠펑에 있다. 이 교구는 순전히 만주인 선교사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며, 현재 만주인 선교사가 자급자족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만주인인 짜오칭화[趙慶化]가 현재 주교 임무를 맡고 있다.

 

신자 총수는 22,360명이며, 만주인 선교사는 22명이고, 벨기에 보조 선교사는 2명, 만주인 수녀는 40명, 대신학생 9명, 소신학생 18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천주교 신자 소재지는 985곳이다.118)

 

이러한 여러 선교지의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일본 군부와 만주국 정부 사람들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그들과의 적대관계에 있던 나라의 주교나 신부들은 항상 걸림돌처럼 그들에게 부담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며, 일본 군부와 만주국 정부 관리들 역시 그들을 좋은 시각으로는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마찰이 일어났다. 이러한 성직자들에 대한 일관적인 통치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일본이나 만주국에서 행하는 군국주의적인 행위에 참여시키고, 그들을 동원시킴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반발이나 반항을 최소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행위가 황실과 신사 참배 등이다. 이러한 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만주에서 오족(五族)119) 협화(協和)를 추구하였으며,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의 자신들의 계획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계획이 신빙성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정책에 대한 믿음을 백성에게 주고자 무던히 종교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만주국의 천주교 통제 방법은 각 교구의 주교를 통해 만주국에 적극적인 협조와 만주국 황제와 만주국을 위한 기도와 충성 맹세가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6. 결론

 

본 논문을 작성하면서 만주국이 완정한 독립국이 될 수 없었던 것을 성립배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부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건국된 만주국이 어떻게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면서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천주교를 활용하는 것이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대외적인 측면에서 교황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라는 것을 내세워 국제적으로 공인된 국가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오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만주국과 일제에 봉사하는 국민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주교라는 종교의 활용 역시 아주 좋은 방법의 하나라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만주국과 일제는 어떻게 활용하여 나름대로의 목적을 어떻게 이루어내고자 하였는지에 대해, 또 교황청에서는 만주국을 과연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각 장절별로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만주국은 성립배경부터 독립국이기를 포기한 상태에서 국가로 성립된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 자주 독립적인 국가로 발전하기란 애당초 가능하지 않았다. 만주국 성립배경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만주국은 관동군의 역할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국 성립 이후에는 만주국에서의 권한이 관동군 사령관에서 일본 정부의 내각총리대신, 외무대신 및 만주국주재 특명전권대사(대개는 관동군 사령관이 겸직) 등으로 권한이 나뉘게 되었고, 명령체계는 관동군 참모장은 총무장관에게 명령하였고, 관동군 사령관은 만주국 황제를 면회하는 형태로 명령을 공포하게 하였다.120)

 

둘째, 만주국이 일제 패망 후 소리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은 그 성립 때부터 관동군과 일제는 만주국의 황제와 대신들과는 동상이몽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만의정서>에 서명을 하면서 만주국의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정샤오쉬가 3년 만에 행정장관과 총리직에서 물러난 것을 볼 때, 역시 그 한계가 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샤오쉬가 만주국에 참여하였던 가장 큰 이유는 푸이를 황제에 복귀시켜 제제를 통해 만주국의 자립을 도모하는 것에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제제 이행에 대해서도 청조의 복벽(復?)을 부정하는 관동군과 격렬한 각축이 생겨나고 상호 대립이 두드러졌다.121) 즉 정샤오쉬가 생각하고 희망하였던 만주국이 아니었으므로, 관동군과 만주국의 황제인 푸이와 정샤오쉬의 생각은 서로 같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122)

 

점차 만주국에서 황제의 권한을 상실해 가자 스스로 권한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제1차 일본 방문 후 귀국하여 <회란훈민조서>(1935년 5월 2일)를 발표하여 “일본에서의 천황의 지위는 만주국에서 나의 지위와 같기에, 일본인이 천황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나에게도 해야 할 것이다”는 논리에 따라 우방 일본과 “一德一心”이라고 하며, 만주황제에 거역하는 것은 일본 천황에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논조로 조서를 발표하였다.123) 그러나 관동군은 이러한 푸이의 상태가 위험 단계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일만 관계를 확실하게 조절해 나갔다. 화란훈민조서에서는 일본을 우방이라 표현했는데, <협화회 창립 5주년 기념일 칙어>(1936년 7월 25일에는 “일본을 맹방”이라 칭하며 “맹방 일본제국에 의지하여 영구히 변하지 않는다.”124)라고 말하고 있고, <건국 10주년 조서>(1942년 3월 1일)에서는 “대동아 성전에 힘써 친방(親邦)의 대업을 봉익(奉翼)하고”라고 하여 ‘친방’이라는 말을 하였다. 친방은 부모를 가리키는 말이고, ‘봉익’이란 받든다는 뜻이다. 이러한 몇 차례의 발표 문서에서 일만 관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셋째, 만주국은 왜 그토록 교황청으로부터 국가로서의 승인을 받고자 하였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태생 자체가 독립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국 건국의 정당성 및 국제적으로 만주국이 완정한 하나의 독립국임을 교황의 권위와 교황청의 국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대외적으로 공인을 받고자 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주국 내에서 천주교의 선교를 담당했던 선교주체가 여러 나라에서 만주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 역시 일본과 만주국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관계를 선린 우호적으로 펼치는 것이 득이 된다는 판단 하에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천주교 전교 상황을 살펴본다면, 만주국에서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국가에 봉사의 일환으로 종교를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비단 만주국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본국 및 조선에서도 이러한 것을 점차 강요한 것을 본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황실의 건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를 바치게 하는 것 등을 통해 천주교인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우선시 되었다. 그러나 1942년 12월 8일에 제정된 국민훈의 내용125)이 일제의 만주국에 대한 실제를 드러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126)

 

넷째, 일본과 만주국은 천주교를 일본의 국가신도(國家神道) 내지는 신사신도(神社神道)의 하위 종교로 인정하고 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신앙에 대한 정책은 메이지 유신기에 일본 자국에서 형성되었던 신도 국교화 정책 내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주입을 위한 교화정책의 연장이며, 더욱 가혹한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기조는 국가신도 내지 신사신도를 정점으로 하여, 그 하위에 교파신도와 불교, 기독교를 국가의 공인종교로 삼고 국가 시책에 충실히 따르도록 통제하고 이용하였으며, 그 외의 종교는 ‘유사종교단체’라 하여 불법화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통제, 탄압하는 것이 주된 정책이었다.127) 일본이나 만주국이 인정한 종교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통치방침에 비협조적이거나 그들의 정책에 위배될 때에는 공인종교라 하더라도 가차 없이 탄압하였다.

 

다섯째, 만주국의 승인 여부는 현재의 중국과 교황청의 관계 개선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 이유는 교황청의 만주국 승인 여부는 곧 중국 분열을 초래하는데 교황청의 일조 여부와 관련이 있다고 중국 측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황청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그리 녹록치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일제 및 만주국의 종교에 대한 정책을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내용에 대한 답은 의외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일제의 종교에 대한 탄압은 일제에 대해 적성국의 신부나 주교를 추방하거나 입국 금지시키는 것 등으로 종교 탄압을 가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이를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천주교의 중국 토착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중국인 주교 탄생 및 조선의 조선인 교구장 탄생128) 등은 이러한 것을 반증하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즉 해당 지구에서 종교의 탄압으로 서양 선교사와 수도자들이 모두 축출된다 하더라도, 자국 주교와 신부가 존재한다면 이후로도 신앙의 명맥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본국 성직자 양성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만주국의 멸망 이후, 중국 공산화와 중국에서의 천주교 탄압 그리고 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과 자립을 뜻하는 애국교회의 삼자운동 실시로 중국 정부는 교황청과 분리된 독립 교회129)를 주장하였다.130) 그러나 교황청의 만주국 승인은 종교적 차원에서의 승인이라는 것과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닌 신자 보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주장하며, 중국 측에서도 교황청의 만주국 승인은 순수한 종교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이제는 애국교회를 주장하며 교회분리의 조장을 그쳐야만 할 것이다.

 

만주국 문제로 야기된 교황청과 중국 교회의 갈등이 이제는 하나의 교회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더 이상 교회가 분열된다면 그것은 중국과 교황청과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중국 내부의 애국교회와 지하교회의 문제131) 등 여러 문제132)로 비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당국도 하나의 교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과 희생을 기울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복잡다단한 본 논문의 결론을 다음의 성경 구절로 마무리해 본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 12~14)

 

* 이 논문은 2015년 한국교회사연구소의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참고문헌

 

1. 歐文資料

Giovanni Coco, Santa sede e Manciukuo 1932~1945, Citta del Vaticano : Liberia deitrice vaticana, 2006.

Pierre Blanchard Regis Ladous, Le Vatican et le Japon dans la guerre de la Grande Asie orientale La mission Marella, paris : Desclee de Brouwer. 2010.

 

2. 中文資料

國民政府 外交部, 《中日問題之眞相 - 參與國聯調査團中國代表提出之二十九種說帖一九三二年四月至八月》, 臺北 : 臺灣學生書局, 中華民國六十四年版.

<國民布告 第17號>, 《滿洲帝國政府公報》 1942.12.8.

《滿洲敎務年鑑》上, ANNUAIRE DES MISSIONS CATHOLIQUES DU MANCHUKUO(《滿洲帝國天主公敎敎務年鑑》, MOUKDEN : 奉天市 瀋陽區 小南街 天主堂 公敎印書館, 1941年.

遼寧省?案館編, 《溥儀私藏僞滿秘?》, 北京 : ?案出版社, 1990年版.

中國歷史博物館編, 《鄭孝胥日記》, 第5冊, 北京 : 中華書局, 1993年版.

顧保鵠, 《中國天主敎大事年表》, 臺北 : 光啓出版社, 1970年版.

金光熙, 《延邊天主敎的沿革與現狀》(延邊文史資料 第8輯宗敎史料專輯), 1997.

Rudolf Lowenthal(羅文達)著, 王海 譯, 《在華天主敎報刊》, 廣州 : ?南大學出版社, 2013년판.

安可佳, 《中國天主敎簡史》, 北京 : 宗敎文化出版社, 2001年版.

晏家佳, 《中國天主敎》, 北京 : 五洲傳播出版社, 2004年版.

?森富, 《中?基督?史》, 台北 : 台?商?印??, 1978年版.

吳佩軍 · 傅學藝, <僞滿時期的政敎關係 - 以天主敎延吉敎區爲中心>, 《外國問題硏究》, 2013年 第1期, 總207期.

張力 等著, 《中國敎案史》, 成都 : 四川省社會科學院出版社, 1987年版.

解學詩, 《僞滿洲國史新編》, 北京 : 人民出版社, 1995年版.

牟鍾鑒, 張踐, 《中國民國宗敎史》 - 《中國全史》(全一百冊), 北京 : 人民出版社, 1995年板.

 

3. 日文資料

片倉衷, 《滿洲事變 機密政略日誌》, 《現代史資料(7) - 滿洲事變》, みすず書房, 1964년.

比屋根安定, 《支那基督敎史》, 東京 : 生活社, 1940年.

田口芳五郞, 《滿洲帝國とカトリック敎》, 東京 : カトリック中央出版部, 1935年版.

 

4. 國文資料

김승태, <일제하 조선의 신사에 관한 연구>, 《근대 한 · 일간의 상호 인식》, 동북아역사재단, 2009년판.

내포교회사연구소 자료집 2 《라리보 주교 자료집》Ⅰ,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년판.

穆啓蒙 편저, 신의식 역, 《중국천주교회사》, 도서출판 명성, 2011년판.

山室信一, 윤대석 역,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소명출판, 2009년판.

신의식, <로마 교황청의 만주국 승인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 - 당시 왕래한 문서 내용 분석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4, 2014년.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2.

<중국예식과 그에 대한 서약에 관하여>, 《경향잡지》, 919(1940. 2. 15).

중화민국 국민정부 외교부 편, 박선영 옮김, 《중일문제의 진상 - 국제연맹 조사단에 참여한 중국 대표가 제출한 29가지 진술(1932년 4월~8월》, 동북아역사재단, 2009년판.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허동현 등 저, 《근대 한 · 일간의 상호 인식》, 동북아역사재단, 2009년판.

 

--------------------------------------------------

1) 1933년 8월 8일 日本閣議에서 결정한 <滿洲國指導方針要綱> 내용에 의거하여 만주국을 조종하였던 것과 푸이 황제를 꼭두각시 체제로 만주국을 조종하였기 때문에 괴뢰정권이라고 언급하였던 것이다. 解學詩, 《僞滿洲國史新編》, 北京 : 人民出版社, 1995年版, 197~200, 205~214쪽. 특히 <滿洲國指導方針要綱>의 내용은 14개 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一, 제국의 만주국에 대한 지도는 반드시 만주국의 사회 특성, 독립적 체면과 습관적 내력을 존중하고 민족 협화(協和)와 安倨樂民을 실현한다. 二, 만주국 국가의 근본 조직, 국방, 치안과 외교사항, 日滿 경제활동 중의 특별히 중요한 사항 및 국체 존립에 대한 중대 문제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지도한다. 三, 만주국 지도에 대한 현행 체제 아래에서 관동군 사령관 겸 만주국 주재 대사의 내부적 통합관리 아래, 중요한 내용은 일본 관리의 실질적 지도를 받는다. 四, 만주국은 君主立憲制를 실행하는 것을 최종목표로 하나 현재는 현행 체제를 유지하고, 신중한 토론 후에 정식 헌법을 제정한다. 五, 만주국 행정은 극단적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지 않고, 지방차지의 전통을 존중하여 중앙과의 집권을 협조하게 한다. 六, 만주국 육해군은 국내 치안을 유지할 정도의 한도 내에서만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근 국가에 대한 방어 및 함선 등의 시설을 갖춘다. 필요에 의해 점진적으로 갖추어 나간다. 七, 만주국 치안의 유지는 만주국 성립의 특수성 및 국내외 상황을 고려하여 특별히 조사 기관을 설립하고, 관동군과 긴밀한 연계를 유하는 기초 위에서고, 국내외 각종 국가를 파괴하는 행위를 미연에 방지한다. 八, 만주국 외교정책은 동방 평화를 확보하고 大義를 伸張시킨다는 제국의 외교정책에 의거하여 함께 움직인다.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의 원칙을 유지하나, 구체적인 집행에 있어서 국방에 관련된 사항은 제한을 둔다. 九, 만주국 경제정책의 제정은 제국이 세계경제에서의 實力을 발전시키는 기초 위에서 만주국의 경제 實力을 합리적으로 일만 양국의 융합된 경제를 목표로 발전시켜, 국민 생활의 향상과 균형을 보장한다. 十, 만주국 경제개발은 日滿 공존과 공영을 지도 사상으로 하여, 제국이 국방상 부분적 제약을 받을 때, 제국의 실제적 통치 아래에 놓인다. 十一, 만주국의 교통과 통신은 국방과 치안관계가 밀접한 관계로 제국의 실제적 통치 아래에 놓여, 각 항의 발전을 건전하고 신속하게 발전시킨다. 十二, 만주국의 재정은 국민 부담의 합리성을 고려함과 동시에 신속하게 확립하여 제국의 만주국 주둔비용을 분담해야 한다. 十三, 만주국의 敎化는 만주국과 제국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동방의 평화를 유지하는 특수한 사명적 자존심과 오족(五族) 평화의 이상을 배양한다. 노동교육의 초점은 실업교육을 진흥함에 있다. 十四, 만주국의 사법은 특별히 만주국의 국민성과 습관을 특별히 존중하고 신속히 건전한 체제를 정비하여, 보편적으로 법을 준수하는 정신을 배양한다. 동시에 대외적인 신의를 지켜, 이로써 점차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폐지시킨다. 解學詩, 앞의 책, 198~200쪽.

 

2) 解學詩의 앞의 책 목록에서는 “滿洲國”을 지칭하는 모든 명칭에서 “僞滿洲國”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解學詩, 앞의 책, 1~7쪽의 목차 참고.

 

3) 山室信一, 윤대석 역,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소명출판, 2009.

 

4) 田口芳五郞, 《滿洲帝國とカトリック敎》, 東京 : カトリック中央出版部, 1935年版이다. 참고로 저자인 田口芳五郞(1902.7.20.~1978.2.23.)은 ?崎? 西彼杵郡 外海町(??崎市)에서 태어났다. 1928년 12월 22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특히 1934년 3월부터 12월까지는 만주국에 고문의 신분으로 지린(吉林)교구 가스페 주교에게 봉사하였다. 1937년 7월 <日本天主?新?>(현재의 <天主?新?(周?)>)의 초대 사장을 역임하였다. 1941년 12월 14일 Jean-Baptiste Castanier에 이어 오사카[大阪]교구 주교에 임명됨과 동시에 4개국 교구 수석사도(四???首席使徒)에 임명되었다. 1945년 5월~8월에는 해군에 잠시 있었고, 1956년에는 천주교 교육위원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9년 8월 5일에는 오사카 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되자 대주교에 임명되었고, 1973년 5월 5일 추기경에 피임되었다. 1978년 2월 23일에 서거하였다. 그러나 《中國敎案史》에서 요시고로 다구치는 로마와 바티칸에서 양성되어진 사람으로 일제의 중국 침략에 대해 공산당의 위협에 대한 자위라고 《中日戰爭的公敎觀》 이라는 소책자에서 언급하고 있다고 하며, 이 요시고로 다구치는 1937년 텐진[天津]의 文貴賓 주교를 방문하여, 文 주교를 텐진 주재 일본군관에게 소개시킴으로써 이때부터 文 주교와 군대와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張力 等著, 《中國敎案史》, 成都 : 四川省社會科學院出版社, 1987年版, 736~743쪽.

 

5) 《滿洲敎務年鑑》上, ANNUAIRE DES MISSIONS CATHOLIQUES DU MANCHUKUO(《滿洲帝國天主公敎敎務年鑑》, MOUKDEN : 奉天市 瀋陽區 小南街 天主堂 公敎印書館, 1941년.

 

6) 졸고, <로마 교황청의 만주국 승인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 - 당시 왕래한 문서 내용 분석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4, 2014년, 285~319쪽.

 

7) 만주와 몽골을 이하 만몽(滿蒙)이라고도 칭한다.

8) 山室信一, 윤대석 역,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소명출판, 2009년판, 41쪽.

9)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44쪽.

 

10) 관동(關東)이란 산하이관(山海關)의 동쪽이란 뜻으로 일본이 붙인 이름이다.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1905년 러시아로부터 이권을 계승하여 이듬해 뤼순[旅順]에 관동도독부를 두었다. 관동군이나 관동청 같은 말도 모두 여기에서 유래했다.

 

11) 니치렌[日蓮]을 개조(開祖)로 한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이다. 법화종(法華宗) 또는 불립(佛立)종이라고도 하고 한국에서는 일련정종(日蓮正宗)이라 한다. 니치렌은 천태종의 법화사상(法華思想)을 배워 우주의 통일적 진리(묘법연화경), 그것의 인격화(구원석존), 그리고 현실에서의 구현(보살행)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개인 구제뿐만 아니라 사회 · 국가의 전체적 구제를 주장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1253년에서 1282년까지 30년간 포교에 힘썼고 그가 죽자 여섯 제자에 의해 그의 교리는 일본 전국에 퍼졌다. 뒤에 가마쿠라파와 후지파로 분파되었다가 1941년 정부의 권고로 합동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여러파로 나뉘었다. 그 중의 분파인 일련정종과 창가학회는 한국에도 유입되어 포교활동을 하였다. 창가학회에서 만든 고메이도[公明黨]는 현재 일본의 연립수권정당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71~71쪽 재인용.

 

12)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1889~1949)는 육사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중장으로 전역한 엘리트 군인이다. 1920년 고쿠츄카이[國柱會]에 참가하고 불교의 일종인 니치렌[日蓮] 신자가 되었다. 1923년부터 독일에 유학하여 총력전론을 배워 귀국하게 되었으며, 1931년 관동군 작전주임참모로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西郞]와 더불어 만주사변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대소전 준비를 주장하고 중일전쟁을 반대하다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와 대립하여 퇴역하게 되었다. 전쟁사 연구와 니치렌 신앙을 토대로 동양대표(일본)와 서양대표(미국)의 세계 최종전론을 주장하는 한편, 동아연맹(東亞聯盟)을 지도하였다.

 

13)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西郞, 1885~1949)는 육군 대장으로 이와테현 출신이다. 1929년 이후 관동군 고급 참모로서 이시하라 간지 등과 함께 만주사변, 만주국 창설을 주모했다. 1936년 관동군 총참모장이 되어 화북분리 공작을 추진하였다. 1938년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성 대신, 지나 파견 참모장, 조선군 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극동국제 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49쪽.

 

14)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52쪽.

 

15) 일본 즉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킬 때, 쟝제스[蔣介石]이 이끄는 국민당은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案內)로 국내 통일을 최우선 과제로 하여 비저항주의를 채택하고 공산당 포위, 소탕작전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미국과 영국은 경제공황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고, 소련은 제1차 5개년 계획 달성에 여념이 없어서 중립불간섭을 선언한 상태였다.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82쪽.

 

16)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82쪽.

17)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83쪽.

 

18) 관동군이 푸이의 등용을 추진한 이유는 대략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푸이가 만주족의 명문이고 구황제로서의 성망은 동북지방에서 여전히 원수로 통용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둘째, 중국 동북지방이 만주족의 옛 땅이기 때문에 두수가 되어도 국제적 비난을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점. 셋째, 푸이가 국민당 정부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고, 장제스와도 장쉐량과도 연대할 염려가 없다고 판단된 점. 넷째, 지린[吉林]의 시치아[熙洽], 타오난[?南]의 장하이펑[張海鵬] 등의 지지는 있지만 푸이 자신에게는 정치적 실력이 없고 관동군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 다섯째, 연성 자치라는 형태를 취한 국가에서 그 가운데 한 성의 실력자가 정권을 쥐면 대립이 생기게 되어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푸이처럼 고유한 기반을 가지지 않은 인물을 상징적으로 원수의 자리에 두는 편이 무난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추가적인 이유를 하나 더 들 수 있는데, 그것은 내몽골을 만주국에 포함시키려는 관동군의 의도와 관련이 있었다. 즉 몽골의 왕후들은 청조와 관계가 깊고, 또한 한(漢) 민족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서 봐도 만주족의 푸이를 이용하면 몽골의 지지를 얻기 쉬울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1932년 2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국 측 건국최고회의는 정체의 문제를 둘러싸고 상당한 진통을 겪게 되었다. 회의에서는 시치아[熙洽]의 대리인 장옌칭[張燕卿] ? 셰제스[謝介石], 푸이의 측근인 완성스[萬繩?], 후룬베이얼[呼倫貝爾]의 링성[凌陞]의 대리인 샤오린[邵麟] 등이 제제(帝制) 채용을 강하게 주장했음에 비해 짱스이[臧式毅], 장징후이[張景惠], 자오신보[趙欣伯], 마잔산[馬占山] 대리인인 자오쫑런[趙仲仁] 등은 시대에 역행하는 제제(帝制)를 부정하고 입헌공화제의 채용을 주장하며 팽팽히 맞섰는데, 양파의 대립은 동북행정위원회의 이름으로 신국가 독립 선언이 발표된 2월 18일 이후에도 귀추가 정해지지 않았다. 정체의 결정 여하에 따라 그 후의 권력 배분이 크게 좌우되는 이상, 쌍방이 서로 양보할 리가 없자, 이에 관동군 측이 민본주의에 따라 원수는 집정으로 하고 집정이 몇 년 동안 선정을 베풀어 인민이 집정의 덕을 칭송하여 황제로 추대하면 제제로 이행한다는 안을 제시하여 2월 24일에서 겨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만주국 건국 시에 푸이는 ‘황제’로서의 등극이 아니라, ‘집정’ 즉 ‘원수’로서의 취임이었다.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151~152쪽, 161쪽.

 

19) 가타쿠라 다다시[片倉衷], <만주사변 기밀정략일지>, 《현대사자료(7) - 만주사변》(고바야시 다쓰오외편), みすず書房, 1964년, 187쪽.

 

20)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149쪽.

 

21) 解學詩, 앞의 책, 89쪽에서는 2월 10일부터 10차례 회의를 개최하였다고 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1월 22일 관동군 고급 관료들의 회의 내용과 1월 27일 이다카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가 확정한 “건국” 내용이었다. 다음과 같은 11개의 내용으로 되었다. 첫째, 봉길흑(奉吉黑) 3성의 대표들로 중앙정무위원회 조직, 건국준비 업무를 담당하게 하며, 장징후이[張景惠]를 위원장으로, 장쓰이[臧式毅], 시치아[熙洽], 마잔산[馬占山]을 위원으로, 시치아는 간사장(幹事長)을 겸하였다. 둘째, 정무위원회에서는 중국 중앙과 분리됨을 선포한다. 셋째, 정무위원회는 수시로 개최하여, 만주정부 준빈 업무를 吉林에서 진행함. 넷째, “건국”준비업무는 國號, 國旗, 宣言, 人選分配와 首都를 결정한다. 다섯째, 이러한 내용이 준비되면, 정무위원회에서 결의한다. 여섯째, 정무위원회에서의 결의는 반드시 각 성의 “민의”기관의 동의를 거친다. 일곱째, 각지에서 “대총통 선발”, 여덟째, “民意”의 표출로 선출, 아홉째, 정무위원회는 “民意”를 원칙으로 중앙정부를 건립한다. 열 번째, 대총통은 중앙정부를 조직하고, 조례를 발표한다. 열한 번째, 정무위원회에서는 內蒙古, 熱河에 대표를 파견하여 결의에 참여하여 신속히 국가에 합류 요구 등이다.

 

22) 장징후이(張景惠, 1871~1959.1.11.) 자는 서오(?五)이며,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9 · 18사변 후, 장쭈오린[張作林] 장지(葬地) 문제에 대해 장례 시 발생할 문제 등에 대한 일본의 골칫거리를 장쭈오린계에서 요구했던 해성(海城) 지역을 피해 그보다는 펑톈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장쭈오린의 세력 또한 해성보다 많지 않은 금현 역마방(錦縣 驛馬坊)으로 결정해 주면서 친일본 쪽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협화회(協和會) 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계기로 그는 선후로 만주국 참의부(參議府) 의장 겸 동성특별행정구(東省特別行政區) 장관, 군정부총장(軍政府總長)과 만주국 초대 총리인 쩡샤오쉬[鄭孝胥]의 면직 후 후임으로 만주국 국무총리 대신을 역임함. “8 · 15”광복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푸순[撫順] 전범수용소에 수용되었고, 1959년 그곳에서 사망함.

 

23) 짱쓰이(臧式毅, 1885~1956),자는 봉구(奉久)이며, 원적은 산동성 제성(諸城)이고, 션양[沈陽]에서 태어남. 일찍이 쑨리에천[孫烈臣]을 따랐으나, 후에 장쭈오린[張作林]과 장슈에량[張學良]을 알게 된 후, 동삼성 보안총사령부(東三省保安總司令部) 중장 참모장, 요녕성 정부(遼寧省政府) 주석 등 직에 임명되었다. 9 · 18후에는 만주국 4대 거물 중의 하나가 되었다. 4대 거물로는 장슈에량([張學良]의 은사인 시치아[熙恰], 봉군(奉軍) 장쭈오린[張作林]의 수족이었던 동성행정장관(東省行政長官) 장징후이[張景惠], 흑성경비사령(黑省警備司令) 및 성장대리(省長代理) 마짠산[馬店山] 그리고 짱쓰이이다. 만주국 건국 후, 그는 민정부(民政部) 총장 및 펑톈성[奉天省] 성장을 역임하였고, 1934년(康德 元年)에는 민정대신(民政大臣)을 1935년 5월에는 참의부(參議府) 의장 및 흥아국민운동대회(興亞國民運動大會) 총사령을 역임하였다. 1941년 10월 28일 그는 만주국 전권대표의 신분으로 난징[南京]으로 와서 난징 왕징웨이[汪精衛] 정권과 함께 《일만화 삼국 공동선언》(日滿華三國共同宣言)에 서명하였다. 1945年, 만주국이 붕괴될 때, “중신회의”(重臣會議)에서 “유지회”(維持會)를 비밀리에 성립한 후, 지방정권 실체의 자격으로 소련군과 담판을 벌였으나, 8월 30일 소련군에 체포된 후 중국에 인도되었으며, 1956년 푸순[撫順]전범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24) 시치아(熙洽, 1884.10.18.~1952.10.29.), 션양인[沈陽人]. 아이신쥬에루오씨[?新??氏]. 신해혁명 때, 시치아는 종사당(宗社黨)과 함께 복벽운동(復?運動)에 참여하여 청조의 통치를 위한 복벽(復?)을 위해 노력함. 시치아는 일찍이 일본의 도쿄진무학교(東京振武學校)와 사관학교(士官學校)에서 공부하였다. 9 · 18 사변이후, 시치아는 지린성[吉林省] 독립을 선포하고, 군정합일(軍政合一)의 길림성 장관공서(吉林省長官公署)를 만들고 스스로 장관을 맡고, 남경정부로부터 장슈에량[張學良] 정권의 독립을 선언하고, 푸이[溥儀]의 복벽과 만주국 건립을 계획하였다. 1932년 만주국이 건립된 후, 시치아는 만주국 재정부(財政部) 총장 겸 길림성 성장을 역임하였고, 1934년에는 재정부 대신에, 1936년에는 궁내부(宮內府) 대신에 임명되었다. 1945년 만주국이 소련의 공격으로 와해될 때,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압송되었다.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에 인도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하얼빈[哈爾濱] 전범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25) 마잔산(馬占山, 1885~1950), 자는 수방(秀芳). 1885년 11월 30일 길림성 회덕현(懷德縣) 출생. 장쭈린[張作林] 휘하의 우쥔셩[?俊陞]에 발탁되어 승진하였고, 9 · 18 사변 후, 장슈에량[張學良]에 의해 흑룡강성정부(黑龍江省政府) 대리 주석에 임명되었다. 1931년 12월 7일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板板垣征四郞]가 마잔산 근거지에 도착했고, 마잔산은 만주국 건립시 흑룡강성 성장 취임을 제시한 세제스[謝介石]의 권유로 새 정권 건립에 참여하게 되었다. 1932년 2월 7일 마잔산은 관동군에 귀순하였고, 2월 16일 마잔산은 펑톈[奉天]의 대화여관(大和旅館)에서 장징후이(張景惠, 黑龍江省 省長), 짱쓰이(臧式毅, 奉天省 省長), 시치아(熙洽, 吉林省 省長), 마잔산(馬占山, 후에 黑?江省 省長에 취임)의 4인이 만주국 건국회의를 개최하였다. 2월 17일, 장징후이[張景惠]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북최고행정위원회(東北最高行政委員會)가 성립되었다. 2월 18일에는 이 위원회에서 전문을 발표하여 동북지방은 국민정부에서 이탈한다는 선포를 하였고, 3월 1일에는 동국최고행정위원회가 장징후이[張景惠] 집에서 ‘만주국’ 건국 선언을 통과시켰다. 만주국은 이렇게 탄생하였고, 마잔산은 흑룡강성 성장에 임명되었으며, 3월 9일에는 만주국 군정부 부장을 겸직하였다.

그러나 1개월 후인 4월 1일 마잔산은 비밀리에 헤이허[黑河]를 탈출하여, 동북 전역에서의 철저한 항전을 주장하며, 동북구국항일연군(東北救國抗日聯軍)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대의 열세로 인해 1933년 소련으로 도망하였다. 그는 유럽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왔으며, 쟝제쓰[蔣介石]에게 철저한 일제와의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 티앤진[天津] 조계에 거주하게 되었다. 1936년 장슈에량[張學良]과 양후청[楊虎城]이 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키자, 그는 쟝슈에량을 지지하였다. 1937년 7 · 7사변 후, 그는 동북정진군(東北挺進軍) 총사령에 임명되어, 산서성 팔로군(八路軍)과 협력하여 항일전쟁을 벌였다. 제2차 국공내전 말기 중국인민해방군이 베이핑[北平]을 공격할 때, 그는 푸쭈오이[傅作義]에게 떵빠오싼[鄧寶珊]을 추천하여 그로 하여금 중공과 평화담판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이후 1950년 베이징에서 64세로 사망하였다.

 

26) 탕위린(湯玉麟, 1871~1949.2),자는 각신(閣臣). 직례성 승덕부 조양현(直?省承德府朝陽縣, 현 속요녕성)에서 출생. 1928年(민국17년) 장쭈오린[張作霖]이 황구둔사건(皇姑屯事件)으로 관동군에 의해 피살되자 그의 아들인 장슈에량[張學良]이 지위를 계승하면서, 국민정부(國民政府)에 귀순하게 되는 <동북역치>(東北易幟)로 탕위린[湯玉麟] 역시 러허성[熱河省] 정부 주석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32년 2월 만주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1933년 3월에는 러허[熱河] 전투를 일으켜 일본군 28사단과 대적하였으나, 탕위린 군대가 패배하여 그는 티앤진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10일 만에 러허[熱河]는 만주국에 합병되었다. 만주국에서는 탕위린을 참의부(參議府) 부의장 겸 러허성[熱河省] 성장에 임명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이후 그는 펑위샹[馮玉祥], 지홍창[吉鴻昌], 팡쩐우[方振武] 등이 결성한 차하르[蔡哈爾]민중항일동맹군(民衆抗日同盟軍)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국민정부 중앙의 반감을 산 펑위샹의 하야로 인해 항일동맹군은 사실상 해산되었고, 러허[熱河]를 빼앗긴 책임으로 국민정부는 탕위린 체포령을 내렸다. 탕위린 군대는 국민혁명군 29군 군장(軍長) 쏭저위앤[宋哲元]에 의해 개편되었고, 탕위린은 쏭저위앤에 의해 제29군 총참의(總參議)에 임명되어, 군사 지휘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1934년 1월 9일 국민정부는 탕위린의 체포령을 취소하고, 5월에 탕을 군사위원회 베이핑 위원회 고등고문으로 임명하였다. 1949년 2월 티앤진[天津]의 거처에서 사망하였는데, 향년 78세였다.

 

27) 이는 몽고인으로 지림(哲里木, Jilim)맹(盟)의 수장으로 만몽 양족은 같은 군주를 섬긴다는 동군(同君) 사상에 의해 푸이[溥儀]가 황제로 등극하는 만주국 건국을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28) 링셩(凌陞, 1886년~1936년 4월 24일)의 또 다른 이름은 복현(福賢)이고, 자는 운지(雲志)이다. 다우르족[達斡爾族]으로 내몽고 후룬베이얼맹[呼倫貝爾盟] 부도통(副都統)인 귀복(?福)의 아들이다. 9 · 18사변 후, 동북행정위원회 위원이었고, 만주국 성립 후, 1932년 씽안베이분성[興安北分省] 성장이었고, 1934년에는 씽안베이성[興安北省]의 성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성장 임기 기간 중 일본에 대한 불만 표출로 1936년 일본 관동군 하이라얼[海拉爾]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그와 함께 체포된 씽안베이성[興安北省] 경비군참모장(警備軍參謀長) 푸링[福齡], 경무청장(警務廳長) 춘더[春德] 등 20여 명이 4월 20일 일본 관동군 군사법정에서 “통소, 통몽, 반만항일죄”(通蘇, 通蒙, 反滿抗日罪)의 죄목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그 후 집행되었다.

 

29)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88~89쪽.

 

30) 1931년 11월 2일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1883~1948) 대좌가 티앤진[天津]에서 푸이를 만나 션양[瀋陽]으로 올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자 이후 도이하라가 푸이를 티앤진에서 따리앤[大連]으로, 따리앤에서 탕깡즈[湯崗子]까지 압송하였고, 푸이는 이곳에서 약 3개월간 감시를 받다가, 3월 9일 집정에 취임하였다. 구시대 중국 황제의 규칙에 따르면 황제가 등극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세 번을 요청하였다. 첫 번째는 일본이 선발한 11명으로 구성된 단체가 2월 29일에 갔으나 푸이가 승낙하지 않았다. 다음 3월 4일에 다시 요청하였지만 푸이가 또 승낙하지 않자, 3월 7일에 세 번째로 요청하여 푸이가 집정을 허락하였다. 國民政府 外交部, 《中日問題之眞相 - 參與國聯調査團中國代表提出之二十九種說帖一九三二年四月至八月》, 臺北 : 臺灣學生書局, 中華民國六十四年版, 548쪽.

 

31)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132쪽.

 

32)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48쪽 ; 특히 일만 관계는 초기에는 그나마 독립국으로서의 대등한 관계에서 점점 일본 국내에 준하는 지위로 전화해 가는 변화를 만주국에서 공표된 문서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建國宣言>(1932년 3월 1일)에는 단지 “이웃에게 손을 빌린다.”고 되어 있지만, <日滿議定書>(1932년 9월 15일)에는 “일만 양국 간의 선린관계”라고 되어 있다. 이어서 <회란훈민조서>(1935년 5월 2일)에는 “우방과 일덕일심”이라고 해서 ‘우방’이라고 되어 있고, <협화회(協和會) 창립 5주년 기념일 칙어>(1936년 7월 25일)에서는 “맹방 일본 제국에 의지하여 영구히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맹방’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건국 10주년 조서>(1942년 3월 1일)에서 “대동아 성전에 힘써 친방(親邦)의 대업을 봉익(奉翼)하고”라고 하여 “친방”이란 말이 상용되었다. 이 친방의 ‘친’(親)이란 ‘친하다’란 의미가 아니라, ‘부모’를 가리킨다. 즉 이것은 ‘친자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인데, 친자관계란 “보본(報本)의 지성을 다한다.”(건국 10주년 조서)라고 하듯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지성과 효양을 다해야 한다는 것에 역점이 있다.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51~252쪽.

 

33) 구츠헝(谷次亨 : 교통부 대신, 도쿄 고등사범졸업), 옌촨푸(閻傳? : 사법부 대신, 도쿄제대 경제학부 졸업), 싱스롄(邢士廉 : 치안부 대신, 일본 육군사관학교 기병과 졸업), 루안쩐두오(阮振鐸 : 경제부 대신, 만철 남만의학당 졸업), 루위앤산(盧元善 : 총무처 차장, 미야기현립농학교 졸업), 왕윈칭(王允卿 : 특명전권대사, 메이지대학 법학과졸업), 쉬샤오칭(徐紹卿 : 펑톈성장, 도쿄제대 농학부졸업), 왕시앤웨이(王賢? : 펑톈시장, 도호쿠제대 공학부졸업), 왕쯔헝(王子衡 : 빈장성장,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졸업), 쉬지아환(徐家桓 : 통계청장, 교토제대 법학부 졸업), 왕칭장(王慶璋 : 우정총국장, 도쿄공업대학 졸업) 등이다.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36쪽.

 

34)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9쪽 ; 그러나 1932년 3월 5일에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12일에는 난징[南京]국민정부가 만주국 부인 성명을 발표하였고, 더불어 국민정부는 중국인의 만주국 참가를 매국행위라 하며 치죄법 및 도비징치조례에 따라 엄하게 처단할 것을 천명하였다.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09쪽.

 

35) <日本政府承認“滿洲國”之聲明>(1932年9月15日)의 부록으로 “日滿議定書” 全文이 게재되어 있다. 遼寧省?案館編, 《溥儀私藏僞滿秘?》, 北京 : ?案出版社, 1990年版, 41~42쪽.

 

36) 解學詩, 앞의 책, 129~130쪽 ; <일만의정서> 이외에도 일본과 만주국 여러 밀약 즉 1932년 8월 7일 本庄 繁과 鄭孝胥가 체결한 <鐵路, 港灣, 水路, 航空路等的管理和線路修築管理協約>, 1932년 8월 7일 本庄 繁과 鄭孝胥가 체결한 《關於設立航空會社的協定》 및 1932년 9월 9일 武藤信義와 鄭孝胥가 체결한 《關於確定?業權的協定》을 체결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일본이 만주국을 조종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놓았다 ; 졸고, 앞의 논문, 《교회사연구》 44, 2015, 305쪽의 각주 38 참조.

 

37)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05쪽.

 

38) 이것은 4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만주국은 국방 및 치안유지를 일본에 위탁하고, 그 경비는 만주국이 부담한다. ② 만주국은 일본군대가 국방상 필요로 하는 철도 · 항만 · 수로 · 항공로 등의 관리 및 신로의 부설 · 개설을 일본 또는 일본이 지정하는 기관에 위탁한다. ③ 만주국은 일본군대가 필요로 하는 각종 시설을 극력 원조한다. ④ 달식명망(達識名望)있는 일본인을 만주국 참의에 임명하고, 또 그 외 중앙 · 지방 관서에도 일본인을 임용하며 그 선임 · 해직에는 관동군사령관의 추천 · 동의를 요건으로 한다. 解學詩, 앞의 책, 96~97쪽 ;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169쪽.

 

39)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170쪽.

 

40) 1932년 9월 4일에 보고서가 완료되어, 9월 22일 국제연맹 본부에 제출, 10월 2일에 중국과 일본 양국정부에 전달되고, 제네바, 도쿄, 난징 세 곳에서 일시에 발표되었다. 중화민국 국민정부 외교부 편, 박선영 옮김, 《중일문제의 진상 - 국제연맹 조사단에 참여한 중국 대표가 제출한 29가지 진술(1932년 4월~8월》, 동북아역사재단, 2009년판, 22쪽.

 

41) 중화민국 국민정부 외교부 편, 박선영 옮김, 앞의 책, 30~31쪽.

42)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05~206쪽. 

43)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10쪽.

44) 田口芳五郞, 앞의 책, 110쪽.

45) 田口芳五郞, 앞의 책, 116쪽.

 

46) 졸고, <로마 교황청의 만주국 승인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 - 당시 왕래한 문서 내용 분석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4집, 298~305쪽에 기록되어 있는 교황청 승인을 얻기 위한 만주국의 노력 참조.

 

47) 田口芳五郞의 《滿洲帝國とカトリック敎》 목차 제1장이 로마 교황청이 만주제국을 종교적 승인으로 종교적 승인임을 강조하였다. 田口芳五郞, 앞의 책, 9쪽, 53~54쪽.

 

48) 교황청을 대표하는 교황공사(公使)나 교황대사(大使)의 파견이 없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9) 당시 대사를 파견한 국가는 11개 국가로, 독일(1920년), 아르헨티나(1928년), 벨기에(1927년), 브라질(1919년), 칠레(1920년), 이탈리아(1929년), 콜롬비아(1927년), 페루(1919년), 스페인(1904년), 폴란드(1919년 공사파견, 1924년 대사로 승격), 프랑스(1904년, 그 후에 일시 폐지, 1921년 다시 설립)이다.

 

50) 교황청에 공사를 파견한 국가는 25개 국가이었다. 오스트리아(1921년), 바이에른(1919년), 볼리비아(1925년), 코스타리카(1915년 특파사절 파견, 1921년 공사 주재시킴), 네덜란드(1921년 파견, 1926년 일시 폐지), 온두라스(1929년), 헝가리(1920년), 아일랜드(1929년), レツトリア(1925년), 리베리아(1927년), 리투아니아(1927년), 모나코(1929년), 니카라과(1929년), 파나마(1929년), 포르투갈(1918년), 프러시아(1920년), 루마니아(1920년), 산 도밍고(1930년), 산 마리노(1926년), 산 살바도르(1928년), 체코슬로바키아(1919년), 말카(1930년)이 있다. 田口芳五郞, 앞의 책, 113~114쪽.

 

51) 《滿洲敎務年鑑》上, ANNUAIRE DES MISSIONS CATHOLIQUES DU MANCHUKUO(《滿洲帝國天主公敎敎務年鑑》, MOUKDEN : 奉天市 瀋陽區 小南街 天主堂 公敎印書館, 1941年, no page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REPRESENTATION DU SAINT-SIEGE

AUPRES DU GOUVERNMENT DU MANCHOUKUO

駐滿羅馬敎皇廳代表部

Representant : Son Exc. Mgr Augustin GASPAIS, Eveque titulaire de Canope et Vicaire Apostolique de Kirin. Par Lettres du 20 Mars 1934, la S.C. de la Propagande lui confiaitla charge de representer le Saint-Siege et les Missions Catholiques aupres du Gouvernment du Manchouku.

代表 : 吉林敎區主敎高德惠. 於一九三四年三月二十日, 由宗座函爲高主敎爲駐滿敎皇代表. 이를 보면 교황사절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서신으로 길림 주교로 있던 가스페 주교를 만주 지역의 대표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가스페 주교를 교황청에서 파견한 교황사절이라고 일제와 만주국은 주장하고 있으며, 교황청에서는 만주국의 여러 주교 중에서 그들을 대표하는 주교로 가스페 주교를 임명한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스페 주교를 교황사절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소지를 남겨놓고 있다.

 

52) 일본이나 만주국 측에서는 이러한 가스페를 교황이 파견한 공식 사절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므로, 교황청에서 국가로 승인하였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국가적 승인이 아닌 종교적 승인이라고 강조하였다. 田口芳五郞, 앞의 책, 115쪽.

 

53) 이 교섭 임명장의 라틴어 원문과 이탈리아 역문은 Giovanni Coco, Santa sede e Manciukuo 1932~1945, Citta del Vaticano : Liberia deitrice vaticana, 2006(Giovanni Coco[喬瓦尼 科科], 《聖座與滿洲國(1932~1945)》), pp. 202~203. 한국어로 번역한 내용은 <임명장 제816호> 교황청 특수 임시 대리권을 지린[吉林] 겸 신징[新京] 주교 가스페 각하, 귀하가 본교를 대표하여 만주국 경내의 각 교구와 만주국 정부와 상담하여 천주교회에 관련된 모든 일을 처리하시오. 천주교회는 어떠한 국가와도 전교를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세상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교황청은 이러한 예를 준수하여 특별히 대표를 선임하여 그가 주축이 되어 관련된 각종 종교 문제를 상의해야 한다. 졸고, 앞의 논문, 292쪽.

 

54) 田口芳五郞, 앞의 책, 1쪽.

55) 田口芳五郞, 앞의 책, 3~4쪽.

 

56) 僞《滿洲公敎月刊》에 《天主公敎會發表書》의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 顧衛民, 《中國天主敎編年史》, 上海 : 上海書店出版社, 2003年版, 496쪽 ; 여러 책에서 이 발표문으로 천주교에서 만주국을 승인하였다고 언급하였다. 晏家佳, 《中國天主敎》, 北京 : 五洲傳播出版社, 2004年版, 63쪽.

 

57) 顧衛民, 《中國天主敎編年史》, 上海 : 上海書店出版社, 2003年版, 495쪽.

 

58) “吉林天主敎敎務主敎高德惠及敎皇代理司敎顧問田口芳五郞,天主敎司鐸丁午樵來訪.” 여기에서 흥미있는 것은 田口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모두 통역하였다는 것이다. 정샤오쉬는 천주교에 대한 별다른 내용을 부기하고 있지는 않다. 中國歷史博物館編, 《鄭孝胥日記》 第5冊, 北京 : 中華書局, 1993年版, 2894쪽. 주로 천주교 관계 사안은 가스페와 외교부 대신인 세제쓰가 담당하게 되었다.

 

59) 교황청에서의 만주국 승인은 종교적 승인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田口芳五郞, 앞의 책, 119쪽.

특히 교황청에서는 어떤 나라와 국교를 맺을 때는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국무원과 국교 체결을 했느냐이다. 둘째는 교황청에서 직접 파견한 교황대사나 교황대사 격의 특사가 파견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는 해당국을 국가로서 승인하였다는 소식은 반드시 《로마관찰보》(L’Osservatore Romano, 羅馬觀察報)에 보도한다. 그러나 만주국의 경우에는 이러한 내용에 이반되기 때문에 교황청에서는 국제적으로 만주국을 국가로서 승인한 적은 없고, 단지 종교적 승인만을 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졸고, 앞의 논문, 286쪽.

 

60) 졸고, 앞의 논문, 300쪽.

 

61) 田口芳五郞, 앞의 책, 139~140쪽. 만주국 관리들은 천주교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에게 국가에 충성할 것을 수시로 강조하고 있으며, 이에 만주국 주교들은 포고를 통해 국가에 애국과 충성을 할 것을 당부하였다.

 

62) 《바티칸화보》 1938년 9월호, p. 784. 顧衛民, 앞의 책, 503~504쪽 ; Pierre Blanchard Regis Ladous, Le Vatican et le Japon dans la guerre de la Grande Asie orientale La mission Marella, paris : Desclee de Brouwer, 2010, pp. 291~292.

 

63) 田口芳五郞, 앞의 책, 136쪽.

64)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2, 268~269쪽.

 

65) 마렐라는 1935년 5월 8일 포교성에 보낸 보고문에서 신도 예식에 대한 교회의 결정을 새로이 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앙에 반대되는 행위들에 큰 편견을 지니지 말아야 하며, 또한 국가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행위들과는 진지하게 협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훈령이 나오기 전까지는 교황청에서도 신사참배를 불허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선자, 앞의 책, 271쪽.

 

66) 특히 이곳에서 비온디가 일본에서 신사참배가 갖는 의미, 신사참배를 거절함으로써 일본 천주교회가 당할 어려움, 신사참배로 기울고 있는 일본 천주교회의 상황을 인식하였음이 분명하며, 또 1926년 10월 28일 교황청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중국인 주교 6명을 서품하였고, 10월 30일에는 일본인 주교 1명을 서품함으로써 현지인에 의한 교회 관할을 추진하였다. 윤선자, 앞의 책, 272~273쪽 ; 중국인 주교 6명의 서품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 중국 천주교회의 중국 토착화 노력에 대한 결과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대표적인 사람으로 코스탄티니 교황사절, 중국 예수회 신부였던 마샹보[馬相伯]와 베네딕도회 수사이자 신부인 루찡샹[陸徵祥] 등의 노력을 들 수 있다. 顧衛民, 앞의 책, 451~454쪽, 464~467쪽.

 

67) 牟鍾鑒, 張踐, 《中國民國宗敎史》·《中國全史》(全一百冊), 北京 : 人民出版社, 1995年板, 120쪽.

68) 牟鍾鑒, 張踐, 앞의 책, 120쪽.

 

69) ?森富, 《中?基督?史》, 台北 : 台?商?印??, 1978年版, 144쪽 ; 安可佳, 《中國天主敎簡史》, 北京 : 宗敎文化出版社, 2001年版, 211쪽.

 

70) 이탈리아 펠트레(Feltre)에서 출생. 파도스(Padous)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수학. 1913년 7월 18일 사제서품. 1933년 코스탄티니 대주교 후임으로 주교가 되었다. 1935년 9월 중화공교진행회(Catholic Action) 제1차 전국대회를 상하이에서 거행. 1936년 베이징 시쓰쿠[西什庫] 천주당(현재 우리는 北堂으로 더 잘 알고 있다.)에서 중화공교진행회(中華公敎進行會) 총감독인 위빈[于斌]을 주교로 축성한 후, 난징[南京] 대목구장에 임명함으로써 천주교의 중국 토착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1941년 일본 점령지의 학교에서 일본 사람을 받고, 일본어로 강의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짜이닌 주교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보인대학(輔仁大學)과 신학생 양성으로 중국 국적의 신부 양성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1946년 건강상의 문제로 좀 쉬었고, 1947년 3월 21일에는 교황청에 의해 칠레 대사로 파견되었으며, 1953년 2월 7일에는 아르헨티나 대사로 이동되었다. 1858년 8월 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71) 牟鍾鑒, 張踐, 앞의 책, 122쪽.

72) 顧衛民, 앞의 책, 505쪽.

 

73) 顧衛民, 앞의 책, 507~508쪽 ; 《한국천주교회사》 5, 346쪽. 이 훈령은 《경향잡지》 919호(1940년 2.15)에 <중국예식과 그에 대한 서약에 관하여>라는 번역문이 게재되었다.

 

74) 이 세 가지는 검과 곡옥과 거울로 天叢雲劍(草?劍이라고도 함), 八咫瓊勾玉(또는 八阪瓊曲玉), 八咫鏡이다.

75) 新京 滿洲國 皇宮內에 설치되었다.

 

76) 191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 조선 총독 백작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공포한 것으로 각 조항이 모두 문제가 있지만, 그중에서 제4조의 내용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4조의 내용은 “조선 총독은 포교방법, 포교관리자의 권한 및 포교자의 감독방법 또는 포교관리자가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변경을 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77) 《한국천주교회사》 5, 27쪽.

 

78) 윤선자, 앞의 책, 258쪽. 이렇게 된 이유는 서울교구장인 뮈텔과 서울교구 선교사들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만주 침략을 시작하면서 강요되기 시작한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조상제사를 금지함으로써 초창기의 한국 천주교회가 겪었던 박해의 경험을 뮈텔은 생각하였을 것이다. 일제가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는 일제의 한국 통치에 대한 거부로 여겨질 수 있다고 뮈텔은 추측하였을 것이다. 한국 통치권을 강화해가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천주교회가 계속 반대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박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같은 파리 외방전교회원이지만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는 1898년 한국에 입국하였으므로, 박해의 경험이 없었고, 베네딕도 회원과 메리놀 회원들은 1909년과 1923년에야 한국에 진출하였으므로 박해의 위험성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윤선자, 앞의 책, 260쪽.

 

79) 《京鄕雜誌》, 1936. 4. 12, 218쪽.

80) 《한국천주교회사》 5, 343쪽.

81) 김승태, <일제하 조선의 신사에 관한 연구>, 《근대 한 · 일간의 상호 인식》, 동북아역사재단, 2009년판, 103~281쪽.

 

82) 가미다나[神棚]는 신도 제의에서 사용되는 도구로, 가정이나 사무실 등에서 가미[神]를 모시기 위한 선반 또는 제물상이다. 일종의 소형 사당이라고 볼 수 있다.

 

83) 1941년 나바위 본당의 김영호(金永浩, 멜키올, 1912~1978) 신부는 가미다나 모독, 신사참배 거부, 군사기밀 등의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전주교도소에 수감되는 등 김 신부처럼 신사참배를 거부하거나 가미다나를 폐기하거나 혹은 일제를 비판하는 강론을 했다는 이유로 성직자와 신자들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한국천주교회사》 5, 344쪽 ; 신사참배에 거부항쟁이 갖는 교회사와 민족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은 4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는 세속권력을 절대시하고 신성시하는 천황 숭배와 신사 숭배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다는 점이다. 둘째는 당시에 세속 권력에 굴복하여 타협하는 공교회의 변질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개혁하려 하였다는 점이다. 셋째는 타민족을 식민으로 지배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지배체제를 부정하고 이에 항거하였다는 점이다. 넷째는 가공의 이데올로기로 민족과 교회를 변질시켜 국제 평화를 파괴하는 대외 침략 전쟁에 내몰려는 일제의 군국주의적 침략 정책에 반대하고 저항하였다는 점이다. 김승태, <일제하 조선의 신사에 관한 연구>, 《근대 한 · 일간의 상호 인식》, 233쪽.

 

84) 내포교회사연구소 자료집 2 - 《라리보 주교 자료집》Ⅰ,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년, 499쪽.

 

85) 조선 八 교구 모든 감목의 교서를 발표하는 지면의 하단부 박스 안에 작은 글씨로 황국신민의 서사를 게재하였다. 그 내용은 一,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軍國)에 보답하련다. 二,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三,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黃道)를 선양하련다. 《경향잡지》 1940년 7월호, 제924호, 169~171쪽 ; 내포교회사연구소 자료집 2 - 《라리보 주교 자료집》Ⅰ,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년, 529쪽.

 

86) 《경향잡지》 1938년 11월호(단행본 889호), 527~528쪽.

 

87) 1936년(민국 25년)의 통계에 의하면, 1개의 대교구, 85개 교구, 대목구 36곳, 독립교구 7곳으로 합계 129개 교구가 있었다. 1926년(민국 15년)에는 중국인 주교가 6명이 임명되었으므로, 중국인 성직자의 숫자가 크게 증가했고, 현재 중국인 주교가 23명이나 되었다. 1938년(민국 27년)에는 대주교 1명, 주교 94명, 사제 4,552명, 수사 1,263명, 수녀 5,746명이 있다. 수도회를 국적별로 나누어 보면, 프랑스가 26곳, 이탈리아가 23곳, 중국이 21곳, 독일이 14곳, 스페인이 11곳, 미국이 9곳, 벨기에 7곳, 캐나다 4곳, 네덜란드가 2곳, 아일랜드가 2곳, 폴란드가 1곳, 포르투갈이 1곳, 스위스가 1곳, 합계가 122곳이었다. 주요한 수도회로는 성 도미니코회, 예수회, 라자리스트회, 파리 외방전교회, 성 프란치스코회, 성 아우구스티노회, 밀라노 외방전교회, 메리놀 외방전교회 등이 있었다. 比屋根安定, 《支那基督敎史》, 東京 : 生活社, 1940년판, 302~303쪽 ; 1940년에는 전국 주교구 1곳, 대목구 90곳, 감목구 46곳, 모두 137곳의 교구가 이었고, 전국 외국 국적 신부는 3,064명이고, 중국국적 신부는 2,091명이며 전국 교우수는 3,262,678명이다. 顧保鵠, 《中國天主敎大事年表》, 臺北 : 光啓出版社, 1970년, 81쪽 ; 穆啓蒙 편저, 신의식 역, 《중국천주교회사》, 도서출판 명성, 2011년, 140~141쪽.

 

88) 比屋根安定, 앞의 책, 295~297쪽.

89) 현재 션양[瀋陽]의 옛 이름이다.

 

90) 면적은 61,456㎢이고, 22개 전구(專區)가 있으며, 거주민은 885만 명이며, 그중 31,000명이 천주교 교우이다. MOUKDEN(謀克敦)市(瀋陽을 말함)의 거주인구는 약 70만 명인데, 그중 천주교우는 3,000명 정도이다. Rudolf Lowenthal(羅文達)著, 王海 譯, 《在華天主敎報刊》, 廣州 : ?南大學出版社, 2013년판, 56쪽.

 

91) 《滿洲敎務年鑑》 上, ANNUAIRE DES MISSIONS CATHOLIQUES DU MANCHUKUO(《滿洲帝國天主公敎敎務年鑑》, MOUKDEN : 奉天市 瀋陽區 小南街 天主堂 公敎印書館, 1941년, 7쪽.

 

92) 1938년 2월 9일 포교성성에서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펑톈 교구의 교우 수는 29,404명이다. 《滿洲敎務年鑑》 下, 5쪽. 흥미로운 것은 봉천에 있던 조선교우 천주교당(Paroisse Coreenne)은 奉天市 敷島區 十間町五,六에 있던 천주교회로 본당신부는 M. Joseph Hirayama Sinzi(平山信治, Joseph Sin, 申)이었고, 교우는 638명이 있었다. 《滿洲敎務年鑑》 上, 14쪽.

 

93) 田口芳五郞, 앞의 책, 74~77쪽.

94) 《滿洲敎務年鑑》 下, 22쪽.

95) 《滿洲敎務年鑑》 上, 24쪽.

 

96) 《滿洲敎務年鑑》 上, 35쪽 ; 《滿洲敎務年鑑》 下, 22, 24쪽.

 

97) 만주 총면적은 1,300,000㎢를 초과하였으며, 당시 중국 19개 성(省)의 4분의 1을 초과하였다. 이 만주지역은 프랑스, 독일과 아일랜드를 포함한 대영제국의 총면적과 비슷한 광활한 지역이었다. 만주지역의 인구는 대략 3,290만 명으로 그중 185,000명이 천주교 신자이고, 개신교 신자는 31,000명으로, 전체 총인구의 0.66%이었고, 828명의 선교사가 이러한 지역에서 종교생활에 대한 봉사를 수행하였으며, 그중 3분의 1은 중국인이었다. Rudolf Lowenthal(羅文達)著, 王海 譯, 앞의 책, 54쪽.

 

98) 吳佩軍, 傅學藝, <僞滿時期的政敎關係 - 以天主敎延吉敎區爲中心>, 《外國問題硏究》 2013年 第1期, 總207期 참조.

99) 田口芳五郞, 앞의 책, 77~81쪽.

100) 田口芳五郞, 앞의 책, 77~81쪽.

 

101) ‘메리놀’이라는 명칭은 메리놀회 본부의 위치에서 유래하였다. 창설 당시 이 회의 명칭은 미국 외방선교회(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였고, 본부는 뉴욕에서 40Km 떨어진 호손(Hawthorne)에 있었다. 그러다가 1912년 10월 오시닝(Ossining) 근처의 언덕 위로 이전하면서 회원들은 성모 마리아의 중재를 간구했고, 자신들이 있는 곳을 ‘마리아의 언덕’(Mary’s Knoll)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메리놀(Maryknoll)은 선교회의 명칭이 되었다. 《한국천주교회사》 5, 210쪽.

 

102) Rudolf Lowenthal(羅文達)著, 王海 譯, 앞의 책, 57쪽.

103) 田口芳五郞, 앞의 책, 88~92쪽.

104) Rudolf Lowenthal(羅文達)著, 王海 譯, 앞의 책, 57~58쪽.

 

105) 이 지역의 특징은 신문, 잡지의 발간이 돋보였다는 것이다. 이모프 주교는 1933년 7월에 《龍沙公敎月刊》(Lungsha Catholic Monthly)을 창간하였고, 1935년 이모프 주교의 사망으로 폐간되었다가, 1936년 7월 《鍾聲》(The Ringing Bell)이라는 이름으로 복간되었다. 이후 《龍江天主敎堂小報》(Lungchiang Catholic Cathedral Fortnightly), 《小朋友》(The Little Friend)라는 간행물이 있었다. Rudolf Lowenthal(羅文達)著, 王海 譯, 앞의 책, 58~59쪽.

 

106) 田口芳五郞, 앞의 책, 95~97쪽.

 

107) 교구는 다음과 같이 분류되며 모두 교구라고 통칭된다. 첫째는 교계제도를 통해 교황사절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을 대주교구라고 하며, 교황청에 의해 특정한 수도회에 포교를 이관했던 것을 관구(管區, 여기서는 교구를 지칭함), 교황청 포교성성(현재는 인류복음화성성)에서 포교지에 설치한 교구 설립 이전의 단계를 대목구(代牧區)라고 하며, 수도회 중에서 유력한 곳에 독립적으로 포교하는 것을 독립교구(獨立敎區) 또는 면속구(免屬區)라고 말한다. 比屋根安定, 앞의 책, 302쪽.

 

108) Rudolf Lowenthal(羅文達)著, 王海 譯, 앞의 책, 58쪽.

109) 田口芳五郞, 앞의 책, 97~99쪽.

110) Rudolf Lowenthal(羅文達)著, 王海 譯, 앞의 책, 59쪽.

 

111) 창간 일자에 대해 아동문학가 이석현(李錫鉉)은 1967년 《사상계》 1월호에서 《가톨릭소년》에 대해 1936년 2월에 창간되어 3년간 나오다가 1938년 9월호(?)로서 정간되었다고 하고, 1993년 2월에 나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톨릭소년>항(최석우(崔奭祐) 집필)에는 “가톨릭계 월간잡지의 하나로 1934년 만주 연길(延吉) 교구에서 창간하였다. 발행인은 신부인 아펠만(Appelmann, 배(裵)), 주간은 김구정(金九鼎), 발행소는 용정(龍井) 본당이었다. 연길교구 용정 본당에서 창설된 탈시시오소년회가 교구단위로 확대되자, 《탈시시오회지》를 1934년 교구연합대회에서 《가톨릭소년》으로 바꾸고 연길 교구의 소년소녀잡지로 결정하였다. 주로 교회사 · 서양사 · 과학기술 · 청소년문제 등 소년소녀들을 위한 기존 교양물과 지혜주머니 · 기담(奇談) · 오락실 · 동화 · 동요 · 동시 · 소설 등의 다양한 난을 두었다. 평론가 서상렬(徐相烈), 화가 구본웅(具本雄), 《간도일보》의 김원제(金轅濟), 교육자 장내원(張?遠) 등이 고문으로 편집에 참여하였다.··· 일제의 압력으로 1940년 폐간하였다. 잡지는 현재 구해볼 수 없고 《가톨릭연구》에 한두 번 소개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필자는 최석우 신부의 주장이 더 객관적으로 합당하므로, 이를 따르기로 한다.

 

112) 만주지역에서의 개신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에 대해서는 특히 한부선 선교사가 1940년 1월경 신사 불참배 운동을 하던 김윤섭, 김신복, 박명순 등과 함께 하얼빈 자신의 집에 모여 토의한 결과, “스코틀랜드 언약자들의 모범을 따라 성명서를 작성하여 신사참배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과 우상숭배를 묵과하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단절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였다. 이 문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세례도 베풀지 않았고, 교제를 끊으며, 예배도 인도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서약문의 1~3항은 ‘조선(祖先) 숭배’와 천황을 신격화하는 일본 정부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고, 4~6항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비판한 것이며, 7항은 이 문제에 굴복한 한국 교회를 비판하고 그와의 단절을 천명한 것이다. 김승태, <일제하 조선의 신사에 관한 연구>, 《근대 한 · 일간의 상호 인식》, 221~225쪽.

 

113) 吳佩軍, 傅學藝, 앞의 논문 전체 참조 및 金光熙, 《延邊天主敎的沿革與現狀》(延邊文史資料第8輯宗敎史料專輯), 1997.

 

114) 원산 대목구장인 보니파시오 사우어(B. Sauer, 辛上院, 1877~1950) 아빠스(베네딕도 수도회에서는 주교라고 하지 않고 아빠스라고 부름)에 의해 간도와 이란[依蘭] 지역을 독립시켜 자신의 관할 구역을 축소해야만 하였다. 그는 원산 대목구의 분할을 교황청에 요구했고, 그 결과 교황청에서는 1928년 7월 3일 이란 지역을 ‘이란 포교지’로, 1928년 7월 19일에는 북간도 지역을 ‘옌지 지목구’로 설정하였다.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196쪽.

 

115) 《한국천주교회사》 5, 197쪽.

116) 田口芳五郞, 앞의 책, 99~100쪽.

117) 田口芳五郞, 앞의 책, 100~103쪽.

118) 田口芳五郞, 앞의 책, 103~104쪽.

 

119) 오족협화(五族協和)는 만주국 건국이념으로 일본인(日本人) · 한족(漢人) · 조선인(朝鮮人) · 만주족(滿洲人) · 몽고인(蒙古人)의 화합을 말한다.

 

120) 만주국은 집정 아래에 참의(參議)와 참의부(參議府)가 있고, 그 아래에 국무원(國務院) 입법원(立法院), 감찰원(監察院), 최고법원(最高法院)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全權大使(日本人)의 휘하에 滿洲國軍(日本人), 관동군(日本人), 執政(中國人), 司法院(日本人與中國人)으로 실질적인 권한은 일본인 전권대사가 갖고 있었다. 國民政府 外交部, 앞의 책, 552~556쪽.

 

121) 관동군과 일본 정부에게 제제 채용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청조 복벽이라는 성격을 불식하는 가에 있었고, 푸이와 쩡샤오쉬 등에게는 최대의 관심사는 오로지 제제 채용을 청조의 조업(祖業)을 회복 실현시키는데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지지자와 지지기반이 없었던 쩡샤오쉬에게는 이러한 그의 관심사를 진행시키기에는 너무 힘에 겨웠고, 당시 일본의 행정관과의 마찰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만주국에 봉직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어 자진해서 사직을 하게 되었다.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18쪽.

 

122) 만주국 황제 등극 시 푸이는 청조의 부활을 상징하는 차원에서 용포(龍袍)를 입은 것이 아니라, 만주국 육해공군 대원사 정장을 입고 등극의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은 관동군과 일본 정부에서 제제 채용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청조 복벽이라는 성격을 불식시키는 가에 있었고, 한편 푸이와 정샤오쉬 등에게 유일 · 최대의 관심사는 오로지 제제 채용을 청조의 조업(祖業) 회복으로 실현시키는데 있었으므로, 만주 황제 등극 때부터 서로 생각이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17~218쪽.

 

123)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24쪽.

124) 山室信一, 윤대석 역, 앞의 책, 251~252쪽.

 

125) 하나, 국민은 건국의 연원이 유신의 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하여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게 숭경을 바치며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한다. 하나, 국민은 충효인의를 근본으로 하여 민족협화 · 도의국가의 완성에 노력한다. 하나, 국민은 근로를 숭상하고 공익을 넓히며 인보상친(隣保相親)하고 직무에 정근하여 국운의 융창(隆昌)에 공헌한다. 하나, 국민은 굳세게 스스로 서며, 절의를 존중하고 염치를 중시하며 예양(禮讓)을 뜻으로 하여 국풍의 현창을 도모한다. 하나, 국민은 총력을 다해 건국의 이상을 실현하고 대동아공영(大同亞共榮)의 달성에 매진한다. <國民布告 第17號>, 《滿洲帝國政府公報》 1942.12.8., 1면.

 

126) 1937년 중일전쟁이 개시된 후 전 중국의 개신교 신자 수는 40만 명에서 65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나, 선교사의 수는 1921년의 6,204명에서 거의 증가하지 않은 상태였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에 의하여 1,200여 명의 선교사가 붙잡혀갔고, 교회와 교회학교는 심각하게 파손되었다. 중일전쟁 후의 기독교 인수는 거의 증가하지 않은 상태로 약 77만 명에 불과하였다. 조훈, 《중국기독교사》, 도서출판 그리심, 2004년판, 219쪽. 이 내용은 비록 중국 전역에 있던 개신교 신자 수에 대한 내용이지만 주목할 내용은 1,200명의 선교사가 일본군에 의해 붙잡혀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교황청의 고민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27) 허동현 등 저, 앞의 책, 232, 245쪽.

 

128) 당시 조선에서 황국화 작업을 진행하던 일제가 외국인 교구장을 모두 일본인으로 교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사임을 결심하고 후임자로 노기남 바오로 신부를 비밀리에 교황청에 추천하여 1942년 1월 주교로 임명함과 동시에 제10대 서울교구장에 임명하여 첫 한국인 교구장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129) 1957년 이후 중국 천주교회는 삼자애국교회의 조직으로 일부 주교와 신부들이 중국천주교 애국회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이들을 “지상교회”(地上敎會), “공개교회”(公開敎會), “관방교회”(官方敎會), “애국교회”(愛國敎會)라고 부르고, 또 한 부분의 주교, 신부와 신자들을 비공개적인 활동을 벌인다하여 지하(地下)로 들어갔다고 표현하며, 그들을 “지하교회”(地下敎會), “충정교회”(忠貞敎會), “비관방교회”(非官方敎會), “고난교회”(苦難敎會)라고 부르고 있다.

 

130) 2006년 중국 천주교회 애국회에서는 천주교회의 전통과 교회법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 “자성”(自聖) 주교 및 신부를 임명함으로써 교황청의 반대와 견책을 받았다. 1958년 이래로 “자선자성”(自選自聖) 주교는 170여 명에 이르고 있다. 2009년 1월에는 약 80%의 “자선자성”(自選自聖) 주교가 교황청의 사면으로 교황청이 인정하는 합법적인 주교가 되었다.

 

131) 요즈음 교황청이 중국 애국교회와의 접촉을 시도하자, 지하교회 측의 반발이 일어나고 있음을 중국교회 뉴스를 통해 접할 수 있다.

132) 이후 보다 충분한 자료의 수집 후, 중국 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돌아 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보는 논문을 작성해 볼 것을 다짐해 본다.

 

[교회사 연구 제49, 2016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신의식(충북보건과학대학교 부교수)]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파일첨부

4,34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